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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농민 전쟁' 아닌 '유학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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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농민 전쟁' 아닌 '유학 혁명'이다!

[동아시아를 묻다] 2014 : 갑오년 역사 논쟁

좌(Left)와 우(Right)

새해 벽두부터 역사 논쟁이 뜨겁다. 교학사 교과서가 불을 지폈고, <뉴욕타임스>의 사설은 기름을 얹었다. 퇴행적인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하지만 미진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들다. 새 교과서가 엉터리라 해서 기존의 교과서가 안고 있는 허물을 덮지는 못한다. 양쪽이 다투는 역사 인식의 기저, 좌·우라는 잣대부터 미덥지 못하다.

우파를 개발파라고 한다면, 좌파는 개혁파라 할 수 있다. 전자는 경제적 근대화(자본주의)를 추앙하고, 후자는 정치적 근대화(민주주의)를 옹호한다. 개발파가 시장 만능주의에 빠졌다면, 개혁파 또한 민주 만능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닮은 구석이 없지 않다. 전자는 경제 발전에 우월감을 누리고, 후자는 민주주의 성취에 자부심을 갖는다. 양쪽 모두 개화파의 적자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120년 전, 갑오경장은 개화의 출발이었다. 개화파가 공유하는 불문율이 있다. TINA(There is No Alternative)이다.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를, 일본을, 미국을 따랐다. 특히 대안은 이 땅에 없다고 했다. 이 땅의 역사와 문명에는 대안이 없었다. 그래서 줄기차게 '쇼크 독트린'을 도입했다.

그 이면으로 자기 폄하와 자기 부정도 드셌다. 개화파를 우로 심화시킨 개발파나, 좌로 계승한 개혁파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파가 일본과 미국을 섬기는 만큼이나, 좌파 또한 동구와 서구를 흠모했다. 최근에는 북구로 바뀌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동방 문명에 대한 오만과 편견이 오리엔탈리즘 못지않다.

갑오년에 값하는, 그에 걸맞은 역사 논쟁을 해야겠다. 작금 한국의 위기와 혼란은 국지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적이고, 지구적이다. 갑오경장 이래 개화 100년의 결과이며, 개화를 강요했던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결국(結局)이다. 마침내 1894년 개시되었던 '장기 20세기'의 결말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야말로 지난 세기 금과옥조처럼 배우고 외웠던 언어와 개념과 발상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100년의 개화에 대한 총체적 재평가도 수반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고(古)'를 '구(舊)'로 타박하고, '금(今)'을 '신(新)'으로 대신했던 100년의 습속부터 바로 잡아야 하겠다. 다시금 관건은 정명(正名)이다. 좌·우는 부차적이다.

신(新)과 구(舊)

갑오경장은 획기적이었다. 말이 크게 바뀌었다. 사람의 도리(道理)보다는 개인의 권리(權利)가 중요했다. 예치는 법치로 바뀌었다. 언어적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점차 국문이 한문을 밀어냈다. 국문은 모름지기 개화파의 언어였다. 허나 조선의 언문을 계승하기보다는 번역과 중계에 급급했다. 그만큼 일본풍이 여실했다. 나랏말의 비애이다. 조선의 망국과도 무관치 않다.

1890년대의 신조어 중에 '사대주의'가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그 문하생들이 갑신정변에 관여한 일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고안한 말이다. 일본을 추수했던 개화파들을 '독립당'이라 치켜세우고, 그 맞은편은 '사대당'이라 업신여겼다. 본래의 맥락을 거세하여 '사대'를 곡해하고, '독립'이 최고의 덕목인양 일방으로 편들었다.

그러나 당시를 기록한 <매천야록>을 살펴봐도 '독립'이 지상 과제는 아니었다. '독립'이 절실했던 것은 1910년 국권을 잃은 이후라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그래서 3월 1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다. 비로소 '독립'이라는 개념에 뼈와 살이 붙었다.

'사대주의'에 버금가는 신조어로 '중화주의'도 있다. 사대주의가 청일 전쟁을 전후해서 등장했다면, 중화주의는 중일 전쟁을 전후로 보급되었다. 전자가 조선에 책임을 전가했다면, 후자는 중국의 저항을 겨냥했다. 만사, 조선의 사대주의가 악습이고 중국의 중화주의가 병통이라 했다. 그렇게 일본의 동양학은 천하대란을 촉발하는 새 언어와 신개념들을 널리 유통하고 전파시켰다. '지(知)의 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럴수록 동아시아는 안녕하지도, 태평하지도 못했다.

고·금을 신·구로 전도시킨 책임을 일본에만 떠넘기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겠다. 고종도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을 일으킨 그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내세웠다. 옛 것을 기본으로 하여, 새 것도 보태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다. 황제권 강화를 위하여 편의적으로 신과 구를 활용했을 뿐이다.

국가보다는 자신이 우선이었다. '짐이 곧 국가'였다. 군주를 이념으로 규율했던 유교 국가의 이상은 무너지고, 유럽식 절대왕정이 들어섰다. 옛 것은 옛 것대로 굴절되었고, 새 것은 새 것대로 뒤틀리고 말았다. 그래서 대한제국은 옛 기준으로 봐서도 미흡하고, 새 기준으로 평가해도 부족한 국가였다. 내발적 요구에 즉응한 개혁이기보다는 흉내 내기, 따라잡기(Catch Up)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개화가 500년 조선의 전통과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국정의 혼란을 야기하고 국가의 위기를 가중시켰다. 결국 대한제국은 단명했다. 조선에 견주자면 턱없이 모자란 국가였다. 그럼에도 근대화를 추진했다며 고종을 높이려는 일각의 움직임이 나로서는 참으로 황당하다.

고(古)와 금(今)

고·금은 신·구처럼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다. 금은 고의 누적이며, 금은 또 고가 되어간다. 옛 것은 한 때의 새 것이며, 오늘의 새 것은 훗날 옛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고에 비추어 금을 반추할 수 있었고, 당장에 고착되지 않는 정신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소중한 시간 감각이며, 귀중한 역사의식이다. 물론 이 고·금의 잣대를 동방인들의 고유한 마음이라 편애할 뜻은 없다. 아니 역설적으로 유럽이야말로 고전적인 듯 보이기도 한다.

나는 유럽에서 살아보지는 못했다. 학창 시절 배낭여행이 고작이고, 런던 생활 두 달이 최장기 체류이다. 하지만 유럽이 보유한 경쟁력의 원천을 '좌우 합작'에서만 구하는 것은 피상적 관찰이라고 여긴다. 유럽이 유럽인 것은 그 '클래식'함에 있다. 기품과 격조가 있다.

역시나 '고'의 자취 탓이다. 전통이 살아있고, 옛 것을 간직하고 있다. 식민화를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실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즉 유럽풍 매력의 바탕에는 고금의 합작이 자리한다. 좌·우가 공생할 수 있는 기저에 고·금의 조화가 떠받치고 있다.

유럽이 미국보다 나은 점도 이와 무관치 않아 뵌다. 미국은 온통 새 것 뿐이다. 새 것의 질주를 조율할 역사의 중력이 없다. 말 그대로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이다. 그러나 신세계의 용맹스런 독주는 치명적이다. 어질기보다는 거칠다. 혈기와 패기가 지나치다. 성숙보다는 성장 지향적이다. 지난 100년 미국이 부렸던 패도 또한 고전 문명의 결여와 깊이 결부되어 있을 것이다. 오래된 것을 배려하지 못하고, 옛 것을 존중하지 못한다. 독선적이며 독단적이다. 고약한 마음씨다.

돌아보면 갑오경장 이후 옛 것은 몽땅 사라지고, 새 것만 득세했던 것은 아니다. 동방 문명 1000년과 조선 왕조 500년의 척추에 기초한 '진화'의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적지 않았다. 과거제의 폐지는 과거제의 문호를 대폭 확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출신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오로지 학교에 몸담은 것을 기준으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일신하고자 했다. 전통적 경학의 기반 위에서 새로이 요구되는 시무(時務) 능력도 갖추고자 했다. 온고지신의 명맥이 이어졌던 것이다. 동과 서, 고와 금은 상부상조, 윈윈(Win-Win)할 수 있었다. 자기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자기 혁신을 수행하는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이 가능했다.

이 창조적 가능성이 꺾이고 만 결정적 계기는 역시 식민지화이다. 이로써 신이 구를 압도해 버렸다. 더군다나 일본은 동방 문명의 정수를 실천해본 경험이 미천한 나라였다. 인문학의 훈련을 통해 자기 구원에 이르는 지식 기반 국가의 이상을 알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유교 문명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왜곡되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한 채, 불시에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노니는 '식민지 근대'로 내던져진 것이다. 불행히도 그 식민지적 기질은 대한민국과 북조선으로 이어졌다. 북과 남은 '반(反)봉건'으로 하나 되어, 식민사관을 답습했다. 좌·우가 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소)분단 체제든, 동아시아의 (대)분단 체제든, 20세기가 조탁한 분단 체제의 최종 심급에는 고·금 간의 아찔한 절벽이 자리한다. '자기 소외'야말로 한반도·동아시아 분단 체제의 핵심 요체이다. 따라서 분단 체제를 극복하는 집합적 운동의 최대 강령 또한 고·금 합작에 두어야 할 것이다. 전환 시대가 좌·우의 날개로 날았다면, 반전 시대는 고·금의 날개로 비상한다. 본디 '根本'으로 돌아가는 것이 동방형 혁명의 본령이다.


동(東)과 서(西)

고금합작의 단서는 다시 갑오년에 있다. '동학(東學)'이 일어났다. 나는 개화기의 새 말들 가운데 '동학'을 으뜸으로 친다. 가장 창조적인 신조어이다. 다만 농민 전쟁과 동학 운동은 분별할 필요가 있다. 동학 운동은 계급투쟁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학습 운동'이다. 그 학습의 범위가 농민들까지 확산되었던 것이다.

즉, '학이시습지…'로 출발하여 배우고 익힘을 최상의 기쁨으로 여겼던 동방 문명의 하방으로 동학이 개창한 것이다. 그래서 동학 조직은 학습 네트워크이기도 했다. 조선의 전복을 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조선을 동방의 이상에 한층 부합하는 국가로 혁신하는 운동이었지, 조선을 부정하는 운동은 아니었던 것이다.

즉, 신유학으로 출발한 조선의 끝에서 유학 국가는 민주화, 민중화되고 있었다. 유학이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면, 그 계급적 교양을 전민 교육으로 보편화시킨 것이 동학이다. 사람이 하늘이고, 인성에 천성이 담겨 있다 하셨다. 그래서 농과 공과 상도 사와 대등할 수 있었다. 신분제의 철폐 또한 도둑처럼 온 것이 아니다. 서학의 수용 탓만도 아니다. 신유학의 장기 지속적인 '문명화 과정'의 결실이라 해야 온당하다. 동학은 모두가 선비가 될 수 있는 나라,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는 국가를 염원했다. 유학의 혁명이자, 혁명적 유학이었다.

그래서 동학은 평지돌출이 아니다. 구(舊)와 척을 지는 신(新)이 아니었다. 고(古)의 누적이자 집대성으로 금(今)이 발현한 것이다. 멀게는 요순 시대로 거슬러 오르고, 가까이로는 18세기 영·정조의 '개명(開明)' 정책의 유산이다. 개명 아래 일정하게 성장하고 있었던 민중 세력은 발랄한 시민 문학을 선보였다.

향촌 사회를 이끌었던 농촌 지식인이 동학의 주축을 이루었다. 18세기의 개명이 19세기의 서세동점으로 개화파의 서학과 개벽파의 동학으로 분화했던 것이다. 개화파가 유학의 타파와 조선의 전복을 꾀했다면, 고종은 절대왕정의 이데올로기로 유학을 왜곡시켰고, 개벽파는 유학의 민중화를 통한 조선의 갱신을 도모했다. 유학을 고집하는 척사파와 서학을 맹종하는 개화파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내재적 민주화'의 맹아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가지 못한 길'이다.

2014년, 새 경장이 필요하다. 소학(小學)은 무너졌다.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대학(大學)은 시시해졌다. 치국과 평천하를 배우지 않는다. 민도는 민도대로 떨어지고, 자질과 자격을 갖춘 지도자도 키우지 못한다. 군자가 사라지자, 소인천하가 도래했다. 대중 사회라고도 한다.

소인들이 1인 1표제와 접속하자 정치는 저열해졌다. 권력만 남고, 권위는 사라졌다. 삿된 권리 추구(私)가 공공성(公)을 잠식해버렸다. 그래서 한 원로 정치학자의 일갈처럼,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질적으로 나빠졌다." 그리고 스노비즘이 창궐한다. 허나 이 속물 근성이 비단 '97년 체제'만의 산물은 아니지 싶다. 줏대 없는 개화 100년의 누적이고 축적이다. 이광수는 이미 <무정>에서 그 원형을 탁월하게 조형했던 바 있다. 영어교사 이형식은 고(古)와 단절된 신청년의 표상이자 속물의 원조였다. 그 후예들이 소학과 대학을 접수하고 만 것이다. 동학은 100년간 고독했다.

20세기가 좌우 합작이라면, 21세기는 고금 합작이다. 새 말로는 하이브리드(Hybrid)이고, 옛 말로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서학을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유학의 민주화를 꾀했던 동학을 모시는 마음으로 되새기는 까닭이다. 2014년, 부디 원기(元氣)를 배양하고 근기(根氣)를 회복하는 갑오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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