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종을 누르고 현관을 들어서자 열 살 성준이와 두 살 아래인 여동생은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아마 초록색 복장을 한 그린 산타의 모습이 낯설었나 보다. 산타 노릇을 처음 해본 나는 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약간 당황했다.
24일 하늘은 짙은 어둠으로 변한 저녁 7시께, 10년째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는 성준이가 사는 용인 기흥의 아파트를 찾았다. 왕초보 그린 산타의 첫 경험은 이렇게 시작됐다.
▲ 환경 산타가 건넨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성준이(오른쪽)와 여동생(왼쪽). ⓒ환경보건시민센터 |
초록 산타의 등장에 아이들은 그림 선물
성준이 엄마와 아빠 모두 산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물 꾸러미를 주니 이이들이 좋아라고 뜯어보았다. 루돌프 머리 장식과 빨간 코를 본 아이들은 머리에 이를 쓰고 사진을 찍으며 좋아했다. 그리고 마구 질문을 해댔다. "루돌프는 어디에 있어요?" "산타는 빨간색 옷을 입는데 왜 아저씨는 빨간색 옷을 입지 않았어요. 산타가 아니죠? 수염도 없잖아요." 아이들에게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해야 했다.
"루돌프는 서울에서 오느라 지하주차장에서 쉬고 있어." "원래 산타는 핀란드가 원조인데 소나무 색깔인 녹색이란다. 미국에 와서 빨간색으로 변한 것이야. 원조 산타는 녹색 옷을 입고 다녀. 아저씨는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산타야. 서울에서 15분 만에 루돌프를 타고 순식간에 왔어."
성준이 엄마 권미애 씨도 거들었다. "산타 아저씨는 오늘 너희들 만나느라고 일부러 수염을 모두 깎고 왔어."
선물을 받은 성준이가 두 번 접은 하얀 종이를 준다. 가장자리에 구멍이 주르륵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스케치북을 한 장 뜯은 모양이다. 펼쳐보니 산타와 루돌프가 나란히 서 있는,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산타는 빨간색 복장에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콧수염과 턱수염은 회색으로 큼지막하게 그려놓았다. 루돌프 사슴은 하얀 눈과 빨간 코만 빼곤 모두 갈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여동생도 이에 질세라 리본으로 예쁘게 맨, 둘둘 만 종이를 건넨다. 리본을 풀고 펼쳐보니 역시 빨간 모자에 빨간 옷을 입은 산타 할아버지가 흰 수염을 한 모습을 그렸다. 보라색 루돌프를 데리고 와서는 인형을 주는 모습을 앙증맞게 그려놓았다. 아이들은 빨간색 옷을 입은 흰 수염의 산타가 올 것으로 생각하고 그림까지 그려놓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초록색 복장을 한, 수염도 나지 않은 아저씨가 왔으니 처음 만났을 때 "산타가 아니야!"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여동생은 인형을 받고 싶어 그림에까지 그려놓았는데 준비해간 선물꾸러미에 인형이 없었으니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불찰을 뒤늦게 후회해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흰 티셔츠와 수면 양말, 그리고 돌고래가 예쁘게 그려진 어린이 우산 등이 내가 가지고 간 선물이었다. 흰 티셔츠에는, 그린 디자이너로 유명한 국민대 윤호섭 명예 교수가 무독성 페인트로 직접 그린 돌고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신나 하는 아이들을 보고 잘 못 부르는 노래지만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하며 노래를 몇 소절 불렀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루돌프 뿔 머리띠 장식을 머리에 꽂게 한 뒤 사진도 찍어주었다. 성준이가 "아저씨는 많이 본 아저씬데요. 텔레비전 촬영할 때도 본 것 같아요." 라며 친근감을 나타낸다. 성준이와의 만남은 지난 7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환경 조사 때를 비롯해 그동안 대여섯 번쯤 돼, 얼굴을 기억할 정도가 된 것 같다.
두 번째 피해자 방문 집에 가기 위해 현관을 나서려 하자 여동생은 다시 말을 건넨다.
"산타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잠든 뒤에 와서 선물을 주는데 아저씨는 우리가 자기도 전에 와서 선물을 주는 걸 보니 산타가 아닌 게 맞죠?" "산타 맞아. 오늘 아저씨는 가장 바쁜 날이야. 다른 아이들에게도 선물 주러 가야 해. 이 집 어린이가 정말 착하다고 아저씨가 오늘 가장 먼저 이 집에 온 거야."
아이들은 이처럼 티 없이 맑았다. 그런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이 엄청난 상처를 준 것이다. 성준이는 생사의 갈림길까지 갔었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뛰어놀지를 못했다. 그 긴 투병 생활을 하면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그래도 늘 표정은 밝은 것 같아 좋았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껏 들뜬 성준이와 여동생, 그리고 부모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않고 산타를 자청한 보람을 느꼈다.
씩씩한 기우를 보며…가장 보람찬 크리스마스이브!
기흥에서 수원 권선동으로 가는 길은 10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여서 그런지 차가 막혔다. 20~30분이면 되려니 생각했지만 40분 넘게 걸렸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갈 기우네로 향했다. 기우는 엄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렸을 때 이미 엄마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20평도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관사 아파트에 사는 기우는 주로 할아버지와 지낸다. 아버지는 아침에 출근해 저녁때가 되어야, 때론 밤늦게 오기 때문이다.
▲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엄마를 잃은 기우 군과 하늘나라로 간 며느리 대신 손자를 돌보는 친할아버지 이영복 씨. 이영복 씨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대책을 촉구하는 국회 모임에도 여러 번 참석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
기우는 한창 말을 배울 나이에 엄마가 곁에 없어 아직도 의사 표현이 서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열심히 이런 말 저런 말과 질문을 나에게 해댔다. 그리고 선물로 가져간 우산도 몇 번씩이나 폈다 접었다 했다. 우산과 함께 준 호루라기도 불기도 했다. 잘 불어지지 않자 할아버지가 부는 법을 가르쳐준다. 아이(기후도 피해자다)의 건강 상태를 물어보았다.
할아버지는 힘 있는 목소리로 키도 요즘 본격적으로 크기 시작하고 몸무게도 이전보다 많이 늘어났다며 많이 건강해졌다고 한다. 정말 다행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천진난만한 아이의 몸과 마음이 정말 무탈해야 할 텐데'하고 마음속 기도를 올렸다.
작별하려 하자 기우가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그리고 정확히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뭐라 뭐라고 한다. 아마 나와 함께 더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곗바늘은 이미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우 아빠가 아파트 1층 주차장까지 내려와 이렇게 찾아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배웅을 해준다. 차를 몰고 집으로 오는 내내 태어나서 가장 보람 있는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냈다는 기쁨이 내 몸 구석구석의 모든 세포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 코에 산소 호흡기를 찬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신지숙 씨와 딸 정아 양. 환경 산타가 건넨 산타 모자를 쓰고 즐거워하고 있다. 산모였던 지숙 씨는 천만다행으로 건강한 정아 양을 낳았다. 비용도 큰 문제지만, 폐 이식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인데 수술을 견뎌줄 체력이 못돼 폐 이식을 못하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
환경 산타를 소개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크리스마스는 이제 모든 사람의 가족과 연인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갖는 날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사회 각계에서 소외받고 힘든 한 해를 견뎌온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환경 피해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많은 어린이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건강을 해쳤습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12월 17일 환경피해시민대회를 진행했습니다. 이어 12월23일과 24일에 가습기 살균제 사건 피해자 어린이와 가족 그리고 병원에 입원 중인 석면 피해자를 방문하여 소정의 선물을 전달하면서 격려와 희망 그리고 웃음을 선사하는 [환·경·산·타]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2013 환경 산타 참가자들 안종주, <침묵의 살인자 석면> 저자 임흥규, 환경보건시민센터 팀장 조수자, 환경보건시민센터 공피해자지원위원장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 최현주, 태강삼육초등학교 5학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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