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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 중독', '날씬 욕망' 벗어나는 길, 먼저 '절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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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성형 중독', '날씬 욕망' 벗어나는 길, 먼저 '절단'하라!

[내 몸은 '나'다] 정희진과 함께 읽는 <몸에 갇힌 사람들>

네모진 턱, 살짝 기미 낀 피부, 결코 미인이라 할 수 없는 한 여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앉는다.

조명이 켜지고, 화장 브러시나 머리빗을 쥔 손들이 그녀의 얼굴 주변을 빠르게 오간다. 작업은 화장을 넘어 '분장' 단계로 진입하고, 완벽한 모습이 만들어졌을 때 스틸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진다. 끝이 아니다.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 온 사진 속 얼굴은, 목이 길어지고 눈이 커지는 등 '포토샵'의 세례를 받는다. 이윽고 거리에 커다랗게 내걸린, 완전히 다른 모습의 그녀의 사진.

▲ 도브의 '리얼 뷰티 캠페인'의 일환인 CF 영상 '진화'. ⓒ프레시안
'진화'라는 제목의 이 84초짜리 동영상은 화장품, 샴푸 등을 판매하는 기업인 '도브'가 펼치는 '리얼 뷰티(real beauty)' 캠페인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이다. 동영상은 말미에, 직설적으로 "우리가 미인이라고 여기는 것은 왜곡된 것(No wonder our perception of beauty is distorted)"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도브는 천편일률적인 미의식에 변화를 주려는 시도들을 펼쳐 왔다.

허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녀들이 아닌 직업 모델들을 바라보며 닮고 싶다는 불가능한 욕망에 매달린다. 지난달 30일 저녁,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에 위치한 '이리 카페'에서 열린 한 강연에 앞서 이 영상이 상영됐다.이날 강연은 수지 오바크의 <몸에 갇힌 사람들>(창비 펴냄) 출간에 맞춰 진행된 행사다. 여성학자 정희진 씨가 강연자로, 이 책을 옮긴 김명남 씨가 사회자로 나섰다.

김명남 씨가 "솔직히 영상을 보고, '나도 저렇게 변신시켜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하자, 청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우리는, "왜곡된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광고의 의도대로 "모든 여성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못할까? <몸에 갇힌 사람들>의 독자는 이 광고를 보며 드는 모순된 감정을 똑같이 마주하게 된다.

몸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치유하자는 책의 목적과 내용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도, 덮는 순간 책을 읽으며 과자를 집어먹던 자신을 타박하며 무의미한 맨손 체조를 한다. "몸에 대한 상업적 착취와 신체적 다양성의 격감을 시급히 막"고, "우리와 아이들의 신체적 특징을 즐기도록 해야 한다"는 책의 주장에 박수를 치면서도, 그보다 '시급히' 뱃살과 팔뚝 살을 빼고 싶은 것이다.

'프레시안 books'는 두 시간 동안 진행된 정희진 씨의 강연과, 이어진 짤막한 대담을 지상 중계한다. 물론 이 글 속에도 결국 모순을 없앨 해결책은 없다. 그러나 다이어트와 성형을 넘어 내 '몸' 자체와 '정상성'이라는 관념에 대해서까지 깊이 성찰해 볼 수 있는 유효한 조언을 얻을 수 있다. <편집자>


다이어트와 성형 수술처럼 '사소한' 문제?

최근 '외모주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병원에서 나오던 길, 모 백화점 지하 식품 매장에 들렀다가 생긴 일이다.

치즈를 고르는데 유니폼을 차려입은 늘씬한 직원이 다가와서 "아니 손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전철 타고 왔다고 답했더니(일동 웃음), 그게 아니라 여기서 무엇을 하냐며 계속 쫓아다니는 거다. 분위기가 이상해졌고 다들 날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난 운동화에 청바지,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런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노숙자 내지는 잠재적인 도둑으로 간주된 것 같았다.

한번은 용산역에서 택시를 네 대나 내리 놓친 적이 있다. 택시 기사들이 멈추려다가 휙 지나가거나, '빈차'를 '예약'으로 바꾸는 등 날 태우지 않으려는 의도를 보이는 거다. 난 어리둥절했는데 내 친동생이 이렇게 해석했다. 당시 내가 엄청 큰 짐을 지고 있었고, 눈물까지 흘린 상태라 기사들이 나를 '자살 직전의 미친 중년 여자'로 보고 문제가 생길까봐 피한 거라고. (일동 웃음)

술, 담배와 함께 한국인이 소비에서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높은 분야가 화장품과 의류라고 한다. 외국에서 유학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수업 시간에 화장하고 오는 건 한국인밖에 없다.

이런 외모주의 이데올로기는 보수 진보건 좌파 우파건 아무 상관이 없다. 일례로 나는 지식인 연하는 남성을 만날 때 꼭 묻는 게 있다. "좋아하는 여성 배우는?". 대개 이영애, 김태희라고 답하는데, 그러면 그와는 다시 연락을 안 한다. (웃음) 해당 배우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으니, 오해 마시길. 다만 아무리 진보를 외치는 사람인들 '청담동 여성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다. (일동 웃음)

자기를 '진보'라 말하는 사람들 역시, 지나가는 사람의 외모에 대해 언급, 평가하고 모종의 계급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인권과 평화를 외치던 남성들이 여성의 외모를 기준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변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페미니스트,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에서도 옷을 허름하게 입거나 머리가 벗겨진 사람에 대한 편견들을 목격한다. 아니, 그분들은 오히려 더 기준이 더 까다롭다. (웃음)

이걸 경험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많이 했다. 평소 내가 하던 대로 해야 하느냐, 아니면 나도 '꾸며야' 하느냐. 또 누군가 내 외모를 깔볼 때, 입을 열 것인가 말 것인가. 참 힘든 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모주의 문제를 다룬 <몸에 갇힌 사람들>을 읽었다. 그런데 창비 같은 출판사나 페미니즘 진영이 이런 다이어트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가벼운 주제라고 욕을 먹는다. 난 그게 너무 기가 막히다.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다. 다이어트, 여성성 등 외모주의 문제가 북핵 문제보다 사소하거나 가볍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미모 문제가 남북 문제를 작동시키고 있기도 하다. '북한 미녀 응원단'에 대한 뜨거운 반응을 보라. 한국 남자들은 '빨갱이'든 간첩이든 절도범이든 '얼짱'이면 다 용서한다. 그토록 싫어하는 페미니스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보고, "사람들이 널 싫어하는 건 페미니즘을 공부해서가 아니다"라면서 "김태희처럼 생겨봐" 하고까지 말한다.

문제는 어떤 게 일상 담론이고 어떤 게 거대 담론인가가 아니라 그 두 차원이 어떤 식으로 작동을 하느냐다. 사상이라는 건 감정의 최고 형태다. 그게 제일 높고 좋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엑기스'의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남자가 어떤 여자 연예인을 좋아하는지를 통해 그 사람의 생각이 대충 판단이 된단 얘기다.

여성의 외모에 대한 우리의 감각, 감정이야말로 정치학의 '첨단'이라고 본다. 우리가 아는 사람을 만날 때건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건,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있을 때건 없을 때건, 먼저 성별과 나이를 보고, 그 다음엔 옷차림과 외모를 보고 자신의 태도를 결정한다. 이런 게 일종의 압축된 정치학이다.

어떤 사람의 외모를 보고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저절로 드는 감정을 직시해 보자. 이 문제는 가장 밑바닥의 성찰을 요구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여자로 분장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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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에 갇힌 사람들>(수지 오바크 지음, 김명남 옮김, 창비 펴냄). ⓒ창비
<몸에 갇힌 사람들>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을 두 차원으로 나누어 이야기해보려 한다. 하나는 젠더 문제, 또 하나는 자유 문제다.

먼저 젠더 문제.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지만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 저자는 외모주의를 다루면서 여성만 특별히 강조하는 게 아니라 그걸 인간 보편의 문제로 만들고 있다. 젠더 문제를 강조하지 않았다고 (책에 대해) 뭐라고 한다면, 그건 굉장히 촌스런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외모주의는 절대적으로 여성의 이슈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물론 남성들도 '식스 팩' 근육 어쩌고 하지만, 여러분 솔직히 식스 팩 있는 남자가 좋나, 돈이 많아서 내 미용을 후원할 수 있는 남자가 좋나. 남성들의 몸은 여성의 그것처럼 절대적이지 않다. 남성을 가리키는 표현 중에도 '초식남'과 '차도남'이 있지 않느냐고? 이건 젠더 표현이 아니라 계급 표현이라고 본다. 농촌 총각을 초식남이라고 하나? 초식남은 대도시(metropolis)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쉽게 얘기해 이렇다. 남성은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인 존재로 다뤄져 왔으므로 상대적으로 '몸'이 그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은 덜하다. 하지만 여성은 아직까지도 초역사적, 자연적, 생물학적 존재로 간주되기 때문에 몸이나 성(性)은 그 인간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니다. 세상이 변했다. 여성들도 사회적 존재로 여겨지지 않느냐"라고 하는데, 착각이다.

예전엔 (여성에게) 예쁘거나 똑똑하거나 둘 중 하나만을 요구했다면 지금은 두 가지를 다 요구하고 있다. 그걸 (여성이) 해방된 거라고들 착각하고 있는 거다.

일 혹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몸과 꾸미는 몸, 아름다운 몸은 결코 일치될 수 없다. 연예인처럼 예쁘기 위해선, 한두 시간이 아니라 하루 종일 미용에 몰두해야 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걸 달성하는, 소위 '알파 걸'이라는 변종들이 부모의 후원 아래 등장하기 시작한 거다. 이건 해방이 아니라 이중 삼중의 고통이 덮어 씌워진 거다.

여성이란 존재는 무조건 '외모'로 환원되기 때문에 나경원도 박근혜도 예뻐야 한다. 이건 남성이 여성을 무엇으로 보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오랫동안 성폭력 피해자, 가해자 상담을 했는데, 성폭력은 대부분이 근친 간, 아는 사람 간에 이루어진다. 많은 가해 남성들이 딸과 아버지, 조카와 삼촌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육체적 관계로 피해 여성을 대한다는 뜻이다.

외모주의는 여성의 '24시간' 이슈다. 물론 나에겐 한 2시간쯤 되는 이슈지만. (웃음) 남성들은 여성들의 미용 산업이 어떤 건지 상상도 못할 거다. 여름이면 왁싱을 해야 하고 굽 높은 킬 힐을 신기 위해 굽 낮은 플랫슈즈를 가방에 넣고 다니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여성이 한 번 집 밖으로 나오기 위해 어떤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지 상상해 보라. 그건, "여성으로 분장하는" 과정이다.

'체액을 통제하지 못하는' 보편적 인간들

그럼 이런 질문이 따라올 것이다. 누가 시켰냐고, 왜 사서 고생이냐고. 여기서 바로 강연 두 번째 주제인 '자유'와 이어질 수 있다. 이른바 '주체적 종속'의 문제다.

누군가 자기 머리통에 총구를 들이대며 "예뻐져라" 명령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다들 '초과 달성'을 하고 있지 않은가. 거식증에 걸리고, 구토하고, 30킬로그램이 된 채로 사망하고…. 외모에 있어서 자기만족이란 달성될 수 없는 목표다. 엄마가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딸은 부정한다. 예뻐지고 싶은 욕망, 자기 몸을 규율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어디까지 예뻐져야 한다는 것에 있어선 '끝'이 없다.

외모에 대한 강박, 개인이 알아서 제어해야 하는 문제일까? 나는 얼굴이 잘 붓기 때문에 강의하기 전날 밤 먹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강의 때문에 오히려 스트레스가 커져서 결국엔 마구 먹는다. 그러고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져 절망한다. 그런데 이는, 사회적으로 수많은 여성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다.

내가 양푼에 밥을 비벼먹고 아침에 좌절하는 이 상황을, 개인적인 문제로 봐야 하는가, 사회적인 문제로 봐야 하는가?

사람들은 인과관계식 사고에 익숙해서 늘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내달리는데, 다이어트 문제에 대한 답으론 주로 "나의 몸을 사랑하자",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자" 이런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난 도대체 내면이란 게 어디 있는 건지 모르겠다. 몸을 가르면 나오나? (웃음) 이런 말로 내가 밤에 새우깡 한 봉지를 입에 털어 넣는 일을 중단시킬 수 있을까?

수지 오바크는 몸의 변형에 특히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우리가 창조, 즉 조형하려는 몸은 안정된 몸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결국 결론도 몸에 대한 생각을 "우리가 깃들여 사는 장소"로 바꾸고, 몸을 사랑하자는 쪽으로 모아지는데, 나는 이 접근 방식의 경우 '다른 형태'의 몸 변형에 대한 시각과 성찰을 은폐시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가령 인권 문제로 접근했을 때 트랜스젠더는 어떻게 볼 것인가? 반론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이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스릴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로 '재현'과 관련한 것이 있다. 어떤 몸이 정상으로 재현되고 있느냐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체액과 외모'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존경하는 철학자 가운데 나카무라 유지로가 있는데, 그의 책에서 감동 받은 대목이 있다. 자신이 나이가 들면 자식들한테 부탁을 해서 치매에 걸린 모습, 침 흘리는 모습 등을 촬영해 미디어에 내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그게 자기가 생각하는 마지막 운동이라면서. 이것도 인간의 모습이며, 오히려 더욱 보편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라고 한다.

플라톤은 인간임과 아님은 체액에서 구분된다고 했다. 체액을 통제할 수 있으면 인간이고 그게 아닌 사람은 인간 이하라고. 우리가 정상이라고 말하는, 지적이고 건강한 남성 외에 모든 사람은 오줌, 똥, 생리혈, 눈물 등 체액을 흘리고 다닌다. 다시 말해 소수자들-여성, 유아, 노인, 환자, 장애인-이란 체액 관리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사실 이 '소수자'가 전 국민의 90퍼센트 아닌가? 정우성과 현빈이 과연, 인간적의 보편적인 모습인가 묻는 것이다.

이런 '체액을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진짜 인간'으로 등장할 때, 사람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외모에 도취되어 있는 나의 10대 딸에게, "너도 엄마 나이 되면, 살찌고 배 나올 수 있다"고 얘기했더니 그 친구가 식탁에서 "으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더라. (일동 웃음) 사람들은 뚱뚱한 사람을 만나면 난리를 치고, 노인들의 섹스가 재현되어도 난리를 친다.

사실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도 보편적 인간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서 체액을 흘리며 힘겹게 생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극소수 사람들에 맞추어서 모든 정책이 정해지고, 개인들의 사고 역시 그것이 정상이라고 여겨지며 돌아간다. 같은 맥락에서 '양성 평등' 역시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대체 어떤 남자하고 평등하고 싶다는 얘기인가? 이명박, 오세훈? 아니면 신창원?

움직이는 구조에 어떻게 돌을 던질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 구조를 비판해야 하는가? 거기에도 역시 어려움이 있다. 다시 '자유'에 대해 고찰해 보도록 하자.

식민지 시대와 후기 식민지(신 식민지) 시대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과거엔 국가의 독립이 쟁취 대상이었는데, 지금은 그 국가가 바로 제국의 통치 단위가 되었다. 몸 문제도 이와 비슷하다. 예전엔 특정 투쟁 대상으로부터 자유를 갖고 오는 것이 목표였다. 아버지건 국가건 학교건, 그것들로부터 독립하면서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 진보적인 의미를 가졌다.

그런데 지금 이런 자유를 얘기하면 웃기게 된다. 한번 보자. 과거 개인의 몸은 국가가 억압, 통제, 간섭하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이 국가가 권력을 행사하는 장이라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통치 영역으로 이동해 오면서, 오히려 무기력한 개인들이 권력을 가장 많이 행사할 수 있는 장소가 되고 말았다. 자기 몸을 예쁘게 하는 것에 대해, 누구도 지배 체제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구조와 개인의 이분법이 깨진 거다.

다시 말해, 예전의 국가 권력은 국가보안법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지금 국가가 사람을 다스리는 방식은, 그저 내버려 두는 것이다. 국가는 사실 우리한테 관심이 없다. 이제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명확한 지배 전략이 됐다. 스스로 개별적인 통치가 가능한 사회로의 변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즉 더 이상, 개인과 구조라는 이분 구도로 다이어트를 사고할 수 없는 것이다. '가부장제나 외모 지상주의, 자본주의라는 구조에 개인이 동의 혹은 저항해야 한다' 이런 접근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대한 뷰티 산업 탓이다? 아니, 만일 뷰티 산업이 망하면 아마 사람들은 돈 모아서 화장품 회사를 세울 것이다.

물론 구조를 아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그게 가장 큰 전제이지만,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여러분의 감정-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성 역시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외모를 봤을 때 느끼는 감정, 거기가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외모 지상주의라는 구조에 대해 모든 개인이 똑같은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100명이라면 100가지 반응과 대처 전략이 있다. 각자가 다 다른 주체를 만들어 낸다. 구조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그걸 고정시켜서 비판하는 건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절단된 팔·다리가 아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아픔을 느끼는 증상인 '환각지(phantom limb)' 얘기가 나온다. 나는 '환상 사지' 혹은 '유령 사지'라고 번역하는데, 이 통증은 몸은 '실체'가 아니라 '기억'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몸은 기억이며, 어떤 역사를 기억(remember)하는 것은 사지(member)를 재(re)조합하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누군가 페미니스트가 되거나 환경주의자가 되는 것은 자기 몸에 굉장한 변화를 갖고 오는 행위이다. 그것은 한편, 굉장히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몸에 갇힌 사람들>은 그저 성형을 비판하는 책이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 시대 몸을 둘러싼 인식, 사유에 대한 얘기다. 모든 정치, 계급, 인종에 대한 이슈를 자기 몸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몸에 대한 입장은 '자원'에서 '행위성'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내 몸은 내 거다"가 아니라 내 몸은 그냥 나인 거다.

"내 몸은 내 거다"라는 말엔 이미 몸과 마음의 이분법이 있지 않나. 이 책은 몸의 정치학, 몸의 철학이라는 차원에서 각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김명남이 묻고 정희진이 답하다

김명남 : 좋은 강연이었다. 이 책의 내용을 다 다루면서도, 그 이상의 것을 언급했다. 구조와 개인을 나눠 구조만 반대하면 되느냐, 이런 문제제기를 했는데 사실 이 책은 구조를 성실하게 비판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수지 오바크는 결국 구조를 공략해야 하고 우리의 미의식을 다양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일환으로 뷰티 브랜드 도브의 '리얼 뷰티 캠페인' 등 미의식을 다양화 시킬 수 있는 시도들을 옹호한다. 그런 구조의 공략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인가?

정희진 : 필요하다, 안 필요하다의 차원이 아니라 구조는 공기와 같은 거다. 공기를 반대할 수는 없지 않나. 사람들이 나보고 가부장제에 불만 있으면 지구를 떠나라고 하는데, 그와 비슷한 거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으며 내·외부가 없기 때문에 비판, 공략 차원이 아니라 '개입'을 해야 한다고 본다.

아주 작은 예로는, 어떤 화장품을 선택하느냐도 개입이 될 수 있다. 여성단체 생활협동조합에서 파는 친환경 화장품을 쓰는데, 정말 질 좋고 부작용도 없고 매우 싸다. 도브의 프로젝트 역시 이와 같은 작은 개입, 실천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김명남 : 책에서 눈에 띈 것 중 하나는 저자가 몸의 불안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진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요즘 10대들이 지나치게 다이어트에 집착하는 이유를, 엄마부터가 그것을 열정적으로 실행하고 있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식욕 등 정상적인 생물학적 욕구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자녀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이를 키워 본 입장에서 그런 몸의 불안이 진짜 전해진다고 믿는가?


정희진 : 나는 일단 '어린 시절' 얘기 나오면 질색한다. 인간의 성격 형성에서 어린 시절의 경험이 결정적이라고 믿는 경향을 신뢰하지 않는다. 중산층이 많이 사는 경기도 ㅂ시에 강의를 갔더니 그런 '부모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더라. 사실 난 그 고리를 끊고 싶다. 프로이트가 (어린 시절의 경험을 강조한 것은) 성적인 부분을 설명하려고 했던 거지 육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이 중요할 수 있지만, 이후의 생애 주기에 영향을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다. 우리 집 삼남매가 같은 자궁에서 나왔단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반례는 수없이 많다.

그런 것보다 나와 내 엄마의 관계, 나와 지금 딸과의 관계의 다름에서 기인하는 게 더 크다고 본다. 어머니는 교사셨고 그 시대 통념에 맞춰 나를 통제하면서 키웠다. 지금 내 딸은 자기가 예뻐서 거기에 도취된 앤데 (웃음) 그 외모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 애 엄마인 나는 밤마다 폭식하지만. 가정의 영향보다 사회적 영향을 압도적으로 많이 받았다는 뜻이다. 가정에서 아무리 젠더 교육을 해도 유치원만 가도 아이들이 달라진다고 하지 않나.

김명남 : 나 역시 '옮긴이의 말'에서 불안정한 몸을 경험했다고 고백했고, 강사 역시 강연 중 폭식 등 중독 현상을 겪었다고 말했는데, 실제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한텐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이 띠지에는 "성형, 다이어트 전에 반드시 봐야 할 책"이라고 나와 있지만, 상당히 아이러니한 것은 책을 읽고 "그렇지" 하고 수긍하면서도 '나'의 다이어트는 멈추지 않는다는 거다. 이는 사교육이나 부동산을 대할 때 드러나는 모순된 태도와 매우 비슷한데, 그건 우리가 구조에 포섭되어서 어쩔 수 없는 건가.


정희진 :
<달빛 아래서의 만찬>(아니타 존스턴 지음, 노진선 옮김, 넥서스 펴냄)이란 좋은 책이 있는데 거기에 다이어트나 폭식은 다른 중독-마약, 니코틴 등-과 다르다는 설명이 나온다. 마약이나 알코올, 니코틴 중독은 신체 세포의 화학 성분에 대한 중독이지만, 폭식은 '음식' 중독이 아니라 '먹는 행위'에 대한 중독이라는 것이다. 사실 폭식하는 분들, 배불러도 먹고 맛없어도 먹지 않나.

스트레스가 생길 때 그 불만을 터트리는 방법이 타인을 향할 수도 있고 내 안을 향할 수도 있는데, 보통 여성은 자기 몸을 학대하는 방식으로 간다. 그걸 밖으로 돌려서-물론 반사회적인 방법을 찾지는 말고-기분 좋은 상상, 매력적인 사람과의 대화, 흥분되는 영화 등 먹는 행위보다 날 끌어당길 수 있는 행위를 찾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날씬해지고 싶은 욕망보다 더 섹시한 욕망과 쾌락을 찾으라는 거다. 쾌락이 쾌락만을 이길 수 있다. 다이어트를 부정하는 건 '정치적 올바름'으론 해결할 수 없다.

<127시간>이란 조난 영화가 있는데, 주인공이 등반 중 암벽에 팔이 짓눌려 고립된다. 주인공이 살아남으려면 팔을 잘라야 한다. 이것이 굉장히 은유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갱생하려면 무언가 '절단'이 필요하단 뜻이다. 갱생은 자기 몸, 혹은 그에 상응하는 어떤 것을 버릴 때에 가능하다.

가끔 놀랍게도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될 수 있어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때 "어떤 고통을 겪어야만 페미니즘 지식이 네 몸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지 아냐" 하고 되받는다. 가부장적 '공기'에 익숙해져 있으면 새로운 지식이 몸에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 스피박은 "배움은 특권을 상실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배움이 그런 과정일 때야말로, 모든 문장은 새로운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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