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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골처럼 시원한 연대도, 산호빛 해변 비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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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얼음골처럼 시원한 연대도, 산호빛 해변 비진도"

[인문학습원] 8월 섬학교, 호젓한 통영 앞섬 2박3일 여름휴가형 답사

"올 여름, 나 자신에게 휴가를 주고 싶다!"
이렇게 다짐하는 분은 8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에 참가하십시오. 섬학교 제18강은 에코아일랜드 연대도와 통영 최고의 해수욕장이 있는 비진도에서 8월 9일(금)부터 11일(일)까지 2박3일간 '여름휴가형'으로 진행됩니다(8월 둘째 주말입니다^^).

아름다운 섬 연대도(煙臺島)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섬 탐사와 함께, 따가운 한낮엔 낮잠이나 책읽기, 낚시, 숙소 바로 앞 백사장해수욕장이나 몽돌해수욕장에서의 오붓한 물놀이 등을 즐깁니다. 우리가 묵게 될 숙소인 에코체험센터는 지열을 끌어와 냉방을 하는 까닭에 전기를 쓰지 않고도 내내 시원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너른 방이 마치 얼음골처럼 시원합니다.

하루는 어선을 빌려 바로 이웃 섬 비진도(比珍島)까지 탐사를 다녀옵니다. 눈부신 백사장과 갯돌 해변이 등을 맞대고 있는 비진도 외항 해변은 한려수도 최고의 해수욕장이기도 합니다. 비진도 산호길도 걷고 해변과 솔밭에서 한가롭게 놀기도 합니다.

또 연대도 앞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참돔회와 섬 주민들이 직접 요리해주는 해산물 음식들은 섬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줄 것입니다.

▲ 꽃양귀비꽃이 만개한 연대도 몽돌해변 가는 길 Ⓒ섬학교

2012년 3월 개교한 <섬학교>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섬들을 걸으며 사유하고, 소통하며 배우는 학교입니다. 섬학교의 섬 여행은 다리나 제방 등으로 육지와 연결되지 않고 온전히 바다 위에 있는 섬들만을 답사합니다. 크든 작든 섬에서의 이동 수단은 가급적 두 발에 의존합니다. 섬 여행은 가급적 월 1회 떠나며, 작은 섬은 걸어서 일주, 큰 섬의 경우 섬의 가장 걷기 좋은 길 걷기를 기본으로 합니다.

섬에 남아있는 문화유적, 유배지, 당산, 어부림, 마을 숲, 당집, 사찰, 설화의 무대 등도 답사합니다. 해상 경관이 좋은 섬은 어선을 이용해 해상 일주도 하며, 마을 안길을 산책하기도 합니다. 또 답사 간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다 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섬과 소통합니다. 섬의 토속 음식 맛보기, 섬 노인들로부터 특산물 구매하기 등으로 섬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오도록 합니다.

▲ 한려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진도 산호빛 해수욕장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인 통영 앞바다의 호젓한 비경 <연대도와 비진도 기행>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연대도, 고향처럼 편안한 안식의 섬

"윷놀이 최고의 고수 서재목, 손재희의 집. 목소리 크고 음식솜씨 좋은 아내 손재희. 연대도 개그맨 서재목씨가 달리기를 잘 하는 김동희 할머니와 함께 사는 집"
"전통 어가를 그대로 간직한 백옥수 할머니 집. 영화 백프로에 나온 집입니다."

연대도의 집 담벼락에는 아주 특별한 문패가 하나씩 걸려 있다. 집에 사는 주인의 내력이 적힌 나무판자. 모르고 지나가면 그저 그 집이 그 집일 뿐인 섬 집들. 담벼락에 적힌 설명으로 인해 그 집들이 살아났다. 어느 한 집 예사로운 집이 없다.

"노총각 어부가 혼자 사는 집, 화초를 좋아해서 목부작을 잘 만드는 이상동 어촌계장의 집입니다. 말이 없어서 답답할 정도지만 사람 좋은 집."
"산양 읍내에서 가장 낚시를 잘 하는 어부네 집, 음식솜씨 좋고 동작이 빠른 아내 김혜원과 임중호가 금슬 좋게 사는 집"

▲ 집주인이 살아온 내력이 기록되어 친근감을 더해주는 연대도의 집 문패 Ⓒ섬학교

"허우두리 할머니댁, 연대도에서 태어나 연대도로 시집 오셨습니다. 시금치, 마늘, 밭 농사를 지으십니다. 젊었을 때 한 미모 하셨답니다."
"꽃이 있는 풍경, 허정자 할머니. 작은 집 안팎에도 담장과 골목 길에도 사시사철 꽃을 키우는 마음 착한 할머니댁"
"연대도 유일한 담배집, 가장 오래된 밀감나무와 시원한 우물이 있습니다. 백또성아 할머니댁"

경남 통영시 산양읍 연곡리 연대도. 통영시는 2009년 시민단체 <푸른통영21>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대도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연대도를 생태 섬, 무공해 섬, 화석에너지와 쓰레기 제로의 섬, 에코아일랜드로 만드는 사업을 진행해 2012년 5월 18일 준공식을 가졌다. 외부 자본을 배제하고 섬 개발의 이익이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지속가능한 개발의 모범을 이루었다. 1단계로 연대도 주민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벼려둔 33층의 다랭이 밭을 야생화 밭으로 조성하고 폐교를 리모델링해 숙박을 겸한 에코체험센터를 가동 중이다. 이들 사업에서 나오는 이익은 주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된다. 태양광, 풍력발전 설비가 도입되었고 생태 탐방로도 조성되었다. 2011년 완공된 150kw 규모의 태양광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전기를 사용한다. 가구당 1천원 남짓으로 전기세가 낮아졌다.

오래된 마을회관 건물을 헐고 마을회관과 경로당, 비지터센터를 지었다. 외부 화석에너지를 사용치 않고 자연에너지(지열, 태양광 등)를 이용해 냉난방을 하는 공공건물 최초의 페시브하우스(passive house)다. 화석에너지 제로의 섬, 이제 연대도는 외부 전력 공급 없이 태양광, 지열 등 재생가능 에너지만으로 온 섬의 전력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지금은 대안에너지 체험교육의 메카로 부상했다. 에너지자립을 꿈꾸는 활동가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향후 대안 에너지 체험 시설, 전통 어가 복원, 연대도 폐총 복원, 허브단지 조성, 대표 브랜드 농수산물 개발 등 다양하고 친환경적인 개발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들 모두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사업들이다.

▲ 연대도 몽돌해변의 일몰. 멀리 두미도 너머로 해가 진다. Ⓒ섬학교

1980년대까지도 이순신장군 사당의 소작인으로 살았던 섬사람들

과거 연대도 바다에는 전복, 소라, 해삼 등이 지천으로 깔렸었다. 해마다 30명이 넘는 제주도 해녀들이 들어와 물질을 하고 갔다. 그래서 한 때는 돈이 넘친다 해서 '돈섬'으로까지 불렸다. 하지만 어느 때부턴가 해산물들은 종적을 감추고 섬은 노인들만 남아 늙어가고 있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섬, 그 덕분에 섬은 개발의 광풍을 피할 수 있었다. 섬은 난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연대도 에코아일랜드 사업이 진행되면서 섬은 다시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48세대 82명이 등록되어 있지만 실제는 32세대 59명(2009년)이 거주하는 작은 섬이다. 석기시대 조개무더기에서 어류, 조류, 포유류의 뼈가 출토된 유서 깊은 섬이기도 하다. 숙종 44년(1718년) 군창(軍倉)에 속해 있던 연대도의 둔전 30여 마지기 땅이 충무공 사당인 충렬사의 사패지(賜牌地)로 지정되었다.

사패지란 임금이 왕족이나 공신 등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공신전 등을 내리고 그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문서로 보증해준 땅이다. 사패지인 연대도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제사 비용을 충당하게 했으니 주민들은 모두가 충렬사의 소작인이었다. 300석 보리농사를 지으면 150석을 공출해 갔다. 무려 5할의 소작료였다. 조선왕조시대에 국왕에 의해 하사된 땅의 지배권이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 와서도 이어졌다.

1970년대 초 마을에서 돈 20만원을 모아 충렬사에 주고 소작을 영구히 면제해 달라고 청했다. 당시 20만원이면 충렬사 부근 통영시내 토지 1천 평을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1989년에 와서야 주민들은 공지시가대로 땅값을 물고 제 땅을 만들 수 있었다. 자기 땅에 살면서 식민지를 살았던 서러운 삶이 비로소 청산된 것이다.

연대도 주민들은 어류양식과 낚시어업을 하기도 농사를 짓기도 한다. 옛날에는 쌀, 보리, 고구마,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지었으나 현재는 논농사는 짓지 않고 밭에 마늘, 시금치, 쪽파, 취나물, 방풍나물, 두릅 등을 재배한다. 방풍과 두릅이 많이 난다.

옛날에는 연대도에 주조장도 있었다. 일제 때 사라라는 일본 사람이 연대도에서 오오시키(정치망)어업을 했고 연대도 사람들은 일본으로 가서 머구리(잠수) 배를 많이들 탔다. 시모노세키로 굴을 까는 품팔이를 다니기도 했다. 근래까지도 다니러 가곤 했다. 마을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10여 년 전에도 노인회장의 인솔을 받아 시모노세키로 1주일 동안 굴을 까러 다녀왔다. 아들에게는 여행을 다니러 간다고 거짓으로 일러두고 굴을 까러 갔었다.

해방 후에는 주민들이 일본인들의 머구리배를 구입해서 조업했다. 머구리배가 23척이나 있었고 술집도 7곳이나 됐다. 갈치가 많이 잡히는 갈치어장이었고 바다 속에는 전복, 해삼 등이 지천이었다. 그래서 연대도를 '돈섬'이라 했다. 일본말로 '카네시마'다.

불교의 다비식을 제외하면 이 땅에의 장례풍습에서 화장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연대도에는 화장의 풍습도 있었다. 섬에는 두 개의 화장터가 있었다. 날이 좋을 때는 어둠골에서 화장을 하고 날씨가 궂을 때는 꼬리섬에서 화장을 했다. 화장터는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다. 화장의 풍습이 생긴 것은 농토의 부족 때문이었다. 이상동 어촌계장도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마을 뒤편 어둠골로 가서 직접 화장을 했다 한다.

연대봉 주위를 따라 섬길이 나 있다. 옛날 나무하러 지게지고 다니던 길이라 해서 '지겟길'이라 이름 했다. 지겟길을 따라 걷다 섬의 뒤 안에서 나그네는 연대봉 산길을 오른다. 그냥 걷기도 쉽지 않은 이런 험한 산길을 예전에는 다들 한 짐 가득 나무를 지고 다녔다. 여자들도 땔나무 한 단씩 머리에 이고 다녔던 고생길. 지금 이 길은 그저 산책길이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생존의 길이었다. 고개 넘어 물 길러 가지 않고 높고 깊은 산까지 나무하러 다니지 않는 것만으로도 노인들은 세상이 천국이 됐다고 말씀하신다. 그 뜻이 어찌 이해되지 않으랴.

봉홧불을 올리던 섬

연대도란 이름은 조선시대 삼도수군 통제영에서 왜적의 동향을 알리기 위해 섬 정상(연대봉 220m)에 봉수대를 설치한 데서 비롯됐다. 연대봉의 봉수대는 허물어져 돌들은 뒹굴고 숲은 우거져 바다가 보이지도 않는다. 봉수대는 봉홧불만을 피워 올리는 곳이 아니다. '봉'은 밤에 불을 피워 올리는 것이고 '수'는 낮에 연기를 피우는 것을 말한다. 봉홧불은 장작이나 화약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이 사용한 재료는 따로 있다. 승냥이 똥이다. 짐승의 똥이 군수품이었던 셈이다. 승냥이 똥에는 인이 섞여있어 그 불빛이 푸르고 멀리까지 보이기 때문에 봉홧불의 재료로 사용됐다.

봉수대 옆에는 섬의 당이 있고 당나무가 있다. 연대도의 신전이다. 신전에서 모시는 신단수는 희귀하게도 물푸레나무다. 신전은 건물이 없고 돌담을 둘렀다. 신전 입구는 새끼줄로 금줄을 처서 이곳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했다. 금줄에는 솔가지가 꽂아져 있다. 부정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당산나무인 물푸레나무와 제단 돌에는 콩짜개 덩굴이 뒤덮여 신령한 푸른 빛을 더한다. 물푸레나무는 신령스런 숲의 주인이다. 주민들은 해마다 직접 솥을 가지고 와서 밥을 지어 올리며 제를 지냈었다. 당제는 정월 초하루에서 5일 사이, 길일을 택해 지냈다.

물을 푸르게 한다 해서 물푸레나무다. 물푸레나무 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푸른 물이 우러난다. 물푸레나무는 질기고 단단하기로 유명하다. 겨울 물푸레나무는 못도 안 들어간다 할 정도로 단단하다. 그래서 도끼나 망치, 호미, 낮, 괭이 등의 자루로는 최고다. 형벌을 내리던 곤장이나 감옥의 창살로도 이용됐던 나무다.

이 땅에서는 물푸레나무가 당산나무로 모셔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북유럽 신화의 이그라드실 물푸레나무는 '하늘과 땅, 지구의 중심까지 삼계를 이어주는 우주목'이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주신인 오딘까지도 물푸레나무에게 지혜를 얻어가곤 한다. 불과 백 년을 살기 어려운 인간에게도 세월의 경륜이 쌓이면 지혜가 생기고 혜안이 열리는데 하물며 수 천 년을 사는 나무들에게 어찌 신령이 깃들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연대도의 당은 두 곳이다. 연대봉의 당은 윗당, 마을 뒤편에도 당이 있으니 아랫당, 혹은 중당이라 한다. 당제를 지낼 때면 윗당산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혼을 달래는 산제를 모시고 아랫당산에서는 장군 휘하의 장졸들의 원혼을 달래는 당제를 모신다. 마지막으로는 마을 한가운데 별신굿 터에서 별신장군제를 지낸다. 옛날에는 무당 불러와 3일간 별신굿을 했지만 지금은 초청해 모셔온 스님과 마을 주민들이 제를 모신다. 우리 섬들을 지켜온 우리 토착 신들에 대한 신앙이 남아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연대도는 참으로 소중한 섬이다.

▲ 연대도 사람들이 당제를 모시는 별신장군대 Ⓒ섬학교

비진도, 통영의 진귀한 보물

사람은 늘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사소한 일 때문에 기쁘고 슬프다. 사소한 것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한다. 사소한 희망에 살기도 하고 사소한 절망에 죽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사람의 목숨이란 대체로 큰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 생사를 좌우한다. 삶에 사소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세계는 사소함으로 가득하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실어 나르는 이 여객선도 기관의 사소한 고장으로 난파할 수 있다.

뉴매물도 페리호는 비진도에 나그네를 부려놓고 서둘러 떠난다. 저 배의 승객 대부분은 소매물도가 목적지다. 안섬과 바깥 섬이 이어져 하나로 된 비진도는 섬의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워 '미인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소매물도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한려해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손꼽히는 섬이다.

면적 2.766㎢, 해안선 길이 9㎞, 최고봉은 선유봉(311m)이다. 통영시에서 남쪽으로 10.5㎞ 해상에 있으며, 주변에는 매물도(每勿島)·소매물도(小每勿島)·한산도(閑山島) 등이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섬에는 상록수들이 많으며 천연기념물 제63호인 팔손이나무 자생지는 아주 유명한 상록수림이다.

▲ 비진도 외항마을과 비진도 해수욕장 Ⓒ섬학교

"일기장을 썼으면 석 짐도 더 될 것인디"

비진도 외항 마을 해변, 노인 한 분이 백사장에서 해초를 줍고 있다.

"할머니 그거 몰이지요. 뭐에 쓰시려구요?"
"옛날에는 이거를 보리밭에 안 넣으면 밥 굶는다 했어요."
"보리밭에 거름 주려구요?"
"고추 심겨 아들 줄끼라. 고구마 밭에도 넣고. 옛날 집집마다 다 할 때 같으면 천신도 못하지."

과거 섬에서 농사를 많이 지을 때 해초는 요긴한 거름이었다. 진질이나 몰 같은 해초를 거두어다 발효시켜 퇴비를 만들면 똥거름보다 생산성이 높았다. 식용이 아니라도 해초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농경을 포기할 수 없는 비진도에서 해초는 여전히 유용한 거름이다.

"어렵고, 몸 아프고, 허리 아파 걷지도 못하고 그래가 살고 안 있나."

노인은 혼자 말처럼 하늘에 대고 고통을 하소연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하늘은 묵묵부답이다. 노인은 외항마을 바다에 바짝 붙어산다. 노인의 이웃집 하나는 지붕이 날아가고 없다. 할머니는 중학교 1학년, 손녀딸과 둘이 산다.

"아들 손주 하나 대꼬 산다. 아들은 대전에 가 일한다. 중노동 한다. 집 짓는데 다니는데, 거는 일 있으면 살고, 일 없으면 죽는다."

노인은 오늘 해변에서 미역과 톳을 거두었다.

"톳은 말라가지고 해묵기도 하고, 생으로도 해묵고, 김치도 해 담아 놓으면 맛있다. 요기 생미역 갖고는 생선 국 끓여놓으면 맛있다."

노인이 미역귀 하나를 떼어 준다.

"묵어봐, 꼬시다."

자식이 있어도 다들 어렵게 살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팔순의 노인. 노인은 늙은 몸 이끌고 밭농사도 짓고 해초도 뜯고, 굴도 깨가며 하루씩 생을 연장한다. 지루한 삶, 어서 떠났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다면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

"돈을 벌 재주가 있나. 몸디가 주저 앉았는디. 뭔 부지런을 그리 떨어갔고 몸디가 성한데가 없다. 게을러서 방바닥에 주저앉아 살았어야 했는디. 옛날 수월케 산사람은 아직도 허리 빳빳하다."

노인은 부지런하게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만 때늦은 회한은 부질없다. 영감은 19년이나 병치레를 하다가 떠났다. 노인은 통영의 산양에서 태어나 스물다섯에 섬으로 시집 와 꼬박 55년을 살았다.

"일기장을 썼으면 석 짐도 더 될 것인디. 여그가 바람 때리면 겁나. 여그서 평생 살면서 큰 태풍만 세 번 만났다. 보릿고개 넘었제. 숭년 당했제. 아이고, 아이고 내가 뭐한다고 와갖고. 우리 아배, 옛날에는 시집 못 살고 가면 죽는 줄 알고, 그라이께내 살았제.

비진도는 안 섬과 바깥 섬, 두개의 섬이 시간의 물살에 밀려 하나로 이어졌다. 연결된 구릉 앞뒤로 모래와 몽돌 해변이 등 기대고 앉았다. 해수욕장이 드문 통영에서 비진도 해변은 피서객들에게 이름난 곳이다. 해수욕장 인근의 외항마을은 대부분의 집들이 민박을 친다. 대형 팬션도 서너 채 들어섰다.

"집도 이층으로만 해서 마을이 다 같이 잘 살았으면 좋을텐디 멫 집만 잘 살라고들 집을 높이 올리니 못 사는 사람만 더 못 산다."

노인은 관광업의 혜택이 마을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재력 있는 몇 사람이 대규모로 고층의 팬션을 지어놓으니 관광객들은 허름한 민박은 잘 찾지 않는다.

비진도에는 제삿날이 같은 집이 여럿이다. 운명을 가른 것은 1959년 음력 8월 14일, 추석 전날이었다. 그해 한반도의 수많은 인명을 거두어간 사라호 태풍은 이 섬 어부들도 떼죽음으로 내몰았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앞 바다의 정치망 그물을 걷으러 간 섬의 남자들 아홉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삶을 건지는 그물이 자주 죽음의 덫이 되기도 하는 섬 살이.

"이래갖고 십년만 있으면 도깨비가 나겠구만"

고갯길을 걸어 내항마을로 간다. 산비탈 밭에서는 땅두릅 수확이 한창이다. 땅두릅은 봄철 한산도와 비진도를 비롯한 한산면 일대에서 가장 큰 효자 작물이다. 주민들은 시금치처럼 오래 뜯을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땅두릅은 수확 기간이 이 십여 일 안팎으로 짧다. 밭에서 수확한 두릅은 깨끗이 씻어 건조한 뒤 다음날이면 한산도 농협으로 보내져 경매된다. 수확 초기에는 2킬로 한 상자가 1만 7천원까지 간 적도 있었지만 요즈음은 1킬로에 5천 원 선이다. 봄이 와도 이제는 더 이상 산과 들에 나물 캐는 처녀는 없다. 두릅나물 캐는 여인은 일흔 넷.

"자녀들은 호빡 나가고 없고, 젊은 사람들은 아애 없어요."

비진도는 반농반어의 전형적인 섬마을이다. 파도가 세서 물고기 가두리 양식은 어렵다. 바다에는 미역이나 전복, 해삼, 멍게 등을 가두지 않고 자연 상태로 양식한다. 내항마을 어느 창고 앞, 노부부의 두릅 손질이 한창이다. 노인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섬에 100가구 800여 명이 살았다고 기억한다.

"그때는 작은 섬에 사람이 너무 많다 싶었지. 50가구만 살면 안 살아지겠나 했는데."

지금 섬에는 50가구, 120여 명만 겨우 남았다.

"명절 때나 돼야 동네가 사람 사는 것 같지. 애 울음소리도 없어. 이래갖고 십년만 있으면 도깨비가 나겠구만."

창고 옆 텃밭에는 무슨 작물을 심었는지 밭두둑이 단정하다.

"여기 콩 심으셨어요."
"아니 팥 갈았어요."
"콩 심을 때가 안됐나요?"
"콩은 날짜 따져 갈면 안 되고, 감나무 이파리 세 잎 날 때 갈면 딱 좋습니다."

감나무 이파리 세 잎 나는 날 콩을 심는다! 노인의 말씀이 한편의 시(詩)다.

수포 가는 길

외항에서 수포 마을로 가는 해안 길은 오래된 흙길이다. 한동안 청보석의 바다가 보이는 비탈진 산자락을 따라가던 길이 숲으로 사라진다. 해변의 숲은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새 소리로 아득하다. 길가에는 사람의 자취 없다. 진달래와 산 벚꽃은 어두운 숲길의 가로등이다. 절정으로 피어오른 선홍의 진달래꽃, 하얀 산 벚꽃의 점등으로 숲은 눈부시게 환하다. 파도는 동백나무, 잣밤나무 숲 아래까지 와서 일렁이고 겁 많은 염소들은 인기척에 놀라 숲속으로 달아난다.

사람을 밀어내는 아스팔트길과 달리 흙길은 사람을 품어 안는다. 아스팔트길은 단절의 길이지만 흙길은 소통의 길이다. 길 가는 내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새들과 바람과 나뭇잎과 바다, 바다. 간간이 들리는 어선의 기관소리까지도 이 숲의 흙길에서는 자연의 소리로 포섭 된다.

길의 끝에 수포마을이 있다. 몇 집 되지 않는 마을은 인적이 없다. 마지막까지 살던 노인들이 이승을 떠난 뒤 마을은 폐촌이 된 것일까. 그래도 눈 밝은 수행자 하나 있었나 보다. 마을은 이제 절 골이 되었다. 허물어져 가는 집들 사이에 절이 들어섰다. 법당을 새로 지었고 빈집을 고쳐 요사채로 만들었다. 그러나 절도 조용하다. 살던 스님도 외로움에 지쳐 떠나버린 것일까.

외항마을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마을이 사라진 내력을 듣는다. 수포마을 사람들은 강제로 마을을 떠나야 했다. 섬 노인은 그 때가 납북어부 사건으로 한참 시끄러운 뒤끝이었다고 기억한다. 1977년 통영호 납북 사건이 있었고, 비진도 이웃 섬, 부지도의 한 어부도 납북 되었다. 부지도에 살던 어부는 장어통발 어선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러 온 낯선 사람에게 선급금을 받고 따라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일련의 사건들 뒤 정부에서는 5가구 미만의 외딴 섬과 섬마을들에 대한 소개령을 내렸다. 그때 수포마을 사람들도 모두 살던 집을 떠났다.

"통영도 살러 가고, 요기 큰 부락으로도 살러 오고."

수포마을에는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못했다. 최근에야 한 사람이 들어가 살았지만 그 또한 바로 떠났다. 절은 외항마을 살던 여자가 이혼한 뒤 비구니가 되어 돌아와 지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비구니 스님도 오래 살지 않고 절을 육지의 어느 스님한테 팔았다. 절을 산 스님 또한 상주하지 않는 듯하다.

소개령이 내려진 뒤 많은 섬들이 무인도가 됐다. 수포마을뿐만 아니라 그 때 섬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다시 섬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람이 떠난 뒤 섬들의 오래된 문화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자국민이 간첩에게 납치되어도 지켜주지 못하던 무능한 독재 권력이 '안보'의 책임은 늘 국민들에게 떠넘기던 시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생명의 안위를 국민들 스스로 지켜야 하는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 비진도 제일봉 선유봉에서 내려다본 비진도 풍경 Ⓒ섬학교

섬학교 제18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잠깐! '푸른통영21'이 섬학교의 에코아일랜드 연대도 방문을 축하하며 특별히 8월 10일(토) 저녁 <에코콘서트>를 준비했습니다.

<8월 9일(금요일)>

06:10 서울 출발(6시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10:40-11:30 점심식사
12:00 연대도행 승선
12:20 연대도 도착
12:30-13:00 숙소인 연대도 에코체험센터에 도착 및 방 배정

13:00-16:00 연대도 '지겟길' 걷기 및 마을 탐방(3km)
에코체험센터→ 마을안길-> 태양광발전소→ 지겟길→ 에코체험센터
16:00-18:00 자유시간
(휴식, 낮잠, 책읽기, 낚시, 숙소 바로 앞 해수욕장이나 몽돌해수욕장에서 물놀이 등)
18:30-20:00 참돔회와 매운탕을 곁들인 저녁식사 겸 뒤풀이
20:00 휴식 및 취침


<8월 10일(토요일)>
07:00 기상, 아침 산책
08:00 아침식사
09:00 대절선 연대도 출발
(어선 3척 나눠서 승선)
09:20 비진도 도착
09:30-12:30 비진도 걷기(2km) 및 비진도 해수욕장에서 놀기
외항마을→ 수포마을→ 비진도 해수욕장
12:30 비진도 출발
13:00 연대도로 돌아와 점심식사
14:00-18:00 자유시간
(물놀이, 휴식, 낮잠, 책읽기, 낚시, 기타 등등)
18:30-19:30 참돔회를 곁들인 저녁식사 겸 뒤풀이
19:30-21:30 연대도 에코콘서트(에코체험센터)
21:30 휴식 및 취침


[연대도 에코콘서트]
'에코'란 단어는 '울림'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소리 또는 음향에 대한 기분 좋은 이미지입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생활방식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에코'는 소박하고 담백한 생활방식을 추구하려는 뜻이며, 인간과 자연의 자연스러운 '울림'입니다.


탄소에너지 제로를 추구하는 섬, '에코아일랜드' 연대도에서 젊은, 그리고 독립적인(인디) 포크 음악인들이 소박한 공연을 갖습니다. 담백한 소리의, 그리고 대자본에 얽매이지 않는 포크 음악인들과 '에코아일랜드' 연대도라는 공간의 어울림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만남이 될 것입니다.

'푸른통영21'이 주최하고 '온스테이지 통영'(준)이 기획한 <연대도 에코콘서트>가 10일(토) 저녁 연대도 에코아일랜드에서 열립니다. 참여 아티스트는 이권형(2013 통영프린지 참여), 황자양 (포크밴드 '게으른 오후' 리더), 포크밴드 '사월'등 6명입니다. 한여름 밤 아름다운 섬에서 만나는 이날 콘서트가 연대도의 감동과 추억을 더할 것입니다.



<8월 11일(일요일)>

07:00 기상
08:00 아침식사
09:00-10:00 연대도 산책이나 물놀이
10:00 연대도 출발
(대절선)
10:20 통영 미륵도 도착

10:40-11:30 박경리기념관 관람
12:00-13:00 점심식사
(통영식 한정식)
13:00-14:00 자유시간, 중앙시장 탐방
14:00 서울 향발


<연대도 자세히 알아보기>
연대도 에코아일랜드 홈페이지 www.yeondaedo.com를 참조하세요.

▲ 연대도와 비진도 답사로 Ⓒ섬학교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어머니전>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일부 풀숲 구간에선 필히 긴 바지^^), 스틱, 물통, 윈드재킷, 우비(+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과일,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읽을 책, 수영복, 낚시도구, 물놀이기구,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 연대도 숙소인 에코체험센터 바로 앞 해수욕장 Ⓒ섬학교

섬학교 제18강 참가비는 28만원입니다(2박3일 왕복 교통비, 숙박비, 8회 식사비 및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현재 프레시안에 <통영은 맛있다>를 연재중입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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