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위기, 단축 조업으로 극복
당시 독일의 경제 위기는 금융 부문보다도 특히 제조업 부문에서 훨씬 더 심각했다. 독일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교역 국가로 경제의 상당 부분을 수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들이 금융 위기에 따른 어려움으로 갑자기 수입 물량을 대폭 줄였기 때문이었다. 2008년 독일의 수출 총액은 약 1조 유로(약 1500조 원)로 국내총생산(GDP) 약 2조 5000억 유로(약 3750조 원)의 40%에 달했다.
이처럼 수출 관련 수주 실적이 갑자기 줄어들자 자동차, 철강, 화학 산업 등의 분야에서 다수의 기업이 공장 가동을 놓고 당장 큰 곤란에 빠졌다. 기업의 구조조정 등 대량 해고와 그에 따른 실업 증가 및 극심한 노사 갈등이 예상됐다. 그런데 대량 해고도, 실업 증가도, 노사 간 갈등도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기업들이 단축 조업을 했기 때문이었다.
단축 조업이란 갑작스러운 경기 침체 등으로 수주 실적이 급감함에 따라 기업이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를 해고하는 대신에 전체 또는 일부 노동자들의 정규 노동시간을 일시적으로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제도를 시행할 경우, 노동자들은 다소의 임금 손실을 감수해야 하지만 구조조정 등에 따른 해고를 피할 수 있고, 기업은 경영의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지만 숙련된 종업원을 계속 고용할 수 있다. 동시에 기업의 노하우 유출도 방지할 수 있다. 또 노사는 정부에서 단축 조업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단축 조업 지원금이란 노사가 합의하여 단축 조업을 할 경우, 연방노동청(BA)이 기업을 대신하여 단축 조업으로 인한 노동자 급여의 감소분을 채워주는 지원금을 말한다. 다만 이 지원금은 손실분 전액을 보충해주는 것은 아니고, 단축 조업에 따른 급여 부족분의 60~67%(부양가족이 있을 경우 67%)를 지원한다. 이 지원금의 지급 기간은 기본적으로 6개월이지만, 상황에 따라 24개월까지 연장할 수 있다.
2009년 3월 연방노동청에 접수된 단축 조업 노동자 수는 약 2만4000개 기업의 67만 명에 달했으며, 금융 위기가 시작된 2008년 10월 이래 총 215만 명으로 이는 독일 역사상 기록적인 숫자였다. 단축 조업은 주로 기계 설비 분야와 자동차 업계에서 시행되었는데, 기계 설비 분야는 3월에만 약 9만 명이 신청하여 최고를 기록하였고, 자동차 업계는 종사자의 절반가량이 단축 조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현재 4년 넘게 진행 중인 쌍용자동차의 대량 해고 사태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는데, 독일처럼 노사가 합의하여 단축 조업을 했더라면 현재와 같은 극심한 갈등 사태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 쌍용자동차 범국민 대책 위원회 회원들이 9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 중앙지방 법원 앞에서 열린 '김정우 전 지부장 구속 판결 및 손해 배상 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지난 2일 서울중앙지법은 중구청의 행정 대집행을 방해하고 공무원들을 폭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정우 전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에게 징역 10월을 선고했다. ⓒ연합뉴스 |
노조에 적대감은 없다…연대에 친숙한 독일인들
독일에서 노사 간 대립이나 갈등이 심하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나, 먼저 노동이나 노동자, 노조를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적대적이지 않고 우호적이라는 데서 찾고 싶다. 다음은 노조의 성격이 산별 노조인 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노조가 한 개별 기업 내 노동자들의 권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산업 내 전체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더 공정한 소득 분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귀족 노조'나 '노노 갈등'이란 말은 들어보지 못한 반면, '연대'라는 말이 항상 생활 주변에 가까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국가의 중립적 입장도 노사 양측으로 하여금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타협을 하도록 견인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가 내세웠던 '친기업' 정책은 과거 개발 시대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했던 구태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에 노조 지도부가 노조를 무조건 투쟁적으로만 이끌지 않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사측과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가능하니까 그렇겠지만 말이다. 독일에서 노조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처럼 머리띠를 두르고 앞장서 싸우는 투사가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경제 문제나 노사 관계를 열심히 공부하는 연구자가 되는 것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덧붙여 각각의 인재들이 적재적소에 자리하여 안정되고 전문화된 조직 문화도 노사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재 독일노총 위원장은 좀머(M. Sommer)인데, 그는 2002년부터 그 자리를 계속 맡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용자 측의 훈트(D. Hundt)는 1996년부터 독일경총(독일경영자총협의회: BDA)의 회장직을 맡다가 지난 11월 크라머(I. Kramer)가 새로이 후임자가 되었다. 이러한 노사 조직의 안정은 노사 관계에 대한 장기적 전망을 가능케 해준다. 그밖에 해고 보호법이나 잘 짜인 사회 복지 시스템도 노동자로 하여금 극한 투쟁에 나서지 않도록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중요한 의사 결정을 노사가 함께하는 '공동결정제'이며, 이를 통해서 상대를 파트너로 인정하고 갈등이나 대립을 피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제도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노사가 기업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여 모든 것이 투명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서로 감추는 것이 없기 때문에 비리가 발생하기 어렵고 양보와 타협을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상호 신뢰의 결과가 노사정이 조금씩 양보하는 단축 조업도 가능하게 한다고 하겠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독일의 '공동결정제'는 우리의 정치 제도나 문화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논의하겠다.
조성복의 '독일에서 살아보니' - 그들은 왜 노사 갈등이 심하지 않을까 ① 독일의 파업 뉴스 보다가 놀란 사연 ② 독일, 파업 손실시간이 스페인의 35분의 1인 이유 ③ 독일 경영자가 '사회적시장경제'의 핵심으로 꼽은 것은? ④ "제2의 동양 사태 막으려면 '이것'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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