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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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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27>

견황후와 모황후, ‘삼국지’의 장희빈

***들어가는 글**

한나라 무제(武帝 : 한무제)는 한나라 황제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보위에 있었는데, 궁녀들은 무려 8천명에 이르렀고 61세 때에도 젊은 여인 첩여(婕妤 : 후궁의 직위) 조씨(趙氏) 여인을 총애하여 불릉(弗陵)이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한무제는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는 비결(秘訣)로 하늘의 일정(日精)과 해와 달의 정기(精氣)를 복용하였다고 하는데, 이를 위해 장안의 궁에 백량대(柏粱臺)를 세우고 그 위에 동인(銅人)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림 ①] 한무제의 능

백량대는 높이는 20장(丈), 구리기둥의 둘레는 10아름이고, 이 동인은 승로반(承露盤)이라는 쟁반을 손으로 받쳐 들어 삼경이 되면 북두칠성의 영이 서린 이슬을 받습니다. 황제는 이 이슬에다가 옥(玉)을 갈아서 가루를 내어 타서 마셨다고 합니다.

황제들의 삶은 항상 여인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여인들의 매력에 쉽게 빠지기도 하지만 이내 싫증을 내기도 합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남녀간의 가슴 뛰는 사랑이 지속되는 것은 18개월~30개월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남녀가 만난 지 2년 정도가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사랑의 감정에 관여하는 화학물질인 도파민과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 등이 더 이상 생성되지 않고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1999년 신디 하잔 교수(미국 코넬대)의 연구결과 남녀가 서로 얼굴을 익히고 데이트를 하고 육체적으로 결합해 아이를 낳는 과정은 18~30개월이면 끝나는데, 이 단계가 지나면 남녀는 더 이상 가슴이 뛴다거나 손에 땀이 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하잔 교수는 “애정이라는 것은 대뇌에서 도파민과 같은 화학물질이 분비되어 형성되는 일종의 생리적인 상태”이며 사귄 지 2년쯤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애정 효과가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문제지요. 여자는 남자의 아기를 낳았으니 더욱 그 남자에게 의지해야 하는데 남자의 사랑은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식기 시작하니까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즉 아이를 낳고 나면 애정 화학물질은 더 이상 생성되지 않고 30개월 정도가 지나면 남녀가 헤어지거나 헤어지지 않더라도 애정이 습관으로 변질된다는 것이죠. 이 조사는 남자가 여자에 비하여 쉽게 사랑에 빠지며 여성의 대뇌에 있어서 애정 화학물질의 생성이 남성에 비하여 느리고 둔하다고 합니다.

***(1) 업(業)의 시작 - 견황후, 그 후**

나관중 ‘삼국지’에는 매우 흥미로운 사랑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조가 원소를 정벌했을 때 조비는 원소의 집 후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울고 있는 두 여인을 보던 조비는 그 가운데 한 젊은 여인에 반하고 맙니다. 그 여인이 바로 원희의 아내 견씨(甄氏 : 182-221)였습니다. 조조가 견씨를 보더니 과연 며느릿감이라고 인정하여 조비는 이 여인을 아내로 삼아 허도로 돌아갑니다(나관중 ‘삼국지’ 33회).

[그림 ②] 마차에 탄 조비(드라마의 한 장면)

견씨는 이후 등장하지 않다가 조비가 죽을 무렵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견씨를 아내로 맞은 조비는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위에 오르는데 이 때 견씨는 황후가 됩니다. 그런데 조비는 날이 갈수록 곽귀비를 총애합니다. 곽귀비는 수작을 부려서 ‘견씨가 조비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다’고 모함합니다. 결국 조비는 견씨에게 사약을 내려서 죽게 하고 곽귀인을 황후로 삼습니다.(나관중 ‘삼국지’ 91회)

정사에는 곽귀인이 “지모와 술수가 있다(위서 : 후비전)”는 말만 있습니다. 견황후전에는 “곽후(郭后)ㆍ이귀인(李貴人)ㆍ음귀인(陰貴人) 등이 모두 황제의 사랑을 받자, 견씨는 실의에 잠겨서 황제를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이에 문제(조비)는 크게 노하여 견씨를 자진토록 하였다(위서 : 후비전)”라고 합니다.

견씨, 이 파란만장한 여인의 삶이 끝나는 순간입니다. 조비와 더불어 수많은 남성 독자 여러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던 여인의 삶이 조금은 어이없이 끝이 납니다. 이 때 견씨는 38세의 나이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견씨에 대해 잠깐 알아보고 지나갑시다. 견씨는 중산(中山) 무극(無極) 출신인데 빼어난 미모로 원래는 원소(袁紹)의 둘째 아들 원희(袁熙)의 아내였다가 원소가 멸망한 후 조비(曹丕)가 아내로 맞았습니다.

정사에 따르면 견씨는 명문가 후손으로 빼어난 자색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비범하였다고 합니다. 견씨는 세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는 불행을 겪기도 했지만, 합리적이며 총명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상당한 애정을 가진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나라 전체가 전란에 휩싸이고 기근이 들자 견씨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집에 쌓아둔 곡식을 향리에 풀어 칭송받기도 합니다.

견씨는 자신의 남편인 원희가 유주(幽州 : 현재의 베이징) 자사로 임지에 가 있을 때 시어미를 봉양하기 위해 업도에 남아 원소의 부인 유씨(劉氏)를 봉양하던 중 업도가 조조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조비를 만나 구애를 받았고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이 부분이 매우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견씨는 조비와 재혼하여 위(魏) 명제(明帝 : 조예)와 동향공주(東鄕公主)를 낳았습니다. 견씨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삼국지’ 시대에 여인들은 일종의 전리품(戰利品)으로 취급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승장(勝將)들은 패장(敗將)일지라도 명문의 귀족들의 부인에게는 분명한 예우를 해주는 것을 미덕(美德)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여인들이 전리품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사의 내용 가운데 여인들의 정조(情操)를 중시하는 많은 대목들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여러 남자를 거친 경우를 좋지 않게 생각한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따라서 견씨가 자신의 남편을 죽인 원수의 자식인 조비와 다시 결혼했다는 것은 당시로는 상당한 충격이었겠지요.

조비가 견씨를 선택했다는 것은 조비가 당시의 모든 편견과 질시를 무릎 쓸 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조비는 황위 계승권자인데 그의 아내가 황비가 되고 그들의 소생이 다시 황제가 된다는 것은 신하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도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견씨와 조비의 사랑은 당시로 보면 천하의 입에 오르내리는 참으로 ‘세기의 사랑’이었거나 ‘세기의 스캔들’이었을 것입니다.

원래 남자의 불같은 사랑이 식는 것이 결혼 후 3년이라고 합니다. 아마 조비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견씨는 내심 결혼 초기부터도 아마 전남편 원희에 대해 미안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때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희의 아들일 가능성이 많은 조예의 출생과 더불어 두고두고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제 12강의, 삼국지 최대의 미스터리 참고).

사실 조예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은 견씨와 조비뿐인데 초기에 조비는 견씨를 충분히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개의치 않았겠고 조비는 조조와 마찬가지로 원소 집안을 멸문시킨 것에 대하여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조와 원소의 관계로 볼 때 이들은 상당한 왕래가 있었을 것이고 이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을 가능성도 있죠.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견씨에 대한 조비의 사랑이 식어가면서 오히려 견씨를 싫어하는 것만큼 그의 맏아들인 조예(명제)에 대해서도 매우 싫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제 12강의, 삼국지 최대의 미스터리 참고).

결국 조비가 등극한 지 한 해 만인 221년 여름 조비는 견황후를 스스로 죽게 만들었고 그녀의 시신(屍身)은 업성에 매장합니다. 견황후의 일생은 황실에서 흔히 나타나는 대표적인 비극적 모델이죠. 견황후는 두 지아비를 섬긴 사람으로 그 이름도 후세에 영예롭게 전해지지 못하였습니다.

견황후의 사건을 두고 일부의 사람들은 조조와 그의 일가를 비난하는 좋은 구실로 삼았습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장 불명예스럽게 이 부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야담집 ‘세설신어’의 ‘혹닉편’(惑溺編)에 따르면 조조가 원소의 본거지인 업군(鄴郡)을 점령하자마자 총명하고 자색이 예쁜 원희(袁熙)의 처인 견씨를 불러오라고 독촉합니다. 그러자 좌우 신하들이 “오관중랑(五官中郞 : 조조의 아들 조비를 말함)께서 이미 데리고 가 버렸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조조는 “금년 적을 격파한 것은 바로 그 놈을 위한 것이었구먼!”이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이 대목은 조조의 중원정벌의 가치를 폄하하고 마치 미인을 취하기 위해 아들과 다투는 식으로 묘사한 부분으로써 조조에 대한 가장 악랄한 비방의 하나죠. 여기서 말하는 ‘혹닉편’(惑溺編)이란 사랑에 홀려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이것은 조조와 그의 가문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견씨를 이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죠. 조조는 자신의 오랜 라이벌이자 호형호제하던 원소의 며느리를 취할 만큼 분별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제17강의 참고).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번 살펴봐야 할 것은 견황후의 일생은 위나라의 멸망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살펴봅시다.

***(2) 황제의 죽음**

나관중 ‘삼국지’에 보면 다소 의아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지난 강의에서 원소의 손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조예 즉 위 명제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조예의 죽음을 보시죠.

어느 날 밤, 위황제 조예가 궁중에 있는데 3경 쯤 갑자기 음산한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등불이 꺼졌다. 그러자 죽은 모황후가 같이 죽음을 당한 수십 명의 궁녀들과 함께 어전에 나타나 ‘내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울었다. 이 때문에 조예는 그만 병이 나고 말았다(나관중 ‘삼국지’ 106회).

이후 조예는 시름시름 앓더니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납니다. 제위에 오른 지 13년 만에 36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죠. 그런데 위의 표현은 어떨까요? 마치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물론 정사에 기록된 바는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부분은 가장 사실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때로 소설가들은 행간의 의미나 사라진 내용을 복원하는 데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이 대목은 아마 조예의 병에 대한 예리한 해석일 수가 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가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예리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제 역사 속으로 먼 여행을 떠나도록 합시다.

조예의 죽음은 위나라의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조예가 10년을 더 살았으면 조상(曹爽)과 사마의(司馬懿)가 권력을 전횡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진(晋)나라가 건국될 일도 없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조예는 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 정사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정사를 보면 238년 12월에 “조예는 예상치 못한 질병으로 병상에 있었다(帝寢疾不豫 : 위서 명제기)”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불러들인 사람은 의원(醫員)들이 아니라 부춘 출신의 등녀[登女 : 일종의 무녀(巫女)인 듯]입니다. 정사에 조예는 이 여인에게 신비의 물을 주문합니다. 그러나 그 물의 효험이 없자 이 여인을 죽입니다(위서 :명제기).

즉 정사의 내용으로만 보면 조예는 지병(持病)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떤 마음의 병 때문인 듯합니다. 정사에는 조예의 죽음과 관련하여 모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에는 모황후가 조예의 죽음의 원인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물론 여러분들 가운데는 이 바로 앞 장인 나관중 ‘삼국지’ 105회에 있는 내용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 부분을 보시죠.

237년 조예는 크게 토목공사를 일으켜 여러 궁전을 지었다. … <중략> … 그리고 갖가지 기이한 꽃과 나무들을 심고 기이한 동물들로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이를 방림원(芳林園)이라고 했다. … <중략> … 조예는 곽부인과 함께 정원을 거닐고 있었는데 궁녀에게 이 사실을 모황후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 <중략> … 그러나 이 일을 모황후는 궁인을 통해 알게 되었고 다음날 조예를 만나자 따지기 시작했다. … <중략> … 조예는 당장 이를 알린 궁인들을 잡아 목 베어 죽이고 모황후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나관중 ‘삼국지’ 105회).

이 부분은 정사의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즉 정사에 따르면, 다음날 명제가 모황후를 만나니, 모황후는 “어제 북쪽 정원에서 연회를 열어 노시니 즐거웠겠군요?” 라고 하자 명제는 측근들이 이를 고해바친 것이라고 보고 10여명을 죽이고, 동시에 모황후에게도 자진(自盡)할 것을 명령합니다(위서 : 명도모황후전).

물론 조예는 모씨를 죽이고 난 뒤 큰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황실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도 한데 이 일로 조예가 마음의 병이 깊어 죽는다?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이 문제를 추적해 갑시다.

***(3) 모황후, ‘삼국지’의 장희빈**

‘삼국지’에 나타나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조예의 아내인 모황후(毛皇后 : ? - 237)가 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도 모황후에 대하여 “조예가 제위에 오르기 전, 즉 조예가 평원왕(平原王) 시절에 총애한 여인이었는데 조예가 즉위한 후 곽부인과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조예의 사랑을 잃었다.”라고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만으로 전반적인 상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일단 모황후라는 여자를 알아봅시다.

정사에 따르면 모황후는 하내(河內) 사람으로 미모가 뛰어나 조예가 평원왕으로 있을 때부터 총애하여 후에 조예가 보위에 오른 후 황후로 삼은 여인입니다.

모씨(毛氏)는 가난한 목수의 딸로 어린 나이 즉 위나라 문제(文帝 : 조비) 때 선발되어 동궁에 들어옵니다. 조예는 명문가의 우씨(虞氏)를 왕비로 맞이하였지만 조예는 모씨를 더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외로운 평원왕 조예는 자신의 고독과 고뇌를 위로해주는 모씨를 총애하여 항상 자신의 수레에다 태우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후 조비가 죽고 조예가 제위에 오르자 조예는 모씨를 귀빈(貴嬪)에 봉하고 우씨를 황후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씨는 이를 위로하는 태황태후인 변씨(황제의 할머니 : 조조의 아내)에게 울면서 다음과 같이 하소연합니다.

“태황태후 마마, 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조씨(曹氏)들은 미천한 출신으로 황후를 삼기를 좋아합니다. 그 동안 조씨들이 도리에 따라 사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황후는 궁전 내부의 일을, 황제는 궁궐 밖의 일을 관장하여 이 안팎이 서로 맞아야 하는 것인데 이번에 천자(天子 : 조예)께서는 또 도리와 법도에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황제가 되신 처음부터 이 같은 일을 하시니 어찌 그 끝이 좋겠습니까? 아마 나라가 망하여 사직(社稷)이 끊어지는 조짐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태황태후 변씨는 크게 분노합니다. 변씨 자신도 미천한 신분이었는데다, 이제 막 즉위한 손자에 대하여 사직이 망하느니 하는 대역무도한 말을 늘어놓았으니 변씨가 격분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그러나 어째 위나라의 장래에 대한 복선인 듯 들리기도 합니다). 결국 우씨는 쫓겨나서 업성의 궁전으로 돌아가고, 모씨는 조비가 즉위하던 해 황후에 올랐습니다(227). 이 때까지는 모씨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씨는 조예에게 있어서는 조강지처(糟糠之妻)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황태자가 무슨 어려움이 있어서 조강지처가 있겠느냐고 하실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조예의 삶은 참으로 위태로웠던 점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제12강의 [최대의 미스터리 : 원소 손자, 위황제 되다(?)]에서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조예는 그 아버지인 조비로부터 사랑을 받지도 못했고, 그 어머니는 조비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태였을 것입니다.

조예가 등극할 때까지 가장 큰 정신적인 버팀목이 된 여인이 바로 모황후인 듯합니다. 그래서 모황후가 신분이나 출신이 비천한데도 불구하고 조예는 등극한 후 모씨를 황후로 삼습니다. 그리고 모황후의 아버지인 모가(毛嘉)를 기도위에 임명하고 동생인 모증(毛曾)을 낭중에 임명합니다. 조예는 미천한 가문으로 수레를 만드는 목수였던 모씨 일가에게 대거 벼슬을 줍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고 남자의 사랑도 식어가 조예가 곽씨(郭氏)에게 빠지는 바람에 모씨는 외로운 밤을 보내야 합니다(조비와 조예가 조강지처를 죽이게 한 여인이 모두 곽씨라는 게 재미있네요). 특이한 것은 조예가 모씨를 대신하여 새로 가까이한 여자는 명문가의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중에서 자꾸 웃음거리가 되는 모씨 일족에 대한 반발은 아닐까요?

곽씨(郭氏 : 조예의 후비)는 서평군(西平郡) 출신으로 대대로 호족인 가문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 시대에 서평군에서 반란이 일어나 곽씨는 관노(官奴)가 되어 황궁으로 들어왔다가 조예의 총애를 받아 부인(夫人 : 후궁들의 지위)의 직위를 하사 받습니다.

곽씨는 용모와 자태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지성도 갖추어 날이 갈수록 조예는 미천한 가문 출신인 모황후를 멀리하게 됩니다. 조예는 재색을 겸비한 곽씨의 처소에 들어가면 여러 날을 나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서기 237년 음력 3월, 늦은 봄 조예는 많은 후궁들을 모두 모아놓고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서 연회를 베풀었지요. 조예는 술과 음악을 준비하여 방림원에서 흥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조예는 곽씨를 데리고 이들 후궁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희롱을 하면서 보내는데 이 사실을 안 모씨가 황제에게 무례하게 달려들자 조예는 천자에 대한 능멸의 죄목으로 모 황후에게 자진(自盡)할 것을 명합니다. 모황후가 인생을 마감하자 조예는 곽씨를 황후의 자리에 앉힙니다.

어떻습니까? 중국판 장희빈의 일생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녀의 일생은 조선의 장희빈과 큰 차이가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적 전개는 전혀 다릅니다. 장희빈의 남편인 숙종은 장희빈을 죽이고 아무 탈 없이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아 말년을 잘 보내고 정치도 잘 합니다. 그러나 조예는 숙종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고 위나라는 이제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림 ③] 서오능에 있는 장희빈의 초라한 묘소(홀로 쓸쓸히 떨어져 있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모씨가 조예의 어머니인 견씨의 삶과 거의 유사한 전철을 밟고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씨가 죽은 후 조예도 2년도 못되어 원인도 모를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죠. 참 이상하죠. 조예는 아마 스스로 가장 경멸했을 아버지(조비 : 위나라 문제)가 한 행동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 가슴 아프게 사랑한 첫사랑을 버리고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자신의 첫사랑을 냉정하게 죽이고 맙니다. 사람이 가진 성적인 욕망은 정말 끝없고 강렬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견씨와 모씨의 삶은 조예를 중심으로 많은 연결 고리들이 있습니다. 정사에 따르면 조예는 어머니 견씨를 항상 그리워했으며, 경우에 따라서 꿈속에 어머니를 보면 외가 식구들 가운데 어머니와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사람들을 더욱 우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위서 : 후비전). 그런데 여러 가지 점에서 모황후의 일생이 견황후와 유사하고 상황도 비슷한데다 모황후의 죽음에 조예가 직접 관계했기 때문에(조비가 견황후를 죽였듯이), 조예가 어떤 마음의 병(심인성 질환)에 걸리지는 않았을까요? 조예는 내성적이며 꼼꼼한 성격(위서 : 명제기 주석)이었죠.

조예의 경우는 죄의식이 병으로 전환되어 나타난 경우라고 볼 수는 있지 않을까요? 즉 심리적인 과중한 압박감(또는 죄책감)이 실제의 물리적인 병으로 전환되어 파멸에 이르는 경우는 많이 있으니까요. 현대의 심리학에서도 심리적인 스트레스와 신체적 질병 사이에 특정한 관계가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 때 사용하는 척도를 사회 재적응 평정척도(SRRS)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수치화한 것인데(예를 들면, 배우자의 사망은 100, 이혼 73, 가족의 사망 63 등으로 수치화), 이 생활 스트레스를 합한 값이 300 이상이면(가중치를 포함) 그 가운데 79% 정도가 신체적인 질병이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살펴보고 지나갑시다. 위나라는 조조를 비롯하여 조비, 조예에 이르기까지 그 황후의 신분이 매우 미천하였습니다. 조조(曹操)의 황후였던 변태후는 가기(歌妓) 출신이었고, 조비의 황후인 견씨(甄氏)는 원소의 며느리였던 사람(원희의 부인)으로 초혼(初婚)이 아니었고, 조예가 황후로 삼은 모씨(毛氏) 역시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웃음을 사는 일이 잦았습니다.

왕후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만큼 세력이 없다는 의미이므로 중앙 정부 내에서 인맥(human network)이 없으므로 정치세력화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죠. 사실 왕자가 신데렐라들을 선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정략적인 결혼을 피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고를 수 있고 여자 또한 오로지 황제에만 충성할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이것이 반드시 성공적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신분이 낮다는 것은 그만큼 상류사회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죠. 특히 미천한 신분에서 황후에 오른 사람들은 황제의 사랑이 식어가면서 극심한 좌절과 몰락을 밟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왜냐하면 이들은 여인으로서 투기(妬忌)를 잠재울 수 있도록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고 가문의 일원으로 황궁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 황궁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에 따른 책임감도 적기 때문이죠.

***(4) 위나라의 황혼 : 모황후의 죽음과 조예의 최후**

모황후가 죽은 후 조예는 더욱 우울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자신의 조강지처(糟糠之妻)를 죽인 것은 아버지였던 문제(조비)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꼴이었기 때문이죠.

조예의 어머니 견씨가 아버지인 조비에게 죽임을 당했고 조예는 그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는데, 그때 조예를 위로한 여자가 바로 모황후였지요. 당시 조예의 나이로 보면 모황후는 사실상 조예에게는 첫 여자였을 것이고, 그녀를 통하여 성(性)에 눈을 떴으며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인데, 이제 그 여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게 만들었던 것이죠.

물론 이것만이 조예를 죽음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조예의 죽음에는 두 가지 원인이 동시에 작용했을 것입니다. 하나는 간접적인 원인으로 어머니인 견황후의 죽음,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서의 사랑하던 자식의 병사(病死)와 모황후의 죽음이겠죠.

232년 조예의 아들 조은(曹殷)과 딸 조숙(曹淑)이 죽었습니다. 이것은 조예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조예로 봐서는 이 같은 슬럼프들을 이겨나갈 돌파구가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조예는 자신의 고독과 고뇌를 여인을 통해 해소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궁전을 짓는 데 몰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군주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아름다운 건축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죠.

한나라 이전만을 보면,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은 구슬로 궁실을 꾸미고 상아로 마루를 꾸몄으며,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은 궁전 누각을 옥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꾸미다가 사직을 망쳤다고 합니다. 초(楚)나라의 영왕(靈王)은 장화궁(章華宮)을 짓다가 재앙이 내려 몸에 화를 입었고,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위해 아방궁(阿房宮)을 지었지만 그 아들들은 모두 죽고 3세 황제인 자영(子嬰) 대에 이르러서 천하의 민심을 잃어 멸망하고 말았죠.

[그림④] 진시황의 기념관 전경(상)과 진시황릉의 내부모습(하) 및 진시황(오른쪽)

조예는 모황후가 자신에게 한 불경스러운 행동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겠지만, 모황후가 죽고 난 뒤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모황후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날로 커져갔을 것입니다. 조예는 모황후가 죽은 지 2년도 채 못 되어 죽고 맙니다. 아마 죽기 전까지 조예는 악몽에 시달렸을지도 모릅니다. 조예가 꿈속에서 본 것은 죽은 어머니와 죽은 아들과 딸, 모씨의 모습 들은 아니었을까요? 조예의 죽음으로 위나라의 황혼이 깊어갑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견황후와 모황후의 삶을 통해서 위나라 궁중여인들의 비극적인 일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의 삶이 천오백년 뒤 조선 숙종비 장희빈의 일생과도 흡사하여 놀라게 됩니다. 이 여인들의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맥베드’, ‘오셀로’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입니다. 그 동안 수많은 ‘삼국지’가 있었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만들어 세계 문화시장에 내놓지 않았는지가 궁금합니다. 이들 여인들의 삶을 보면서, 봉건 왕조의 내적 모순이 해결되지 않은 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국가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역사는 얼마든지 되풀이 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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