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중국혁명에 관한 최고의 르포로 꼽히는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인 에드가 스노의 부인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金山)을 아십니까? 김산은 독립운동가였지만 공산주의자였던 까닭에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저편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김산의 본명은 장지락(張志樂)으로 북경 황포군관학교 및 손문(중산)대학 경제학과를 나와 중국의 공산혁명에 헌신한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공산주의가 지식인들의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의 강령 중에서도 토지 소유 제한에 대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기도 했습니다.
김산은 1938년 엉뚱하게 강생의 지시로 '트로츠키주의자' '일본스파이'라는 이상한 죄명으로 갑자기 처형을 당하면서 한 많은 생을 마친 사람입니다. 김산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당시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는 권력투쟁이 일어났는데, 그 희생양이 필요했고 죽여도 별 부담이 없는 사람으로 조선족인 김산이 선택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김산이 죽은 지 거의 45년이 지난 1983년 공산당 중앙 조직부는“김산의 처형은 특수한 역사 상황 아래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였다. 김산이 지녔던 명예를 모두 김산에게 되돌린다. 이로써 그의 당원자격은 회복된다”라는 결정을 내립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중국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1) 패륜아 여포**
여포(呂布)는 후한(後漢) 말의 무장(武將)으로서 자는 봉선(奉先)이며 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자치구 포두(包頭) 서쪽인 오원군(吾原郡) 구원(九原) 출신입니다. 여포는 활쏘기와 말 타기에 뛰어나 '비장'(飛將)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병주자사(幷州刺使) 정원(丁原)을 따라 낙양(洛陽)으로 가서 동탁(董卓)과 싸웠으나 동탁이 그를 유인하여 정원을 죽이게 하고 심복으로 삼았습니다. 192년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지속적인 설득에 동탁을 암살합니다. 이어 원술(袁術)- 원소(袁紹)에게로 피신하였지만 원소가 그를 죽이려 하자 다시 장막(張邈)에게로 가서 조조군과 싸워 패하고 유비(劉備)에게로 도피하였습니다. 여기서 세력을 다시 정비하여 서주 일대를 지배하였으나 조조군의 공격을 받아 붙잡혀 죽었습니다.
[그림 ①] 여포
‘삼국지’에서 대표적인 패륜아를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은 주저 없이 여포라는 장수를 들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자신의 양아버지(의부)격인 사람을 죽이고 오직 자신의 출세만을 위하여 행동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삼국지’마니아들이 여포를 가장 무예가 뛰어난 장수로 꼽지만, 여포의 패륜적 행위로 말미암아 가장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정사에서도 진수는 여포를 평하여 천박하고 교활하며 번복하기를 잘하며 오직 이익만을 보고 일을 도모하였다고 합니다.
나관중‘삼국지’는 여포가 의부(義父) 정원(丁原)을 호위하다가 동탁이 보낸 적토마에 매수되어 정원을 죽이고 또 동탁을 의부로 섬겼다가 다시 동탁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사에 동탁과 부자의 서약을 맺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만 정사의 어느 구석을 보아도 정원을 양아버지로 섬긴 내용은 없습니다. 정사에는 “여포가 정원(丁原)에게 신임을 얻고 있다”는 정도의 표현 밖에 없지요.
여포가 정원을 살해한 문제는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난세에서 배신과 암살은 일상적으로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삼국지’는 배신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소(가해) → 한복(피해), 원소 → 여포, 손책 → 원술, 진궁 → 조조, 조조 → 장수, 유비 → 여포, 유비 → 조조, 유비 → 유장, 유비 → 유봉, 조운 → 공손찬, 법정과 장송 → 유장, 허유 → 원소 등 이루 헤아릴 수없이 많은 배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혼란기(난세)이기 때문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일상적으로 나타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포만이 유독 심하게 비판을 받는 것은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유비는 양아들인 유봉을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난 뒤 죽이고, 조조가 장수(張繡)의 형수를 후궁으로 맞이하자 장수가 이를 한탄하였는데(繡恨之) 이것을 들은 조조는 불쾌하게 생각하여(聞之不悅) 비밀리에 장수를 죽이려고 계획(密有殺繡之計)합니다(위서, 장수전 : 그런데 나관중‘삼국지’에는 이 대목이 없지요). 원소는 여포를 이용한 후 자객을 보내어 죽이려 하죠(위서, 여포전). 삼국지 시대에 이런 경우는 매우 많습니다. 왜 이런 문제들은 중국인들이 침묵하는 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정원과 여포의 관계가 부자관계가 아니라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포가 동탁을 살해한 문제로 모아집니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논의의 대상이 된 로마의 시이저-부루투스의 문제와도 유사합니다.
시이저의 양아들 격이었던 부루투스는 시이저가 로마의 공화정을 무시하고 전권을 장악해나가자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단서를 달고 시이저의 암살에 가담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시이저의 후광을 업고 있는 부루투스의 입장에서는 시이저에 빌붙어 있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시이저의 처단으로 가고 있습니다. 시이저 역시 이것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점차 죽음에 대해 초연해집니다. 부루투스의 고뇌는 여기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포-동탁의 관계는 부루투스-시이저의 관계와는 두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하나는 부루투스-시이저의 관계는 수십 년 동안 지속된 관계이지만 여포-동탁의 관계는 불과 1~2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동탁이 사실상 일방적으로 부자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그것은 동탁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일방적으로 맺어진 것이죠. 당시 여포가 함부로 거절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그리 깊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동탁의 성질이 거칠어 비위가 상하면 창을 여포에게 던지는 등 여포는 많은 마음고생을 합니다.
정사의 기록에도 여포가 동탁 암살 모의에 가담한 것은 왕윤(王允 : 137~192)의 노련한 이간계(離間計)가 주효했던 것이지, 여포 자체의 인간성 문제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황제가 생존해 있었고 대부분의 제후들에 있어서 공동의 적이었던 동탁의 암살은 누가 보아도 대의명분이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나관중‘삼국지’에서 왕윤이 초선(貂蟬)을 제물로 한 미인계(美人計)를 사용하여 부자(父子) 사이에 한 여자를 두고 갈등이 깊어져 여포가 암살에 가담한 것으로 나옵니다. 유교 덕목이 강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볼 때, 나관중 ‘삼국지’는 여포-동탁의 행위를 가장 추잡하게 묘사한 것이지요. 즉 나관중‘삼국지’는 동탁-여포의 관계에 대하여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모욕을 가합니다(실제로 초선이라는 여인은 없었지만 재미있는 일은 중국의 4대 미인에 초선이 들어갑니다. 이것도 이상하죠? 초선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지요).
분명한 것은 여포-동탁의 관계는 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나관중‘삼국지’식으로 일이 진행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정사를 통하여 판단해 보면 어린 황제가 등극함에 따라 영제(靈帝)를 모시던 대부분의 궁녀들이 귀향하거나 논공행상에 따라 분배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탁이 여포를 자기 신변 가까이에 두었기 때문에 동탁의 시녀 가운데 한 사람과 여포가 사랑에 빠진 듯합니다. 특히 여자들이 귀한 지역에서 살아왔던 여포였기 때문에 낙양의 세련된 여인들에게 반해 버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과거의 관념으로 동탁에 속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으니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이죠. 정사를 봐도 그 여인은 동탁의 애첩(愛妾)인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동탁은 그 여인의 존재에 대해 몰랐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어쨌든 여포가 이 일로 고민하자 그것을 간파한 사람이 바로 왕윤입니다. 왕윤은 여포를 끊임없이 설득하여 동탁을 죽이게 만든 것이죠.
여포가 비난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유비의 영역에 피신했다가 도리어 유비를 내쫓고 주인 행세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주로 나관중 ‘삼국지’에 상세히 나오는데 이것은 당시의 정황으로 보면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죠. 당시의 유비는 일 개 소대장급 군벌(軍閥)에 불과했다면, 여포는 원소와 조조와 어깨를 겨루는 장성(將星)급 군벌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유비가 이어받은 서주는 조조 일가를 몰살시켰다는 이유로 조조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고 있었고, 도겸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습니다(그러니 도겸의 아들들도 이를 승계하지 않지요).
진등(陳登)은 당시 서주의 사정을 “하늘이 재앙(災殃)을 내리고 화(禍)는 서주에 이르렀으니, 주의 장군(將軍)은 죽을 것이고 백성들은 주인이 없게 될 것입니다.(촉서, 선주전 주석)”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경험도 없는 유비가 대세가 돌아가는 상황도 모르고 도겸을 이어받아 죽을 고생을 치르다가 안 되니 여포와 함께 조조를 막으려 했다가 실패하고 결국 조조에게 투항한 것이죠.
정사에 따라 당시의 정황을 보면, 유비가 서주를 장악하니 원술이 허약한 유비를 공격하여 한 달 이상 대치하자 하비의 수장 조표(曹豹)가 유비를 배반하고 은밀히 여포를 영접했다라고만 되어있죠(촉서, 선주전). 이 때 여포의 참모인 진궁이 서주를 방비하여 조조에 대항할 것을 종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는 장비가 술을 마시고 조표를 구타했으며 조표가 여포의 사위로 이 사실을 고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과정에서도 여포는 여자들을 함부로 취한 호색한(好色漢)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죠.
그리고 정사에서는 후성(侯成)과 송헌(宋憲)이 여포에 반역하여 진궁을 묶고 조조에 투항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나관중‘삼국지’는 이 위기의 상황에서 여포를 술과 여자에 빠져서 물불을 못 가리는 한심한 군주로 묘사합니다. 참으로 도가 지나칩니다. 그리고 송헌과 후성은 여포의 매질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조조의 군세가 강대하니 투항한데 불과합니다. 그저 여포를 배신한 것이지요.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주색잡기에 빠진 여포가 후성에게 매질을 심하게 하여 그들을 내몬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포에 대한 인신공격도 이쯤 되면,‘막가자’는 얘기지요.
도대체 나관중‘삼국지’는 여포와 동탁에 대해서 무슨 피맺힌 원한이 있어 이토록 가장 저속한 방법으로 이들을 매도하였을까요? 도대체 여포에게는 무예를 제외하면 아무런 장점도 없는 것일까요? 이제 이 점들을 살펴봅시다.
***(2) 여포의 비극**
우리는 누구나 여포를 비난합니다만 당시에는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사에 따르면 194년 봄 조조는 아버지 조숭이 살해되자 도겸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 장막(張邈)이 진궁(陳宮)과 함께 조조에 반역을 도모하여 여포(呂布)를 맞아들이니 군과 현이 모두 호응하였다고 합니다(위서, 무제기). 이것은 중원 땅에서도 여포에 대한 신망이 어느 정도는 두터웠음을 의미합니다. 이상한 일이죠.
나관중‘삼국지’에 진궁은 천하의 충의지사로 등장하는데 왜 조조를 배신하고 장막과 함께 여포에게로 갔을까요? 정사로 보면, 진궁은 위기의 상황에서 조조를 배신한 것을 제외하면 대장부다운 의연한 몸가짐을 보입니다. 장막 또한 당시에는 중원 땅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로 유명하고 신망이 매우 높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는 식으로 천하의 패륜아였다면 그들이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뿐만 아니라 유비의 휘하에 있던 하비의 수장 조표(曹豹)가 유비를 배반하고 은밀히 여포를 영접합니다. 그 동안 여포에 대해 우리가 가진 생각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죠.
그리고 동탁이 죽은 후 여포는 가장 유력자였던 원소 - 조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기주의 원소 - 허도의 조조 - 서주의 여포라는 삼각 구도를 가지면서 대립합니다. 마치 삼국이 서로 싸우듯이 말이죠. 이것은 여포의 실력이 이들에 못지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림②] 여포의 무용(가운데)을 그린 중국의 우표
만약에 우리가 아는 식으로 여포가 의부를 두 번씩이나 살해하는 파렴치한이었다거나 “오직 싸움만 잘하는 사나이”였다면 가능한 일은 아니죠. 여포의 개인 가정사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으므로 잘 알기는 어렵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여포의 개인사에 대한 내용은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여포는 장군으로서는 드물게 매우 가정적인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처자(妻子)는 의복(衣服)이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유비와는 매우 다르지요(여자관계가 복잡한 것으로 치면 손권이나 조조, 유비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여포는 매우 로맨틱하고 매력적이고 잘 생긴 자수성가형 인물은 아니었을까요?
제가 보기에 나관중‘삼국지’가 유독 여포에 대해 온갖 중상모략을 한 것은 여포가 정통 한류(漢流)가 아니라 몽골계열의 유목민 출신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포의 출신지는 오원(五原)으로 오로도스 사막에 가까운 곳으로 현재의 몽골 지역이지요. 그 곳은 한족들이 가장 무서워하면서도 가장 경멸하는 흉노족(대쥬신족? 또는 몽골)의 땅입니다. 먼저 [그림③]을 먼저 보시죠.
[그림 ③] 삼국지 주인공들의 출신지도
[그림③]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국지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 출신지별로 보면, 오직 여포만이 홀로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사에서 여포가 인종적으로 정확히 어떤 계통인지 밝히고 있진 않지만 그의 출신지와 그의 생활에 나타난 관습(유비에 대한 접대)등으로 판단하건데 그가 흉노(대쥬신?)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요. 따라서 여포는 인종적인 측면에서 동탁이나 가후보다도 더욱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동탁이나 가후는 중국인들이 말하는 오랑캐 지역에 살았지만 그래도 한족이었고, 여포의 경우는 중국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토종 오랑캐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여포는 가장 싸움을 잘하지만 가장 경멸스럽고 비굴한 모습으로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나관중‘삼국지’를 편찬한 사람들은 원(元 : 몽골)나라 말기 사람으로 그들에게 원나라는 금수(禽獸)의 무리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怨讐)의 무리였을 것입니다. 이러니 여포가 어떻게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더구나 자신의 상관을 두 번씩이나 죽인 사람이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 여포는 한족(漢族)을 너무 몰랐던 것 같습니다. 정사의 주석에 보면 여포는“여러 장수들은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람들밖에 없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장홍(臧洪)이 진림(陳琳)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여포가 (장연의 군대를 격파하고) 지원병을 요청하자 원소는 이를 거부하여 여포가 할 수 없이 원소를 떠나려 하는데 원소는 오히려 자객을 보내 여포를 죽이려 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전말을 봅시다. 원소가 상산 땅에 있던 자신의 강적인 장연(張燕)을 여포를 시켜서 쳐부수었는데 원소는 오히려 여포의 세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하여 지원병을 파견하지 않았고 이를 알게 된 여포가 원소를 떠나려하자 원소는 비밀리에 자객을 보내 여포를 죽이려 하지만 실패하지요. 원소는 여포를 철저히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룬 후에는 오히려 여포의 세력이 커질까 두려워 암살하려 한 것이죠. 그런데 이 당시 원소의 행위는 왜 사람들이 비판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군요.
여포는 원소에게서 상당한 충격을 받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여 자살할 결심을 합니다. 정사의 주석에“본래 장양(張楊)은 여포를 죽여 이각과 곽사가 내걸은 현상금을 차지하려 했는데 여포가 이 소식을 듣고 장양에게‘우리는 한 고향이니 자네가 날 잡아가게, 그러면 이각과 곽사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게 아닌가?’라고 했다(위서, 여포전).”라는 말이 있지요. 즉 여포는 원소에게 당한 충격으로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여 “에라,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다.”라고 판단하고 죽을 바에는 자기를 팔아 고향 사람(장양) 출세나 시켜주자고 한 것입니다. 얼마나 한족(漢族)들에게 시달렸으면 이런 기막힌 생각을 했을까요?
여포는 한족들이 가진 국민적 정서를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출세를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한 듯합니다. 어쨌든 여포의 차이나 드림(China Dream)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지요. 마치 이민(移民)을 가기 전에 여러 가지를 부지런히 준비해야 하는데 여포는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복잡한 한족사회에서 성공하려니 힘에 부쳤던 것이고 여포가 한족 사회에서 구성한 인간 네트워크(인맥)도 결국은 하류 한족 사회에 불과하니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겠지요. 그러나 저러나 판단은 여포의 몫이니, 주변의 말을 듣고 신중하지 못한 판단을 한 것은 여포의 잘못입니다.
사실 여포는 한족이 아니었으므로 낙양 지역에서 사용된 중국어도 제대로 몰랐을 것이고 문자를 해독할 능력도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중국이 사회주의혁명으로 통일(1949년) 되기 전까지 언어적으로 크게 다른 방언이 7갈래인데 그것을 다시 나누면 270여 개라고 합니다. 더구나 여포는 한족(漢族)이 가진 복잡한 문화적 특성이나 도덕관념 또는 민족적 대의를 알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만의 판단으로 항상 유력자를 선택했을 것입니다(요즘 한국인들이 미국 가서도 똑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주변에 그에게 카운셀링을 해줄 만한 사람이 제대로 없었지요. 이것이 여포의 비극입니다.
여포의 또 다른 비극은 유비(劉備)와의 만남입니다. 여포는 유비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항상 존경하였다고 합니다. 외형적으로 유비는 온후하여, 항상 외로움과 문화적 차이로 인해 힘들어하는 여포에게, 유비는 친아우 같은 존재였습니다. 문제는 유비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죠. 정사에 따르면 여포는 유비를 소개하면서, “유비는 나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여포가 유비를 좋아한 데는 외형적으로 유비가 온순하고 남의 말을 경청하는 스타일이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유비는 여포와 같이“변변치 못한 변방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정사 여포전 주석). 유비의 고향은 탁(涿)으로 현재 베이징 근방입니다. 당시의 베이징은 중원과는 거리가 먼 지역이었죠. 그런데 유비 자신은 한황실의 후예이기 때문에“여포 따위와는 어울릴 수가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여포는 유비를 자기 아내의 침대에 앉게 하고 아내에게 유비에게 술잔을 따르게 하고 동생으로 삼았습니다. 이 대접은 유목민들에게는 최대의 대접이었고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야만적인 행위입니다(형수가 시동생을 자기 침대에 앉히고 술잔을 따르다니요?). 여포가 순수하게 마음을 열고 유비에게 애정을 보냈지만 유비는 이에 대해서 별 다른 감흥을 가지고 있진 않았고 오히려 이것을 역겨워합니다. 여포는 자기를 배반하고 간 유비의 처자를 보호해줍니다. 문화적 차이가 인간관계를 얼마나 꼬이게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여포는 단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조는 여포를 자기 휘하에 두려고 했고, 여포 또한 여러 번 조조에게 투항하려 했으나 조조를 배신한 전력을 가진 진궁이 이를 방해했습니다. 만약 조조에게 여포가 투항했으면, 여포는 별 탈 없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그냥 살았을 것이고 또 천하 통일도 빨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여포가 조조에게 투항할 경우 자기의 위치도 문제지만 미래에 자신이 천하의 주인이 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판단한 듯합니다. 유비로서는 조조도 감당하기 힘든 상대인데 여포까지 조조에 합세할 경우에는 대책이 완전히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조조가 여포를 자기 휘하에 두는 것을 철저히 반대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비는 조조에게 여포를 죽여야 한다고 강경하게 설득하고 이를 관철시킵니다.
유비의 이 같은 행동을 보면서 여포는 한족(漢族)이 어떤 사람들인지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포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큰 회의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림 ④] 여포(CCTV 드라마 삼국연의 한 장면)
***(3) 고선지, 또 다른 여포(?)의 일생**
여러분들 가운데는“에이 설마, 아무리 지역차별, 인종차별만으로 여포를 그만큼 비하하고 죽이다니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중국이나 미국과 같은 큰 나라 국민들에게는 잘 대해주지만 우리보다 좀 못하다고 생각하는 나라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가혹하게 대하고 있습니까? 그저 중국인들도 우리 못지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포는 주류 한족 사회에서 인간관계(네트워크)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고 물에 뜬 기름처럼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여포의 경우를 통하여 예나 지금이나 소수 민족이 중국의 한족(漢族) 주류사회에 편입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이 같은 예는 매우 많지요. 그 가운데서 혜능선사와 고선지 장군의 이야기를 보시지요.
불교의 고전인‘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불교의 법통을 이어가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달마선사로부터 혜가(慧可) - 승찬(僧璨)- 도신(道信) - 홍인(弘忍)을 거쳐 여섯 번째로 법통을 이은 분이 혜능(慧能) 선사인데, 혜능선사는 현재 광동성(廣東省) 출신이었지요. 광동성은 요즘은 분명 중국의 영토로 홍콩 주변지역이지만 당시에는 중국이라고 할 수 없는 변방이었죠(그래서 오늘날 북경인들이 이들을 깔보기도 합니다).
혜능은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 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고 글공부는 꿈도 꿀 수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금강경을 낭송하는 것을 듣고서 30일을 걸어서 황매산의 홍인대사를 찾아갑니다. 홍인대사는 혜능을 보자“너는 남만인(南蠻人)이구나. 야만인이 어찌 성불(成佛)할 수 있을꼬?”합니다. 혜능이 주로 한 일은 후원(後院)에서 쌀을 찧고 밥을 하는 일이 전부였지요.
그러나 홍인이 혜능의 깨달음을 간파하고 자신이 후계자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홍인은 그것을 공식적으로 알리기에는 반발이 극심할 것을 우려하였지요. 홍인은 할 수 없이 주류 한족 제자인 신수(神秀)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법통의 상징인 의발(衣鉢)과 돈교법문(頓敎法門)을 전해주었고, 뒤늦게 이 사실을 전해들은 신수의 무리들은 분노하여 그를 추격해 죽이려는 바람에 혜능은 이름을 감추고 강남에 15년씩이나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삼국지’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고구려의 유민으로 중국에서 활약했던 고선지(高仙芝) 장군을 봅시다.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중국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입니다. 고선지는 외모가 사나이답고 기마와 궁술마저 능했으며, 용감한데다가 과단성도 있어서 나이 20여 세가 되어 장군에 제수되었다(구당서, 고선지전)고 합니다.
고선지는 해발 4600m가 넘는 힌두쿠시 산맥의 탄구령을 넘어 소발률국(북부 파키스탄 지역에 있던 소국)을 정벌(747년)하였는데, 이것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한니발의 무용담에 비견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나온 관련 책에 의하면, 고선지 장군은 중국 역사의 서역 평정 분야에서 독보적인 사람이며 '실크로드의 개척자'로 동서 문명 교류사에 지대한 공헌을 하지만 그의 업적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고선지는 노예로 전락한 소수 민족 신분으로 출세의 유일한 희망은 군인으로 등용되는 것이었기에 고선지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은 칼 쓰기, 활 쏘기, 말 타기 등의 무예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어린 고선지는 학문과 멀어졌고 그 결과 평생 글을 읽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것 또한 고선지의 비극적인 삶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고선지는 안록산(755~763)의 난이 터지자 진압에 나서지만 반대 세력들은 '황명 거부'라는 엉뚱한 모함으로 고선지 장군을 죽음으로 내몰았지요. 당시 적과 대치 중이던 고선지는 오랜 전투경험을 통해 군진배치를 하였는데 부관이라는 자가 모함을 했고 고선지 장군은 부사령관의 지위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이렇게 적과 대치 중에 전선에서 부관의 모함을 받아 부사령관이 처형되는 일이 잘 있을까요?
고선지의 죽음은 중앙의 무대에서 자신을 옹호해줄 주류 한족이 없었기 때문에 나타난 비극이지요. 차이나 드림, 참으로 멀고도 먼 여정입니다(사족이지만 당나라 현종은 고선지 장군이 대군을 이끌게 되자 그를 믿지 못해 이를 감시하기 위해 환관을 파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통하여 여포의 배신이 정당하다거나, 정원이나 동탁을 죽인 사실에 대해서 면죄부를 준다거나, 또는 그것이 나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역사적 인물이 있을 때 먼저 우리는 그가 실제로 한 행위만을 평가해야 하고, 그 행위의 정황적인 조건을 냉정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나관중 ‘삼국지’는 여포를 패륜아(悖倫兒), 파렴치범(破廉恥犯), 호색한(好色漢 : 플레이보이), 알코올 중독, 야만의 족속, 금치산자(禁治産者), 한정치산자(限定治産者) 등 모든 나쁜 요소들의 집합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삼국지 관련 해설서들도 대동소이합니다). 최소한 이것은 아니라는 얘기죠. ‘삼국지’의 주인공들 가운데 여포에게 돌을 던질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포, 고선지의 경우를 보면서 한족들의 인종 차별에 민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외국인을 진정으로 아껴주고 사랑할 때 그들도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여포나 고선지의 비극적인 삶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되 국수주의나 편협한 민족주의(Chauvinism)에 함몰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진정한 세계화(Globalization)로 나아가야 할 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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