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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그날, 나도 갔더라면… 지옥보다 끔찍한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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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그날, 나도 갔더라면… 지옥보다 끔찍한 이곳"

[사라지지 않는 재개발의 아픔·下] 인천 남구 도화동 43-7번지

2009년 1월 20일. 용산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는 듯하다. 언론은 매년 이맘때쯤이면 그날 남일당 건물에서 숨을 거둔 농성자들의 이름을 꺼내 올린다. 고(故) 이상림, 양회성, 이성수, 윤용현, 한대성.

여러분은 이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다음 얘기 또한 기억하고 있는가. 이들 가운데 이성수, 윤용현, 한대성 씨는 용산 철거민들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 사건으로 구속된 여덟 명 가운데 네 명 역시 다른 지역의 주민이었다는 사실.

그럼에도 그들은 용산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지역만 다를 뿐 그들 또한 같은 처지에 놓인 철거민이었기 때문이다. 용산 재개발을 막아야 자신의 지역 또한 지킬 수 있다는 절박함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폭압적 공권력에 맞섰다.

‘용산 참사’ 이후 5년이 지났지만, 용산에도 다른 지역에도 기대했던 ‘해피 엔딩’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용산 남일당 건물은 터만 남았고,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다른 재개발 지역에선 여전히 거대한 힘에 의해 강제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 다른 지역 철거민들은 언제 ‘제2의 용산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다. 용산 참사 5주기를 맞아 끝나지 않는 비극의 현장 두 곳을 돌았다. 서울시 상도 4동 산 65번지에 이어 15일 <프레시안>이 찾아간 곳은 인천시 도화동 43-7번지 재개발 지역이다. 편집자.

▲인천시 도화동 43-7번지 재개발 현장. 철거 후 남은 기자재와 쓰레기 더미. 왼쪽은 우기선 대책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죽기를 각오했다. 생존권을 보장하라”

섬뜩한 문구가 적힌 현수막과 깃발 아래로 잔뜩 뭉개진 기자재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아무리 봐도 살풍경하지만, 이곳을 지나는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는다. 횡단보도를 통해 건너오는 이들도 맞은편 풍경엔 흥미가 없어 보였다.

인천 남구 도화 오거리. 도화역을 등지고 1시 방향에 있는 이곳은 ‘도화도시개발사업구역’이다. 큰길가에 이런 장면이 보이면 한 번쯤 돌아볼 법하건만, 사람들은 익숙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햇수로 벌써 7년째다. 시에서 재개발을 한다더니, 개발은 안 하고 어설프게 철거만 해놓은 그대로다.

상도동에서도 그랬듯, 이곳 재개발 현장에서 취재진을 먼저 반겨주는 건 사람이 아닌 개들이었다. 옛 인천대학교 터까지 합쳐 약 88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공간이지만, 주민은 15명 정도에 불과하다. 7년 새 모두 떠났다. (☞관련기사 보기 : "부잣집 개만도 못한 취급…'제2의 용산' 두려워")

안쪽은 주택가이지만, 길가를 따라선 정비소, 타이어 가게 등 자동차 관련 업소들이 줄지어 있었다. 지금은 고철상과 정비소 한두 곳만 남았다. 이곳 정비소에 수리를 맡기는 차가 하루 한 대도 안된 지는 이미 오래다.

“처음엔 재개발 반대 투쟁한다고 가게를 닫아도 단골 분들이 이해를 해주셨어요. 저희 사정이 딱한 걸 아니까요. 그런데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죠. 손님들도 빨리 차를 수리해야 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손님이 다 떠났어요. 이젠 가게 문을 열어놔도 아무도 오질 않아요.”

밥줄이 끊겼다. 큰돈은 못 벌었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신세 한 번 안 지고 살았다는 박영우(49) 씨는 “모아놓은 돈을 까먹는 수준을 넘어 이제 여기저기 빚을 지고 다닌다”고 했다. 작년엔 아내가 결혼 후 근 20년 만에 처음으로 바깥에서 돈을 벌어왔다. 그는 몇 년째 제집에서 도둑고양이 생활을 한다.

“집에 밤 10시, 12시 들어가서 새벽 6시에 나와요. 애들 볼 면목이 없으니까요. 아내는 가끔 격려도 해주지만, 그냥 포기하고 다른 데 일자리를 구했으면 하는 눈치예요. 길가에서 투쟁 구호를 외치고 있으면, 큰길에서 옛날 친구들을 마주칠 때도 있어요. 그 친구들이 ‘아직도 안 끝난 거냐’, ‘언제까지 이 짓 할 거냐’ 이런 소리 하면 모든 게 답답해져요. 전 이렇게 40대를 그냥 버렸어요.”

▲공터가 된 도화동 일대를 내려다 보는 철거민 박영우 씨. ⓒ프레시안(최형락)



“무너진 상권은 돈 몇 푼으로 복구할 수 없다”

재개발 사업은 평범한 박 씨를 투쟁가로 만들었다. 지난 2006년, 인천시는 박 씨의 집과 정비소가 있는 이곳 도화 일대를 도시개발사업지구로 선정했다.

도화 재개발은 대표적인 관(官) 주도 재개발 사업이다. 시는 원래 있던 인천대를 이전하고, 여기에 아파트, 상가 등을 건설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켜 2000억 원의 개발이익을 낼 것이라고 홍보했다. 인천대는 계획대로 송도로 옮겼다. 그러나 분양가상한제 시행에 경기침체까지 겹쳐 사업성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결국 시공사로 참여하기로 했던 SK건설 컨소시엄은 2009년 사업을 포기했다.

고육지책으로, 공기업인 인천도시개발공사가 시공을 맡기로 했다. 도개공은 지역 주민에 대한 보상비와 단지조성비 등을 마련하기 위해 공사채까지 발행하며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애초 사업성 부실 판정을 받았던 사업이 잘될 리 없었다. 이곳에 투자를 원하는 사업자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대단지의 주거단지 조성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인천시는 대신 일부는 주거용지로, 일부는 행정타운 등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 와중에, 그간 쓴 예산을 메우기 위해 옛 인천대 자리를 청운대학교에 헐값에 팔아넘겼다.

결국 7년이 지나는 동안 인천시와 도개공이 한 일이라곤 철거뿐이었다. 면밀한 검토 없이 시작한 재개발 사업은 기존 상권을 없애고 원주민들의 삶을 초토화하는 결과만을 낳았다.

“말하자면 인천시가 조합이고 도개공이 시공사인데, 공공사업은 나라가 책임져야 하잖아요. 주민 주거권을 고려해야 할 국가기관이 어떤 재개발을 할지 구상도 제대로 안 하고 원주민에 대한 이주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나가라는 통보만 할 수 있는 건가요.”

박 씨와 다른 주민들은 안상수 전 인천시장과 송영길 현 시장 모두 재개발 문제를 그저 선거용 말치레로만 인식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들은 특히 상공 지역 재개발은 주거 지역 재개발보다 훨씬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주거지 재개발의 경우 개별 원주민가구에 임시 거처와 보상금 지원을 해주면 되지만, 상공 재개발의 경우는 이전비용 보상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재개발로 인해 파괴된 상권을 어떻게 복구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

“자동차를 수리하려고 생각하면, 겉면 수리도 해야 하고, 또 그 김에 내부 점검도 하고, 부속품도 사게 됩니다. 그런 걸 하는 가게들이 모여 있으면 그게 상권인데, 재개발로 가게가 뿔뿔이 흩어지면 상권이 깨지는 거잖아요. 상권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각자 피땀 흘려서 자리를 잡고, 손님을 모은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 몇 푼 줄 테니 다른 데서 장사를 하라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죠.”

전국철거민연합회 김소연 국장은 상공 철거민에게 필요한 건 ‘보상’이 아니라 이전 생활에 대한 ‘보장’이라고 강조했다.

“이분들이 여기서 나가서 새로 상권을 만들려면 다시 5년, 10년이라는 세월을 들여야 합니다. 만일 다른 상권에 편입되려면, 새로 권리금을 내야 합니다. 시에서는 이런 부분을 일절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재개발 사업의 주체가 시라면, 이분들이 수평 이동할 수 있도록 부지 조성을 먼저 하는 게 순리입니다. 만일 주변에 그럴만한 땅이 없다면 나라가 가진 땅이라도 내놓고 재개발 계획을 말해야 맞는 거죠.”

▲급하게 철거작업이 진행된 흔적이 남아있는 주택. ⓒ프레시안(최형락)


"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박영우 씨와 몇몇 주민들은 ‘도화 상공 철거민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돈 몇 푼 보상이 아닌, 지금껏 일궈놓은 터전과 거기서 누려온 삶을 보장받기 위해서다. 대책위 활동을 하면서 다른 철거 지역의 연대 투쟁도 마다치 않았다. 그렇게 간 곳이 2009년의 용산이었다.

용산 참사 당시, 전철연 회원 4명과 일반 세입자 2명 등 총 6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그중 5명은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상, 화염병 사용 처벌법 위반, 일반건조물 방화, 일반건조물 침입 등의 혐의로 구속됐고, 나머지 한 명은 운 좋게도 풀려났다. 그게 바로 박 씨다.

“그때 생각하면 정말 아찔해요. 망루에 올라가려는 데 밑에서 누군가 제 손을 잡았어요. 올라가지 말라면서요. 그때 그분이 제 손을 안 잡아줬다면…. 그런데 요즘은 ‘차라리 나도 그날 같이 갔더라면(죽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요. 사는 게 너무 힘들잖아요. 여기서 사는 게 감옥보다, 지옥보다도 더 힘들어요.”

지옥보다 나을 리 없는 삶이다. 이들은 온종일 싸워야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재개발, 철거 반대를 외친다. 밤에는 돌아가면서 마을 진입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초소를 지킨다. 혹시 모를 철거조의 급습에 대비하는 것이다.

“몇 달 전 새벽에 갑자기 철거 차량이 들이닥쳤어요. 철거하려면 석면 작업부터 해야 하는데 어찌나 급했는지 건물을 유리까지 통으로 부수고 있더라고요.”

이들이 야밤에 감시해야 할 대상이 또 있다. 산업폐기물을 버리러 오는 사람들이다. 인천대 캠퍼스와 인근 주택가가 모두 밀리고 공터가 되자, 사람들이 밤을 틈타 이곳에 몰래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일이 잦아졌다. 박 씨는 “사람들은 여기가 쓰레기장인 줄 알아요”라고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쓰레기장으로 변한 도화동 재개발 현장. ⓒ프레시안(최형락)



철거작업반, 산업폐기물 무단투기자들과의 싸움은 그들을 지치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힘든 것은 그들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들은 5년 전 용산 참사를 떠올릴 때마다 착잡하기 그지없다.

“대여섯 명이 죽었는데도 안 끝나는 싸움을 과연 우리가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요. 용산 참사 전에 비해 눈에 보이는 무차별적인 철거 관행은 많이 사라졌다지만, 재개발 문제의 근본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사회의 관심 밖에 밀려나다 보니, 이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금은 겨울이라 뜸하지만, 날이 풀리면 곧장 철거 작업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이미 인천시와 도개공은 지난해 행정타운 착공 계획을 밝히면서, 이곳 도화 지구에 남아있는 건물 등에 대한 철거를 예고했다. 주민들 모두 강제철거 계고장도 받았다. 이들은 특히나 올해 인천에선 9월 아시안게임도 열릴 예정이라, 시에선 그 전에 철거 작업을 끝내려 하지 않겠느냐며 우울한 전망을 전했다.

“희망이 없느냐”고 물었다. 우기선 대책위원장은 “결과가 그리 좋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버텨야 한다”고 했다.

“망루에서 돌아가신 분들, 다 전날까지 저희랑 같이 밥 먹고 술 마시던 분들이에요. 이제 그분들은 죽었으니, 그분들의 염원을 살아있는 우리가 풀도록 버티고 노력해야죠. 그게 산 자들이 할 일 아니겠습니까.”

▲초소 내부. 라면 등 비상식량과 철거 차량 진입을 감시하는 데 쓰이는 망원경. ⓒ프레시안(최형락)
▲초소에서 바라본 풍경. ⓒ프레시안(최형락)
▲도화동 오거리 큰길에 붙은 투쟁 현수막.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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