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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한반도가 또 동아시아의 화근이 되면…

[동아시아를 묻다] 120년 전 동아시아의 자중지란을 떠올리며

성(盛)과 쇠(衰)

계사년, 한반도는 안녕하지 못했다. 동아시아도 태평과 성세를 누리지 못했다. 위아래로, 안팎으로 수상한 시절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과장 또한 사릴 것이다. 한말에 빗대어 망국을 우려하는 엄살과 엄포는 가려야 하겠다. 우국(憂國)이 지나치면, 시국(時局)을 놓친다. 호흡이 얕고 짧은 것이다. 급할수록 에둘러 갈 필요도 있다. 지구적 차원에서 2013년을 조망하고, 그 안에 동아시아를 자리매김할 일이다.

으뜸은 미국과 이란의 화해(의 출발)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래 30년 넘게 누적된 적대 관계를 해소하기 시작했다. 1972년의 미중 화해, 1989년의 미소 화해에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는 대사건이다. 유엔을 찾은 하산 로하니 대통령은 유럽 정상들과 회담하는 장면을 선보였다. 태반이 1979년 이후 처음이었다. 오바마 대통령과의 회동은 불발되었다. 하지만 귀국 직전 오바마가 직접 전화를 했다고 한다. 양국 정상의 통화 또한 34년만이었다.

미국-이란 화해의 기저에는 시리아 사태로 표출된 미국의 영향력 저하가 자리한다. 미국을 추종하던 영국마저 의회에서 공습안을 부결시키자 추동력을 잃은 것이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이 러시아의 푸틴이고, 이란의 로하니이다. 미국이 중동 문제를 지역 대국으로 아웃소싱 했음이 커다란 변화다.

로하니 대통령의 유엔 연설도 주목에 값한다. 모든 국가의 핵무기 폐기를 촉구했다. 노벨 평화상을 선납 받았던 오바마를 역이용하는 명민한 전략이다. 물론 이란이 직접적으로 겨냥한 국가는 이스라엘일 것이다. 때를 맞춤하여 9월 19일 <뉴욕타임스> 국제판에는 이스라엘의 핵 폐기를 요구하는 사설이 실렸다.

하도 신기하여 확인해 보니, 미국 내 종이 신문에는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징후적인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이란이 핵문제를 매듭짓고 국제 사회로 진입하면 할수록 중동 문제의 핵심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스라엘의 핵무기(및 화학 무기)와 서안 지구 점령이 그것이다. 미국의 태도 변화가 이스라엘로서도 당혹스럽다. 극성기를 지난 미국이 더 이상 미덥지 못한 것이다. 겉으로는 우락부락이지만, 속으로는 전전긍긍이다.

미국이 중동을 관리하는 또 다른 중추는 이집트였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이집트 지원은 보류 상태다. 미국을 대신하여 이집트를 경제적으로 지원한 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올해 7월의 쿠데타 또한 사우디와 무관치가 않다. 왕정 체제를 고수하는 사우디는 무슬림 형제단이 이끄는 이슬람형 민주주의의 확산을 몹시 꺼리고 있다.

이집트의 분란은 진행형이다. 반면 시리아의 내전은 수습 단계다. 러시아와 이란이 주도하여 지역 문제를 해결했다. 미국 패권의 쇠락이 세계의 불안정을 촉발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불어 지역 대국이 각자의 역할을 도맡는 다극화가 세계의 재안정화를 수반하고 있음 또한 객관적 현실이다.

군사 분야에서도 미국의 힘은 조용히 잠식되고 있다. 군사력만큼은 여전히 독보적인 최강이다. 그러나 군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 성능이 아니다. 정보력이다. 적대국의 내심을 파악하고 동향을 살펴 적기에 대응하는 것이 요체이다. 군사는 늘 사후적 집행일뿐이다. 더불어 정보력은 동맹국을 적절하게 통제하는 역량을 제공한다. 내 편과 네 편을 모두 관리할 수 있는 것이 정보의 힘이다.

2013년은 미국의 압도적인 정보력에 균열이 생긴 해로 기록될 것이다. 스노든의 미국 국가안보국(NSA) 폭로가 세기적인 사건인 까닭이다. 이로써 1990년대 이후 정보화 세계를 이끌었던 미국의 디지털 패권을 허무는 움직임이 격발되었다. 독일과 브라질은 통신 감청을 금지하는 국제 체제를 유엔 차원에서 도모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또한 새로운 통신 관리 체제 구상을 제출했다.

곧 미국을 경유하지 않는 새로운 인터넷 망도 등장한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중국 푸젠성의 산터우(汕頭), 인도 남부의 첸나이(Chennai), 남아공의 케이프타운 그리고 브라질의 포르탈레자(Fortaleza)를 잇는 해저 케이블이 완공 단계에 들어섰다. 이 새로운 네트워크의 노드에 해당하는 국가들이 각기 지역 대국임을 눈여겨 볼 일이다. 세계는 촘촘하게 연결되는 만큼이나 다극화되고 있다.

10월 1일도 기억해둘 만하다. 미국 연방 정부가 폐쇄되었다.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참석치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대조적으로 10월 1일은 중국의 건국 기념일이기도 했다. 국경절 행사를 마친 시진핑은 발리에서 열린 APEC의 주역 자리를 꿰찼다.

마침 개막일 무렵 푸틴은 61세 생일을 맞았다. 시진핑의 선창으로 축가를 불렀고, 인도네시아의 유도요노 대통령은 기타 반주를 넣었다. 브릭스와 비동맹 국가의 합작으로 즉흥적인(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벤트가 연출된 것이다. 미국이 만든 APEC은 미국 없이도 화기애애했다. 22세기의 역사가들은 2013년 10월 1일을 강조할 법하다. (내년 APEC은 베이징에서 열린다. 중화민국 총통 마잉지우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시진핑 간 '세기의 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

Renewal : 신세계와 구세계

APEC 불참과는 달리 미일 간의 2+2 회담은 예정대로 열렸다. 사실상 일본의 재무장을 묵인하는 회의였다. 그러나 실상을 살피면 묘하다. 미국 해병대가 오키나와에서 괌과 하와이로 이전하는 비용의 40%를 일본이 부담키로 했다. 300억 달러이다. 미일 동맹의 실제는 점진적인 미군 철수에 가깝다.

그리고 딱 그만큼 일본을 재무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후방 기지에서 전진 기지로의 탈바꿈이라 하겠다. 결국 일본은 '종속 국가'의 유지 및 심화를 위해 이중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끝끝내 중화 세계의 일원이 되지 못하고 쇄국을 고수했던 왕년의 막부 시절로 돌아가는 형세다.

중국은 방공 식별 구역 선포로 맞대응했다. 초장의 소란은 잠잠해진 듯하다. 전투기 출격으로 무력시위를 했던 미국부터 달라졌다. 자국의 민간 항공사들에 중국의 방공 식별 구역 설정을 따를 것을 권했다.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요는 시장의 힘이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의 항공 시장이 침체된 것과 대조적으로 중국은 국내선과 국제선을 막론하고 증대일로이다.

미국, 일본, 호주, 한국 등 아시아를 중시하는 항공사로서는 중국 시장에서 진검승부를 펼치지 않을 수 없다. 싱가포르항공과 호주의 콴타스항공 등은 처음부터 중국의 방공 식별 구역을 인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유나이티드, 델타, 아메리칸 등 중국 노선 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는 미국 항공사들 또한 중국 당국과 마찰을 빚지 않는 편이 유리하다.

마땅치 않다손 치더라도 용인하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다. 한국도 정부 차원에서 반대 입장을 천명했지만,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역시 비행 계획을 사전 통보키로 했다. 민간 영역과 생활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도저한 변화의 물결이다. 중원은 재차 세계 시장의 허브가 되고 있으며, 중국과의 경쟁은 군사가 아니라 경제에서 갈린다.

기실 방공 식별 구역보다 한층 중요했던 사안은 중국공산당 3중 전회였다. 경제의 시장화와 내수 확대에 방점을 찍었다. 도시의 한 자녀 정책 완화도 같은 맥락이다. 국내 시장을 키우겠다는 방침이다. 특히 경제 자유화의 일환으로 환율 시장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음이 백미이다. 위안화의 환율 변동 폭을 확대함으로써 위안화의 가치 절상을 용인키로 한 것이다.

위안화 가치 절하는 중국이 수출에 주력할 때 관건적이었다. 그러나 경제의 축이 내수로 전환하면 위안화 가치가 높을수록 유리하다. 수입품 가격이 내려가 소비를 진작한다. 위안화 국제화의 측면에서도 득이 됨은 당연지사다. 정작 곤혹스러운 것은 환율 개입을 성토해 왔던 미국이다. 중국이 환율 개입을 그만둔다는 것은 달러로 사들였던 미 국채 보유를 축소시킨다는 뜻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군사 기지로 중국을 포위하고 있다면, 중국은 국채 발행으로 연명하고 있는 미국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다.

지난 3개월 동남아를 지켜본 바, 중국식 표준화(Chinese standard)는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도로와 철도와 항로가 중원과 아세안을 종과 횡으로 엮어가고 있다. (단둥-신의주-평양-개성 고속철도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 위안화 국제화의 선도 지역이기도 하다. 시진핑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방문한 자리에서 '해양 실크로드' 구상을 제창했다. 중국과 아세안의 '황금시절'을 지나 '다이아몬드 시절'을 일구자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아세안 국가 전원의 최대 교역국이다. 10년 사이 무역 규모는 6배로, 상호 투자는 4배로 증가했다. 그리고 모두가 중국과의 교역에서 흑자를 누리고 있다. 중국의 경제 개혁이 순조롭게 진척될수록 14억의 수요 증진으로 아세안(및 세계)은 혜택을 입는다. 시장으로 긴밀하게 뒤얽힌 생활 세계이자 운명 공동체가 되고 있다.

전혀 낯선 모습만은 아니다. 15~18세기 '상업의 시대'를 구가했던 바닷길의 재림이다. 동남아는 19~20세기 식민주의/제국주의 이전의 초기 근대를 복원해간다. 신세계 또한 구세계의 갱신(renewal)에 가까울 법 하다.

▲ 청일 전쟁(1894년). ⓒwikipedia.org

왕도와 패도

그럼에도 작금은 미중 패권 교체기가 아니다. 미국에서 중국으로 패권이 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G2는 전형적인 미국발 담론이다. 허언이고 허상이다. 실상은 미국의 단일 패권이 복수의 지역 대국이 경합하는 다극화 세계로 전환하는 것에 가깝다. 동맹국을 다잡아 두려는 말놀음과 으름장에 휘둘려서는 곤란하겠다.

역시나 말을 바로잡아야 한다. 혹은 프레임을 고쳐야 한다. '가치 동맹'은 헛말이다. 이데올로기는 진즉에 종언을 고했다. 한-미-일을 엮는 본질은 '군사 동맹'이며 무(武)의 논리이다. 무단 통치의 지속이자 확대이다. 기껏 20세기형 지정학에 그친다. 지경학으로 돌파하고 지문학을 회복할 일이다.

패도의 시대를 끝내고 왕도의 세기를 개창하는 데 언어와 담론으로써 일조해야 한다. 그게 소프트 파워이고 스마트 파워이다. 중국이 천하를 운운하면 사방에서 눈을 흘긴다. 서방은 의구심을 품고, 동방도 석연치 못하다. 한국의 소임을 정명(正名)에 둘 만하다. 발화력을 갖추어야 한다.

한때 '균형자(balancer)'라는 말이 돌았다. 여전히 세력 균형을 중시하는 국제 관계적 발상과 문법에 그쳤다.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궁리하노라면 동아시아의 언어와 발상부터 복구해야 한다. 천하위공을 집합적 가치로 삼는 사해동포의 일원으로 미국 및 일본을 성심껏 껴안는 포용 정책부터 펼칠 일이다.

중국에 대한 가장 떳떳한 견제와 비판 또한 그들의 고전을 활용하는 편이 고수(高手)의 작법이다. 대국의 체면과 체통을 역이용하여 소국의 자주성과 자율성을 꾀하는 데 '사대'의 묘수(妙手)가 있었다. 그래서 '사소'의 존중도 취한 것이다. 군사 기지를 통한 포위술은 난국에나 통하는 하수(下手)이다.

정전 협정 60년, 여전히 한국은 '보통 국가'도, '정상 국가'도 아니다. 전시 작전권 등 주권의 핵심이 결여되어 있다. 일본도 한국도 온전한 독립 국가가 되지 못한 것이다. 북미 관계정상화에 앞서 한미, 미일부터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 반해 냉전기 '죽의 장막' 너머 중국과 아시아는 '중화 세계의 근대화'를 일구었다. 과거의 상하 관계를 청산하고 대소 관계로 재편되었다.

아무리 작은 소국도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지 않는다. 어느 나라에도 인민해방군이 주둔하지 않으며, 내정에도 직접 개입하지 못한다. 동아시아 천년사의 획기적인 변화이다. 이 엄청난 집합적 공진화로부터 일본과 한국은 멀찍이 소외되어 있던 것이다. 미국의 품 속에서 덩치만 웃자란 반세기의 경험이 커다란 질곡이 되고 있다.

정녕 20세기의 난국은 지났다. 천하는 영원한 유토피아다. 난국과 천하 사이에 소강(小康)이 있다. 작금은 소강과 천하 사이 어드메일 것이다. 재차 난국으로 떨어지지 않고, 천하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데 우리의 역할이 있다. 마침 2014년은 갑오년이다. 120년 전 조선의 자중지란이 청일 전쟁의 천하대란을 촉발했다. 그 패착의 대가를 분단이라는 형태로 여전히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남과 북이 재차 동아시아의 화근이 되는 노릇만은 기필코 삼갈 일이다. 동방예의지국에 충성할 것을 다짐하는 비상한 각오로 새해를 맞이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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