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는 2014년 신년호로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나오길 바라는 미래의 책들에 대한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일곱 명의 필자들에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책, 당신이 읽고 싶은 책, 번역되길 바라는 책과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울러 지난해 12월 13일 송년호에서 예고했던 페이지 개편은 기술적인 문제로 1월 17일부터 구현됩니다. 예고한 대로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독자 여러분, 2014년에도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온갖 종류의 'how to…'에 대한 팁은 대부분 구글링하다보면 나온다. 이사를 앞두고 15개의 책장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다가, 혹시나 해서 '책장 정리하는 법'을 검색해보았다. 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안 읽는 책은 버리세요!" "책은 비슷한 색깔끼리 꽂아두면 예쁘게 어울린답니다!"
이런 조언들은 아무 소용도 없다. 이 책이 언제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에, 이 책을 버렸다가 혹시라도 절판되어 영영 구하지 못할까봐 차마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자의 충고는 아예 전제부터 잘못됐다. 혹은 책 제목을 가나다 순으로, 출판사 별로, 국가별로, 저자별로, 종류별로 꼼꼼하게 구분하여 정리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이들에게 두 번째 조언은 가당치도 않다.
그래서 정말 실제적인 조언을 듣고 싶었다. 소문난 책벌레들에게, 혹은 서점 운영자에게 대체 책을 어떻게 보관하는지, 가구는 뭘 쓰는지, 책 배열은 어떤 식으로 하는지, 혹시라도 책을 버릴 땐 어떤 책을 가장 먼저 집어 드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마침 시기도 새해다. 새해에는 누구나 대청소의 야망을 품게 마련인데, 이 주체할 수 없이 늘어나는 책들을 어떻게 좀 더 보기 좋게,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 '책장 정리의 정석'(이 제목은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깎이의 정석>(정은주 옮김, 프로파간다 펴냄)에서 따왔습니다)을 물어보고 싶었다. <편집자>
*안은별이 만난 사람들
아마 서재 결혼시키기는 평생 진행 중,
: 편집자 유진과 번역가 하성호 부부의 경우
"조지[남편]는 병합파다. 나는 세분파다. 그의 책들은 민주적으로 뒤섞여, 문학이라는 깃발 아래 통일되어 있었다. 어떤 책은 수직으로, 어떤 책은 수평으로, 심지어 어떤 책은 다른 책 뒤에 꽂혀 있기도 했다. 내 책들은 국적과 주제에 따라 소국들로 분할되어 있었다.
어수선한 꼴을 잘 견디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조지는 3차원 물체들에 대해 기본적인 신뢰를 갖고 있다. 자기가 뭘 원하면 그것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으며, 그렇게 믿어서 그런지 또 보통 그렇게 된다. 반면 나는 책, 지도, 가위, 스카치테이프는 모두 믿을 수 없는 방랑자들이어서, 숙소에 꽉 붙잡아 두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으로 튈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 따라서 내 책들은 늘 엄격하게 조직화되어 있다." (앤 패디먼, <서재 결혼시키기>(정영목 옮김, 지호 펴냄) 19쪽)
예전에 신문에서 소설가 신경숙과 문학평론가 남진우 부부의 집 겸 작업실을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널찍한 2층짜리 건물의 벽과 계단에 무수한 책들이 보기 좋게 꽂혀 있어 책의 성처럼 보였고, 특히나 둘 다 글을 쓰는 부부의 공동 작업공간으로서 실용적인 한편 로맨틱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들이야 꽤 오래된 부부이고, 그곳은 이미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었으니 이야기가 좀 다를 수도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책에 관련된 일을 하는 경우 부부의 서재 결혼시키기란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인용문의 앤 패디먼의 경우, 남편과 책을 섞기로 결정한 것은 함께 산 지 6년, 결혼한 지 5년 만이었다.
또 다른 '책의 결혼'의 예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신년으로 결혼 5년차, 30대의 편집자와 번역가 부부인 유진·하성호 씨네 집이 제격일 것 같았다. 세밑의 어느 연말 방문한 부부의 집은 도시의 아파트라는 가장 보통의 공간에서도 충분히 아름다운 부부 공동의 서재를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서울시 영등포구 모처에 위치한 부부의 집은 방 네 곳과 거실, 부엌, 베란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간에서 책이 '흐른다.' 이 모호한 동사를 사용한 것은 그들이 이곳으로 이사 온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리 중인 상태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태어난 지 34개월 된 딸의 책도 한두 권씩 엄마 아빠의 책장 속으로 끼어들고 있어 끊임없이 모양을 바꿔나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아빠 하성호 씨는 유학을 앞두고 있어 조만간 또 하나 큰 책 짐이 꾸려질 예정이다. 누군가 이 집에 있는 책들의 지도를 그린다면, 업데이트 속도는 상당히 빨라야 할 것이다.
▲ 사진 1. ⓒ프레시안(안은별) |
▲ 사진 2. ⓒ프레시안(안은별) |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양쪽에 펼쳐진 두 개의 작은 방이 책들에겐 안방 격인 공간이다. 오른쪽 방(사진 1, 2)엔 벽면 세 곳이 속이 꽤 깊은 책장으로 채워져 있는데, 책은 이중으로 꽂혀 있고 가로로 누운 책들이 틈새를 채우고 있다.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벽면을 차지한 서가엔 천 권이 넘는 만화책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집 서가 중 가장 제대로 체계를 갖춘 곳이라 한다. 책장 위 남은 공간과 천장 사이엔 하성호 씨의 취미인 프라모델 박스가 빼곡하다. 한편 왼쪽 방은 하성호 씨의 작업실. 주로 전공 도서나 앞으로 연구할 주제(에도 시대의 그림 교본)와 관련한 전문 서적들로 채워져 있다. (사진 3)
▲ 사진 3. ⓒ프레시안(안은별) |
▲ 사진 4,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 서가 중 일부. ⓒ프레시안(안은별) |
▲ 사진 5, 고단샤의 <세계의 메르헨> 시리즈. ⓒ프레시안(안은별) |
두 사람은 "우리는 딱히 장서가도 아니고, 내놓을 만한 희귀본도 없다"고 선을 긋지만 적어도 보통의 가정집 책장 풍경과는 확실히 다르다. 1만 권이라는 양 자체가 평균을 뛰어넘고, '이런 책도 나온 적이 있구나'하고 놀랄 만한, 덜 유명하고 흥미로워 보이는 책의 비중이 많다. 실은 부부 모두 각자 거쳐 온 준거 집단에서 '오타쿠'로 불린, 세상의 온갖 정보나 지식에 대한 욕구가 남들보다 살짝(?) 더 많은 사람들이다. 가운데서도 유진 씨는 주로 문학과 인문서를 탐해 왔고 하성호 씨의 수집 목록은 일본 만화와 어린이책, 게임·메카닉·스포츠 관련 자료에 특화되어 있다. 그런 두 사람이었기에 '서재 결혼시키기'는 비교적 평화롭고 상당히 두근거리며 결과적으로는 풍요로운 작업이었다.
"생각보다 둘이 겹치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어느 쪽의 카테고리를 더 중시하느냐, 이런 논쟁 없이 자연스럽게 서로의 조각들이 맞물려 합쳐지는 과정이었죠. 마치 테트리스처럼요." (하성호)
"남편 전공분야(디자인)가 제 관심분야이기도 해서, 이 사람 작업실에 원래 제 거였던 책들도 꽤 있어요. 제 전공이었던 정치학 서가 쪽에 일본 정치 관련 책이 늘어나 기쁜 것도 있고요." (유진)
그래도 살림을 합치기 전 각자가 소장한 책이 몇 천 권이나 되었고 결혼 후 이사도 한 번 했으니, 서재 결혼시키기는 상당한 육체노동을 수반해야 했다. 기실 그들 각자가 책을 사 모은 과정이 체육이기도 했다. 유진 씨는 학교 인근 중고 서점(외대앞역)에서 산 70여 권의 책을 비 오는 날 집(부개역)까지 혼자 끙끙대며 옮긴 에피소드를 들려주었고, 성호 씨는 10대 때부터 PC통신을 통해 만난 형들과 함께 일본 오타쿠 관련 전문 서점가를 드나들며 만화책과 서브컬처 관련 서적을 수십 권씩 쓸어 모으곤 했단다.
그게 도 대회였다면 2010년 결혼 후 서가 정리는 전국체전이었다. 세간을 싹 새로 마련한 신혼집에 무거운 시간의 흔적들이 몇 수레 실려 왔다. "합치니까 생각보다 너-무 많은 거예요. 애초엔 철저하게 체계화해서 분류시켜야겠다는 욕심이 있었는데 눈앞에 수북이 쌓여 있으면… 인간의 뇌로 어떻게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유진) 그래서 일단은 서재를 '결혼시키지' 않고 "삽으로 모래를 퍼 올리듯이" 각자의 책을 따로 정리했다. 둘 다 직장 생활을 하던 때라 퇴근 후 짬짬이 정리하다보니, 책을 끼워 놓는 데만 1주일쯤 걸렸다.
좀 시원시원하게 버리면 되지 않겠냐고? "똑같은 책을 갖고 있어도 판본이 다르니까, 각자 판본의 장점을 생각하면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들도 있어요." 그렇게 세세한 선택을 거친 뒤 박스로 9개분, 500권 정도가 아름다운가게에 기증됐다. (참고로 이건 앤 패디먼 부부에 비하면 시원시원한 편이다.) 이후 성호 씨가 각자의 서가를 오가며 만화책부터 정리를 해 나갔고, 일반서 정리로 나아가려던 시점에 딸이 태어났다. 더욱 바빠졌고, 또 한 번 이사를 했다. 지금 서재의 병합과 책 정리가 얼마나 이뤄졌느냐고 묻자, 약간의 조정을 거친 끝에 "45%"라는 합의점을 찾아 주었다.
이들도 한때는 100%를 원했다. 만화책 서가야 1권부터 완결까지 덩어리로 존재하고 출판사-판형-장르 순이라는 비교적 확고한 분류 체계가 있어서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워졌지만, 인문서 서가는 국적이나 장르로 분류하기에는 "워낙 결이 미묘해서"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문학서를 국가·작가 별로 완벽하게 세분화시키는 것은 유진 씨의 서가 노스탤지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이들의 서가엔 책이 끊임없이 흐른다. 유진 씨는 책을 읽고 참조하고 만들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숙명인 편집자이며, 성호 씨의 관심과 연구 분야는 예전의 그것에서 크게 선회해 '가장 중요한 책들' 순서가 끊임없이 뒤바뀌고 있다. 또 이제 활자와 그림의 재미를 알아가는 딸에게 어린이 책을 골라주고 읽어주는 것은 부부의 새로운 즐거움이 되어, 그쪽 서가가 살찌고 있다. 그래서일까, 부부의 생각도 바뀌어 간다.
▲ 사진 6. ⓒ프레시안(안은별) |
책은 습기나 온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온갖 먼지를 끌어들이는 물리적 속성을 지닌다. 하여 쾌적한 환경이나 살뜰한 공간 배치를 원한다면 끊임없이 정리가 필요하지만, 몇 백 권 수준을 넘어가면 꽤나 수고스럽고 귀찮은 작업이 된다. 물론 그 전에 여행이나 외식, 의류 쇼핑 등 다른 즐거움을 포기한다는 것도 책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전제다.
하지만 부부에게는 이 수많은 책과 뒹굴며 살아가는 건 여전히 즐거운 일, 아니 "딱히 없이 살아본 적이 없어서 뭐가 고통스럽고 뭐가 즐거운지 잘 모를 일"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도 굳이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이런 건 있어요. 어느 밤에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을 때, 검색으로는 안 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있는 공간 어딘가에 그 궁금증에 대한 가장 정제된 정보, 완벽한 정수가 손에 잡히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거… 그게 엄청난 힘이 되거든요." (유진)
◆ 서가 정리의 팁
Q. 사실 관건은 공간의 너비 자체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통용될만한 서가 정리의 팁이 있다면요?
A. 공간 제약이 있다면 역시 판형에 맞춘 최적화가 중요해요. 자취를 했을 때 방이 넓지 않아 공간 여유가 없었는데, 그때 판형별로 책을 정리해서 이중으로 꼽은 다음에 위의 공간을 확보해서 문고판을 꽂았거든요. 이것만 이루어지면 정리와 관련한 다른 건 무시해도 될 정도로 괜찮은 방법이에요. (하성호)
책을 읽지 않기 위해, 혹은 책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 서평가 금정연의 경우
'프레시안 books'에서 활자유랑자라는 직함을 쓰는, 보통은 서평가라는 직함으로 소개되는 금정연 씨는 가끔 개인적인 자리에서 내게 묻곤 한다. "제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피터 버거의 제목을 빌리자면 '어쩌다 서평가가 되어'라고 할까. 책 리뷰야 전 국민이 다 하는 일이지만, 전문적인 서평가도 적지 않지만, 겸업 없이 오로지 그 일로만(그것도 대중적이지 않은 스타일의 글을 쓰면서) 생계를 꾸리고 남들에게 소개되는 지금의 상태가 그는 영 어색하고 민망한 눈치다.
▲ 사진 7. ⓒ프레시안(안은별) |
곧 결혼을 앞둔 30대 초반의 이 총각은, 현재 5년 전 이사한 은평구의 한 빌라에서 혼자 생활과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꽤 널찍한 분리형 원룸의 곳곳에 꽂혀 있거나 쌓여 있는 약 3000권의 책은 얼떨떨한 '서평가'로서의 삶의 밑천이자 스무 살 이후 한 청년이 '활자 유랑'해 온 궤적이다. 스무 살 이후라 특정한 이유는 그 전에 읽던 책들은 이 집으로 이동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건 이제 졸업해야지" 싶어서 종종 어떤 책들을 처분해 왔다는데, 그 가운데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과 겪은 애증의 관계가 인상 깊었다. "10대 때 정말 많이 읽었는데, '언제까지 여기에만 머무를 수 없지' 싶은 기분이 들어서 다 버렸어요. 그러다 문득 생각나면 옛날 장편들부터 다 사서 읽고요. 그런 식으로 읽고 버리기를 반복했죠."
그렇게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인연을 제외하면, 동거 중인 책들이 지금 상태로 불어나기 시작한 것은 군 시절부터다. 전투경찰이던 그는 사무실 야간 근무 때마다 심심했고, 인터넷 세상에서 알라딘(인터넷 서점)과 만났다. 알라딘에서 책을 사서 읽고 리뷰를 올려 추가 적립금을 받고 다시 책을 사고 리뷰 대회의 상을 타고… 하다 보니 제대할 때 카드빚은 300만 원, 책 짐은 3~400권으로 불어났다.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현금서비스를 받아 갚는, 무모하다면 소심하고 소심하다면 무모한 돌려막기 수법이었다. "그땐 제대할 줄도 몰랐으니, 제대하면 뭐라도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야기가 묘하게 흘러간다. 심심함을 달래주기도 하고 카드빚을 주기도 했던 알라딘이 그의 첫 장기 아르바이트처가 되고, 나아가 첫 직장(이자 현재로선 마지막 직장)이 되었던 것이다. 제대 직후 6개월간 했던 아르바이트 업무는 출판사의 보도 자료를 축약하고 다듬어 책 소개 페이지 윗부분에 노출되는 두 문단짜리 소개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때 사기도 받기도 많이 하면서, 책이란 것이 '쌓이는' 걸 목격하기 시작했다. "좀 더 쌓아도 되겠다 싶었죠."
시간이 흘러 마지막 여름방학을 앞두고 백 군데 넘는 곳에 아르바이트 지원서를 넣었는데, 단 한 곳에서도 회신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절친'과 함께 지원한 알라딘 정규직 채용 공고에 절친과 함께 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 3년 6개월을 일했다. 처음 약 1년간은 어린이·유아 MD로, 이후에는 인문 MD로 일하며 담당 분야의 신간 증정본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오랫동안 궁금했던 질문 하나, 인터넷 서점 MD는 하루에도 수십 권 쏟아지는 신간을 얻으니 책을 안 사게 되지 않을까? 답은 반은 YES, 반은 NO였다. 담당 분야의 신간 90%가 손에 들어오긴 하지만, 일 자체가 온갖 신·구간을 접하는 기회가 월등히 많은 일이다보니 분야 외 서적을 사느라 오히려 구매량이 늘어난다는 것. 퇴사하기 전에 개인 구매 정보를 열람해 봤더니, 일하는 동안 알라딘에서 책 사는 데 쓴 현금만 2000만 원이었다고 한다.
▲ 사진 8. ⓒ프레시안(안은별) |
본격적으로 서가 정리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입사 4개월 후, 처음으로 혼자만의 살림을 차리면서부터다. 지금 사는 곳보다 좁은 반지하방에 네 개의 큰 책장을 들였다. MD 경력과 함께 책 살림도 빠르게 늘면서 곧 보다 넓은 지금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때 이미 이삿짐센터 인부들에게 많은 욕을 먹었다. 어쨌든 전보다 큰 집이라 두 배나 많은 서가를 둘 수 있었고 나름의 기준(전집 및 평전/인문학/문학 전집/문학 단행본/과학·예술 등등)으로 분야를 매겨놓은 책장에 책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풍선이 부풀듯 공간과 서가가 늘어났으니, 그때는 정말 가지런히 정렬된 책등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좀 더 큰 집도, 두 배로 늘어난 서가도, 그 하나하나에 매겨놓은 각자의 역할도 소용이 없게 됐다. 분류 기준 자체는 그대로였지만 포화되는 책장이 생겨 2,3중으로 꽂히는 것은 물론이요 이웃 책장을 침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소설의 집'들은 애초에 인구밀도가 높았던 데다가 최근 1~2년간 소설이 도서 구매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급격히 늘어나 아우성을 지르고 있다. 서가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보여 달라는 요청에 그는 수십 권의 꽂혀 있고 눕혀 있는 책을 들어내고 구석에 박혀 있는 오에 겐자부로 전집을 보여주었는데, 이럴 때마다 "바깥쪽에 쌓아놓은 책도 안쓰럽고, 안에 있는 진짜 좋아하는 책들이 안 보이는 것도 안타까운" 것이 심정이다.
▲ 사진 9. 지금은 절판된 오에 겐자부로 전집은 도서출판 고려원의 야심작이었다. 1997년 고려원이 부도를 낸 배경에는 이 전집의 무리한 출간이 있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다. 금정연 씨는 이 전집이 더 이상 시장에 유통되지 않게 되고 나서야 오에 겐자부로에 빠졌는데, 뒤늦게,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중고 시장을 통하지 않고 전권을 사 모았다. 대형서점 앞에 펼쳐진 부도 난 출판사 책 할인 매대나 지방 터미널 근처 소형 서점의 구석서가에서 반품 못한 재고들을 우연히 만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채워 넣었던 것. 그래서 더 각별하다. 가장 좋아하는 <치료탑·치료탑 혹성> 내지에는 2006년 직접 받은 오에의 친필 사인도 있다. ⓒ프레시안(안은별) |
그는 지금 이 공간이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느낀다. 물론 책 때문에 움직일 공간이 부족한 것도 아니요, 넘쳐흘러 베란다로 옮겨 이슬을 맞게 할 정도도 아니다. 그러나 1년 전까지만 해도 불현듯 떠오른 책의 위치를 곧바로 찾아낼 수 있었지만, 요즘은 헤매고 있어 모종의 위기감이 생겼다. 또 '책은 구겨 넣더라도 책꽂이에 꽂아두어야 한다'는 작은 원칙도,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면 허물어지기 시작한 듯 보인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초조함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쌓여가는 게 너무 좋고 보기만 해도 흐뭇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음, 음, 하면서 갑갑해지기 시작하는 거죠. 정치적으로 올바른 비유 같지는 않지만 이를테면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는데, 그게 점점 더 큰 공간을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느끼는 갑갑함이랄까요. <길버트 그레이프>에 나오는 엄마처럼 말이죠. 그게 외적이고 물리적인 것도 있지만, 인생 전반을 생각하게 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어쩌다 서평가가 되어"버린 금정연 씨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을 사거나 끌어안고 사는 이유는 역설적이다. 첫 번째, 책을 "안 읽기 위해서" 산다. "도서관에서 빌리면 이래저래 품이 많이 들고 하나만 빌리기 뭐하니 괜히 다섯 권을 빌리잖아요. 2주 후에 반납해야 하는데, 그 안에 다 못 읽으면 기분이 좀 그래요. 그래서 안 읽고도 마음 편하기 위해 사는 거죠.(웃음)" 두 번째, 읽은 책은 읽었기 때문에 끌어안고 산다. "책을 치우려면 사실 다 읽은 걸 먼저 치우는 게 맞는데, 그게 안 되죠. 글을 쓰다 보면 인용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읽은 책만 인용할 수 있잖아요. 보면서 밑줄 긋고 메모해 놓은 게 제일 중요한 밑천이니."
그렇다. 밑천이다. 가끔 그는 '모든 책을 불태워버리고 싶다'는 말을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밑천이 사라지는 셈이니 다른 삶을 모색해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면 계속 동거해야 하는데, 책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책과 나의 거리가 점점 더 위험 수치에 오르고 있다. 그가 말하는 돌파구는 단 하나다. "돈을 많이 벌어서 큰 집으로 이사를 가서 책이 늘어나도 공간을 차지하는 비율을 낮아지게 하면 되죠. 가장 심플하고, 가장 어려운 해결법." 돈을 많이 벌려면, 밑천을 버릴 수야 없다. 그러니까 책 문제가 곧 삶 문제다. 아, 어쩌다 이렇게 되어….
▲ 사진 10. ⓒ프레시안(안은별) |
◆ 서가 정리의 팁
Q. 사실 관건은 공간의 너비 자체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통용될만한 서가 정리의 팁이 있다면요?
A. 책은 무조건 자기가 생각하기에 비슷한 것끼리 놓아야죠. 각자 다를 텐데 정신의 구조랄지 흐름이랄지 그런 게 있잖아요. 그건 도서관이나 서점의 구분과는 확연히 다르겠죠. 정확하진 않더라도 뭔가가 떠오르면 어떤 책장을 보고 '아 맞다 이런 게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게끔 해서 자연스럽게 근처를 뒤질 수 있도록.
Q. 사실 정리의 시작은 버리는 것 아닐까요. 처분과 관련한 고민이 있다면? 그리고 지금 만약 방에 있는 책장에서 무조건 50권을 줄여야 한다면 무엇부터 내놓을 것 같아요?
A. 사실 지금의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책을 잘 버리지도, 팔지도 못해요. 요즘 고민은 쌓여가는 증정본 중 제가 읽을 가능성이 없는 것들이에요. 대부분 정리한 뒤 남은 책은 친구들 주는 편인데… '어? 야 이거… 음… 잘 볼게' 이러죠. (웃음)
어쨌든 지금 서가에서 무조건 50권을 줄여야 한다면, 융이나 니체, 프로이트 전집을 먼저 뺄 것 같아요. 가운데서 읽은 게 몇 권 있고, 좋았고, 그래서 전체 구색을 맞춰 놓은 건데 우선순위로 꼽은 이유는 앞으로 저 전집들을 진득하게 다 읽을 시간적 여유가 평생 가도 없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아무래도 소설, 읽었지만 감흥 없던 소설 순서로요. 아 맞다. 하루키가 다시 한 번 버려지겠죠? (웃음)
**김용언이 만난 사람들
'나만의' 컬렉션이 '당신들의' 컬렉션이 된다
: 서울 통의동 '더북소사이어티' 서점의 임경용 대표의 경우
임경용 대표의 책장을 들여다보기로 결정한 건 순전한 개인적 호기심 때문이었다.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의 개인 서가는 어떤 식으로 정리될까? 대형서점이야 분류별 코드와 마케팅 원칙과 발간 순서 등에 따라 복잡한 질서를 유지하며 정교한 책 정리를 요하는 게 당연하지만, 아티스트 북과 독립출판물, 예술 관련 서적들을 다루는 작은 규모의 서점에도 책을 진열하는 나름의 원칙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집에 돌아가서도 개인의 서가를 서점을 꾸밀 때만큼이나 강박적으로 정리하게 되진 않을까? 하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사정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 더북소사이어티 서점. ⓒ임경용 |
그의 경우, 일단 네 번의 변화에 맞춰 책장의 규모와 모양새, 보유한 장서의 수가 계속 변화했다. 영화 이론을 전공했던 학생 시절의 그는 주로 인문·철학·미학 종류의 책들을 모았다. 그러다가 현재 '더북소사이어티 서점'을 공동운영하는 구정연과 결혼했다. 미술이론을 전공한 구정연 대표의 경우 예술 분야와 문학 관련 책들을 다량 보유하고 있었는데, 결혼 이후 책장을 합치면서 양쪽 모두 겹치는 분야 없이 다양한 책을 바꿔 읽을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됐다. 뒤이어 예쁜 딸이 태어났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가를 위한 동화책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서점을 열었고, 서점 오픈 전 해외 예술 서점들을 돌아다니며 거의 2000만원 어치의 예술서를 모았다.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꾸준히 구입해왔던 책들과, 예술서 전문 서점을 오픈하면서 팔게 된 책들의 구분이 모호하다보니, 집에 있는 책들도 슬그머니 서점 책꽂이에 꽂히며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임경용 대표의 집과 서점의 경계는 아주 흐릿했다.
집 곳곳에 놓인 책장은 총 10개, 보유 장서 수량은 최대 2000권을 넘진 않는다고 했다. 그의 집에 꽂힌 책의 종류와 분포를 대략적으로 나눠본다면, 먼저 주방과 거실 사이의 'MUJI' 책장에 가장 중요한 책들이 모여 있다. 중요한 책이라 함은, ①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품절되거나 아예 절판되어 가격이 확 상승한 책들, ②내용도 물론 중요하지만 '객관적인 조건들'이 남다른 책들이다. ②번의 경우, 내용 면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명성'이 영향을 크게 끼치지 않는 편이다. 그는 황학동 시장에 자주 가는데, "외서 중에 특히 굉장히 이상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책들"을 모은다. "제본을 뜬 건지 실제 인쇄 자체가 그런 건지 구분이 안 가는" 책들인데, 한국에서는 절대 구현되거나 출간될 수 없는 희한한 재미를 담보하고 있다.
"오늘도 황학동에 갔었는데, 서재 만들기에 관한 1970년대 번역본을 샀어요. 한국에선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미국식 서재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책인데, 이게 꼭 우스꽝스럽지만은 않아요."
그리고 '객관적인 조건들'은 거칠게 번역하자면 만듦새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적으로 매우 뛰어난 책이거나, 일반적인 제작 과정과 다르게 책을 만드는 제작 과정 자체가 내용과 조응하는 양식을 띠고 있거나 한 책들을 뜻한다. 임경용 대표의 개인 컬렉션이기도 한 이 책들은 'MUJI' 책장 가장 위쪽에 모아두었다고 했다. 두 달 전부터 걷기 시작한 딸이 이젠 까치발을 들 줄 알기 때문에, 아가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보관해야만 한다.(상대적으로 책장 아래쪽은 아가가 내키는대로 뽑아서 마구 넘겨보더라도 덜 가슴이 아픈, 덜 중요한 책들의 집합소다) 그중 일부는 서점에도 보관되어 있다. 계산대 뒤의 책장이 그 개인 컬렉션인데, 서점에서 꽤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지만 판매용이 아니다. 그 컬렉션을 탐내는 손님들도 물론 많다. 서점에서 왜 책을 전부 팔지를 않는 거냐는 항의도 있었다고 했다.(하지만 언제 임 대표의 마음이 바뀌어서 컬렉션 중 일부가 슬그머니 매대로 옮겨갈지는 알 수 없다)
▲ 더북소사이어티 서점. ⓒ임경용 |
책장을 고를 때도 그리 까다롭게 굴진 않는데(대부분 '리바트' 유의 표준화된 책장들이다) 다만 거실 쪽에 놓인 책장만큼은 집 사이즈에 안 맞게 높다. 기성품 가구가 아니라 전시회에 맞춰 제작된 다음 행사가 끝난 뒤 갈 곳을 잃은 가구 중 하나를 들고 왔기 때문이다. 여기엔 책장 높이를 십분 활용하여 사이즈가 큰 책들을 모아 두었다. 레스페스트 잡지, 도록, 심포지엄 자료집 등이다.(개인적으로 책을 사이즈별로 나눠서 보관하는 게 편하다고 하는 이들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예술서들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하면서 나에게도 높은 책장이 필요해졌다. 예술서에 최적화된 책장을 그런 식으로도 구할 수 있다니 귀가 솔깃한 팁이었다. 다만…일반인이 구하기 쉬운지의 여부는 확언할 수 없다.)
아가 방의 책장에는 동화책들이, 이제는 창고용으로 규정되는 서재에는 학교 다닐 때 공부했던 책들과 CD와 DVD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나머지 책장들의 경우는 내용별로 정확하게 분류되어 있지 않은데, 사실 그의 컬렉션인 예술서들이 장르가 명쾌하게 구별되는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책을 두고 이것이 미술 쪽인지 건축 쪽인지 확정을 내리기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책들을 덩어리지어 분류하는 건, 순전히 컬렉터 개인의 당시 느낌과 주관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임경용 대표는 2010년 '더북소사이어티' 서점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책에 대한 강박증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모은 장서도 이제 남들에 비해 전혀 많지도 않고, 서점을 통해 대부분 다른 이들에게 배분되면서 책장 정리의 팁 같은 건 없어졌다고 섭외 초반부터 손사래를 쳤더랬다. 하지만 어쩌면 그 강박증이 사라졌다는 것 자체가 책장 정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엔 이건 절대 팔 수 없다고 악착같이 불들고 있던 책들이 많았는데, 예전엔 책을 사자마자 첫 장에 구입 날짜를 썼는데, 이젠 이 책을 언제 팔게 될지 모르니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메모도 안 하게 됐어요. 심지어 책을 보관하는 최적의 습도도 예민하게 따졌는데 이젠 뭐…. 아무래도 책을 팔다 보면 책을 읽을 시간도 많이 없고요.(웃음)"
하지만 개인용 컬렉션 중 일부를 서점에서 팔게 되면서, 그 책들이 '나한텐 필요없다'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다만 서점을 자주 찾는 손님들이 대개 건너건너 아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책을 팔 때도 완전히 없어지기보다 빌려주는 기분이 들어서 거부감이 크지 않다고 했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돈을 매개로 옮겨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웃음)" 이를테면 출판사에서 아예 800부밖에 찍지 않은 사진집 (Roma Publications 펴냄)의 경우 '더북소사이어티'에서 소량만 들여왔고 결국 마지막 남아있던 샘플마저 판매했는데, 나중에 정 그 책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다시 저한테 파실 분?'이라는 공고를 내볼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해본다면서, 그런 가능성이 아예 없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다고도 했다.
그는 '더북소사이어티'에서 판매하는 해외 서적 경우에는 특히 자신의 취향대로만 가는 '편협함'이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취향을 사랑하는 이들이 꾸준히 서점을 찾고 있기 때문에,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자신의 장서를 다른 이들에게 공개하고 심지어 원하는 이들에게 그걸 판매하면서 '취향의 집단(society)'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더북소사이어티' 서점에 한번 와보면 안다.
3.5평 공간, 효율적인 서재 만들기
: 서울 통의동 헌책방 '가가린'의 경우
2008년 헌책방 '가가린'의 시작은 단순했다. 통의동에 모여 있는 집단 중 비슷한 계통에 근무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디자인 작업과 출판을 병행하는 '워크룸', 갤러리 '팩토리', 카페 'MK2', 서승모 건축가. 그들의 사무실이 모여있는 통의동에 3평 반 정도의 작은 공간이 매물로 나왔을 때 그들은 일단 임대 계약부터 맺었고, 그 다음 여기서 뭘 해볼까를 고민했다. 그러다가 개인 책들을 모아 작은 도서관 형태를 꾸며볼까 하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결국 공간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돈을 모으기 위해 작은 위탁 판매 서점으로 형태가 갖춰지게 됐다.
공간을 꾸미기 위한 가구의 원칙은 단순했다. 일단 가격이 싸고 통일성을 줄 수 있어야 했다. 대부분의 기성품 가구는 세트로 나오기 때문에 공간 크기에 딱 맞출 수 없고 데드 스페이스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나무는 아무래도 여름철의 습기와 겨울철의 건조함이 신경 쓰이는 재료기도 하다. 그래서 철제 앵글 책장을 맞췄다. 화이트 톤의 작은 공간과도 잘 어울리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매우 튼튼하며 걸레질 등의 청소도 간편하다. '가가린'의 차승현 매니저는 "아무래도 공간을 만든 분들이 디자인 관련 종사자들이다보니 돈을 최소한으로 들이면서 멋있게 보일 수 있는 방식을 결정한 것 같다(웃음)"고 전했다.
▲ 천장 근처에 매달린 것처럼 보이는 '가가린' 서점의 앵글 선반. ⓒ프레시안(김용언) |
각 앵글들을 지지하는 나사들을 풀어 분리하여 철제 선반 사이의 높낮이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도 있고, 정형적인 책장의 모습 그대로 선반을 수평적으로만 두지 않아도 된다. 선반을 비스듬히 기울여 재조립함으로써 굳이 책을 꺼내지 않고도 앞표지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매대' 진열장으로 간편하게 변신 가능하다. 또한 애초에 공간 크기에 정확히 맞춰 책장 치수를 주문 제작하기 때문에, 벽에 따로 못을 박거나 할 필요 없이 그 철제 선반들끼리 꽉 맞물리게 조립함으로써 천정을 빙 둘러 앵글 선반을 짜맞추는 것도 가능하다.(벽에 못을 쉽게 박을 수 없는 전·월세 거주자 책벌레들에게는 상당히 유용한 정보다)
이를테면 한쪽 벽면 전체를 채우는 앵글 책장을 제작한다면, 다른 옷장 등이 필요없을 정도로 수납 공간은 충분히 확보된다. 가가린 서점은 앵글 책장에 책 뿐 아니라 위탁 판매하는 옷이나 가방, 신발, 핸드메이드 소품, CD와 LP 등도 차곡차곡 정리했다.(좀 보기 흉하다 싶은 부분에는 얇은 천을 가림막으로 활용해 걸어둘 수도 있다) 천장 꼭대기까지 닿는 책에 손이 안 닿을까봐 걱정된다고? 작은 사다리를 하나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비치해두면 해결된다.
▲ 앵글 책장은 '변형' 가능하다. ⓒ프레시안(김용언) |
앵글 책장들을 찬찬히 살펴보다보니, 각 칸마다 붙어있는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알파벳과 숫자로 조합된 암호문 같은 것이 휘갈겨 씌어 있었다. 사정인즉슨, 얼마 전 '가가린' 서점에서 열린 전시회 때문에 한동안 책들을 박스에 포장해 다른 곳으로 옮겨놨다고 했다. 다시 책들을 들여올 때 원래 그 자리에 배치하기 위해, 위치를 헛갈리지 않으려고 책장과 포장 박스 양쪽 모두에 스티커들을 순서대로 붙여놓았다고 했다.
단순하지만 꽤 좋은 팁이다. 책이 많은 이들은 이사 갈 때마다 지옥의 문턱을 넘나드는데, 일단은 이삿짐센터 직원들의 끝없는 불만을 웃음으로 무마시켜야 한다. 두 번째는 물리적인 이사를 마친 다음 기존의 순서와 상관없이 뒤죽박죽으로 꽂힌 책들과 책장들이 눈앞에 두둥 등장할 때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실 다른 가구 정리보다도 이 책장 정리가 가장 시간과 (육체적·정신적)노력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고통스런 작업이다. 책꽂이 칸마다 스티커를 붙여 '이 지점은 어떤 책들, 저 지점은 어떤 책들'을 대략적으로라도 구분할 수 있다면 정리가 훨씬 쉬워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수납장의 용도 변경. ⓒ프레시안(김용언) |
좁은 공간일수록 늘어나는 책의 수에 맞춰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어야 한다. '가가린'의 효율적인 공간 배치는 그런 점에서 책벌레들에게 좋은 아이디어들을 여럿 제공한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가장 힘을 덜 들이고, 거추장스러운 도구나 공사의 필요 없이 가구의 모양을 조금씩 바꾸면서 책의 들고남에 대처할 수 있는 방식은, 사실 너무 자연스럽게 이뤄지기 때문에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생경하고 급작스럽게 대대적이지 않다는 점이 바로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에서 가장 필요한 미덕이 아닌가. 공간 속에 녹아들며 자연스러운 일부, 흐름이 되는 미세한 변화들은, 바로 그처럼 좁은 평수를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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