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에서 비롯된 철도 민영화가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원격 의료와 의료법인의 영리 자회사를 통한 의료 민영화로 또 한 번 사회가 혼란에 빠질 태세이다. 대한의사협회가 오는 3월 3일 집단 파업에 돌입한다고 했으니 사태가 수습되기 요원해 보인다. 아마도 다음 민영화 대상은 물, 전기, 가스 등이 될 듯싶다. 이러한 격랑은 그야말로 '민영화의 쓰나미'라 부를 만하다.
최근 <변호인>이라는 영화가 세간의 시선을 끌고 있다. 과거의 경험에서 오는 감정이입과 현실에서 마주치는 삶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아마도 사회적 관심을 낳았으리라 짐작된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한마디, "국가는 국민이다"라는 표현은 '민영화의 쓰나미' 속에서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공익, 개방∙투명∙참여, 그리고 공공성
민영화 논쟁에서 항상 거론되는 개념이 공공성이다. 민영화를 반대하는 진영은 이번 정책들이 공공성을 훼손한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국가는 공공성의 보루여야 하는데, 오히려 공공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공공성을 국가의 존재 이유로 여긴다. 헌법과 행정법에서도 행정부의 제1 기준으로 공공성 실현을 적시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말만 무성할 뿐, 정책 결정 과정에서 진정한 고려는 찾아보기 힘들다.
공공성이란 여러 의미로 쓰여 다소 논쟁거리가 될 수 있지만, 공공성에 대한 최소한의 구성요소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주체로서 국민 다수이다. 어떤 사안이 주어졌을 때, 이 사안이 국민 중 소수가 아니라 다수에 관련되어야 공공성이 될 수 있다.
둘째, 국민 다수가 갖는 이익이다. 유럽 선진국들은 국민의 이익을 공익(public interest 또는 general interest)이라고 규정한다. 공익은 국민 전체 또는 최소한 국민 다수가 공유하는 이익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방이나 치안이 대표적인 예다. 모든 국민은 타인의 물리적 폭력이나 타국의 침략에서 안전함을 이익으로 가진다. 의료 욕구(medical need)의 충족 또한 마찬가지이다. 국민은 질병에 걸렸을 때 조속히 쾌유하고, 더 나아가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을 이익으로 삼는다.
공공성의 세 번째 요소는 과정을 구성하는 것들로 개방성, 투명성, 참여 등이다. 통치 과정이나 정책 결정 과정에 국민 다수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정책 내용은 국민 다수에게 투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국민 다수의 직간접적인 참여는 이러한 개방성과 투명성을 보장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민영화는 공공성에 대한 배신이다
수많은 정치가와 위정자들은 자신이 추진하는 일들을 언제나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위해' 한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민영화 쓰나미 속에서도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은 수서발 KTX의 자회사 설립이 국민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국무총리, 부총리, 국토교통부 장관도 공식 발표에서 항상 국민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처럼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들이 국민의 이익, 즉 공익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공익은 언제나 객관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어떤 정책이 입안되고 집행될 당시에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해당 정책의 결과가 국민 다수에게 이익인지 아니면 손해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4대강 사업이나 부동산 정책들은 우리에게 손해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민영화의 폐해들은 이미 선진국에서도 다수 발견되었다. 물론 긍정적인 민영화도 있었지만, 민영화가 필연적으로 실패하는 분야도 있다. 특히 인간의 생존 유지, 인간적 삶의 영위에 반드시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 소위 '필수재'는 민영화되는 순간 부정적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의료, 물, 전기, 도로와 철도, 교육, 육아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필수재들은 공공성을 가진다. 누구나 의료를 찾고, 누구나 이동수단이 필요하며, 누구나 전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재화와 서비스를 확보하는 것은 국민 다수가 공유하는 이익이 되며, 그러므로 인간은 함께 협력하여 이를 확보하려 한다. 그리고 국민 다수는 이를 확보하는 과정이 개방되고 투명하길 원하며, 이에 스스로 참여할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필수재를 확보하기 위한 첩경이기 때문이다.
민영화에 대한 공공성 문제 제기는 합리적
필수재를 민영화하면 공공성이 훼손된다. 민영화의 본질은 사익을 추구하고 시장의 메커니즘에 따라 이윤을 각기 투자된 양에 비례하여 배분하는 것이다. 필수재가 이러한 논리로 생산되고 분배되면, 국민 다수는 필수재를 필요한 만큼 소비할 수 없게 된다. 소비를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비용을 내야 한다. 민영화 체제 속에 해당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은 높게 책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 다수가 필수적으로 원하는 필수재에 대한 소비량은 일정 정도 정해져 있다. 이러한 조건은 필수재의 가격 탄력성을 거의 0에 가깝게 만든다. 즉, 가격이 올라가더라도 국민 다수는 일정량은 반드시 소비해야 하기에 높은 가격에라도 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속성으로 민간 기업은 가격을 높게 책정할 수 있다. 의료 수가가 높더라도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는 미국의 예가 이를 잘 증명한다. 철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국민이 정부의 민영화 조치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합리적임을 보여준다. 외국 정부들이 '국민의 이익'을 앞세워 진행한 여러 민영화 사례들이 부정적인 결과들을 낳았다는 사실이 분명하므로 이러한 문제 제기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 지난해 12월 28일 민주노총이 철도 민영화 등을 반대하며 서울광장과 광화문 사거리에서 총파업 투쟁을 벌였다. ⓒ프레시안(최형락) |
왜 민영화를 고집하는가? : 인식좌표계의 부정적 효과
그렇다면 왜 정부는 국민 다수의 문제 제기에도 지속적으로 민영화 카드를 꺼내는 것일까? 그 답은 '인식좌표계'로부터 얻을 수 있다. 인식좌표계(référentiel)란 정부가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정책을 어떠한 방향과 노선으로 이끌 것인지에 대한 틀을 말한다. 정책 결정자들과 참모들은 이 인식좌표계를 통해 눈앞에 펼쳐진 현상을 파악하고 분석하며, 문제 해결 방안을 만들어낸다. 오늘날 우리나라 정부는 20여 년 전부터 '작은 정부를 통한 국가 역할 최소화', '재정 지출 축소에 의한 균형 재정', '시장 메커니즘의 우선성' 등으로 구성된 인식좌표계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식좌표계와 공공성 사이의 대립적 관계이다. 공익은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하나는 변하지 않는 것으로 주로 목표나 기능에 속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변하는 것으로 이러한 목표와 기능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수단, 도구, 제도 도구 등이다. 예를 들어, 질병으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피하려는 의료 욕구는 생존과 인간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기능이다. 이 기능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병원이나 의사, 의료 기술, 의약품, 민간요법 등의 다양한 도구와 제도들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 '작은 정부와 국가 역할 최소화', '재정 지출 축소에 의한 균형 재정', '시장 메커니즘의 우선성' 등은 구체적인 도구들이다. 즉, 정부가 공익을 실현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도구들이다. 이 도구들은 이미 현실에서 부정적인 결과들을 만들어냈다. 양극화 강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 자살률 세계 1위, 노인 빈곤율 세계 1위, 늘어나는 '3포 세대' 등이 이를 증명한다. 어느 것 하나도 공익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는 이 인식좌표계를 마치 '신처럼' 모시고 있다. 정부를 움직이는 정책 결정권자들의 눈에는 이러한 현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자신들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던 그 인식좌표계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유발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에 그 인식좌표계가 옳다면 최소한 이러한 현상들은 줄어들어야 함에도 아직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자신이 인식좌표계의 한낮 노예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고 있음을 모르기에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들이 말하지 않은 것 : 증세를 통해서도 균형 재정은 가능하다
1997~1998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정치가, 행정가, 언론인들에 의해서 가장 많이 되풀이된 용어 중의 하나가 '균형 재정'이다. 국가의 재정은 적자여서는 안 되며 적자가 누적돼 부채가 생겨서도 안 된다. 만약 적자나 부채가 생기면 이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균형 재정의 논리이다. 복지 논쟁에서 항상 나오는 '돈이 없는데 어떻게 복지를 하느냐?'라는 표현은 균형 재정 논리의 이면일 뿐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공기업이나 공공 병원에 대한 압박도 그 기저에는 이 논리가 깔렸다.
균형 재정은 크게 보면 세 가지 방법에 의해 추구된다. 첫 번째 방법은 국가의 자산을 매각하여 적자와 부채를 해결하는 것이다. '민영화의 쓰나미' 속에서 고위 관료나 재정 전문가들은 '가장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 팔라'고 조언한다. 비록 '황금알을 낳는 황금 거위'일지라도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팔라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줄이는 것이다. 국가가 해야 하는 최소한의 일만 하고 나머지 일들은 더 이상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일을 적게 하면 당연히 충당해야 할 비용이 줄어들다. 따라서 거둬들인 세금의 일정 부분은 남고, 이를 정부의 부채를 갚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세 번째 방법은 정부의 부채를 공기업에 떠넘기는 것이다. 4대강 사업에서 한국수자원공사가 떠안은 부채가 대표적인 예다. 마지막으로 공무원을 줄이거나 공무와 관련된 업무들을 외부에 주는 것이다.
하지만 균형 재정은 다른 방식으로도 달성할 수 있다. 증세하면 된다. 세금을 더 거둬 예산을 늘리고, 증가분으로 적자와 부채를 충당하고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에는 현실적인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예산과 부채 규모이다. 2013년 우리나라의 예산 규모는 342조 원으로 GDP 대비 예산 규모를 OECD 회원국들과 비교했을 때 낮은 편에 속한다. 부채 규모를 보면, 우리나라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70.9%로 미국(120.4%), 영국(159.7%)보다는 낮지만, 캐나다(54.4%), 호주(43.4%) 등에 비하면 높은 편으로 국제적 수준에서 보면 양호한 편이다(기획재정부, <2012 회계연도 국가 결산 결과>). 즉 현재 우리나라는 세입 증가를 통한 균형 재정 전략을 쓸 여력이 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정부는 균형 재정, 적자∙부채 해소를 전면에 내세워 정부가 기존에 해왔던,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들을 줄이려 한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민간에게 위탁하려 한다. 국가가 지급하는 돈으로 해당 일을 할 수 있고 없고는 순전히 계약을 체결한 민간기관의 몫이 된다. 민간기관은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다. 민간기관은 일정 정도의 이윤을 얻기 위해서 가격을 올리거나, 근로자들에게 낮은 임금, 많은 근로시간, 열악한 근로조건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비용을 줄이려고 할 것이다. 결국, 정부는 제 일을 줄임으로써 국민인 근로자를 옥죄고, 국민이 이용하는 필수재 값을 올리는 꼴이다.
인식좌표계에 대한 잘못된 충성
지난해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을 수사하다가 지금은 지방으로 좌천된 윤석열 검사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직에 충성한다"라고 말했다. 지금의 집권 세력이나 정부는 '잘못된 인식좌표계에 충성'하는 오류를 부지불식간에 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유사한 인식좌표계를 갖고서 영국을 10여 년 동안 슬픔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마거릿 대처 수상이 그녀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려준 국민 다수를 얻지 못한 이유를 가늠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추진한 정책들은 결과적으로 결코 국민 다수의 이익, 즉 공익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영국 국민 다수는 시간이 지난 후에 몸소 경험하였고, 정책의 추진 과정 또한 개방∙공개∙참여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즉 공공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 지난해 12월 28일 철도 민영화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 사거리로 나온 민주노총 조합원과 시민. ⓒ프레시안(김윤나영) |
현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혹자들은 케네디 대통령의 유명한 취임 연설을 인용한다. "국가에 당신을 위해 무얼 해달라고 하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으십시오(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for your country)." 하지만 이 유명한 문구는 '이미 국가는 국민 다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있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 이미 국가는 국민을 위해 여러 가지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공익을 실현하고 있으니, 반대급부로서 이제 국민은 국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가장 큰 사회 문제 중의 하나가 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이 우리에게 뭘 해주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내포되어 있다. 물론, 과거의 대한민국은 전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냈고, 세상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냈다. 하지만 국민은 21세기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삶의 핍박함은 잘못된 인식좌표계에 기반을 둔 정책들이 초래한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대책들도 그러한 인식좌표계를 통해서 나왔으니 별 효과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공공성을 추구하는 대한민국을 기다리며
공익을 수호해야 할 공무원과 정치인은 사람에 충성해서는 안 된다. 공공성 실현에 충성해야 한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특정 개인에게 충성하는 것이 타당하다면, 그것은 오직 그 사람이 공공성을 추구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이제 우리나라도 어떤 한 사람이나 인식좌표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 다수가 공유하는 이익을 개방되고 투명한 과정에서 직간접적인 참여에 따라 실현해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국가는 사람이다.' 달리 말하자면, '국민이 국가이다.' 그런데 지금 국민들은 아프다. 국민이 아프니 대한민국이 아프다. 대한민국이 공공성을 추구하며 이 아픔을 치유해가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도래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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