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에 대한 맹세문이 개정돼 화제를 모은 적이 있긴 하지만 내용은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지난 2007년에 개정한 현재의 국기에 대한 맹세문은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이다. 1972년 독재 정권에서 제정된 맹세문의 원문은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고 돼 있었다. 국가와 나의 관계는 그저 충성으로 맺어진 관계일 뿐인가. 누가 국가의 주인인가.
이런 일련의 제의와 같은 의식이 포함된 국민의례를 거부해 해고 당한 노동자가 있다. 그러나 법원은 "대한민국 국민이 국기에 대한 경례나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였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이를 이유로 그에게 어떠한 제재를 가하거나 불이익을 줄 수는 없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편집자>
원고는 한국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 2007년 9월 17일 한국노동연구원(이하 '피고')에 입사했다. 피고의 관련 규정에는 연구직은 채용 첫 2년은 특수임용 하고 특수임용기간 종료 30일 이전에 인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특수임용을 연장하거나 계약을 종료할 수 있고, 연구실적이나 근무성적이 우수하다고 인정되면 일반임용으로 발령하도록 되어 있다. 당시까지 박사급 연구원으로 특수임용 되었다가 일반임용이 되지 못하고 계약이 종료된 경우는 없었다.
피고 인사위원회는 2009년 7월 30일 원고의 일반임용에 관한 안건을 심의했는데, 일반임용 전환 여부에 대한 결정을 유보하고 1년 이내에 2009년도 평가결과가 나온 시점에서 이를 다시 심의하기로 하는 데에 참석 위원 전원이 동의하고 이를 원장에게 보고했다. 원장은 2009년 8월 6일 원고가 조직구성원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피고 인사위원회에 재의를 요구했다.
원장은 원고의 자격 미달 사유로 △원고가 2009년 1월 12일 원장의 업무상 지시를 특별한 이유 없이 두 차례에 걸쳐 단호히 거부했다는 점과 △매월 1회 개최되는 피고의 경영설명회와 시무식 등 공식행사에 1년 이상 무단 불참했고, 2009년 2월부터는 경영설명회에 참석하기는 했으나 국민의례를 거부했다는 점(원고는 2008년 2월경 피고 원내 게시판을 통하여 국민의례가 국가주의나 전체주의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경영설명회에서 국민의례를 생략하자고 제안했고, 2008년 4월부터 2009년 1월까지 경영설명회에 불참했으며, 2009년 1월경 원장과 면담한 이후에는 경영설명회에는 참석했으나 국민의례를 할 때에는 착석한 상태로 있었다)을 들었다.
피고 인사위원회는 2009년 8월 12일 원고의 일반임용에 관한 안건을 다시 심의했는데, 8명의 위원 중 원장이 직접 결정하도록 하자는 의견이 다수(5명, 그 외 일반임용을 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2명, 임용을 종료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1명)이었고, 이를 원장에게 보고했다. 원장은 2009년 8월 14일 원고에게 2009년 9월 16일자로 원고와 피고의 특수임용계약이 종료됨을 통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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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의 제기와 쟁점
원고가 위 통지를 받은 후 소송위임 의사를 밝혔고, 해고의 효력이 발생한 2009년 9월 17일 이후에 사무실로 찾아와 약정을 한 후 준비하여 9월 28일 해고무효확인 및 원직복직 시까지의 임금의 지급을 구하는 소장을 접수했다. 피고 측의 형식적인 답변서만 제출된 후 2010년 1월 22일로 기일이 잡혔다. 법정에 가서야 피고 측이 제출한 정식 준비서면을 받을 수 있었다. 대형 로펌을 포함해서 피고대리인들은 준비서면을 기일에 촉박하게 제출함으로써 원고 측으로 하여금 방어 준비를 하는 데 애를 먹게 하는 전술을 사용한다. 동업자(同業者) 정신이 실종된 것이 아닌가 싶어 아쉬운 점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 사건에서 쟁점은 △원고와 피고 사이의 특수임용계약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일반임용으로 전환을 예정한 것이므로 원고에게는 소정의 절차에 따라 일반임용될 수 있으리라는 정당한 기대권이 인정되는지 여부, 그리고 해고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여부와 관련하여 △ 원고가 원장의 특정 연구 수행 지시를 거부한 것을 원장의 정당한 업무지시에 대한 거부로 보아 근무실적이 우수하지 못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는지, △원고가 피고의 경영설명회에 불참하거나 참석하더라도 국민의례를 거부한 것을 근무실적이 우수하지 못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는지, △원고에 대한 2008년 직군평가 결과를 근무실적이 우수하지 못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있는지 등이었다.
원고를 해고했던 원장은 국회에서 공개적으로 헌법의 노동3권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혀 물의를 일으켰다가 임기 도중에 원장직을 퇴임했다. 장기간 파업을 하던 노동조합은 원장의 퇴임 후 파업을 풀고 업무에 복귀했다. 피고 측은 원장 직무대행을 증인으로 신청하여 2010년 4월 16일 기일에 증인신문을 했다.
1심 판결의 선고
2010년 5월 14일 1심 판결(서울남부지방법원 2009가합21769 판결: 재판장 판사 강인철, 판사 강지웅, 판사 한지형)이 선고되었는데 원고가 전부 승소했다.
원고에게 일반임용에 대한 정당한 기대권이 인정되는지 여부에 대하여 피고의 인사규정 등에 따르면 일반임용의 절차 및 요건에 관한 근거규정을 두고 있다고 봄이 상당하고, 원고가 미국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피고에 임용된 점, 임용 당시 피고의 인사규정에 정한 요건들에 관하여 인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쳤던 점, 피고 설립 이래 박사학위 소지자 이상을 대상으로 한 연구원 중 일반임용되지 않은 사례는 없었던 점 등을 고려하여 원고에게는 특수임용계약기간 종료 후에 연구실적이나 근무실적이 우수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일반 임용될 수 있으리라는 정당한 기대권이 인정된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원고가 피고의 경영설명회에 불참하거나 참석하더라도 국민의례를 거부한 것을 근무실적이 우수하지 못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민의례 거부에 대한 판단 부분이 의미 있다. 대한민국국기법과 국기게양·관리 및 국민의례에 대한 지침 등을 고려하면 국기에 대한 경례나 국기에 대한 맹세는 국기를 존중하고 애국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것으로 국가가 관계법령을 통하여 국민에게 요망하고 있는 행위이기는 하나 이를 엄밀한 의미의 법적인 의무라고 보기는 어렵고, 대한민국 국민이 국기에 대한 경례나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였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이를 이유로 그에게 어떠한 제재를 가하거나 불이익을 줄 수는 없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나 국기에 대한 맹세 모두 국가를 사랑하고 국가에 헌신하고자 하는 내면의 양심을 국기를 매개로 하여 경례나 맹세문의 낭독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외부에 표현하는 것인데, 그 거부를 이유로 제재를 가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것은 결과적으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될 여지가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장이 박사급 연구원인 원고에게 일방적으로 연구 과제를 부과하는 것이 정당한가와 관련하여 박사급 연구원이 수행하는 연구가 타인에 의하여 강제되어서는 그 효율성 및 연구결과의 타당성을 담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인정하고 원고가 합리적인 이유로 거부의사를 밝혔음에도 재차 그 과제수행을 요구하는 것은 연구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침해한다고 보아 원장의 일방적인 연구 수행 요구는 정당한 업무지시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및 상고심의 진행
원고에 대한 해고가 원장의 무리수였고, 이러한 점이 1심 판결에 의하여 워낙 명확하게 확인되었기 때문에 피고가 항소를 포기하고 원고를 원직에 복직시키고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할 것으로 기대했다. 피고는 노동 관련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 아닌가? 해고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체면을 위해서라도 항소를 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피고는 그런 기대를 보기 좋게 깨고 항소를 제기했다. 1심 판결 중 대세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사실관계를 애매하게 인정한 한 부분을 물고 늘어졌다. 1심 판결은 임금에 대해 가집행을 붙여 주었다. 항소심 재판이 길어지자 원고가 임금을 가집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집행문을 부여받은 후 피고의 주거래은행 계좌를 압류 및 추심해서 결정이 송달되자 피고는 당시까지의 급여를 즉시 지급해주었다.
항소심에서는 두 차례씩 준비서면을 주고받은 후 2010년 10월 15일 변론기일이 열렸고, 11월 5일 한 차례 더 변론기일을 진행한 후 12월 10일 판결이 선고되었다. 2심 판결(서울고등법원 2010나60488 판결: 재판장 판사 황병하, 판사 이종림, 판사 장경식)은 1심판결을 인용한 후 항소심에서 피고가 추가로 주장하는 부분에 대하여 매우 상세한 이유를 적시하여 피고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 정도 됐으면 피고가 상고를 포기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대리인을 대형로펌으로 교체하여 상고를 했다. 순전히 면피용인가? 새롭거나 획기적인 상고이유가 나올 리 없다. 1, 2심 판결이유를 근거로 해서 답변서를 정리해서 제출하고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 선고를 기다렸다.
답변서를 제출한 것이 2011년 2월 21일인데, 기대했던 대로 4월 14일자로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2011다4230 판결, 대법관 전수안(재판장) 김지형 양창수 이상훈(주심)}이 선고되었다. 심리불속행 기간 판결이 이 사건에서는 반가웠지만, 20명이 넘은 인원이 정리해고 되어 치열하게 다투며 상고한 사건도 같은 날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되어 우리가 패소했다. 판결이유도 받아보지 못한 사건에서는 가슴이 답답했다.
해고된 후 1년 7개월 만에 대법원까지 모두 끝났다. 재판의 속도가 많이 빨라진 편이다. 대법원에서 심리불속행된 것이 기간을 단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심리불속행 제도는 양면의 칼이다. 속도는 신속하게 하면서도 이유를 설시하여 불신을 극복하는 묘수는 없을까?
피고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 핍박을 받아 노동부 용역이 거의 끊기다시피 해서 재정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직원들에 대한 급여도 감액하는 등의 비상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원고의 경우에는 해고 기간 중의 급여를 판결에 따라 전액 지급받았다. 비상식적인 기관장에 의하여 부당하게 해고된 원고가 겪은 정신적·경제적 고통은 물론이고 노동에 관한 정부출연 연구기관이 겪은 대외적인 위상 실추와 내부적인 갈등은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보상을 받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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