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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이 곧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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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이 곧 정치다

[박동천 칼럼] 대한민국을 '내전'에서 구하려면

조셉 매카시는 1947년에 미국 위스컨신 주의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가 역사에 남긴 가장 큰 족적은 매카시즘이라는 단어인데,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공포와 혐오를 자극해서 무분별한 마녀사냥을 벌이는 수법을 가리킨다. 그는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여성당원들의 모임에서 종이 한 장을 손에 쥐고 흔들며, "국무성에서 일하는 공산주의자 205명의 명단이 여기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1950년대 미국을 뒤흔든 빨갱이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이 소동은 매카시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간 기능 악화로 사망한 1957년 이후에는 잦아들었지만, 문명국임을 자랑하던 20세기 미국의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무지와 야만의 증거로 남아 있다.

1950년대의 소동이 워낙 어이없었기 때문에 매카시즘이라는 단어가 생겼지만, 이런 형태의 빨갱이 마녀사냥은 매카시 이전부터 뿌리가 깊었다. 메이 데이(May Day), 즉 국제노동절의 기원이 된 사건도 빨갱이 마녀사냥의 한 사례였다. <미국 노동조합연맹>은 1884년 10월에 모여 회의를 열고, 1886년 5월 1일을 기해 8시간 노동제가 시작된다고 선포했다. 1886년 5월 1일이 가까워지면서 전국적으로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파업과 시위가 일어났는데, 5월 4일 시카고의 헤이마켓에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던 경찰에게 폭탄이 투척되는 일이 있었다. 이에 대응해서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7명의 경관과 최소 4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 책임을 물어 "무정부주의자"라고 알려진 8명이 기소되었는데, 누구도 폭탄을 투척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7명에게 사형, 한 명에게 15년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수 두 명은 나중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한 명은 옥에서 자살했으며, 네 명은 교수형을 받았다.

아무런 물증 없이 공산주의자나 노동운동가를 불온분자로 취급하는 풍조는 20세기로 접어들어 몇 차례 기승을 부렸다. 1910년대에는 공화당 출신 전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민주당의 현직 대통령 우드로 윌슨 등이 "진보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런 움직임은 사회 전체의 진보적 관심을 자극해서 사회당 후보로 출마한 유진 데브스가 대통령 선거에서 90만 표 이상을 획득하기도 했다. 진보 세력의 이와 같은 약진에 대항하기 위한 보수파의 선동 전략으로 "빨갱이" 마녀사냥은 흔한 수법이었다. 뒤를 이어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수정자본주의를 채택했을 때에도, 그와 그의 정책을 "빨갱이"로 색칠하는 수법은 공화당이 즐겨 쓰던 메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미국과 소련이 동맹을 맺자 잠시 잦아들었던 빨갱이 마녀사냥은 미소 대립이 시작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는 등, 안보가 극우파의 장삿속으로 악용될 수 있는 정황이 무르익었을 때, 공명심에 불타는 극우 정상배라면 매카시즘의 수법에 매력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조셉 매카시는 이름을 팔기 위해 그런 정황을 이용한 한 명의 부나방일 뿐이다.

매카시즘은 중세적 마녀사냥의 재판이다. 유럽 중세의 마녀사냥은 "마녀"를 잡아서 문제였던 것이 아니다. 만만한 사람을 아무나 골라 "마녀"라는 혐의를 씌우고,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있는지 없는지를 전혀 따지지 않고 인민재판에 따라 처형했기 때문에 문제였다. 매카시즘이 문제가 되는 구조 역시 이와 정확히 똑같다. "공산주의자"를 잡기 때문에 문제인 것보다는, 누구든지 "공산주의자"로 몰렸을 때 자신을 변호할 모든 수단이 사실상 차단된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매카시즘이라고 부르든 마녀사냥이라고 부르든, 이런 형태의 야만이 종식되려면 사법권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제도를 완비하는 길밖에 없다. A가 B를 "공산주의자"로 몰면서 처벌을 요구할 때, 그리하여 사법부는 두 가지 질문에 관해 진상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먼저 B가 진실로 "공산주의자"인지를 밝혀야 한다. 만약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면, B에게 걸린 모든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선포해야 하며 나아가 A에게 "무고죄" 또는 "손해배상"을 요구할 B의 권리를 인정해 줘야 한다.

만약 B가 "공산주의자"인 것이 사실로 판명된 경우에는, 다시 그래서 B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사법부는 추가로 물어야 한다. 그리하여 처벌하도록 되어 있는 범죄를 B가 구체적으로 저질렀을 때에만 B를 처벌하고, 단지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판시해야 한다.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등, 인간의 내면성을 국가 권력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회는 문명사회가 아니며, 법이 없는 사회와 같기 때문이다.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1950년대 미국에서는 사법부도 시대의 풍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각종 하급심들은 두 말할 것도 없고, 1952년에는 연방대법원마저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는 교사를 해고할 수 있도록 정한 뉴욕 주의 법을 합헌으로 인정했다 (애들러 대 뉴욕 시 교육위원회, 342 U.S. 485). 파인버그법으로 일컬어지던 이 법에 따라, 교육위원회는 교사들에게 "현재 또는 과거에 공산당원인 적이 있었는지"를 묻고서, 답변을 거부하면 곧 "불온한" 조직에 가입한 것으로 간주하여 해고했는데, 이런 관행을 연방대법원이 인정하고만 것이다. 윌리엄 더글러스 판사가 "경찰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6 대 3으로 합헌판결이 났다.

하지만 1957년 6월에는 (판결과 반드시 상관이 있지는 않지만, 매카시는 그 해 5월에 사망했다) 정반대의 판결이 내려졌다. <예이츠 대 미국, 354 U.S. 298>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자아내지 않는 한 단순히 믿음만을 이유로 개인을 처벌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어서 1967년에는 1952년의 애들러 판결을 번복했고, 이에 따라 파인버그법에 의해 해고된 수많은 교사들이 복직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미국 사회가 그나마 가장 야만적인 수준의 매카시즘에서 벗어난 경로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마냥 저절로 진행된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연방대법원의 구성이 바뀌었기 때문에 판결의 방향도 바뀌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1952년의 애들러 사건에서 다수에 섰던 6명 가운데 1958년에도 판사로 남았던 사람은 둘뿐이다. 그 사이에 두 명은 사망하고 두 명은 은퇴한 것이다. 남은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1958년에 입장을 바꿨고, 다른 한 명은 원래 입장을 고수했다. 1952년에 소수의견을 냈던 판사 세 명은 1958년에도 현직에 남아 원래 입장을 지켰다. 그 사이에 새로 임명된 네 명 가운데 두 명은 판결에 참여하지 않았고, 두 명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에 동의했다.

▲ 사법의 정치화, 정치의 사법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진은 헌법재판소가 지난 2009년 언론관련법을 공개변론하는 장면 ⓒ연합

이제 한국 이야기를 해보자. 김대중 정부 이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이 사법부의 판결에 의해 결정되는 사례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한 켠에서는 "정치의 사법화"라는 염려가 등장하고, 다른 한 켠에서는 "사법의 정치화"라는 한탄이 고개를 든다. "정치의 사법화"라고 부르든지, "사법의 정치화"라고 부르든지, 내 눈에는 이러한 전개가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인다. 깡패들이 군홧발로 정치를 짓이기던 시대에서 법치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과 군부의 선거개입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면 심각한 부정선거가 자행된 것이다. 만약 경찰과 국정원과 군부가 이러한 선거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공작을 꾸몄다면 헌법의 원리, 즉 공동체의 기본 질서를 파괴한 내란죄를 묻기에 충분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한국에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한국에는 국정원과 군부의 선거개입에도 불구하고 박근혜의 정당성이 손상되지 않는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고, 이 의혹을 은폐하기 위해 국정원과 경찰과 청와대가 작전을 벌이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설령 국정원과 경찰과 청와대가 그런 작전을 벌였다손 치더라도 덮고 넘어가는 편이 자기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이런 논쟁은 전형적으로 정치적인 논쟁이다. 정치적인 논쟁에서 어느 편이 옳은지 어떻게 판가름해야 할까? 화끈하기로는, 양 진영이 무장하고 나서서 패거리 싸움을 벌이는 방법이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정치적 논쟁을 내전으로 해결한 사례는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단, 내전이라는 방법은 그로써 논쟁이 해결되더라도 도중에 희생자가 너무 많이 생기고, 더구나 논쟁을 해결하지도 못한 채 끝없는 무력 다툼으로 비화될 위험도 크다. 그래서 문명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정치적 논쟁일수록 사법부를 통해서 해결한다. 단, 사법부가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오직 사안의 진상과 법의 원리에 충실한 판결을 내릴 때에만, 정치적 논쟁이 사법 기능을 통해 해소될 수가 있다.

적어도 전두환의 시대까지 한국의 사법부는 치욕의 역사로 일관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일수록 군사정권의 협박에 굴종했다. 그러다보니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만성적인 내전 상태를 겪어야만 했다. 민주화 이후 사법부의 기능이 크게 향상되었지만, 아직도 검찰과 법원 및 법학계에는 사법의 정당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표창원, 권은희, 채동욱, 윤석렬, 그리고 법을 지키려는 이들의 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한 편에서 늘어났지만, 김기춘, 황교안, 이진한, 조영곤, 황우여, 등등, 법을 권력의 주구로 되돌리려는 자들이 여전히 고위직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

나는 한국에서 법치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 근본적인 사법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지만, 내전 또는 폭력적인 혁명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당초 나는 내전이나 혁명은 법치의 실현을 앞당기기보다 지연시킬 뿐이라고 믿는다. 정치적 논쟁 때문에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내전에서 구원할 수 있는 첫 번째 열쇠는 사법공무원들이 쥐고 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수사하는 검사들이 진상을 깔끔하게 파헤쳐서 기소하고, 재판부가 오로지 법의 목소리에 따라 판결을 내리기만 하면, 이 나라가 다시 정치 때문에 내전 상태로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울러 시민들과 정치평론가들과 정치인들은, 이 나라 정치의 진보를 진심으로 바라는 시민과 정치평론가와 정치인이라면, 사법공무원들의 정치적인 임무를 정상으로 바라보면서 그 임무를 바르게 수행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법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을 자극하거나, 말초적 감정을 선동해서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절제심을 발휘해야 한다. 사법공무원 가운데 법의 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믿음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그런 사람들의 수가 늘어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방향에 관심의 초점을 모아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논쟁이 사법부에서 결정되는 일은 앞으로 급증할 것이다. 따라서 법과대학에서 어떤 가치와 어떤 논리를 가르쳐야 하는지, 어떤 사람을 검사와 판사로 선임해야 하는지를 일반 시민과 정치평론가와 정치인들이 깊게 고찰해야 할 때다. 민주사회에서 법은 법과대학 졸업생의 생계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평화롭게 인도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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