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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 통일인가 평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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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 통일인가 평화인가?

[박동천 칼럼] 선(善)한 통일만이 선이다

대통령이 통일 얘기를 꺼내자 여기저기서 통일 얘기를 따라서 한다. 으레 그렇듯이, 이런 식의 맞장구치기에는 구체성이라는 게 없다. 권력자가 꺼낸 의제가 실천으로 이어지려면 어떤 요소들을 갖춰야 하는지를 따지는 차원의 논의는 없고 “통일은 대박”이라는 구호를 복창하는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뉴스에 따르면 (관련기사 ☞ “Park Extols Korea Bonanza with a North-South Unification”), 박근혜는 “우리 경제가 또 한번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통일을 규정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통일이 언제 찾아올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지만, 북한에 대한 “대규모 경제 원조는 핵개발을 포기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한 모양이다.

 

이런 몇 마디 말 이상으로 통일에 관한 구체적인 구상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몇 마디 말에서 추론할 수 있는 통일의 모습은 빤하기 때문이다. 북한 체제가 동독처럼 붕괴되는 상태 말고 다른 모습의 통일은 박근혜의 상상력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적했던 얘기지만, “핵개발을 포기하면 경제 개발을 지원할 수 있다”는 말은 핵개발 포기를 겨냥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북한 정권더러 국제사회의 전면적인 수색 영장을 수용하라는 뜻이다.

 

나는 물론 북한이 이런 조건이라도 받아들이고 국제사회의 평화적인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란다. 북한 정권으로서는 “핵개발 포기”라는 조건이 핵개발 포기에 그치지 않고 여타 수많은 분야에서 국제적인 간섭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할 것이다. 국제사회도 그렇지만, 특히 남한 정부가 일단 칼자루를 쥔 다음에 “핵개발 포기”라는 조건은 북한에 대해 일파만파 포괄적인 요구로 이어질 것이 틀림없다. 그래도 북한이 “핵개발 포기”만 천명하고 국제사회의 사찰을 정상적인 수준에서 수용하게 된다면, 북한 정권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은 오히려 지금보다 넓어질 수 있다. 일단 대화가 시작된 다음에는, 미국도 남한도 일방적으로 협상을 깨기에는 큰 부담이 따른다. 어렵게 시작한 해빙 무드를 망쳤다는 비난에 몰리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근혜가 북한의 굴복을 기대하고 통일 얘기를 꺼내는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 먼저 박근혜 주변의 멸공주의자들이 과연 북한의 굴복을 기대할 도덕적 역량이 있을까? 애당초 남한의 극우 세력에게는 남북 간의 대치 상태가 지속되어야 정권의 유지에 유리한 것이 아닌가? 북한이 계속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있어야 남한 내의 비판적인 목소리를 빨갱이로 몰아 배제할 빌미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박근혜 정부에게는 사실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의 사찰을 받아들이기로 결단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곤혹스러운 일이다. 북한이 그런 성명을 내더라도 남한은 일단 “평화공세”로 폄하하면서,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을 때까지 검증을 줄기차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을 마냥 이어갈 수는 없다. 만약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인정할 정도까지 진정성을 보여준다면, 그때부터는 오히려 남한 정부가 진정성을 보여줘야 할 부담을 지게 된다. 따라서 현재 박근혜 정부로서는 어차피 북한이 자존심을 접을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북한더러 자존심을 버리라고 마음 놓고 성명전을 전개할 수가 있다.       

 

이런 상황은 남한과 북한에 공히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권력 유지를 우선시하는 정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남북 관계의 개선은 남북에서 공히 정치권력의 체질변화가 선행되지 않고는 달성되기 어려운 목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가 “통일”을 입에 담자 지지율이 약간이나마 상승했다고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찰이 필요한 하나의 주제가 있다. 한반도의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통일인지 평화인지를 깊게 성찰해 봐야 한다.

 

통일은 이론적으로 크게 두 가지 길밖에 없다. 흡수통일 아니면 연방제 통일이다. 남한이 북한 체제에 흡수되는 통일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흡수통일이라면 북한이 남한에게 흡수되는 형태뿐이다. 남한이 주도하는 흡수통일도 다시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데, 무력 통일 아니면 북한 체제의 붕괴다. 무력 통일은 두 말할 나위도 없고, 북한 체제가 붕괴되는 사태 역시 한반도는 격렬한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한반도의 운명은 주민들이 원하는 바와는 상관없이 국제정치의 풍향에 따라 결정되고 말 것이다. 요컨대, 모든 통일이 선일 수는 없고, 오로지 선한 통일만이 선인 것이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진보를 꿈꾸는 많은 지식인들이 한반도가 현대사에서 겪어온 질곡의 원인으로 분단을 지목해 왔다. 하지만 과연 모든 분단은 악인 것일까? 만약 남한과 북한이 미국과 캐나다처럼 국경선을 개방하고 개인들 사이에 자유로운 협력과 경쟁을 보장하되, 다만 정부만 두 개인 상태로 살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선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요컨대 분단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개인들의 건강한 활동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선한 가치를 공유하기만 한다면, 남과 북에 두 개의 정부가 있다고 해서 문제될 까닭이 전혀 없다.

 

블룸버그 기사를 보니, 박근혜는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우던 시절이 그리운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통일보다 평화를 소원할 수밖에 없다. “꿈에도 소원은 통일”을 빌미로 한반도의 긴장을 악화시키는 사람들이 권력을 차지하는 현실이 너무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마침 문익환 목사의 20주기가 지나가는데, 장준하나 문익환 같은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들이 실제로 원했던 것은 통일이라기보다는 평화였다고 읽힌다. 단,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 때문에,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분석적인 사고에 철저하도록 훈련을 받지 못했던 까닭에, 아울러 독재 정권에 항거하기 위한 대중적 호소력을 위해, 그들로서는 “평화”보다 “통일”을 구호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살아 있는 우리가 그들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으려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숱한 생명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세밀하게 분별해서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 그것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다. 평화로운 통일만이 선이고 폭력적인 통일은 악이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분단만이 악이고 평화로운 공존은 선이기 때문이다.

 

평화를 목표로 설정해야 통일을 핑계로 전쟁 또는 군비경쟁이 벌어지는 사태를 비판할 안목이 생긴다. 평화를 목표로 설정해야 정치권력을 민주적으로 분산하고, 권력이 왜 필요한지를 따져 묻는 시민들의 분별력이 자라날 수 있다. 우리가 평화의 기치를 높이 올리고, 사회생활을 평화적으로 규율할 수 있는 지혜를 찾아낸 다음에야 비로소, 북한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우리를 둘러싼 정치단위들에게 평화가 왜 선한 일인지를 알려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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