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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의 몸, 한국민주투쟁사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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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의 몸, 한국민주투쟁사의 기록

[기고] '김근태 온라인 아카이브'를 출범하며

오늘(12월 30일)은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만 2년이 되는 날이다. 우석대학교 김근태민주주의연구소는 김근태 2주기를 맞아 그가 온몸을 바쳐 실천하려 했던 민주화운동의 기록들을 한자리에 모아 후대에 남기기 위한 작업(김근태 아카이브)을 시작한다. 김근태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과 기억과 기록들을 갖고 계신 분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바라며, 생전에 김근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최상명 우석대학교 교수(김근태 민주주의연구소 소장)의 글을 싣는다. 편집자

공소의 김근태, 국가폭력과 인권유린을 기억했던 몸, 국가폭력과 인권유린을 돌파했던 몸, 고문피해자 김근태, 우리의 전선이 시장에 있다던 김근태, 평화가 밥이라던 김근태, 파킨슨 김근태, 떠난 후 민주주의자가 된 김근태!

김근태를 떠올리는 우리들의 기억구조는 몇 가지 길항의 혼란에 빠져든다. 진보적 이념의 타협 없는 원칙론자 김근태에서 동자승의 환한 미소로 따뜻하게 손잡아주던 영원한 '근태兄'의 모습이 번위한다. 김근태는 한국 민주화의 자랑스런 얼굴이자 동시에 파킨슨의 어눌한 그의 몸은 우리 민주화의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이 살아 낸, 그의 몸이 실천한 역사를 오롯이 기록할 때, 비로소 우리의 기억구조의 길항이 한 궤를 향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 기록이 김근태와 한국 민주주의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대 정치의 실종과 시대적 혼란 속에서 김근태와 같은 민주주의적 리더십 부재를 아쉬워하는 정치권 인사가 많다. 나아가 김근태 정신을 계승하자는 토로가 이어진다. 그러나 정작 김근태 정신이 무엇인지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내재화된 말인지를 물으면 이내 얼굴이 붉어진다. 여기에 글을 쓰는 필자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근거리에서 그와 함께한 몇 편의 기억과 기억의 저편에 섰는 단상 몇 가지로 우리가 김근태를 이해하고 계승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김근태를 기억하는 일, 김근태가 이루고자 했던 일을 오롯이 밝혀내는 일, 그 일들은 우리 현대정치사의 중요한 민주주의 역사요, 인권신장의 기록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분명 그것은 김근태의 정체성에 머무는 것이 아닌, 김근태가 살아 낸, 김근태가 이뤄낸 시대의 정체성과 호흡하는 일이라 단언한다. 이 일은 김근태의 '살아남은 자들'이 민주주의와 역사를 위한 양심의 첫 걸음이다. 김근태에 대한 오해 없는, 올바로 김근태가 이해되는 경로를 마련하는 것은 그래서 우리의 의무로 나서게 되었다.

이 글은 '김근태 온라인 아카이브'의 시작을 알리는 글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김근태에 대한 기억이 파편화 되는 것이 아닌, 기억이 기록으로 모아져 비로서 그의 통찰이 우리에게 온전히 전달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이다. 읽는 이들의 김근태에 대한 애정과 그 애정이 작은 김근태의 기억이라도 아카이브에 전달되기를 희망한다. 김근태 온라인 아카이브의 구축은 김근태의 민주화 업적을 기리는 것은 물론, 그의 정치사상적 업적에 대한 학술연구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김근태 아카이브는 현재 김근태에 대한 기록이 수집되어 보관되고 있는 민주화운동 기념 사업회와 우석대학교 김근태 민주주의 연구소 및 김근태 재단이 협력하여 구축될 것이며, 김근태 온라인 아카이브는 현재 나누어 보관중인 기록을 김근태 민주주의연구소 홈페이지(www.gtid.or.kr)에 디지털화 하는 작업에 1차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이후 지속적인 수집활동이 전개될 것인데 김근태와 함께한 사진은 물론, 성명서, 메모, 그리고 잊혀 지지 않는 기억도 구술로 수집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민주화의 역사가 김근태와 함께 미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의 끈을 모으자!!!

여기에 김근태에 대한 기억의 단상을 제공하는 몇 가지 기록을 소개한다.

ⓒ프레시안(최형락)

고문피해자 김근태!

#1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본인은 지난 9월 한 달 동안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검사 제지) 본인의 이 사건은 지난 9월 한 달 동안 남영동에서 있었던 비인간적이고, 불법적인 고문에 의해 그리고 동물적인 능욕과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생명에 대한 위협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진실이 밝혀지고 사법적 정의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존업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본인에게 가해졌던 참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이러한 고문이 조사되고 색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몸에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먼갈아 가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이때 마음 속으로 '무릎을 끓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방청석이 울음바다가 되고 심지어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라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때 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성의 절망에 몸서리 쳤습니다."
(1985년, 12월 19일 오전 10시, 서울지방법원 118호법정, 재판장 부장판사 서 성, 담당검사 김원치, 변호인 김상철, 홍성우 등, 우리나라 공판사상 최초로 모두진술 제도를 활용하여 자신이 당한 고문피해에 대해 진술한 내용 중에서)


1985년 8월 24일, 김근태는 서울대 민추위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연행되고 구류를 당했다. 9월4일 구류에서 풀려나 서울 서부경찰서를 나오던 중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된다. 이날로부터 23일동안 10회에 걸쳐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을 당했다. 9월 26일 검찰로 송치되던 날 오후 2시30분, 검찰청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인 인재근이 가까스로 남편과의 대면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때 김근태는 말했다."인재근 나 당했어, 무지하게 당했어" 그러면서 그는 그가 당한 고문의 사실을 복도를 지나 검사에게 가는 찰라의 순간에 번득이는 기억의 전부를 인재근에게 설명했다. 증거로 그가 당했던 전기고문의 후유증인 발뒤끔치의 피딱지를 인재근에게 건넨다. 인재근은 이내 김근태의 고문사실을 국내외에 알리고 11월 11일 김대중, 김영삼이 참석하는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의 항의 농성을 시작한다. 그리고 1985년 12월 9일 변호사 접견이 비로소 풀리고, 19일 첫 공판이 시작되었다.

19일 첫 공판에서 김근태는 우리나라 법정사상 최초의 모두진술을 활용했다. 너무도 차분히, 그리고 너무도 창백하게, 몸서리치는 기억 속에 토해 낸 김근태의 고문피해의 육성이 역사 밖으로 퍼져 나갔다. 1985년 대한민국, 군부독재 치하의 국가폭력은 김근태의 피 토하는 법정 육성(모두진술)을 통해 그렇게 국내외에 알려졌다. 그때 김근태가 마음 속으로 부른 노래 '무릎을 끓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인간의 존엄을, 인간이 살아 있음을, 인권의 소중함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었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과정을 법정에서 모두진술을 통해 끝까지, 때론 숨차고, 때론 피가 거꾸로 솟는 치욕을 억누르며 진술함으로써 대한민국 인권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김근태에게 빚지고 살게 된 이유가 되었다.

김근태는 이때부터 해마다 9월을 전후해 한차례씩 심하게 앓았다. 고문 후유증은 훗날 김근태의 파킨슨씨병으로 이어졌다. 1987년 감옥에서 김근태는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부인 인재근과 공동으로 수상했다. 1988년에는 독일 함부르크 재단이 김근태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했다. 남영동의 대공분실과 정의롭지 못한 법정과 김근태의 몸만을 가두었던 그 감옥안에 있었던 김근태의 2년 9개월, 그동안 세상 밖에서는 고문피해자 김근태는 인권운동의 상징이자 민주주의 실천자로 국내외에 우뚝 서 있었다.

공소의 김근태!

65학번인 김근태는 67년 대통령 부정선가 규탄시위로 연행되었다. 이때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다. 복학 후 71년 교련반대데모, 대통령선거 파동 등으로 수배생활을 시작했다. 수배 중에 대학을 졸업했다.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연속 수배를 당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저격사건 때까지 피신했다. 길고 긴 수배생활 중에 많은 동지들이 투옥되었다. '971년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으로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이신범은 투옥돼 옥살이를 했고 김근태는 지명수배를 받아서 피신했다. 이때부터 김근태에게 별명이 붙었다. '공소의 김근태'다. 그렇게 김근태의 대학과 청년시절은 수배와 피신, 공소의 김근태로 위정자들에게 각인되며 지나갔다.

민청련 김근태!
#2 '감히 말씀드리면 그것이 87년 6월항쟁으로 가는 출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초반 당시에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캠퍼스 내, 학교 내에서 시위하고 집회하고 감옥살이하거나 제적당해서 군대 가거나 바깥사회로 축출당하는 청년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 청년들이 부글부글해서 일부는 사회과학 출판사로 가서 활동했는데 그러고도 차고 넘쳤죠. 광주항쟁 이후 슬픔과 분노는 조금 잦아들기는 했지만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가슴 속에서 내연하고 있었고요. 전두환 정권이 이제 다 장악했으니까 자기들이 좀 풀어줘도 된다는 유화국면을 조성했어요.

그때 이걸 뚫고 가야 된다는 의견들이 당시 청년들의 일부에서 만들어지고 저도 이건 돌파해야 된다, 민주주의 요구는 국민들 가슴 속에 타오르고 있다는 판단을 해서 공개적인 조직을 공개적으로 출범시킨 거죠. 사람들이 모여서 민청련이 만들어졌고 민청련이 만들어진 1년 후에 민추협이 만들어졌습니다. 민청련이 만들어진 이후에 민통련도 만들어지고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도 만들어지고 하면서 각 영역에, 각 지역에 공개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감히 말씀드리면 그것이 87년 6월항쟁으로 나아가는 출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9월 16일, 폴리뉴스 창간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김근태, 폴리피플 김능구 대표와 인터뷰 기사 중에서)


재야의 대통령 김근태!
#3 '민주화운동에 대한 권력의 탄압수단으로 지겹도록 사용돼 온 국가보안법·집시법이 공소장에 그대로 나열되어 있는 것은 차라리 하나의 희극이다'


"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에 대한 권력의 탄압수단으로 지겹도록 사용돼 온 국가보안법·집시법이 공소장에 그대로 나열돼 있는 것은 차라리 하나의 희극이며, 고문경관 이근안은 1년 6개월이나 행방이 묘연하고 다른 고문경관 4명은 불구속상태에서 재판을 받는데도 고문피해자가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비극이다. 권력유지를 획책하고 있는 지배세력의 음모를 폭로·규탄했다는 이유로 나를 이 자리에 다시 끌어 세운 것은 명백한 정치적 보복'이며, 기만적인 공소장 내용을 두고 더 이상 다툴 의사가 없어 헌법상의 재판받을 권리를 포기하겠다"
(1990년 7월 20일, 전민련 결성 선언문 및 범민족 회담 개최제의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공판1차 모두진술 중에서)

1988년 6월 30일 만기출소한 김근태는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창설에 참여하여 정책실장을 맡는다. 1990년 3월에는 전민련 2기 대의원대회에서 집행위원장을 맡게 된다. 이때부터 김근태는 '재야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만큼 당시의 민족민주운동세력(소위 재야세력)의 기운이 대단했다. 특히 1990년 1월에 단행된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야합의 3당 합당으로 재야와 집권세력의 새력전은 거대한 판갈이 싸움을 예고하고 있었다.

집권세력은 전민련의 위력에 대해 불안해 했다. 명분과 민심이 자신들을 떠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재야의 결집에 불안 해 했고, 특히 전략가이자 재야의 대통령이라 불린 김근태를 눈에 가시처럼 여겼다. 그러던 1990년 5월 9일, 6월항쟁 이후 최대의 시위로 기록된 '민자당 해체 및 노태우 정권퇴진 국민 궐기대회가'가 있었다. 이를 주도한 혐의로 김근태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다. 그러나 그는 그 시위 현장에 없었다. 5월13일 제주 YWCA에서 시국강연을 한 후 다음 날 제주의 친척집에서 검거되었다.

1990년 5월 13일 민자당 반대시위와 관련, 집시법으로 구속된 뒤 6월 9일 전민련 결성 선언문 및 범민족 회담 개최 제의 관련, 국가보안법이 추가 적용되어 구속 기소된 후, 7월 20일 1차 공판 모두진술 발언을 통해 자기변호권을 포기하고, 법정진술을 거부한 체 법정을 떠나버린다. 서울지검 공안부 문성우 검사는 김근태와 변호인단, 방청객들이 모두 퇴정한 후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구형했다. 인권운동의 상징인 김근태의 선택은 1985년 12월 공판 때와 달랐다. 김근태는 자신을 법정에 세우는 법(국보법과 집시법) 자체가 불법이고 비인권적임을 재판거부를 통해서 웅변한 것이다. 또한 사법정의가 올바로 서 있지 않는 사법부에 대한 일갈이기도 했고,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에 관한 경종이기도 했다.

#4 '부조리한 사회에 눈감고 현실을 외면하는 우리의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거대 국가폭력 앞에 인간은 나약하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지는 거다. 불법체포와 구금의 현장에서 정신 차리고 싸워라! 법정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모두진술권, 변호권을 확실히 구사하라!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으면 지금 나를 체포하고 감금하고 재판정에 세우는 이 사실이 불법임을 또 싸워야 한다. 부도덕한 정권, 정의롭지 못한 법정, 권력의 시녀 검찰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부조리한 사회에 눈감고 애써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우리의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2009년 11월 3일,전남대학교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 사상 대강좌'에 초청, 시국강연중에서)


이날 김근태는 이명박 정부에 대해 "김제동, 손석희 씨가 중도하차 했지만 옛날처럼 미운털이 박혀서 구속되지는 않았다"며 "지난 군사독재시절보다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탄압하고, 억압하기 때문에 분노는 잘 조직되지 않고 분노가 폭발했다가도 이 정권의 저강도 전략과 친서민 행보에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한다"고 우려했다. 특히 이 같은 저강도 전략이 "효과적으로 비판자, 반대세력에게 집중타격을 가하는 방법이자, 분노와 항의의 폭넓은 연대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규정하고 "이 정권의 교활한 저강도 전략을 국민에게 폭로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에 맡길 수 없는 것들이 있다던 김근태!
#5 '우리의 전선은 시장에 있다'


민주적 시장경제 : "1998년도에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사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배정되었다. 거기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두 수레바퀴로 합의를 구하자'는 주장을 당선자가 했는데, 당선자가 없는 자리에서 '민주주의와 민주적 시장경제'라고 하자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혼자 주장하다 물러서고 말았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시장경제,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불안전성 이런 것을 다른 수레바퀴인 민주주의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즉, 시장이 가진 폭력성을 경제시스템 내에서 제어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민주적 시장경제다."
(2011년 7월, 프레시안, 자유인 인터뷰 중에서)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계급장 떼고 토론하자! : "당정, 당청 간에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공공주택 분양가 문제와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하여 결론을 도출할 때, 여타의 다른 문제들을 쉽게 갈 수 있다.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 그리고 나서 질서를 고려하자.

(중략)

일부에서 말하는 시장논리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공공주택 공급은 서민을 위한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이를 일반 기업의 이윤창출 논리와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것 역시 정당하다. 그런 차원에서 공공성을 중심으로 사고할 때 공공주택의 분양원가를 공개하는 것을 전향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분양원가 공개관련, 2004년 6월 14일, 성명, '소리 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중에서)


의료법인 영리법인화 반대 : 2005년 12월 어느 토요일, 한반도재단의 격주 토요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장관직을 그만두면 여의도로 돌아와 당의장에 출마하려는 논의를 했던 회의였다. 회의를 마치고 우연히 회의실에 김근태 의장과 단둘이 맞이했다. 내가 이야기를 꺼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세요?', '당신이 평가해 봐', '소록도를 찾아가 나환자의 손을 직접 잡아주시고, 에이즈 환자와도 직접 손을 잡으며 위로하고 격려하고, 잊고 살았거나 아니면 모르고 살았던 원폭피해자 2세들도 최초로 방문하시고, 또 루게릭 등 희귀병환자들의 사회적 관심도 유도하셨으니 세간의 평가는 좋을 듯 합니다'라고 분위기를 띠웠다. 잠시 웃음 짓던 김근태 의장에게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최상명! 에이즈보다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알아? 생명을 다루는 의료기관에 시장바이러스가 들어오는 거야, 난 그렇게 느껴, 언제가는 경제관료들 논리에 의료법인 영리법인화가 되겠지? 내가 보건복지부를 떠나면서 제일 걱정 되는게 그거야. 내가 있을 땐 그래도 경제관료들하고 맞서 싸우기도 했는데...

다음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검토되는 사람이 유시민 이라지? 그런데 유 의원이 의료법인 영리법인화를 찬성한다고 시민단체가 벌써부터 반대하겠다는 얘기를 들었어. 좀 불안해, 한곳에서 열리면 결국 다 열리잖아? 그래서 제주도나 경제자유구역 등 예외적이라는 논리를 거부했던 건데..
."(격주 토요모임, 한반도재단 회의를 마치고 난 후 회의실에서의 대화, 2005년 12월 어느 토요일)

동인모임, 신자유주의 대안을 마련해야 해! : 2007년 대선에서 지고, 2008년 총선에서 낙마한 김근태는 2009년, 민주정부 10년의 신자유쥬의적 국가시스템 운용을 성찰하고, 2008년과 같은 금융공황을 헤쳐갈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공부모임 '동인'을 구성하였다. 준비되지 않은 수권은 또 한 번의 국민적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치적 구현방도로서그는 민주대연합을 선택했다. 민주재연합은 김근태의 정치기조이고 민주주의 실현방안이며, 경제민주화의 구현요소였다.

평화가 밥이라던 김근태!
#6 '평화가 밥이다'


"평화가 유지돼야 경제를 운영할 수 있습니다. 분단국가이자, 정전협정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는 '평화가 곧 밥'입니다. 평화가 깨지면 경제가 흔들립니다. 밥그릇이 깨지는 것입니다."
(2006년 10월 개성공단 방문성명 중에서)

"동아시아 협력에 관련해서 한국과 중국 일본은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이다. 천안함 사건 이후 일본의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가 좌절되었다.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에 의한 후쿠시마 원전 사태도 만약에 편서풍이 아닌 편동풍이 불었다고 한다면 한반도와 중국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2008년 미국의 금융회사 리먼브러더스 도산 이후 한국의 경제지표는 그나마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수출시장으로서 중국시장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을 고려하여 국제관계에 대한 정책을 고민하고 수렴해 나아가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동아시아 내에서 패권적 경쟁을 하게 되면 현재의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년 총선과 대선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협력과 공존, 번영의 시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정권이 되어야 한다. 6자회담과 같은 채널을 통해서도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그것을 디딤돌로 활용할 수 있는 고민도 함께 해야 한다." (2011년 7월, 프레시안, 자유인 인터뷰 중에서)

민주주의자 김근태!
#7. '민주주의정신은 두꺼비다'


"민청련의 상징인 두꺼비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다. 두꺼비가 뱀한테 잡아먹히면 자기는 죽지만 그 뱀도 두꺼비 독에 쏘여서 뱀도 죽는데 두꺼비 새끼들이 그 속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해서 새롭게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탄압을 받아서 죽겠지만 이것이 한국에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하는 데 불가피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희생을 결단하자는 상징으로 두꺼비를 내세웠습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장례식 당일, 장지인 마석 민주공원에 겨울 산골짜기를 휘돌고 있는 바람 속에서 김근태의 음성은 분명 귓전을 맴돌았다.

2011년 12월 30일, 김근태는 고문후유증으로 발병한 파킨슨병을 이기지 못하고 뇌정맥 혈전증으로 고되고 힘든 삶을 마감했다. 그해 겨울 장례위원회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첫 단어가 민주주의라는 점과 그의 삶의 방식이 민주주의원리에 충실했던 점을 기려 그를 민주주의자로 기억할 것을 제안(결정)했다. 그렇게 시대를 정면으로 살아 낸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모란공원에 묻혔다. 그렇게 민주주의자의 삶이 역사로 기록되게 되었다.

※김근태 아카이브에 제공할 기록과 기억을 주실 분들은 우석대학교 김근태 민주주의연구소나 김근태재단으로 연락바랍니다.

김근태민주주의연구소 : 063-290-1369, 010-5397-2114
김근태재단 : 02-720-9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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