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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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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10>

조조(曹操), 모돈을 죽이다

***들어가는 글**

사마천‘사기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漢)나라의 사신이 흉노 황제의 궁에 와서 “흉노족은 노인을 천대한다”고 하자 흉노(대쥬신? 또는 몽골)의 대신인 중항열(中行說)이 꾸짖으며 “너희 놈들은 전쟁 가는 아들에게도 따뜻한 음식과 두꺼운 옷을 주지 않는 모양이지. 우리나라는 청년 전사(戰士)들의 나라야”라고 쏘아붙입니다.

다시 한나라 사신이 “흉노족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으니 이 무슨 해괴한 짓이요? 예의나 범절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나라군요”라고 하니 중항열이 “형수를 취하는 것은 우리가 유목민이니 같은 성씨(姓氏)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 우리는 좀 문란하다(사실 이것은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너희 놈들은 입만 뻥끗하면 예의, 예의하는데 그 예의 때문에 항상 상하(上下)가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쓸데없이 명품 옷이니 하여 극도의 사치를 부추기지 않냐? 또 성곽을 쌓아서 백성들을 늘 피로하게 하지.”

다시 한나라 사신이 뭐라고 중얼거리자 중항열이 신경질적으로 다음과 같이 한나라 사신의 입을 막지요.

“한나라 사신아, 너는 말이 참 많구나. 말이 많으면 별로 소용이 있는 말이 없는 법이지. 한나라가 우리나라에 보내게 되어있는 비단이나 솜, 쌀과 누룩 들은 정해진 수량대로만 보내면 될 일이다. 자네는 무슨 말이 그리도 많아?

너희 나라가 우리에게 보내는 공물(貢物)이 충분하다고만 한다면야 무슨 말이 더 이상 필요한가!

그러나 수량이 모자란다든지 조잡한 물건들을 보냈다든지 한다면 너희들이 추수할 때쯤에 가서 말을 몰아 작물들을 다 밟아버릴 것이니 그리 알아라.”

***(1) 조조, 실질적 중국 통일자(관도대전)**

사람들은 적벽대전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관도대전(官渡大戰 : 200년)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그 이유는 나관중 ‘삼국지’의 서술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적벽대전은 원인과 결과가 일목요연하게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서술되어 있지만 관도대전은 여기 저기 흩어져 매우 산만하게 묘사되어있기 때문에 이 전쟁이 정말로 중요한 것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죠.

관도대전은 원소의 근거지인 업도와 조조의 근거지인 허도(허창)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황하를 중심으로 조조군과 원소군이 치른 대혈전을 말합니다. 그리고 관도대전이 있었던 곳은 화북평원(華北平原) 지역으로 중국의 중심지에 해당합니다. 관도대전의 격전지는 낙양의 바로 동쪽 지역이었죠.

192년 4월, 동탁이 살해된 이후 제후들은 본격적으로 군비를 강화하고 군사체제를 정비하여 군벌화(軍閥化)되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군벌들은 많았지만 최대의 세력은 조조와 원소였고 이들은 천하의 자웅을 겨루기 위해 각기 중소 군벌들을 제압합니다. 조조는 원술과 여포 및 유비를 제압하고 원소는 공손찬을 제압하여 중원을 남서와 북동으로 양분하게 되었고, 그 교차점이 바로 관도였지요.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원소나 조조는 모두 중앙의 귀족 출신이었다는 것이죠. 그 만큼 대규모의 전쟁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관도대전의 경과를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서기 200년 2월, 여양으로 진군한 원소는 안량(顔良)에게 명령하여 백마(白馬 : 河南省 滑縣의 동쪽)를 공격하면서 관도대전이 시작됩니다. 관도대전은 ① 백마전투(조조의 기습전) → ② 연진전투(조조의 기습전) → ③ 관도 수성전(지구전) → ④ 허도 사수(조인의 후방사수 : 유비ㆍ유벽의 허도공격) → ⑤ 오소 전투(보급로 파괴) → ⑥ 원소의 죽음(202) → ⑦ 원소 자녀들의 내분 → ⑧ 공손강의 원희ㆍ원상 처단 제거(207) → ⑧ 조조의 중원 회복 등의 순서로 전개됩니다.

[그림 ①] 관도대전도

관도대전은 조조의 중원 통일전쟁으로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이나, 나관중의 ‘삼국지’에서는 적벽대전(208)만큼 중요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지요. 이것은 나관중 ‘삼국지’가 유비와 제갈량을 미화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적벽대전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관도대전의 승리는 조조의 가장 큰 업적입니다. 이 전쟁을 통해 조조는 익주ㆍ형주 그리고 강동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대부분을 통일합니다. 당시 강동(江東)과 익주(益州)는 오지(奧地)로 공략이 쉽지 않는 곳이고 당시 중국인들의 중심 무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익주는 조조에 대해 언제든지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므로 조조는 전 중국 통일을 눈앞에 둔 것이죠. 관도대전의 결과는 아래의 [그림②]와 같습니다.

[그림②] 관도대전 결과(붉은 색은 조조 영역, 파란색은 원소 영역)

[그림②]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조조는 원소의 지배영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어 당시 중국 주요 지역을 대부분 장악합니다. 익주 지역은 적벽대전 때에도 조조에게 연합군을 보낼 정도로 조조에 대해서는 사실상 투항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손권의 경우도 조조에게 적대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도대전으로 중국은 ‘사실상 통일’된 상태라는 말이지요.

이번 강의에서는 관도대전의 내용 그 자체에 대해서는 상세히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들은 대체로 정사와 일치하고 나관중 ‘삼국지’에 산만하지만 많은 설명과 묘사가 되어있어서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관도대전 자체에 대한 것을 해설하면 아마 여러분들은 더 이상의 흥미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관도대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한번 가져보고 여러분들이 읽고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을 다시 한번 검토해보도록 합시다.

***(2) 승리는 인격 순이 아니잖아요?**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원소(袁紹)나 순우경(淳于瓊)을 지나치게 비하(卑下)하고 있습니다. 관도대전 당시의 원소를 두고 지나치게 우유부단하고 심복들의 자중지란을 막지 못했으며 전쟁 운영도 형편이 없었다는 얘기죠. 그것은 어쩌면 소설가들의 권리이기도 하겠지요. 그렇지만 패자(敗者)라고 해서 너무 인격적으로 모독을 가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소 전투에 나타난 다음의 묘사를 보시죠.

이 때 원소의 장군 순우경은 여러 장수들과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곯아 떨어져 있다가 … 순우경이 결박을 당하여 조조 앞으로 끌려왔다. 조조는 순우경의 귀와 코, 손가락을 자르고 결박지어 원소의 진영으로 보냈다. … 원소는 순우경의 목을 쳤다.

이 대목은 ‘조만전’을 이용하여 쓴 것으로 조조군의 잔인함과 순우경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한심한 사령관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만전’은 지은이도 모르는데다 인신 공격적인 내용이 많아 신뢰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죠. 정사는 “조조의 병사들이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워 순우경을 크게 무찌르고 그들을 모두 죽였다.(위서 : 무제기, 원소전)”라고만 하고 있죠. 오소(烏巢) 전투의 승리는 원소 진영에서 귀순한 허유(許攸 : ?-204)가 오소에 대한 군사 기밀들을 모두 조조에게 알려준 것이 결정적인 것이었지, 기습당한 순우경만의 문제라고는 볼 수 없지요. 원소의 참모 저수(沮授 : ?-200)는 원소에게 별도의 부대를 보내어 기습에 대비하라고 했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원소·조조·순우경·허유 등은 같은 동기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순우경은 영제 때 우교위(右校尉)가 되어 조조나 원소와 같은 반열에 속했다고 합니다. 순우경은 후에 원소의 부하가 되었는데 순우경은 허유와 더불어 원소 진영내의 신구 세력간의 세대교체에 따른 일종의 소외그룹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원소 진영 내에서 허유와 순우경 등은 새로운 엘리트들인 심배(審配)·봉기(逢紀)·저수·곽도 등에 밀려나는 구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죠.

이 점을 통하여 원소는 과감한 정치개혁을 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지요. 자기의 친구들을 과감히 물리치고 개혁의 기수들을 정치 일선에 배치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순우경과 허유는 상당한 심적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결국 허유는 조조에게 투항하지만 순우경은 병참 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다가 전사(戰死)한 것으로 보입니다. 허유는 조조군에 투항하여 원소군의 진용을 일일이 알려 주는 동시에 자신과 동류인 순우경이 지키는 보급창인 오소를 쳐야한다고 진언하였지요. 이런 점에서 허유는 원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 사람입니다. 원소의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배신자겠지요.

당시 순우경은 새로운 세대인 심배와 봉기에게 밀리면서도 불평 없이 병참 부대를 지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나관중 ‘삼국지’의 묘사는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아무리 흥미 본위로 소설을 쓴다고 해도 이런 종류의 인신공격은 좀 문제가 있지요. 특히 이 사람은 실존인물이 아닙니까?

전쟁의 승패란 반드시 인격의 승리는 아니지요. 조조가 전쟁에 이겼다고 해서 인격적으로 원소 진영을 격파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실제로 원소진영에는 얼마나 많은 충신(忠臣)들이 있었습니까? 나관중 ‘삼국지’에 묘사된 대로였다면 그 많은 충신들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관도대전 부분에 나타난 나관중 삼국지의 표현들은 승자의 횡포를 고스란히 옮겨둔 듯합니다.

다음으로 나관중 ‘삼국지’는 관도대전에서 조조는 극소수의 군대로 원소를 격파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즉 원소는 70만 대군, 조조는 7만의 병력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원소는 대체로 10만여 명 조조는 2만~3만 정도의 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조군이 매우 적었던 이유는 원소가 조조군이 방비할 틈이 없이 바로 결전을 감행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조조는 방어를 하는 입장이므로 수 배의 원소 원정군과 대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개는 공격하려면 수비군의 수배에 달하는 병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령 조조가 관도에서 패배했다고 해도 조조가 재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조는 서북방의 방어와 형주의 유표군에 대한 방어 등으로 군대를 분산시키고 있었고 만약에 위급한 상황이 온다면 그 이상의 군대도 동원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극단적인 경우 조조는 허도(허창)를 내어주고 서주(徐州) 쪽이나 낙양ㆍ장안(長安)쪽으로 후퇴하여 재기(再起)를 노릴 수도 있는 상황이죠. 또는 허도(허창)를 예주 방면ㆍ장안 방면ㆍ여남 방면으로 포위하는 형국으로 다시 압박해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요. 관도대전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조조의 입장에서는 병력상의 손실은 큰 것이 아니었고 원소를 제외하면 다른 군벌들이 조조를 공격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서 지구전(持久戰)으로 전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관도대전으로 조조는 원소를 격파하였지만 원소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가 아니었죠. 이 당시의 전쟁은 과거 전국시대처럼 전선이 하나의 주전장(主戰場)을 중심으로 시행된 것이 아니라 전쟁터 자체가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어 있어 대규모의 승전(勝戰)이라 해도 그것이 바로 적을 총체적으로 섬멸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전쟁 공간도 확대된 상태이기 때문에 조조는 다시 원소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서 머나먼 북정(北征)길에 오릅니다. 그래서 조조는 원소의 잔당인 원희·원상을 기주에서 몰아내고 요동반도 쪽으로 달아났던 원희와 원상이 공손강(公孫康)에 의해 참수됨으로써 사실상 북정이 끝납니다.

***(3) 조조, 모돈(冒頓)을 죽이다**

그런데 관도대전과 관련하여 나관중 ‘삼국지’는 상당한 문제가 있습니다. 조조가 관도대전을 마무리하면서 원소의 일가를 모두 제거하는 과정에서 나관중 ‘삼국지’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전주가 조조에게 말했다. ‘백단(白檀)의 험한 언덕을 넘어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나가면 유성(柳城)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무방비 상태의 모돈(冒頓 : 묵돌)을 공격한다면 단 한번의 싸움으로 모돈을 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는 전주의 말을 듣고 그를 정북장군(靖北將軍)에 봉하고 향도관을 삼아 길을 인도하게 했다. 장요가 그의 뒤를 따랐다. … 백랑산(白狼山) 에 당도하자 모돈과 힘을 합해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나오는 원희ㆍ원상과 마주쳤다. … 장요가 말을 달려 추격해 들어가 모돈(묵돌)의 목을 베니 묵돌의 군사는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

여기서 유심히 보아야할 부분은 묵돌, 즉 모돈(冒頓)입니다. 모돈은 비유하자면 칭기즈칸(成吉思汗)과 유사한 인물인데 그는 조조가 태어나기 4백여 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택동(毛澤東 : 1893-1976)이 칭기즈칸(成吉思汗 : 1162-1227)을 죽였다는 말이죠. 왜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이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중국의 입장에서 북방의 여러 민족 가운데 전국시대 말기에 흉노(대쥬신?)가 가장 강성하였지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중국에 인접한 소수 민족들 가운데서 흉노(대쥬신? 또는 몽골)가 가장 강하였다고 합니다.

흉노는 중국어로는 슝누[xiongnu]인데 몽골의 훙(XYH)에서 나온 말로 문어(文語)에서는 훙누로 들립니다. 이 말의 뜻은 몽골어로 그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음차(音借 : 음을 빌려 표현)하여 한족들은 흉노(匈奴)로 불렀지요. 문제는 음차 과정에서 이들을 비하(卑下)하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이죠. 흉(匈)이란 오랑캐, 흉흉스럽다는 의미이고 노(奴)는 노예라는 의미죠. 이 말이 가지는 의미를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이 사람행세를 한다”는 의미라고 한 바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흉노라는 말은 흉노인들 자체가 스스로를 부른 말은 아니라는 말이죠. 이 부분의 전문 연구자인 정수일 교수(단국대)에 의하면 흉노는 특정 종족집단이 아니라 알타이 산맥을 동남으로 거주했던 유목민의 총칭이라고 합니다.

흉노는 몽골의 고원지구에 거주하였는데 흉노의 황제(선우 또는 단간?, 단군?) 두만(頭曼)은 조(趙)나라·연(燕)나라·진(秦)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지요. 흉노는 지금의 요녕(遼寧) 서북부·산서(山西) 북부·내몽고·영하(寧夏) 등의 일대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고 수초가 풍성한 하투(河套)지방을 차지하여 군대는 강하고 경제도 번영하였지요. 흉노는 강력한 야간 기동작전도 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대적하기가 가장 어려운 적수였다고 합니다. 두만의 아들 모돈(冒頓)은 쿠데타를 일으켜 두만을 죽이고 선우가 되어 북방초원에 강대한 제국을 건설합니다.

모돈(冒頓)은 흉노족(대쥬신족?)의 대영걸로 천해(天海 : 바이칼호)로부터 천산산맥(天山山脈)이나 몽고고원은 물론 혼유(渾瘐)ㆍ굴사(屈射)ㆍ정령(丁零)ㆍ격곤(鬲昆)ㆍ신리(薪犁) 등의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전한(前漢)까지 정벌하여 속국(屬國)으로 삼은 사람이었지요. 당시 즉 기원전 2세기 후반의 지도를 먼저 보시죠.

[그림③] 흉노(대쥬신? 또는 몽골)의 영역(B.C. 2세기)

어, 그림이 좀 이상합니까?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들은 항상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만 보셨기 때문이겠지요. [그림③]은 흉노(대쥬신?)의 본거지인 알타이산맥·바이칼 호수·기련산 등을 중심으로 하여 그린 지도입니다. [그림③]을 통해서 보면 당시 흉노의 영향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한(前漢) 정부가 흉노(대쥬신?)에 조공(朝貢)을 바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림④] 유목민 기병(영화 칭기즈칸의 한 장면)

나관중 ‘삼국지’를 편찬한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돈이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는 것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돈은 사마천의 ‘사기’에 상세히 기록된 사람이기 때문이죠.

제가 보기에 모돈을 전혀 엉뚱한 곳에 등장시킨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모돈은 한족들에게 매우 큰 치욕을 안기고 괴롭힌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기에 끌어들여 속 시원하게 죽여 버린 것이죠(혹시 우리의 을지문덕 장군이나 광개토대왕이 중국 어느 소설책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지는 않았나 걱정이 되네요). 이제 그 까닭을 좀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모돈이 당시 한나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를 보시죠.

“하늘과 땅이 생기는 이 곳, 해와 달이 있는 곳인 흉노(대쥬신?)의 천자(대단군?), 한의 황제에게 묻노니 그 동안 별일이 없었는가?”

마치 황제가 어느 식민지의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편지는 한나라 황제가 쓰는 목간(木簡 :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음)도 한나라 황제가 쓰던 목간보다도 큰 것을 사용하고 봉인(封印)도 모두 더 넓게 크고 길게 하여 한 황제를 하대(下待)하여 위엄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에 흉노(대쥬신?)에 투항 귀순한 한나라의 장수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는 모돈의 이런 언사를 망언(妄言)이라고 하고 있지요.

아마 나관중 ‘삼국지’ 편찬자들은 가장 강한 군사력을 가진 조조를 통해 한족(漢族)을 모독했던 모돈을 시원하게 목 베어 죽이는 장면을 연출한 듯합니다. 한족에게 있어서 이 장면은 명장면 중의 하나겠지요. 즉 한족을 가장 괴롭힌 사람 중의 하나를 전혀 엉뚱한 장소에서 끌어들여서 속 시원하게 베어 죽임으로써 민족적인 카타르시스를 얻으려고 한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 나관중 ‘삼국지’의 내용을 사실인양 아무렇게나 인용하는 것은 전혀 엉뚱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조조의 북방정벌로(북정로)를 보시죠.

[그림 ⑤] 조조의 북정로

[그림 ⑤]로 보면, 조조는 유성(柳城)까지만 갔고 공손씨의 영역인 요동반도까지는 가지 않지요. 원상과 원희가 요동의 공손강(公孫康)에게로 도망가자 휘하의 신하들이 지금 정벌하면 그들을 잡을 수 있다고 하니 조조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조조는 “나는 지금 공손강에게 원상과 원희의 머리를 베어 보내도록 할 것이오. 다시 번거롭게 군사를 움직이지 마시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공손강이 원상과 원희의 목을 보내옵니다. 신하들이 궁금해 하면서 물으니, 조조는 “공손강은 평소부터 원상을 두려워했다. 내가 원상의 무리에 대해 무리하게 잡으려 한다면 공손강은 오히려 원희의 무리와 힘을 합치게 될 것이니 오히려 이들을 내버려두면 서로 싸울 수밖에 없거든.”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곽가의 유서를 보고서 한 일로 나오지만 사실은 조조의 판단이었지요.

유성의 현대 위치는 요녕성(遼安寧) 조양(朝陽) 서남쪽이라고 합니다. [그림⑤]에서 보는 바와 같습니다. 나관중 ‘삼국지’를 읽으면서 구체적인 지명의 위치를 모르면 조조가 마치 산맥과 사막을 건너 만주대평원을 넘어 고구려는 물론이고 북방유목민들을 모두 무찌른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요. 4백 년 전 과거 모돈이 활약한 땅은 오늘날 오르도스(얼뛰스) 지역을 비롯한 내몽고 자치주의 남부와 섬서성(陝西省)의 일부가 중심 지역이었죠. [그림⑤]에서는 A지역인 셈이죠. [그림⑤]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조조는 그 근방에도 가지를 못합니다.

결국은 나관중 ‘삼국지’의 편찬자들은 그 동안 중국을 가장 괴롭혔던 흉노(대쥬신? 또는 몽골)의 황제(대단군?)를 끌어다가 시원하게 죽임으로써 중국민 전체의 카타르시스를 유도한 듯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홍군연의(紅軍演義)’가 나와서 칭기즈칸도 모택동이나 주덕(朱德 : 홍군 총사령관)의 총에 맞아 죽는 이야기가 만들어질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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