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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특집:제주도&가파도&비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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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봄특집:제주도&가파도&비양도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2014년 4월 4일(금)부터 6일(일)까지 2박 3일간 제주 섬 속의 작은 섬들을 걸을 예정입니다. 아직 한참 남은 제26강 답사를 미리 공지하는 까닭은 항공권 확보 때문입니다. 이번 답사는 항공이든 배편이든 제주까지는 모두 개별 도착하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항공권을 예약해야 하는데, 답사 즈음에는 항공권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고 가격도 비쌉니다. 미리미리 항공권을 구입해야 합니다.

제주도까지는 각자 항공편(또는 배편)으로 이동해서 제주공항에서 모일 계획입니다. 특히 항공편으로 참가하실 분은 지금부터 예매를 서둘러주시기 바랍니다. 예약은 빠를수록 편리하고 이점이 많습니다. 섬학교의 <새봄 제주도 특집> 참가자는 먼저 반드시 항공편을 예약하시고 참가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17만평 가파도 보리밭 한가운데 환상처럼 피어난 갯무우꽃과 유채꽃 Ⓒ섬학교

4월 답사에서 걷게 될 비양도는 고려시대 화산 폭발로 바다에서 솟아났다는 기록이 전하는 신비의 섬이며 가파도는 봄이면 17만평의 들판에 청보리 물결이 출렁이는 환상의 섬입니다. 또 제주 답사에서는 올레 코스 중 가장 아름답다는 10코스도 걷습니다. 10코스는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해변올레입니다.

답사길에는 또한 아름드리 천년의 거목들이 자라는 신비의 숲 비자림과 제주 오름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한 사진작가 김영갑 선생이 늘 오르던 용눈이오름에도 오릅니다. 서귀포 앞바다 무인도 새섬을 걷고 폭풍의 화가 변시지 화백의 그림들이 상설 전시되는 기당미술관에도 갑니다. 짧은 기간 제주의 속살을 깊이 들여다보고 올 수 있는 드문 기회입니다.

이번 제주 섬학교 가는 길에는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추천사를 쓴 강제윤 교장선생님의 제주 여행기 <올레, 사랑을 만나다>(예담, 2010년)를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고려시대 화산 폭발로 바다에서 솟아났다는 기록이 전하는 비양도 Ⓒ제주시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5월 답사지인 제주 섬 속의 작은 섬들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청보리섬 가파도]

이 나라에서 가장 낮은 섬, 머물기 위한 길

가파도는 바다와 거의 수평입니다. 섬 전체에 산이나 언덕이 없습니다. 가파도는 한국의 유인도 중에서 가장 낮은 섬입니다. 섬의 최고점이 20.5m에 불과합니다. 가장 낮은 섬답게 가파도에는 높은 건물이 없습니다. 2층이 최고층이지요. 제주도에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한라산과 가장 낮은 섬 가파도가 함께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서면 가장 낮은 곳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낮은 섬 가파도는 느리게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할 정도로 작습니다. 그러므로 가파도 길은 걷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머물기 위한 길입니다. 가파도에는 보리밭길을 따라 올레길이 나 있습니다. 올레 10-1코스입니다. 예전 가파도는 평일 하루 평균 여행객 이10여명도 안됐었는데 올레길이 생기고 난 뒤 지금은 하루 1000명 이상의 여행객이 다녀가는 명소가 됐습니다.

성게 향 가득한 포구

언뜻 보면 가파도는 물에 잠길 듯이 위태롭지만 사람살이 내력은 신석기시대까지 이어집니다. 제주도내에서 발견된 180여 기의 고인돌 중 135기가 가파도에 있습니다. 가파도 사람들은 고인돌을 '왕돌'이라 부릅니다. 가파도의 왕돌은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이지요. 판석을 세우지 않고 지하에 묘실을 만든 다음 작은 굄돌을 놓고 그 위에 큰 덮개돌을 올려놓았습니다. 왕돌의 나라. 이 손바닥만큼 작은 섬도 그 옛날부터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어 살았던 것일까요.

가파도는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항에서 서남쪽으로 5.5km 거리에 있습니다. 모슬포와 마라도의 중간 지점. 오늘 가파도는 성게 향으로 가득합니다. 해녀들은 잠수복도 벗지 않은 채 선창가 건물 그늘에 앉아 성게 작업 중입니다. 해녀들은 집 마당에서도 성게 알을 깝니다. 여객선이 닿는 상동 마을을 지나 하동으로 가는 길 주변 들판은 온통 보리밭입니다. 17만 평의 보리밭이 겨울부터 초여름까지 가파도의 들판을 푸르고 누렇게 물들입니다. 이런 보리밭을 섬에서 만나는 것은 어디서도 누리기 힘든 행운이지요. 바다 건너 송악산과 산방산 너머로 구름에 쌓였던 한라산이 흰 이마를 드러냅니다.

하동 마을 초입의 낡은 집 한 채. 이 집에서도 할머니 해녀가 성게 까는 작업 중입니다. 할머니는 손칼로 성게를 쪼갠 뒤 작은 숟가락으로 성게 알을 긁어냅니다. 고단하고 지루한 작업.

"할머니, 혼자 사세요."
"혼자 살멍 고생고생하고 살았수다."
"연세가 많아 보이세요. 할머니."
"팔십이 넘었수다. 팔십 둘 난 할마니가 이거 아니면 먹을 것도 못하고, 왕래도 못하고, 이거 해야 죽을 때 까장은 먹고 살거 해야."

팔십 두 살, 할머니가 매일 매일 물질을 나갑니다. 오전에 잡아온 성게를 붙들고 휴식도 없이 오후 내내 씨름합니다. 아침에 먹은 밥이 성게 가시처럼 목에 걸립니다.

"자식들은 제주 사나요?"
"육짓 할망들은 한 오십만 되도 자식드렁 언처 산다는디. 제주 할망들은 그게 아니라. 이녘대로 활동해야 살지렁. 자식들은 한 삼명 되신디 다 모실포가 살아. 인제 나 혼자 살아."

할머니는 육지 사람들을 부러워 하지만 뭍의 농어촌 노인들도 할머니처럼 죽을 때까지 밭일이나 갯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도시의 노인들이라고 다를까요. 그래도 모질기로 말하면 제주 섬보다 더한 곳이 없겠지요.

▲가파도 해안길은 한라산과 산방산, 송악산 등 제주의 명산과 바다를 보며 걸을 수는 아름다운 길이다. Ⓒ강제윤

60년을 물질했어도 여전히 무서운 바다

"할머니 물질해서 하루에 얼마나 버세요."
"하루 만 원도 벌고 이만 원도 벌언."
"오다가 보니까 다들 성게만 잡으시나 봐요."
"가파도는 뭐가 나지를 안혀. 옛날엔 소라도 만니 나고 전복도 만니 나고 그랜. 이제 그런건 다 없어져 부런. 오염된. 오염된. 전복 같은 건 없어. 소라 전복 같은 건 가끔, 아주 가끔 나와. 오염 되부난 없어. 바당에."

할머니는 바다가 오염이 되서 전복이나 소라가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오염 때문만이겠습니까. 소라나 전복의 새끼까지 잡아들인 남획의 책임도 클 것입니다. 가파도 근해에서도 전복은 씨가 말랐고 소라는 먼 바다에 나가야 작은 것들이 조금씩 잡힌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어디서 시집 오셨어요?"
"모실포서 태어난 이제까지 완. 하르방 찾안. 이젠 하르방 가불고."
"돌아가신 할아버지 보고 싶으세요?"
"보고 싶으멍 어쩌. 고향 찾어 가불고. 그 고향이 존디지."

할머니는 노구를 이끌고 물질도 하고 보리농사도 짓고 콩 농사도 짓습니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노인들에게 노년의 노동이 행복일 리가 없습니다.

"물질은 처녀 때부터 하셨어요."
"여기 와서 물질은 배완. 이거라도 해야 먹고 살고 하정. 큰 물질은 못하고. 큰 물질 해야 소라도 잡고 전복도 들고."

먼 바다에 나가야 되는 큰 물질을 할머니는 젊어서도 못 하셨다 합니다.

"에고 무서워서 못핸."

그 무섭기만 한 물 속에서 할머니는 60년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바다가 무섭지만 바다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늙은 해녀, 허망한 팔자타령이 구슬픕니다.

"물도 나무도 귀한 섬에서
점심도 못 먹고 물질을 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이
서방님 용돈에 다 들어간다.

어떤 년은 팔자가 좋아
분단장 하고 살아가는데
이 내 팔자 허망하여
물질하면서 살아간다."
(제주 민요 <잠수노래>)

섬의 역사는 단절의 역사

오랜 세월 무인도였던 가파도에 다시 사람살이가 시작된 것은 조선 영조 때 제주목사가 조정에 진상할 목적으로 소 50마리를 방목하면서부터입니다. 과거에 섬은 왜구나 해적들의 침탈로부터 해상방위 등의 목적으로 자주 공도(空島)정책이 실시됐습니다. 터전을 잡을 만하면 섬사람들은 섬 밖으로 쫓겨나기 일쑤였지요. 외딴 섬이거나 작은 섬들일수록 섬의 역사는 자주 단절의 역사입니다.

섬사람들은 섬에서 강제로 쫓겨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섬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도록 강제되기도 했습니다. 천민들이 이주의 자유가 없었던 것처럼 섬 주민들 역시 거주 이전의 자유마저 빼앗기고 살기도 했습니다. 육지에서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비하하는 태도가 근래까지 이어져 온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제주도에는 1629년부터 1830년까지 출륙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섬사람들은 공납의 괴로움과 관리들의 수탈을 피해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지요. 출륙 금지령은 제주 섬사람들 전체를 죄인으로 감옥에 가둔 악법이었습니다.

속도를 다스리는 가파도의 길

가파도에는 하동과 상동 두개의 자연부락이 있고 일주 도로와 마을 중심을 가르는 두 개의 큰 길이 있습니다. 그 길들로 경운기가 다니고 트럭 몇 대가 드물게 다닙니다. 화물이나 어구를 운반하는 자동차들. 이 작은 섬에서는 자동차가 결코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과 자동차의 충돌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늘 위험한 물건은 아닙니다. 자동차가 속도를 다스리지 못하고 속도에 지배될 때 자동차는 흉기가 됩니다. 가파도에서는 가속이 붙기도 전에 길이 끝나고 맙니다. 과속할 수 없는 자동차는 전적으로 섬의 지배 하에서 움직입니다. 섬의 길은 시작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길은 섬 안의 어느 곳으로도 열려 있으나 섬 밖의 어느 곳으로도 닫혀 있습니다.

상동포구 선착장 부근에 패총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고인돌과 함께 가파도에 살았던 선사인들의 유적입니다. 시간은 사람이 먹고 남긴 쓸모없는 조개껍질들, 쓰레기마저 귀중한 유물로 만드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시간은 삶을 지배하는 유일신이고 형체를 드러내는 유일한 신입니다. 아무리 하찮다고 여겨지는 삶도 시간의 주재 하에서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삶의 어느 사소한 것 하나도 돌이켜 보면 소중하지 않은 것이란 없습니다. 가파도 북쪽 해안 길은 이승의 길이 아닙니다. 삶의 이면 도로는 묘지들로 가득합니다. 묘지의 주인들은 끝내 평생 자맥질하던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바다 곁에 누웠습니다.

"너른 바당 앞을 재언 혼질 두질 들어 가난 저승길이 왓닥 갓닥 이어싸나 이여싸나." (제주 민요 <이어도>)

이어도, 그들은 마침내 저승길을 지나 유토피아에 도착한 것일까요. 해변의 묘지 끝자락쯤에 가파도의 할망당이 있습니다. 할망당에는 더 이상 소망을 비는 기도의 자취가 없습니다. 당 할망의 조력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섬사람들의 삶은 안전해진 것일까요. 해안선 길이 4.2킬로미터. 타원형의 섬을 한 바퀴 돌아오니 다시 상동입니다. 해녀들은 여전히 성게 알을 까고 있습니다. 성게 알은 1킬로그램에 6만원. 젊은 해녀라도 하루 1킬로 작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노동에 비해 대가는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도시 소비자들에게 성게 알은 쉽게 맛 볼 수 없는 값비싼 음식입니다. 여기서도 해녀 노동의 이익을 가져가는 것은 중간 상인들입니다. 성게 알은 어촌계로 모아져 내일 아침이면 상인들에게 보내질 것입니다.

▲가파도 돌담, 돌담은 바람의 방어막이 아니다. 바람의 통로다. Ⓒ섬학교

돌담, 바람의 통로

가파도 또한 여느 작은 섬들처럼 물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지하수와 해수담수화 시설을 통해 공급됩니다. 2004년 10월부터 2005년 12월 사이에 총 예산 10억원이 투입되어 해수담수화 시설이 만들어졌습니다. 담수화 시설은 하루 150톤의 생산 능력이 있습니다. 섬에서 오랜 세월 쏟아지던 용천수와 우물이 마르게 된 것은 인구의 증가 때문만이 아닙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었으나 물은 점점 부족해졌습니다. 섬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육지를 닮아가면서 물 낭비적인 삶으로 변했기 때문이지요.

비바람일까요. 마라도 쪽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옵니다. 돌이켜 보면 나그네는 늘 바람과 맞서기만 했습니다. 바람을 타는 것과 바람에 맞서는 것 어느 쪽이 진리일까요. 가파도 하동포구 바다와 정면으로 마주선 집들의 돌담은 튼튼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허술하기 그지없습니다. 돌담은 구멍까지 뚫려 있습니다. 어떻게 저 혼자 있기도 위태로워 보이는 돌담이 거친 해풍을 막아내며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저 숭숭 뚫린 구멍 덕에 돌담은 오랜 세월 바람을 막아낸 것은 아닐까요. 돌담은 저 구멍으로 바람을 분산 통과시키며 바람으로부터 섬의 안전을 지켜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담은 바람의 방어막이 아니라 바람의 통로입니다. 섬사람들은 바람을 거스르고는 살 수 없어 바람이 지나갈 샛길 을 만들어 주고 바람과 함께 살아갑니다.

[고려 때 바다에서 솟아난 화산섬 비양도]
서산이 바다 한가운데서 솟아오르니
제주특별자치도에는 제주 본섬을 제외하고 모두 8개의 유인도가 있습니다. 가파도, 마라도, 우도, 비양도, 상추자도, 하추자도, 횡간도, 추포도가 아직 사람이 사는 섬들입니다. 추자군도의 섬들은 해남 반도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마지막 빙하기 때 물속에 잠기면서 남은 땅입니다. 우도나 비양도, 마라도와 가파도 등의 섬들은 화산섬입니다. 그래서 흙빛이 다르지요. 제주시 한림항에서 비양도행 도항선을 탑니다. 한림에서 5km, 협재에서는 1.5km에 불과한 거리지만 여객선은 하루 세 차례뿐입니다. 섬과 육지. 작은 섬과 큰 섬 사이의 소통은 물리적 거리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왕하는 사람의 숫자에 달려 있습니다. 비양도는 섬 속의 섬, 가까운 낙도입니다.

바다는 하늘의 거울입니다. 제주에서도 푸르기로 소문난 비양도 앞 바다가 온통 청보석 물빛입니다. 비양도는 해안선 둘레 3.5km의 타원형 섬입니다. 주민은 100여 명 남짓. 섬에는 일주 도로가 나 있습니다. 비양도는 고려 시대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제주목 고적'에는 "고려 목종 10년(1007년), 서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아오르니 태학박사 전공지(田拱之)를 보내 살피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서산이 정확히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비양도로 보는 견해가 우세한 편입니다.

그래서 지난 2002년에는 비양도 탄생 천년맞이 축제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곳이 됐건 11세기 초 고려 목종 재위 기간에 화산 활동으로 제주 바다에서 섬 하나가 생겨난 것만은 사실인 듯 보입니다. 중국에서 한 오름이 날아와 비양도가 되었다는 전설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서산이 비양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지요.

아무튼 화산 활동의 원리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바다에서 섬이 솟아오른 사건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바다에서 산이 솟아나고 지옥의 유황처럼 끓는 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용의 승천이나 봉황의 출현 따위의 전설도 더 이상 전설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바다 속에서 땅도 솟아오르는데 어찌 용왕이 조화를 부려 비구름을 몰고 오고 풍랑을 일으킨다는 것 따위 소소한 일을 믿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오백 절오백' 이라는 말이 있듯이 제주에 유독 '할망당'을 비롯한 신당과 토속 신앙이 발달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닐런지요.

▲비양도 해안 용암이 굳어진 기암괴석은 그대로 조각품이다. Ⓒ섬학교

제주서 아들을 낳으면 "이건 내 자식이 아니고 고기밥이야!"

비양도에는 19세기 말(고종 13년)에 와서야 비로소 사람이 처음 입주해 살기 시작했다고 공식 기록이 남아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많은 섬들처럼 그보다 훨씬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을 것입니다. 이미 고려시대 말에 해상 방어를 위해 망수(望守)를 배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미 그 무렵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일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해변을 따라 화산 활동으로 흘러나온 용암이 굳어져 생긴 돌들, 현무암 해변이 이어집니다. 염습지인 펄랑 못을 지나 10여 분쯤 가니 애기업개돌(負兒石)이 물가에 서 있습니다. 아이를 업고 서 있는 듯한 바위의 형상에서 바위에 지성을 드리면 아이를 낳게 해준다는 전설이 생겨났습니다. 육지에서는 보통 아들 낳게 해준다는 바위나 불상들이 많은데 여기서는 그냥 아이입니다.

뭍의 사람들은 아들을 못 낳아서 안달복달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섬의 돌은 아들이 아니라 그저 아이를 낳게 해준다는 바위일까요. 과거 제주와 육지 사람들의 자식에 대한 열망의 차이가 다른 까닭이 아닐까요. 옛날 제주 사람들은 아들을 반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최부(崔府, 1370~1452)가 쓴 <표해록>에는 제주에서 육지로 나가다가 표류 되었을 때 제주도 사람과 나눈 대화가 나옵니다.

"제주 사람은 앞서 가다 죽지 않으면 반드시 뒤에 가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제주도에는 남자 무덤은 매우 드물고 여염에는 여자가 남자의 세 곱은 됩니다. 다들 딸을 낳으면 반드시 '아, 내게 효도할 애로군!' 하고, 아들을 낳으면 '이건 내 자식이 아니고 고기밥이야!' 합니다. 우리 죽음이야 하루살이 같은 것이오니 비록 평화로운 날일지라도 어찌 제집에서 죽기를 바랄 수 있으리까." (최부 <표해록>, 보리출판사)

제주도 사람들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완도의 덕우도에 갔을 때 섬의 묘지를 보며 풀지 못했던 의문의 한 가닥이 풀리는 듯합니다. 그때 나는 수백 년을 사람들이 살다간 섬에 어찌 이렇게 묘가 적은 것일까, 궁금했었습니다. 섬사람들은 대부분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었지요. 바다에서 죽어 고기밥이 됐으니 섬 땅에 묘가 많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합니다. 남자들뿐이었겠습니까. 많은 여인들 또한 어로와 잠수 중에 죽음을 당하고 시신은 찾을 길 없이 고기밥이 되고 말았을 테지요.

섬사람들은 바다 생물들에 대한 약탈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바다 생물들이 일방적으로 먹고 먹히기만 하는 수탈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밥이 되어 주는 상생의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전 섬들의 일반적인 장례 풍습은 매장도, 풍장도 아니고 수장이 아니었을까요. 관도 없고 상여도 없이 물에서 나와 물로 돌아간 수생 생물들의 운명적 모천회귀.

그뿐이겠습니까. 섬사람들은 자주 난파당하고 표류한 뒤에도 쉽게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없었습니다. 최부의 <표해록>에 "우리 제주도는 아득히 바다 가운데 떨어져 있어 수로로 구백여 리나 되고 또 파도가 어느 바다보다 흉포하기 때문에 공물 실은 배와 장삿배가 끊임없이 표류하고 침몰하는 것이 열에 대여섯은 됩니다"라고 한 제주 사람의 탄식은 결코 제주 섬사람만의 한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이나 삶과 죽음의 양식에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물고기 밥을 면하고 중국이나, 일본, 유구국 등의 해안에 표류했더라도 살아 돌아오는 경우는 열에 한둘도 안 됐습니다. 해적들에게 사로잡혀 노예로 팔려가거나, 최부 일행이 그랬던 것처럼 때때로 공적에 눈이 먼 그 나라 관군들에게 왜구나 해적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섬사람들의 운명은 섬을 떠나 바다로 나온 순간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섬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뼛속까지 숙명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된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운명의 거친 파도 때문이었겠지요.

시간은 늘 나의 편이다

느릿느릿 걸으며 한 바퀴 돌아도 비양도는 한 시간 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언덕 하나 없이 평탄한 길, 섬에서도 이런 걷기의 천국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섬을 걷는 내내 차를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걷기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은 비양도가 뭍에서 온 길손들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선착장 부근에서 보말(고동)죽 한 그릇을 점심으로 먹고 비양봉 꼭대기의 등대까지 느리게 다녀온 뒤에도 배시간이 남습니다. 이번에는 왼쪽 길로 섬을 한 바퀴 더 걷습니다. 그 사이 물이 빠졌습니다. 화산석의 해변은 온통 먹빛입니다. 잠수들이 미역을 따고 있습니다. 걷기에만 집중하니 어느새 한 바퀴를 다 돌았습니다. 바닷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습지를 이룬 펄랑 못, 산책로를 돌아 나와 골목길에서 메모를 하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뭐라고 말을 걸어옵니다. 선뜻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뭐라고요 아주머니."
"수돗세 받으러 나왔냐구요."

아주머니가 이번에는 제주말이 아니라 서울말로 되묻습니다. 이 섬도 수돗물을 먹는 걸까요. 용암이 굳어져 생긴 섬이라 샘이 귀할 것입니다. 수첩을 들고 기웃거리는 내 모양새가 수도 검침원처럼 보였던가 봅니다.

"아주머니 여기도 수돗물을 먹는가요."
"여기 아주 살기 좋아요. 한림에서 이렇게 큰 빠이쁘로 물이 건너오고, 발전소가 있어 전기
걱정도 없고."

섬에 먹을 물이 귀하니 제주 본섬에서 해저 관로로 물을 날라다 먹습니다. 섬의 가장 큰 고통이던 물 걱정을 던 기쁨이 몸으로 전해져 옵니다. 문득 남해안 어떤 섬에 갔을 때 만났던 할머니 말씀이 떠오릅니다. 할머니는 물 한 동이 얻기 위해 반나절을 걸어갔다 와야 하는, 물이 귀한 섬이 고향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 섬으로 시집을 오니 집안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드셨다더군요. "천국이 있다더니 여기가 천국이구나!" 천국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마실 물 한 그릇 속에도 천국이 있습니다. 비양도 사람들에게도 마실 물 걱정 없는 것이 천국입니다. 우리의 천국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올레 10코스. 봄철 제주는 어느 길이나 꽃밭이다. Ⓒ섬학교

섬학교 2014년 4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4월 4일(금)>

12:00 제주공항 도착, 대합실 렌트카 창구 앞 집결(참가자는 각자 제주공항에 도착하시고, 집합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13:00-14:00 점심식사(한림항 식당에서 조기매운탕, 돔매운탕, 생선조림요리 중 택1)
14:10 한림항 비양도 도항장 출항
14:25 비양도 도착

14:30-16:30 비양도 걷기(약 3km)
비양항→비양분교→펄랑못→수석거리→자갈밭해변→돌공원→코끼리바위→비양봉 →등산로 입구→큰 분화구→비양나무 자생지→비양등대→비양항
16:30 비양항 출발
16:45 한림항 도착, 서귀포로 이동
17:30-18:30 서귀포항 도착, 새연교 다리로 연결된 새섬 걷기
(약 2km)
18:40-20:40 저녁식사 겸 뒤풀이(서귀포의 주민들이 즐겨 찾는 손맛 좋은 횟집에서 생선회 코스요리)
21:00 취침 및 자유시간(서귀포 법환포구 <가름게스트하우스>, 다인실)

▲올레10코스는 내내 산방산과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최고의 길이다. Ⓒ섬학교

<4월 5일(토)>

07:00 기상, 아침 산책(숙소에서 3분 거리에 범섬이 보이는 법환포구가 있어 산책하기 좋음)
08:20-09:20 아침식사(서귀포항 식당에서 해물뚝배기, 갈치국, 성게국요리 중 택1)
09:30-10:00 기당미술관 관람
11:00 모슬포항 출항
11:20-12:20 가파도 도착, 청보리밭길 걷기
(약 3km, 올레10-1코스)
가파도 상동포구 선착장→상동본향당→평풍덕→작은 아끈여→큰 아끈여→물 앞이돌 →고냉이돌→냇골챙이→보리밭길→가파초등학교→전화국→보리밭길→개엄주리코지→큰 옹짓물→뒤시여→제단→제관숙소→볼락적코지→부근덕→발전소→전화국→농협창고→고인돌 군락지→하동 가파포구 해녀촌앞(종점)
12:20-13:20 가파도 하동에서 점심식사(해녀촌 식당에서 성게 칼국수와 해물파전), 선착장으로 이동(식당에서 선착장까지는 하동포구 본향당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서 20분 거리)
14:00 가파도 출항
14:20 모슬포 도착
14:30-17:00 제주 올레10코스 일부 구간 걷기
(약 7km)
섯알오름→송악산→사계리 사람발자국 화석발견지→사계포구→설큼바당→용머리해안 입구
17:00-18:00 용머리해안 걷기
18:20-20:20 저녁식사 겸 뒤풀이
(모슬포에서 방어회와 매운탕요리)
20:50 취침 및 자유시간(서귀포 법환포구 <가름게스트하우스>, 다인실)

▲용머리해안은 화산섬 제주의 속살을 보여주는 절경이다. Ⓒ섬학교

<4월 6일(일)>

06:30 기상
07:20 숙소 출발
08:00-09:00 아침식사
(표선 포구에서 제주 최고의 옥돔무국요리)
09:30-10:30 용눈이오름 걷기(약 1km)
11:00-12:30 비자림 걷기(약 3km)
13:00-14:00 제주시 동문시장 부근에서 점심식사(고등어조림요리)
14:00 동문시장 앞 해산
*장을 볼 분들은 해산 후 동문시장을 이용하는 게 좋습니다. 질 좋은 수산물과 과일 등이 제주 어느 곳보다 풍성하고 쌉니다.

▲섬학교 제26강 걷기 지도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등산복/배낭/등산화), 스틱, 모자,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학교 제26강 답사 참가비는 제주 2박·7식 숙식비와 뒤풀이비, 현지 버스비와 배요금, 강의비, 관람료, 운영비 등 포함 33만원입니다. 참가 등록하시기 전에 반드시 각자 제주행 항공(또는 배편) 예약을 마치시기 바랍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어머니 가슴처럼 우리를 안아주는 용눈이오름 Ⓒ섬학교

[학습자료]

[가파도]
가파도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
: 가파도의 김동옥 전 이장님에게는 아름다운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1학년 여름방학 때 동생은 고향 가파도로 돌아왔다. 그녀는 누구보다 총명하고 영특했지만 물질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놀이터 삼아 바다 속에서 살았으니 물은 그녀 모성의 고향이었다. 그녀는 뭍에서 성공하기보다 해녀가 되고 싶었다. 옛적부터 가파도 여자들은 "서방보다 바당을 더 좋아한다" 할 정도로 바다에 대한 애착이 컸다.

그녀는 방학 내내 해녀 친구를 따라다니며 물질을 했고 전복을 잘도 따왔다. 그러던 어느 날 물 속으로 들어간 뒤 영영 나오지 않았다. 수중에서 참았던 숨을 놓고 만 것이다. 물 속에서 내내 살고 싶었던 것일까. 바다를 떠나기 싫었던 것일까. 깜작 놀란 해녀 친구는 울부짖으며 해녀대장이던 자기 엄마에게 매달리고 고모에게도 매달리며 "내 친구가 바다에 누워있다, 건져 달라" 했지만 2백여 명이나 되는 해녀들 모두가 외면했다. 해녀 사회에는 금기가 있었다. 바다에서 빠져 죽은 사람을 건져주면 죽은 사람에게 숨을 다 줘버리기 때문에 다시는 해녀 노릇을 할 수 없다는 믿음이다. 그것은 아마도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해녀들 스스로 만들어둔 금기이자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장님 집안은 해녀 친구네 집안과 원수가 됐다. 결국 여동생의 시신은 모슬포 살던 아버지 친구가 와서 찾아줬다. 그도 잠수부 노릇이 싫어 20년 동안이나 물 속에 들어가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친구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어린 나이에 죽은 친구의 딸이 불쌍해서 스스로 금기를 깨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사이 이장님은 애절하게 울어대는 동생의 친구를 달래고 위로하면서 자신도 위로 받았고 마침내 둘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두 집안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 어느 쪽도 둘의 결혼을 허락하려 들지 않았다. 효자였던 이장님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나한테 대들면 이 자리에서 죽어불지. 살아 뭐 할 거냐"라고 할 정도로 완강하고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장님은 유랑의 길을 택했다. 가파도를 떠나 뭍으로 가서 몇 달씩 떠돌다 돌아와 사는 시간이 시작됐다. 대정읍사무소의 공무원 생활도 접고 떠돌이가 됐다.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혼 허락을 얻으려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다. 그렇게 유랑과 귀향의 날들이 수도 없이 반복됐다. 어느 해 유랑에서 돌아온 날 이장님의 아버지가 드디어 손을 들었다. "귀신이 세 개 들어도 남녀 간의 사랑은 못 말린다는데 내가 졌어." 10년 만에 얻은 사랑의 승리. 이장님은 그 자리에서 만세를 불렀다.

보리밭 : 가파도에는 17만 평의 보리밭이 있다. 늦겨울부터 초여름까지 보리밭 길은 우리를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자로 만들어준다.
고인돌 군락지 : 가파도는 '왕돌'이라 부르는 고인돌의 고장이다. 제주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남아 있다.
집담과 밭담 : 가파도는 돌담이 예술이다. 담돌 하나하나가 모두 수석이다. 돌과 이야기하면 가파도의 역사를 모두 전해 들을 수 있다.
6개의 산 : 오름이나 봉이 아니라 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제주의 산은 모두 7개다. 가파도에서는 영주산을 제외하고 한라산, 산방산, 송악산, 군산, 고근산, 단산 등 6개의 산을 모두 볼 수 있다.
김성숙 선생 동상 : 가파초등학교의 전신인 신유의숙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김성숙 선생의 동상
고냉이돌 : 고양이 모양으로 생긴 돌이다.
할망당 : 가파도에는 상하동 두 곳의 할망당이 있다. 할망은 제주의 신들에게 붙이는 극존칭이다.
제단 : 해마다 음력 1월이면 마을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지금도 제관으로 뽑힌 마을 남자 7명은 3박4일 동안 제단집에 머물며 부정을 피한 뒤 돼지와 닭 날 것을 제물로 제사를 올린다.
까마귀돌 : 사람이 올라가면 반드시 비바람이 분다 해서 오르지 못하게 하던 신령한 바위

▲고즈넉한 천년의 숲 비자림 Ⓒ섬학교

[비양도]
개요 :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비양도는 섬이자 기생화산이다. 면적 0.5㎢, 해발 114.7m, 동서 길이 1.02㎞, 남북 길이 1.13㎞. 죽도라고도 한다. 한림항에서 북서쪽으로 5㎞, 협재리에서 북쪽으로 3㎞ 거리, 한림항에서 여객선으로 15분 거리다. 섬은 전체적으로 타원형이며, 서북∼남서 방향의 아치형 능선을 중심으로 동북 사면이 남서 사면보다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다. 섬 중앙에는 높이 114m의 비양봉과 2개의 분화구가 있다. 오름 주변 해안에는 '애기 업은 돌'이라고도 하는 부아석(負兒石)과 베개용암 등의 기암괴석들이 있고, 오름 동남쪽 기슭에는 '펄낭'이라는 염습지가 있다. 북쪽의 분화구 주변에는 비양도에서만 자라는 비양나무(쐐기풀과의 낙엽관목) 군락이 형성되어 있다. 1995년 제주기념물 제48호 비양나무 자생지로 지정되었고, 우리나라 유일의 비양나무 자생지로 보호되고 있다.

비양도 탄생 전설 : 비양도는 원래 중국 쪽에서 떠돌아다니던 섬이었는데, 조류에 밀려 제주까지 떠내려 오고 있었다. 마침 임신한 해녀가 바다에서 해초를 캐다가 섬을 발견하고는 섬에 올라가 소변을 봤는데, 그로부터 섬이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고 한다.(한립읍 현주선님 구술)
옛날에 중국 쪽인지 본토 쪽인지에서 웬 섬이 두둥실 떠내려 오고 있었다. 임신한 여자가 그 섬을 보고는 "섬이 떠내려 온다!" 하고 손가락질을 하였다. 그 바람에 떠내려 오던 섬이 그 자리에 자리를 잡고 제주의 일부가 되어 버렸단다. (한림읍 김영이님 구술)
(출처 <제주도 전설>, 서문당, 1976)

[비자림]
천연기념물 제374호. 구좌읍 송당리에 위치한 비자림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 중 하나이며 국내 최대 비자나무 군락지다. 48㎢의 면적에 500∼800년 수령의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있어 단일 품종 군락으로는 세계 최대로 꼽힌다. 열매는 한약재나 제사 음식으로 쓰였으며 목재는 가구나 바둑판을 만드는 데에 사용했다. 비자림은 옛날 마을 제사에 쓰이던 비자나무 열매가 사방으로 흩어져 군락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숲 한가운데에는 비자나무들 가운데 최고령인 800년 수령의 조상목이 자리잡고 있다.

[기당미술관]
서귀포 기당미술관은 폭풍의 화가 변시지(1926~2013) 화백의 그림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 미술관이다. 제주가 고향인 재일교포 사업가 기당(寄堂) 강구범(姜龜範) 선생이 서귀포시에 기증해 1987년 7월 1일에 개관했다. 전국 최초의 시립미술관이다.

우성(宇城) 변시지 화백, 그의 화폭에는 늘 제주의 바람이 분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폭풍이 몰아친다. 그래서 그는 '폭풍의 화가'로 불린다. 미국의 스미소니언박물관에는 생존 아시아 작가로는 최초로 변 화백의 그림 <난무>와 <이대로 가는 길> 두 점이 상설 전시되었다. 1997년에는 한국 화가로는 유일하게 검색 포털 '야후'에 의해 고흐나 피카소와 함께 세계 100대 화가에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 6월 타계할 때까지 제주에 살며 오로지 제주만을 그려온 변 화백의 그림은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다. 한국 화단의 중심부가 그를 제주의 향토화가 정도로 애써 무시하는데 급급할 때 세계적인 박물관 디렉터는 그의 진가를 알아봤고 그는 변방의 화가에서 일약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결국 동시대의 화가들이 다들 유럽으로 떠날 무렵 홀로 고향으로 돌아온 그의 선택이 옳았음이 입증된 것이다.

▲기당미술관에 전시중인 변시지 화백의 대작 <태풍> Ⓒ기당미술관

유레카! 제주의 색을 발견하다
변 화백은 서귀포 서홍동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을 보냈다. 유년기 잠깐이지만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것이 후일 "서양화를 전공한 변 화백의 수묵화적 기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서종택 교수는 그의 저서 <변시지>에서 평가한 바 있다. 소년 변시지는 여섯 살 때 가족들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에 정착했다. 큰 형은 고무 공장을 차려 가족들을 부양했다. 그는 소학교 2학년 때 씨름대회에 나가 2, 3학년 선수들을 차례로 물리쳤고 마침내 그보다 몸집이 두 배나 큰 4학년 선수와 맞붙었다. 그는 오기로 버티다 결국 모래판에 처박혀 관절이 망가졌다. 한순간의 오기 때문에 평생 다리를 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은 소년 변시지가 그림에 몰두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변시지는 1948년 <일전(日展)>과 함께 일본의 대표적 공모전인 <광풍회전(光風會展)>에 출품해 스물세 살의 어린 나이로 최연소 최고상을 수상하며 일본 화단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일전>의 심사 위원이던 사이토 요리가 "변시지의 그림을 인정하면 대가들의 그림이 위험하다" 했을 정도로 그는 일찍부터 재능과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변시지는 일본에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1957년 11월 15일 서울대학교 초청을 받아 영구히 귀국했다. 그러나 학연과 지연, 인맥으로 얽힌 한국 화단의 반목과 질시를 견디지 못해 방황했고 마침내 고향 제주로 낙향을 결심했다. 서울에 있으면서 갑작스레 일본에서 귀국한 그를 의심하며 감시하는 기관원들의 눈초리를 견디기도 힘들었다. 두 번이나 국전 개혁운동을 주도하다 좌절하기도 했었다. 그는 제주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의 삶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새로운 화법을 발견하기 위해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매일 술을 마시고 대취했다. 심지어 일주일 내내 입에 곡기 한번 대지 않고 술만 마시기도 했다. 그가 술에 취해 쓰러지면 동료와 제자들은 그를 화실로 옮겨다 주고 그가 그린 그림들을 훔쳐갔다.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그림도 있었다. 그런 치사한 우정의 나날들이 갔다. 끝내 견딜 수 없을 때면 바닷가 자살바위 근처를 배회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술에 취한 몸으로 깨어났는데 간밤에 마주 보았던 자신의 캔버스가 온통 황갈색 톤으로 보였다. 서종택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마침내 '유레카!'를 한 것이다. 유레카! 나는 알아냈다! 드디어 '제주의 색'을 발견한 것이다. 하늘도 바다도 땅도, 온통 황갈색. 그것은 제주 원형의 색이었다. 그날 이후 변 화백의 그림은 하늘이나 바다도 푸른색이 아니다. 온통 황갈색이다.

미술관에 부는 폭풍
기당미술관은 그의 그림을 아끼는 제주 출신의 재일기업인 기당(奇堂) 강구범 선생이 지어서 그에게 헌정한 미술관이다. 변 화백은 미술관을 개인 소유로 하지 않고 서귀포시에 기증했다. 미술관 특별전시실에는 변시지 화백의 그림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폭풍에 휩싸인 것처럼 강렬한 에너지에 압도당한다. 그의 작품 <태풍> 앞에서 몇 번이나 무릎 꿇었다. 하늘도 바다도 온통 누런 빛, 그의 그림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의 바다와 하늘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바다와 하늘은 현실을 떠나 있지 않다. 나는 어느새 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구부정한 사내로 서 있다.

<해촌>의 돌담에 둘러싸인 초가는 평화롭다. 오늘은 바람이 없어 그림 속의 사내는 모처럼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낚싯대에는 줄이 없다. 줄이 없으니 바늘도 없다. 사내는 무엇을 낚으려는 의지가 없다. 그가 낚으려는 것은 바다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낚시는 생의 저 깊은 심연에 거처하는 존재의 본질을 낚아 올리려는 것이다. 대체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더불어>의 작은 초가 속에는 사내와 말이 들어가 있다. 사내는 화폭에 말을 담으려 하지만 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저 또한 그림을 그리자는 행위가 아니다. 말에게 묻는다.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자신도 모르는 답을 말에게 묻지만 말이라고 답이 있겠는가. 변시지 화백의 그림들은 대부분 강렬한 폭풍 속에 내던져진 존재의 고독을 그린다. 하지만 나는 폭풍의 풍경보다 정적인 풍경에서 더 깊은 존재의 외로움을 본다. 거대한 폭풍 앞에서는 존재가 의문을 품을 틈이 없다. 실존이 더 화급하다. 바람에 날리거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말과 사내와 나무는 서로 기대어 섰다. 그것이 전부다. 초가 또한 날려가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돌담 아래 고개를 처박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한라산>, 한라산 아래 초가. 사내는 오늘 또 부질없는 짓을 벌이고 있다. 까마귀에게도 묻는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까마귀는 무엇이라 지껄이지만 아마도 저건 딴청인 듯하다. 영리한 까마귀가 알 수 없는 질문을 못 알아들은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제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과 속을 넘나드는 영매가 아니라고, 그저 배고픈 날짐승일 뿐이라고. 그러니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다고. 한낮의 태양은 한라산 마루에 걸려 이글거린다. 태양 아래 세계의 본질은 다 드러나고 비밀 따위는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해가 저물 때,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나를 저버리는 세 번(…) 허공을 향하여 문이 열리는 저 순간들이 나는 무섭다"―장 그르니에 <섬>

까마귀도 그걸 이야기하려는 걸까. "멍청아, 보이는 게 다야, 존재의 비밀 따위는 없어."

그런데 정말 그럴까. 생사의 비밀은 없는 걸까. 존재의 실상은 끝끝내 찾을 수 없는 것일까. 한라산을 내려와 나는 다시 <태풍> 앞에 선다. 그림 속의 바람이 화폭을 벗어나 나에게 몰아친다. 사내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온 바람이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폭풍의 화가' 변시지의 바람은 정물이 아니다. 활물이다. 그의 바람은 풍경이 아니라 실재다. 그는 바람을 그리되 화폭에 담지 않는다. 가두지 않는 것이다. 바람은 멈추는 순간 더 이상 바람이 아님을 잘 아는 까닭이다. 그는 단지 화폭에 바람이 지나갈 통로를 만들어준다. 그의 그림은 바람의 통로다. 그의 화폭이 늘 일렁이고, 바람 소리가 들리며 소나무가 흔들리고, 초가집 추녀가 들썩이고, 파도가 솟구치는 것은 바람의 통로를 따라 세상의 모든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서귀포 새섬]
서귀포항을 방파제처럼 감싸주고 있는 무인도다. 옛날 초가지붕을 만드는데 썼던 띠(새)가 많이 자라서 새섬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섬은 동서 560m, 남북 길이가 430m의 타원형이다. 문섬, 범섬, 섶섬과 함께 서귀포 앞바다에 있는 4개의 무인도 중 유일하게 출입이 가능한 섬이다. 서귀포항 천지연 폭포 부근과 새연교로 이어지면서 제주 본토로 편입되어 있다. 울창한 숲과 해변을 따라 섬을 일주할 수 있는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어서 서귀포 시민의 공원 구실을 하고 있다. 새연교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다리'라는 뜻이다. 제주의 전통 배인 '테우'를 형상화해서 만들어졌다.

[용눈이오름]
용눈이오름은 사진가 고(故) 김영갑이 가장 사랑했던 오름이다.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측화산이다. 산정부는 북동쪽의 정상봉을 중심으로 3개의 봉우리를 이루고, 그 안에 동서쪽으로 다소 트여 있는 타원형의 분화구가 있다. 해발 247.8m, 높이 88m, 둘레 2,685m, 면적 40만 4264㎡. 송당에서 성산 쪽으로 가는 중산간도로 3㎞ 지점에 있다. 용이 누워 있는 모양이라고도 하고 산 한가운데가 크게 패어 있는 것이 용이 누웠던 자리 같다고도 해서 용눈이오름이라 한다. 또 위에서 내려다 보면 화구의 모습이 용의 눈처럼 보인다 해서 용눈이오름이라고도 한다. 정상에서는 손자봉, 다랑쉬오름, 동거미오름, 성산일출봉, 우도를 볼 수 있다. <탐라지도병서> <제주삼읍도총지도> <제주삼읍전도>에 '용유악(龍遊岳)', <제주군읍지>의 '제주지도'에는 '용안악(龍眼岳)', <조선지형도>에는 '용와악(龍臥岳)' 으로 표기되어 있다.

[올레10코스]
걷는 내내 제주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최고의 해변 올레다. 화순 금모래해변에서 출발해 모슬포 하모체육공원까지 이어지는 총연장 14.8km의 올레길. 제주 바다뿐만 아니라 산방산과 오름군, 영실계곡 뒤의 한라산 비경도 감상할 수 있다. 제주올레가 스위스정부 관광청과 맺은 '제주올레-스위스 우정의 길'이다. 우리는 섯알오름에서 용머리해안까지 걷는다.

[용머리해안]
천연기념물 526호. 산방산 아래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용머리해안은 제주 최고의 기암절승이다. 해안의 언덕 형상이 용이 머리를 틀고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용머리'라 한다. 바다 속 세 개의 화구에서 분출된 화산쇄설물이 쌓여 만들어진 해안이다. 성산일출봉이나 수월봉과는 달리 화구가 이동하며 생성된 지형적 가치가 크다. 전체가 마치 신비로운 조각 같다. 거친 파도가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든 조각품들이다. 이 대자연이 빚은 조각품들을 보는 순간 인간이 만든 조각품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서귀포 자연휴양림]
혹시 바람 때문에 가파도나 비양도 두 섬 중 한 곳을 걸을 수 없을 때 대신 걷게 될 숲이다. 한라산 서쪽을 가로질러 제주시와 서귀포시 중문관광 단지를 잇는 1100도로 동쪽 중심에 700고지 무렵에 자리잡고 있고, 온대·난대·한대 수종이 다양하게 분포된 50년대 내외의 울창한 편백림에 산림욕장이 조성되어 있다. 옛날에는 휴양림 일대가 화전민촌이었다.

숲은 적막하다. 바람이 지나가고 숲이 일렁인다. 오늘 이 숲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 검은 옷의 전령들. 까마귀들은 떼 지어 날기도 하고 삼나무나 소나무 가지에 앉아 경계를 살피기도 한다. "까악 까악..." 까마귀들 지껄이는 소리가 숲의 고요를 깬다. 저 소리는 무슨 징조일까. 뭍에서라면 까마귀 소리는 나쁜 징조다. 그러나 제주의 까마귀는 흉조가 아니다. 제주의 까마귀는 신들의 소식을 전해주는 영매와 같다.

제주에서 까마귀는 기쁜 소식도, 불길한 소식도 모두 전한다고 믿어진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까마귀를 외경한다. 까마귀는 검은 옷의 심방이다. 옛 제주에서는 까마귀가 동쪽 방향으로 울면 재물 운이 있고 서쪽을 향해 울면 집안에 병환이 있을 징조로 여겼다. 남쪽 방향으로 울면 귀신이 들고 북쪽 방향이면 손재수가 생긴다고 여겼다. 또 급하게 울면 나쁜 일이 있을 징조고 한가롭게 울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여겼다. 까마귀는 신의 전령이자 점술가이기도 했다. 오늘 까마귀는 사방을 향해 울어댄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재물운도 손재수도, 모든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언일까. 이 세상은 무엇이든 다 일어날 수 있다는 전언일까.

서귀포휴양림은 인공조림이 아닌 자연림이라 숲의 식생이 다양하다고 자연스럽다. 휴양림의 숲은 극상림이다. 햇빛에 민감한 소나무보다 햇빛을 적게 받아도 생존이 가능한 단풍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들이 우점종이다. 지금 숲은 서어나무가 대세다. 숲에는 감탕나무와 사스레피나무 등 상록수도 더러 눈에 띄지만 그보다는 비목나무와 당단풍나무, 참꽃나무, 나도밤나무, 채진목나무, 때죽나무 등 낙엽수들이 더 우세하다. 빈 공간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은빛 가지들이 반짝인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7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현재 프레시안에 <통영은 맛있다>를 연재중입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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