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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광해의 맨얼굴, 박정희인가 노무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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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2012 광해의 맨얼굴, 박정희인가 노무현인가?

[3인1책 전격수다] 오항녕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혼군(昏君), 판단이 흐린 임금. 조선 시대 내내 그렇게 평가되던 광해군이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실용적인 군주로 재평가되었다. 어떤 연유에서일까?

역사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프레임으로 거듭 수정되고 재평가될 수밖에 없지만, 기존의 왕 중 광해군만큼 격렬한 변화를 겪은 이도 또 없다.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펴냄)은 광해군에 얽힌 그 변화의 비밀을 추적하면서, 그의 "부활과 권세" 에 대한 비판이다. 다시 말해, 저자는 '광해군은 혼군이 맞다!'는 대담한 관점에서 "임금님은 벌거숭이!" 라고 외치고자 한다.

도서평론가 이권우(한양대 특임교수), 서평가 이현우(필명 '로쟈'), <프레시안> 기자 김용언 세 명이 다양한 주제의 책들을 선정하여 같이 읽고 토론하는 자리, '3인 1책 수다'에서 준비한 11월의 책은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이었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12월 5일 기준으로 현재까지 누적 관객수가 1218만2327명을 기록하며 역대 한국 영화 흥행 순위 4위를 기록 중인 영화 <광해>에 쏠린 관심과 맞물리며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책 수다는 인터넷 매체 (☞바로 가기)에 동시 게재된다. <편집자>

▲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용언, 이권우, 이현우. ⓒ프레시안(최형락)

김용언 : 이번 책 수다를 위해 뒤늦게 영화 <광해>를 보고 왔습니다. 잘 만들었고 재밌게 보긴 했는데, 좀 복잡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시다시피 암살 위협을 받던 광해군을 대신하여 왕과 똑같이 생긴 천민 하선이 15일 동안 왕의 대역을 하면서 영화가 진행되지요. 이 하선이라는 주인공에게 '당신도 우리와 같은 서민이니까 당신 같은 사람이 왕이 되면 우리의 고통을 알아줄 것'이라는 기대를 투영하는 식으로 흘러갑니다. 그럼으로써 하선이 원래 적통의 왕보다 더, 왕다운 왕이 된다는 컨셉트고요.

이 책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선 광해군이 대동법 시행에 있어 얼마나 소극적인지 잘 나오잖아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광해군은 대신들의 반대에 무기력합니다. 그런데 광해군이 주저하던 그 대동법을 하선이 직접 시행시켜버려요. 그리고 명나라에 군대를 보내되 후금에도 따로 조서를 보내어 우리는 너희와 싸우고 싶지 않으니 잘해보자는 식으로, 광해군의 업적으로 여겨지는 중립 외교를 하선이 시행하는 걸로 나옵니다.

이 같은 창작을 통해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광해군'의 어떤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결국 광해군의 개혁 군주로서의 이미지를 더 강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사극이라는 장르가 좀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또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람들이 기대했던 부분들, 밑바닥부터 올라가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그 입지전적 인물에게 사람들이 자신의 희망을 투영시켰던 기억이 한 편에 존재하고, 코앞으로 다가온 2012년 대선에서 '진심' '진정성' 등이 유행하는 것과도 묘하게 겹쳐지더라고요.

광해군이, 정확하게 말하면 광해군 대역이 자신과 같은 처지의 서민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정치적인 역학 관계를 물리치면서까지 진심을 강조하는 선정을 펼친다는 이 영화에 사람들이 그토록 호응하고 1000만 명 관객을 넘겼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한편, 학생 시절 국사 시간에 광해군의 실리 외교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배웠던 게 기억나는데요. 영화와 함께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을 읽으면서는, 광해가 '혼군'이 맞다는 걸 입증해보이기 위해 편향된 이데올로기를 걷고 사료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겠다는 각오와, 그에 걸맞게 서술되는 여러 가지 논거들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다만 광해군 시대의 중요한 업적이었을 허준의 <동의보감> 편찬이라든가, 명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광해군이 내린 실리적 결정들 같은 부분은 아예 서술되지 않거나 매우 축소시켜 이야기되고, 대신 조선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무리한 대궐 공사라든가 대동법 실시에 소극적이었던 면에 집중했다는 비판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어요. 기본적인 제 소감은 이 정도였고요, 두 분 선생님들께선 역사에 대해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공부를 하셨을 테니까 하실 말씀도 많을 것 같습니다. (웃음)


▲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오항녕 지음,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이현우 :
일반 독자로선 정확한 역사 자료에 대해 접근하게 되는 한계가 있으니, 학자들의 이런 저런 주장에 의견을 덧붙이긴 힘들 것 같습니다. 다만 저 역시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이 좀 편파적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 광해군에 대한 호의적인 역사 평가가 저자가 보기에 하나의 편향이었다면,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또 다른 편향에 기울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실리 외교, 요즘 식으로 하면 등거리 외교 같은 부분은 분명 광해군의 치적인데 언급을 거의 안 하지요. 명의 요구에 따라 후금에 출병했을 때에도 1만2000명 중 9000명이 궤멸했다면서, 실리 외교의 실상치고는 너무 참담하다는 정도의 언급만 나옵니다.

하지만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한길사 펴냄)를 보면, 8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 그때 전쟁이 별로 길게 이어지질 않았고, 후금 군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명나라는 딱히 손을 쓰지도 못한 전투였다고 합니다. 한쪽에선 8000명이 포로라고 하고 또 한쪽은 9000명이 궤멸했다고 하니 이 차이가 너무 커서 저로선 내막이 좀 궁금하더라고요.

김용언 기자가 좀 전에 얘기한 대로 <동의보감> 편찬도 조선 후기의 굉장히 중요한 치적이자 광해군의 의지가 많이 개입된 사업이었죠. 선조가 사망한 다음 어의였던 허준도 귀양을 가야만 했는데, 1년인가만에 돌아와서 <동의보감>을 편찬할 수 있도록 광해군이 여건을 만들어 줬거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일말의 얘기가 없어요. 저로서는 '광해군 바로 보기'라는 취지에 조금 더 부합하는 균형 잡힌 시각이 또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편향을 교정한다는 의미에서는 의의가 있지만 또 다른 편향 때문에 광해군에 대한 책이 한 권 나와야 하는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요.

이권우 : 오항녕 교수가 요즘 말로 '돌직구' 방식으로 책을 쓰셨죠. 광해군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부숴버리겠다고 분명히 밝힌 다음, 정말 반론만 제기하잖아요. 아예 이 책 자체가 '광해군에 대한 21세기 반정'이라는 표현도 책 뒤표지에 쓰여 있고요. 목표의식이 그런 측면에서 강했던 것 같아요. 책을 읽고 나면 광해군에 대한 기존의 긍정적인 편향을 반성하게 하는 데 분명 의미가 있고요.

사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을 좀더 폭넓게 읽으려면 두 권의 책이 더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즉 오항녕 교수의 전작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과 한명기 명지대학교 교수의 <광해군>(역사비평사 펴냄)이요. 먼저 <조선의 힘>은 조선이 500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인가, 그 문치주의를 가능케 했던 세 가지 힘, 즉 언관, 사관, 경연의 관점들을 중요하게 보지요. 그 관점이 오항녕 교수의 다음 책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서 광해라는 왕을 어떻게 평가하게 되는지 근거가 되고요. 그랬을 때 분명 광해를 구성하는 또 다른 요건들에 대한 내용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지적하신 내용들이 빠지게 된 거지요.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아무래도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염두에 두고 썼을 것 같은데요, 생각하는 것보단 두 책이 상당히 비슷합니다. 실리 외교 부분에서만 차이가 나요. <동의보감>에 대해서도, 오항녕 교수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았고 한명기 교수는 호의적인 평을 내린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명기 교수가 아주 중요하고 깊이 있게 다루진 않았어요.

대신 실리 외교 부분을 자세하게 다룹니다. 여기서 두 분의 생각이 갈려요. 곧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도 개정판이 나온다고 들었는데요, 분명 오항녕 교수의 책에 대한 반론이 쓰여 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어떻게 쓰실지 관심이 가요.

개인적으로 <조선의 힘>의 6장, '부활하는 광해'에 나오는 실리 외교 비판이 이번 책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로 나왔다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조선 문치주의를 연구한 책에서 등장한 하나의 챕터를 확장하여 단행본으로 만들면서, 기존 역사에 대한 편견 및 오해, 관념을 부숴버리겠다는 목적 의식을 보여준 게 아주 의미 있었던 것 같아요.

대동법 vs 궁궐 중축

김용언 :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을 읽다가 광해군이 폭군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다른 의미로서의 왕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칠게 표현했을 때 일반적으로 성군으로 꼽히는 정조나 세종대왕이 인문학적 왕이라면 광해군은 어떤 점에선 이과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궁궐 중축만 해도 물론 본인의 안전에 대한 신경증적인 집착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 외에도 궁궐을 짓는 것 자체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거든요. 중국에서 무슨 원료를 수입해라, 기와는 이런 걸 써라 하면서 본인이 하나하나 다 따지잖아요.

어떻게 보면 토건이나 건축, 혹은 나중에 나오는 외교적인 문제까지 광해가 관심을 갖는 건 문과적인 부분이 아니었던 것 같거든요.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조선이 요구했던 왕은 아니라도 그 자체가 좋은 장관 내지는 전문가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조선에는 문치주의라는 강고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경연을 거부하고 다른 분야에만 집중했던 이 사람이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제 인상 비평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선생님들께선 광해가 어떤 왕이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 이권우. ⓒ프레시안(최형락)
이권우 :
오항녕 교수는 경연의 힘을 중요시하지만 한명기 교수는 그다지 크게 다루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전작 <조선의 힘>에서 강조했던 조선 문치주의의 힘에 대한 연역적인 방법으로 광해군을 본 측면이 있다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경연에 대해선 <경연, 왕의 공부>(김태완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라는 책을 참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에는 기대승의 <논사록>과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가 번역되어 실려있는데요. 거기 묘사되는 경연의 장면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대학>의 몇 구절을 놓고 왕과 신하들이 함께 토론해요. 양쪽 다 고전에 대한 이해가 되게 높은데, 고전의 한 두 구절을 놓고 원뜻이 무엇이었는지, 중국 역사에서 어떻게 이해됐는지를 이야기하다가 곧바로 조선 현실로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경연은, 고전에 비추어봤을 때 오늘의 정치 현안을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놓고 벌이는 팽팽한 논쟁인 거죠. 임금은 제자가 되고 신하가 스승이 되면서 팽팽한 새로운 균형이 이뤄져요. 현실의 힘과 이상의 힘이 동시에 관철되면서 아주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이뤄진다는 거지요.

그런 걸 봤을 때 오항녕 교수의 관점에서 보자면, 설득당하고 설득하면서 거기서 도출되는 합의에 기초하여 통치하는 과정에서 경연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대체로 폭군들이 경연을 등한시 하죠. 연산군도 경연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결국 대리 출석시켰다는 거 아닙니까. (웃음) 대체로 경연하라고 요구하는 건 신하들이고요. 원활한 국정을 수행하기 위해 합의 시스템을 요구하는 거라고 전 느꼈어요. 그런 면에서 광해가 즉위 초반부터 왕권 위협 세력들에 대해서는 직접 친국을 가할 만큼 열성적이었는데 경연 자체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다는 비판에 대해선 의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현우 : 왕권 견제 장치로서 문치주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지요. 조선이 왕조 국가이긴 하지만 동시에 선비들이 지배했던 나라잖아요. 그게 권력의 전횡을 제한하는 효과도 가져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떤 개혁이든 지지부진하게 만들기도 했죠. 대표적인 예가 대동법일 텐데요.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 광해군이 대동법을 경기도 지역에 한정해서 시험적으로 시행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는데요. 결국 5년 만에 흐지부지되면서 결과는 성공적이지 않았고요.

광해군 자신이 여기 대해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유가 있어요. 광해군의 지지 세력들이 방납(防納 : 일정한 대가를 받고 생산되지 않는 공물을 대주는 전문 업종)과 관련된 폐단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뒤집어서 얘기하면 광해군의 실패는 광해군이 강력한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바꿔 말하면 왕권을 좌지우지하던 당대 권신들 때문이기도 하죠. 그 잘못을 광해군에게 다 전가시킬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광해군이 조선 왕들의 평균보다도 못한 왕이었는지도 의문이고요.

실리 외교도 그렇습니다. 파병할 때 후금에 비밀리에 전갈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 공식적인 외교 노선이 될 수 없었죠. 왜냐하면 대신들 대부분이 사대주의자였기 때문에요. 저는 그런 것을 좀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광해군은 우리가 배운 것만큼 개혁 군주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강력한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저자 오항녕 교수가 얘기했던 문치주의라는 조선의 힘이, 그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권우 : 문치주의 시스템 내에서는 상대방의 주도권을 정당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했는데, 어떻게 보면 광해군 시절에는 문치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옥사가 자주 발생했죠. 저는 문치주의 시스템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광해군과 그의 지지 기반인 북인들이 공동 책임을 질 필요는 있다는 제한적인 의미에서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현우 : 전 북인만의 책임이 아니라 선비 계급 자체에 문제 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과연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반정 이후 광해군 시절의 폐해가 없어졌는가? 그것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두 차례 호란을 불러오는 데 그쳤죠. 제가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 갖는 불만 중 하나는 그거에요. 광해군 이후에 대해 기록하지 않아요. 광해군 시절의 '잃어버린 15년' 때문에 조선 후기가 완전히 망가진 걸로만 나오잖아요. 이건 좀 과도한 인과관계 설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권우 : 음, 그 부분은 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것 같습니다.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봐도 당시 조선은 인조 반정 이후, 기미책(羈靡策)이라고 하죠, 명과 후금 모두 도발하지 않고 견제하는 외교 정책을 폈어요. 인조 때에도 배금을 한 건 아니라고, 책에 보면 "친명의 기치는 확실하게 유지되었"지만 "배금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 그들 역시 후금을 자극하여 사단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명시했어요. 사실 인조 부분은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선 광해군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정도의 가정은 가능하겠지요. 만일 그렇다면 광해군이 권력을 유지했다면 병자호란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이현우 : 적어도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 노력했지요. 당연히 후금은 조선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이중적인 플레이를 한다는 걸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인조 반정 이후 바로 명나라 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명백해지니까 그제서야 비로소 조선 침공의 명분을 찾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인조 얘기를 굳이 꺼내려던 건 아니고,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서 광해군의 잃어버린 15년을 바로잡은 게 인조라는 결론 때문에 의문이 들어서였습니다. 인조 시기를 과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건지 말이죠.

약한 왕, 광해

이권우 :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서는 광해군의 모든 실정의 근원은 토목 공사에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죠. 사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이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후금에 대한 군사적 견제를 준비했다면 군량미마저 빼돌려서 궁궐 공사하는데 치중해선 안 된다는 거잖아요. 한명기 교수 역시도 궁궐 공사가 전체 국가 운영에 짐이 됐다는 걸 인정하거든요.

▲ 이현우. ⓒ프레시안(최형락)
이현우 :
당시 상황상 궁궐 공사를 안 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다 불타거나 훼손된 상태였기 때문에 중축이나 개축은 필요했죠. 광해군이 자기 역량이나 국가 재정에 비해 과도하게 욕심을 낸 건 오판이었지만요. 왜란 이후에도 국가 기강을 잡고 대외적인 위신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사업이긴 했는데, 그걸 강력하게 추진할 만한 재정적 기반과 권력은 안 갖고 있었다는 거죠.

이권우 : 그래서 오항녕 교수는 대동법 시행이 우선적이어야 했다고 본 것 같습니다. 궁궐 공사와 대동법 시행 둘 중 대동법을 먼저 시행하여 민중들의 삶의 질을 높여줘야 하는 게 우선이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광해군이 대동법과 궁궐 중축 중 대동법을 먼저 시행하여 민심의 동요를 막고 민중의 삶의 질을 높였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겁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아버지 선조와 함께 권력을 분할해서 분조(分朝 : 제2의 정부)를 이끌었고, 그 와중에 노비들이 궁을 불태우고 사관들이 도망치며 실록을 불태우는 걸 봤어요. 내부 권력이 다 무너진 시대임을 경험했죠. 그랬을 때 본인이 왕이 됐을 때 민심의 규합을 이뤄냄으로써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걸 우선하지 않고 궁궐 공사라는 토목공사를 택했다는 것 자체는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

이현우 : 공과는 다 있는 건데, 그중에 과는 우리가 다 인정할 수 있지요. 실제 광해군은 성공한 군주가 아니라 실정하고 쫓겨난 군주였지만, 다만 그가 보여줬던 개혁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은 가능하잖아요. 광해군이 쫓겨난 이후에는 사실 더 나빠졌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다른 역사책에서 읽은 건데, 인조 반정 당시 천몇백 명 정도의 반군이 궁궐에 들어왔다는 것부터가 당시 왕권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보여주는 거죠.

이권우 : 한명기 교수 책에 그 부분은 잘 나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반군이 청와대 경호실장과 이미 내통하고 있었던 거예요. 반군한테 직접 궁궐 문을 열어준 거죠. 사실 반정의 소문은 날 대로 났고 되게 어설프게 진행되었는데도 광해군이 무력하게 무너지는 걸 보면, 왕권이 약화되었다기보다 그가 이미 민심에서 많이 이반되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현우 : 지금 책 수다 모임에선 광해군 시대만 다룰 수밖에 없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광해군에 대해 그 이전의 선조와 이후의 인조의 공과와 비교해야 광해군에 대한 균형잡힌 평가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그래야 광해군의 잘못이 어떻게 시정될 수 있었고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었는지, 그 다른 가능성이 보일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이 책에서 좀 아쉬워요. 인조 반정 이후에 모든 것이 바로 돌아갔다, 라고만 되어있는데 저희가 알고 있기로는 곧바로 또 다른 재난에 직면하게 되니까요.

김용언 : 전 이 책에서 선조 얘기가 좀 더 많이 나왔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진왜란 때 사관들이 실록을 불태웠기 때문에 이전 실록을 다시금 편찬하는 데에만 8년인가 걸렸다고 쓰여 있잖아요. 원래 자료들이 남아 있었다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선조에서 광해군으로 넘어오는 시기, 그 시기 부자 관계와 대신들 간의 알력 다툼이 좀 더 상세하게 조명되면서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역성 혁명 모의를 처단하는 데 시간을 오래 들였고 친국과 궁궐 중축에 집충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전제가 됐을 것 같습니다.

이권우 : 네. 광해군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면 선조와의 관계를 또 봐야 하죠. 오항녕 교수나 한명기 교수 모두 선조의 정치 스타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진 않는데, 선조는 우선 자기보다 뛰어난 인간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 같아요. 이순신 장군이 실은 자살한 거라는 의혹이 있잖아요.

종전 이후 이순신 장군이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을 텐데, 선조가 결코 그걸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라는 거죠. 전쟁 와중에도 엄청나게 많은 군사적인 공을 이룬 사람들을 견제했던 게 선조니까. 그런 가운데 전선을 뛰어다니며 민중들과 직접 소통하고 군사를 통솔했던 아들 광해군에 대한 불안과 견제도 분명 있었을 것이며, 아버지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압박감에 광해군이 시달렸을 거라는 추론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현우 : 전 이이화 선생님의 책을 참고했는데요. 임진왜란이라는 급박한 시기 때문에 일반적인 것보다 세자 책봉이 좀 빨라졌죠. 친형인 임해군은 이미 그전부터 난폭한 성정 때문에 군주로선 모자라다고 다들 인정했기 때문에 광해군이 세자가 된 건데, 다만 두 번째 정실부인인 인목대비 소생인 영창대군을 보고 나서 선조의 마음이 좀 흔들린 것 같습니다. 선조 본인도 후궁 소생이라는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신하들에게 은근히 운을 떼는 거죠. 신하들은 광해군 파와 영창대군 파로 갈립니다. 문제는 영창대군이 세 살밖에 안되었을 때 선조가 급사했다는 점이고요. 그런 상황에서 대세론 때문에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지만 위태로운 위치를 계속 자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선조 때부터 정통에 대한 콤플렉스가 광해군 때에도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김용언 : 역사책을 읽다보면 신기한 게, 조선의 모든 왕들이 너무 힘들게 왕위에 오르지 않습니까. (웃음) 모두의 호평과 축복 하에 순조롭게 왕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다들 너무 힘든 권력 투쟁 끝에 거머쥡니다. 선왕과의 관계도 거기 큰 비중을 차지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나 세조처럼 엄청난 콤플렉스와 힘든 권력 투쟁 끝에 왕위에 올라 오랜 세월 동안 그 왕권을 유지할 수 있던 사람들을 보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오랜 세월 어떻게 자기 권력 기반을 유지했을지, 그들의 힘은 어디에 기원하는지, 광해군은 왜 그렇게 못한 건지, 그들 사이의 차이점이 뭔지 궁금해집니다.

이권우 : 전 광해군의 통치 기반이 약했냐는 질문에는 좀 부정적입니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정인홍을 필두로 북인 세력이 형성되었고, 그 이후에도 정인홍은 막강한 이데올로그 역할을 했죠. 남명 조식의 제자로서 정인홍이 도덕성과 지식의 면에서 막강한 권세를 누렸고요. 광해군의 궁궐 공사에도 많은 저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처리할 수 있었던 건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정인홍도 결국 낙향하게 되지만요.

▲ 김용언. ⓒ프레시안(최형락)
이현우 :
하지만 북인이라는 지지 세력 기반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왕이 그 신하들에게 좌우되는 것 아닌가요? 권력 기반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군주 자신의 권력이 아니었다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례 중 하나가 정인홍의 회퇴변척(晦退辨斥), 즉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다섯명의 학자들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려는 오현종사(五賢從祀)가 추진될 때 정인홍이 스승 조식의 이해관계를 위해 이언적과 이황을 이 목록에서 빼려고 시도한 사건이 있었죠. 말하자면 광해군은 이런 순간 막후 실력자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의중을 살펴야 했던 겁니다. 좋게 포장하면 이 상황이 민주주의입니다. 독단적으로 결단하지 않고 합의에 따라야 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왕이 결정할 수 없는 것, 자기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대신들이 그렇게 원한다면 그 의중을 꺾지 못한다는 거죠.

이권우 : 지금 말씀하시는 부분이 광해군의 통치에 한정된 건가요, 아니면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점을 지적하는 건가요?

이현우 : 일반적인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문치주의가 조선의 힘이라고 애기하지만, 조선 왕의 힘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 '조선 선비의 힘'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선비들이 좌우했던 나라, 또 그들의 부정적인 면 때문에 망한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권우 : 이건 굉장히 논란이 될 만한 지적인데요. (웃음) 붕당 정치가 특정 집단의 권력을 좇는 이익 집단 무리로 볼 거냐, 혹은 분명한 자기 철학을 바탕으로 그 뜻을 현실 정치에 관철하려 경쟁하는 집단이냐는 다르게 볼 수 있는 부분 같습니다.

하지만 대동법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아까 이현우 선생님은 신하들이 임금의 개혁 의지를 꺾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대동법 경우에는 오히려 신하들이 더 강력하게 요청한 걸로 나와 있잖아요? 물론 북인 세력이나 왕조 세력이 방납을 통한 기득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존재했지만,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던 구신들이 계속 대동법을 지지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대동법보다는 궁궐 토목 공사에 우선을 뒀지요.

이현우 : 임진왜란 이후에도 군역 개혁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잖아요. 일단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병력을 확충하려면 양반들이 군역을 지거나 아니면 노비들이 평민으로 풀려나 병역을 져야 했는데 두 가지 모두 기득권층의 반대 때문에 무산됐죠. 우리가 전혀 갖고 있지 못한 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문치주의라고 하지만, 자기들의 특권만 챙기는 문치주의였죠.

왜란으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못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광해군의 실정 때문에 15년을 잃어버린 게 아닙니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 보면 "그 15년을 잃지 않았다면 (…) 사림의 헌신적인 리더십과 인민들의 발랄한 생활력이 만나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문화를 아름답게 꽃피웠을 것이다. 광해군 때 잃어버린 15년의 나라 꼴을 회복하는 데, 침략 전쟁 두 번을 포함하여 인조, 효종 연간 30년 이상이 걸렸다"라고 하는데, 전 이해가 안 갑니다. 광해군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다 광해군 책임이라고 하는 건 편파적인 것 같아요.

역사관 논쟁은 진행형

이현우 : 서문에서 오항녕 교수는 광해군이 개혁 군주로 재평가받기 시작한 게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거기서부터 '새로운 왜곡의 시작'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요.

이권우 : 아, 그 부분은 한명기 교수의 책과 함께 고민할 부분 같습니다. 한 교수도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높이 평가하되 자신의 결론이 식민사학자 이나바와 일치한다는 것을 경계해요. 이나바의 광해군 평가가, 조선과 만주족의 연합을 염두에 둔 가치 평가가 개입됐다고 보는 입장이었거든요.

이현우 : 그렇게 될 소지가 있음을 경계했다는 건데, 전 식민사관을 경계하면서 오히려 거기 붙들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본 학자가 제대로 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이러이러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일본 학자의 평가가 틀렸다고 주장하면 되는 것인데, 다만 일본학자가 주장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개혁 군주로 재평가하는 게 식민사관에 종속된다고만 볼 순 없을 것 같습니다만.

이권우 : 한명기 교수가 반론을 제기한다면 이 부분을 가장 먼저 얘기하지 않을까 싶어요. 본인이 자신의 결론이 이나바의 결론과 닮았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솔직하게 토로한 바 있으니까요.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앞부분에도 사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굉장히 논쟁적이면서, 한국 역사학자가 당연히 고민할 부분이 잘 드러나 있어요.

▲ 영화 <광해> 중 한 장면. ⓒ리얼라이즈픽쳐스

이현우 : 그 동안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몇 가지 있었죠. 그중 하나가 자본주의 맹아론입니다. 이미 영정조 시대부터 자본주의의 맹아가 조선에 존재했고, 일본의 지배를 받지 않더라도 자생적인 근대로 접어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오항녕 교수는 그것과도 좀 다른 관점에서 근대주의 자체를 보편적 척도로 인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 안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없었더라도 그것 때문에 자격지심을 가질 필요 없다, 조선 문명에 대해 충분히 호의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만큼 괜찮은 문명이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고 읽힙니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망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집이 도둑맞았을 때 주인을 탓할 수 없고 도둑이 나쁜 놈이라는 생각에는 근거가 약한 것 같아요. 임진왜란은 일본의 잘못이고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잘못이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조선의 잘못은 전혀 없는 걸까요?

이권우 : <조선의 힘>에서 오항녕 교수는 그렇게 말하진 않습니다. 모든 체제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생성하고 언젠가 소멸할 수밖에 없는데, 조선 같은 경우 몰락 과정에서 자연사가 아니라 사고사를 당했다고 보는 쪽이 더 맞다고 하지요. 조선은 이미 내적으로 붕괴하고 있었는데, 제국주의의 습격으로 더 시기가 앞당겨진 거라고요.

이현우 : 역사라는 게 비교 평가하려면 보편적인 척도와 관점이 필요한데, 저자의 관점, 그러니까 근대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과연 일관된 척도가 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선 사회의 특수성에 대한 설명으로는 가능하겠지만요. 조선이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제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저자는 당시 사대주의, 즉 조선 선비들의 친명 정책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보지만 실리 외교에 대해서는 기회주의적인 외교로, 명분을 잃은 외교로 평가절하합니다.

저자는 궁궐 중축이 국가 재정에 비해 무리하게 추진한 사업이었고 중요한 실정 중 하나였다고, 현실 감각이 없었다고 지적하죠. 대륙에 새롭게 부상하는 세력이 후금이고, 명은 쇠퇴하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현실 판단이었는데 결국 이 판단을 그르쳐서 조선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됩니다. 광해군이 궁궐 중축을 한 게 판단 착오였다면, 세력 판도를 잘못 읽은 책임 소재에 대해서도 밝혀야 하지 않을까요.

이권우 : 일방적인 친명이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에 두각을 드러낸 거잖아요? 임진왜란 때 명이 파병을 했기 때문에 우리도 그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게 강해지는 거죠. 그전에는 오로지 명나라만을 좇는다는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아요. 지금의 우리와 비슷하죠. 한미관계가 이렇게까지 종속적이지 않았는데 한국전쟁 이후 바뀐 것처럼요.

이현우 : 하지만 명나라 파병은 조선에 폐도 많이 끼쳤습니다. 1만 명 군대가 숙소를 마련해라, 식량을 내놔라 하면서 피해를 입혔는데 이 책에는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이권우 : 돌직구라니까. (웃음) 광해군에 대한 지나친 긍정적 평가에 대해서 일관되게 반론을 제기하는 거죠.

광해군, 현재 한국을 비추는 거울

김용언 : 경연이 중국의 고전에서 시작하여 조선의 현실로 넘어왔던 것처럼,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책 수다도 끝맺음을 현실에 비추어보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워낙 정치적인 계절이다보니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드셨을 것 같은데요.

이현우 : <광해> 영화 자체가 대선을 염두에 두고 개봉했죠?

김용언 : 그런 면이 있지요. 시나리오 작가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오마주를 인정했고요.

이현우 : 약한 권력의 반대편에 대한 요구가 계속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던 존재, 강력한 군주요. 정조를 비롯해 뭔가 개혁을 하려던 군주들의 공통점은 강한 왕권을 갖고자 했다는 점이죠. 조선의 시스템에서는 쉽지 않았습니다. 가까이에선 노무현 대통령만 해도 약한 모습을 보였잖아요. 여대야소의 상황에서 개혁 입법을 끝까지 추진하지 못했던 한계가 있었고, 거기 대한 실망도 컸던 것 같습니다. 거꾸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나 이명박 신드롬도 근거가 거기 있는 것 같아요. 가시적인 뭔가를 해냈고 보여줬다는 거요. 우리에게 결여되어있던 강한 권력에 대한 욕망이 이번 대선에서 어떻게 귀결될지 궁금합니다.

이권우 : 내치에 기반을 두지 않은 외치가 가능할까요? 국제 관계의 역학을 잘 활용하려면 국민적 지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자의 광해군에 대한 문제의식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 같은데요. 어려운 시대에 토목 공사를 해서 민중의 삶을 얼마나 어렵게 했는지에 관한 도덕적 회의, 말하자면 군량미를 유용하고 세금을 올리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무슨 실리 외교냐, 어떻게 후금을 견제하겠냐라고 단언하는 거거든요. 그런 측면에서는 충분히 저자의 관점을 수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실리 외교만으로는 위기를 벗어나기 쉽지 않다, 민중의 삶의 질을 높일 때 거기서 규합된 힘이 외교 문제에서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내재적인 힘이 될 것 같다는 거죠. 저자의 이런 문제의식이 이번 대선을 통해 고민되면 좋겠습니다.

김용언 : 저도 이현우 선생님과 좀 비슷한 생각인데요. 영화 <광해>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한국에서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좋은 왕'을 뽑는 개념에 그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정치계가 아무리 후지고 천박하다 하더라도 몇십 년 동안 이어진 나름의 시스템과 역학 관계가 있는데, 마치 우리 마음을 알아주는 좋은 대통령 하나 뽑으면 모든 게 좋아질 것이며 잘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여전히 압도적인 것 같아요. 오항녕 교수의 책에서 왕과 신하와의 의사소통이 이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국가의 전체 방향이 얼마나 흔들릴 수 있는지 선명하게 예시되는데요. 지금의 한국에서도 '한 명의 좋은 대통령'만으로 모든 것이 잘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습니다.

이현우 : 이해할 만한 점이긴 해요. 광해군도 그렇고 정조도 그렇고, 조선 권력층의 중간, 가령 양반층의 자기 개혁을 통해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권력자 한 사람이 결단을 내려 변화를 가능케 하는 모델이 그나마 현실적이었으니까요.

김용언 : 게다가 그 드물었던 현실 개혁 시도가 항상 꺾였다는 좌절감 때문에 더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이권우 : 그런 의지를 특정 세력에 위임하면 안 되지요. 대의 민주주의인데, 대의를 하게끔 해야 하는 거잖아요. 요즘 새로운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젊은 학자들이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비전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잖아요. 전 직접 민주주의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진 않지만, 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대의가 제대로 작동하게끔 하는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는 측면에선 동의합니다.

한 나라는 공공의 것이며, 시민 스스로가 다양한 세력들, 특히 사회적 소수자들을 보호하는 대의가 이뤄지도록 시스템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봐요. 일반 대중들의 염원과 달리, 누가 대신해줄 수 없다는 걸 우리도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긴 시간 동안 대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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