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20일. 용산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는 듯하다. 언론은 매년 이맘때쯤이면 그날 남일당 건물에서 숨을 거둔 농성자들의 이름을 꺼내 올린다. 고(故) 이상림, 양회성, 이성수, 윤용현, 한대성.
여러분은 이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다음 얘기 또한 기억하고 있는가. 이들 가운데 이성수, 윤용현, 한대성 씨는 용산 철거민들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 사건으로 구속된 여덟 명 가운데 네 명 역시 다른 지역의 주민이었다는 사실.
그럼에도 그들은 용산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지역만 다를 뿐 그들 또한 같은 처지에 놓인 철거민이었기 때문이다. 용산 재개발을 막아야 자신의 지역 또한 지킬 수 있다는 절박함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폭압적 공권력에 맞섰다.
‘용산 참사’ 이후 5년이 지났지만, 용산에도 다른 지역에도 기대했던 ‘해피 엔딩’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용산 남일당 건물은 터만 남았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다른 재개발 지역에선 여전히 거대한 힘에 의해 강제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 다른 지역 철거민들은 언제 ‘제2의 용산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다. 용산 참사 5주기를 맞아 지난 16일 끝나지 않는 비극의 현장, 서울시 상도 4동 산 65번지를 돌아보았다. 편집자.
"300가구 중 남은 곳은 단 3가구…이곳은 폐허"
"왈왈왈"
적막 속에 개 짖는 소리만 요란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폐허 사이에서 개들만 불쑥불쑥 나타났다. 전국철거민연합 소속 상도 4동 철거민대책위원회 천주석(51) 위원장의 개들이다. 천 위원장이 ‘안’에 들어가기 전만 하더라도 대여섯 마리였는데, 지금은 몇 마린지도 모를 만큼 많아졌다. 어림잡아 스무 마리는 족히 될 듯 했다.
“얘네들이 저 없을 동안 제 마누라, 자식들, 이 동네를 지켜줬어요. 보초견이죠.”
천 위원장은 보름 후면 ‘안’에서 나온 지 1년이 된다. 그는 5년 전 용산 참사 당시 구속자 중 한 명이다. 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4년형을 선고받고 2009년 10월 구속됐다가 지난해 1월, 만 3년 3개월 만에 출소했다.
“그래도 그 전엔 사람이 좀 있었는데 다 나갔더라고요. 어쩔 수 없죠.”
천 위원장이 사는 산 65번지에는 원래 300여 가구가 가파른 언덕길 위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300가구에서 100가구, 30가구로 점점 줄어들더니 이젠 천 위원장 집을 포함해 달랑 세 집만 남았다. 이웃들이 떠나고 난 자리엔 소파나 싱크대로 추정되는 쓰레기들이 흉물스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폐허 사이 동그마니 서 있는 천 위원장의 집도 그리 성하지 않았다. 포격을 맞은 듯 담장은 무너져내려 없다시피 했다. ‘즐거운 나의 집’이라고 페인트칠이 된 대문만이 여기가 사람이 사는 집의 입구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예전엔 상상도 못 했던 어지러운 풍경, 이 모든 것은 강제 철거가 남긴 흔적이다.
“철거민은 부잣집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
상도 4동 산 65번지에 재개발의 악몽이 시작된 것은 지난 2006년, 이 지역의 땅 주인이 바뀌면서였다.
이 지역은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인 ‘지덕사’ 인근 주택지로, 지덕사 소유의 땅이었다. 이곳에 가난한 서민들이 수십 년 전부터 서민들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무허가주택 촌이 형성됐다. 그러다 서울에 재개발 바람이 불던 2006년 지덕사 측이 민간주택 건설회사인 S사에 땅을 팔면서 철거 작업이 시작됐다.
S사 측은 주민들에게 “여기서 계속 살고 싶으면 재주껏 새 아파트에 입주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이 아파트를 살 돈이 나올 리 만무했다. 겨우 전세 200~500만 원짜리 허름한 집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민영개발이기 때문에 시행사와 시공사는 공공임대주택을 지을 의무도, 세입자에 대한 보상 의무도 없었다. 세입자들과 무허가주택 가옥주들은 하루아침에 철거민 신세가 됐다.
철거 소식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마을 어귀에 굴착기가 들어서고, 새벽부터 수백 명의 ‘용역 깡패’들이 들이닥쳤다. 사람이 사는 집의 경우 당장 철거를 진행할 수 없고 노동부의 석면검사 필증을 받은 뒤 철거하도록 돼 있지만, 이런 절차는 과감하게 생략됐다. 집만 부수는 것도 아니었다. 용역들은 고추장이 담긴 항아리를 깨고, 사람도 패대기쳤다. 천 위원장은 “철거민은 부잣집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용역들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보이는 거면 뭐든 작살을 냅니다. 용역들이 때려서 환자가 생기면 어딘지도 모르는 사설 병원에 보내 버리고, 노인들은 번쩍 들어서 바깥에 내쫓아버려요. 한 번은 용역들이 저희 집사람을 벽돌로 내려치려다가 주먹으로 때렸어요. 집사람이 아파서 길바닥에 쓰러지니 그 다음엔 배를 차는 바람에 집사람이 바지에 오줌까지 지렸지요. 얼마나 지독하게 구는지 모릅니다.”
천 위원장은 감옥 생활을 하는 도중, 같은 집에 살던 처남을 잃기도 했다. ‘용산 참사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하던 처남은 경찰서에서 잡혀 들어가 모진 조사를 받았다. 이후 동네에서 행패를 부리는 용역들을 마주칠 때마다 벌벌 떨었다. 공포 속에 매일을 술로 지내던 처남은 결국 집 마당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철거가 급박하고 무자비하게 진행되면서 비극적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에 비해 재개발 사업은 지지부진하게 흘렀다. 2007년 5월, 서울시는 이 동네를 주택재개발 정비구역으로 지정했다. 이에 S사는 구청이 주도하는 재개발에 반대하며 즉각 재개발사업 승인처분 무효 확인 소송을 걸었다. 판결은 2010년에서야 나왔다. 대법원은 S사의 손을 들어줬고, 주택재개발구역 지정은 취소됐다. 그리고 이듬해 봄부터 S사는 다시 명도집행을 명분으로 철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철거 작업은 곧 중단됐다. S사 측이 온갖 비리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고, 토지대금 지불 등을 위해 빌려 간 돈을 갚지 못하자 금융회사들이 공매를 신청한 것.
"주민들과 다 같이 살기 위해 벌인 싸움, 멈출 수 없다"
당분간 이곳의 싸움은 휴지기에 접어들 전망이다. 몇 집 남지 않은데다, 새로운 시공업체를 찾기까지 시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크게 달라질 일은 없다. 결국 주민들은 터전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그저 유예 선고를 받았을 따름이다.
산 65번지에 남은 또 다른 주민 장현순(가명·74) 씨. 그는 마지막 철거날인 지난 2011년 4월 25일, 모든 세간을 잃었다.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나쁜 놈들이 그새 집을 다 부숴놨더라고요. 내 손때 묻은 집기도 다 잃고, 죽은 남편 영정 사진 한 장도 못 건지고…. 제 몸뚱이 하나만 남았어요.”
장 씨에게 남은 건 지금은 무너져가는 구멍가게 하나뿐이다. 장사는 접은 지 오래다. 물품진열대 대신 연탄난로와 간이 침대를 놓았다. 내부가 멀쩡한 건물이 없는 탓에 지금 이 가게는 일종의 ‘주민 대피소’ 역할을 한다. 여기서 주민들은 난롯불을 쬐며 차갑게 언 몸을 녹인다.
앞으로 사태가 잘 해결되리라는 전망은 불투명하고, 이웃들도 모두 떠나고 폐허만이 남았다. 그러나 천 위원장과 장 씨는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에게는 꿈이 있다고 했다. 장 씨는 요즘도 예전 이웃들과 다시 다 함께 사는 꿈을 꾼다고 했다.
“가난하지만 정말 인심 좋은 동네였어요. 국수를 해도 한 솥을 삶고, 통닭 한 마리를 사와도 다 나눠 먹고. 자물쇠가 필요 없는 인심 좋은 동네였어요. 그런 동네를 재개발한다고 들쑤셔놓고, 지역으로 복귀도 못 하게 보상금도 안 준다니 울화통이 터져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철거 압력에 못 이겨 나간 다른 주민들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해 빚을 내 월세 생활을 한다고 했다. 비록 이곳을 떠났지만, 지금도 종종 찾아오는 주민이 많다. 천 위원장은 “주민들을 위해 끝까지 싸워서 세입자 권리를 인정받고, 임시 거처 대책을 받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저희는 철거민이기 전에 다 같은 동네 주민입니다. 다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도 이곳이 좋다고 한 분들이에요. 그래서 처음부터 주민들과 다 같이 살자고 재개발 반대하기로 한 거고요. 제가 위원장을 지내면서 용산에 간 것도 그 때문입니다. 더 이상 물러날 순 없습니다. 주거세입자 권리를 지키는 일에 본보기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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