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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의 아름다움, 피아골 단풍에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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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절정의 아름다움, 피아골 단풍에 물들다"

[알림]<백두대간12걸작선2> 10월 산행은 피아골 구간

백두대간학교(교장 최창남)의 <백두대간12걸작선2> 10월 산행(제24강)은 선홍빛으로 물들어 절정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단풍 아름다운 지리산 피아골 구간입니다. 성삼재에서 출발하여 노고단 대피소를 지나 노고단에 올라 가을하늘을 만끽하며 주변의 풍광을 가슴에 담습니다. 돼지령을 지나 임걸령 전 피아골 삼거리에서 우측 피아골 대피소로 향합니다. 피아골 대피소를 지나 남매폭포의 폭포소리에 귀를 씻고 삼흥소에 도착하면 청량한 계곡과 어우러진 단풍에 잠시 시름을 잊습니다. 연이어진 아름다운 소(沼)를 지나면 다랑이 논이 아름답게 펼쳐진 직전마을입니다. 산행은 다랑이 논을 보며 마감합니다. 10월 27일 토요일(당일)입니다.

▲ 피아골을 물들인 단풍 Ⓒ백운자전거愛

[교장선생님의 산행지 설명]

산은 '오르는 것'[登山]이 아니라 '들어가는 것'[入山]입니다. 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지만,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산입니다. 산의 주인은 산입니다. 산에 사는 동물들이고 나무들이고 꽃과 풀들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작은 산을 들어가더라도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겸허한 마음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만이 산과 교감하고 자연과 하나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자연이 주는 '쉼' 즉 '휴식'을 얻는 것이기도 합니다. 산길을 걷다보면 어느 새 정화되어 있는 마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 씻고 몸을 닦는데 산길을 걷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숲속에 있을 때 참된 휴식을 얻습니다. 휴식이라는 한자는 이런 뜻을 잘 담고 있습니다. '휴'(休)자는 '사람'[人]이 '나무'[木]를 만난다는 뜻이고, '식'(息)자는 '스스로, 절로'[自] '마음'[心]이 하나가 된다는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러니 휴식(休息)이라는 낱말의 참뜻은 '사람은 자연 속에 있어 하나가 될 때 진정한 휴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연이 주는 깊은 쉼과 휴식은 걷기를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쉼과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몸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몸을 열어야 합니다. 걷기는 몸을 여는 행위입니다. 걷는 것을 통해 잊고 지내던 자신의 몸을 느끼고, 몸을 통해 느껴지는 즐거움과 기쁨을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긴 시간의 걷기는 근육과 관절에 피로를 주지만, 그 피로감 속에는 산길을 걷고 숲의 기운을 느끼며 얻게 된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함과 아늑함이 가득 차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걷기는 자연을 만나는 접촉점이며 자연이 주는 생명력을 받아들이는 통로입니다. 걷기는 사람에게 주어진 자연의 축복입니다.

▲ 반야봉 낙조 Ⓒ구례군

그렇다면 걷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걸어야 할까요?
첫째,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할 수만 있고 여건만 허락된다면 나무늘보처럼 느리게 걸어야 합니다. 풀도 만져보고 야생화와 이야기도 나누고 나무의 진동을 느끼면서 걸어야 합니다.
둘째, 머리가 아니라 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발로 느껴지고 손으로 만져지고 몸으로 전해져 오는 것들에 대해 정직하게 느낌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셋째, 몸을 열어야 합니다. 흔히들 마음을 열어야 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반대입니다. 몸을 열어야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걷기는 몸을 여는 과정입니다.
넷째, 자연과 교감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자연과 하나되는 산행을 해야 합니다. 산행 중 고요히 머물러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 등은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섯째, 산과 자연의 교감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이 새로워지는 경험을 가지는 것입니다. 산길을 걷는 것은 충만함과 아늑함만 주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성찰도 줍니다. 그러므로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자연과 하나 되는 과정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자연이 주는 지혜를 얻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지리
산은 그 이름부터가 '머물면 세상과는 다른 종류의 지혜를 얻게 되는 산'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어찌 지혜가 깃들지 않겠습니까. 지리산의 본래 이름은 지리산(智利山)입니다. 이것은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자와 '리'(利)자를 따온 것입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현신한 문수보살의 지혜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지혜를 얻은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가 계승되고 재해석되며 지리산(智異山)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지리산(智理山)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지혜로운 이인이 많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워지는 산'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서로 뜻이 통하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 이름들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머물면 지혜로워지고 그렇게 지혜로워진 사람이 많아지면 지혜로운 이인이 많아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백두대간 12걸작선> 시즌2의 마지막 산행이며 전체 산행의 24번째가 될 10월 산행은 바로 그 지혜의 산 지리산입니다. 하늘의 빛과 땅의 온기가 어우러져 빚어낸 절정의 아름다움으로 숨을 멎게 하는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러 갑니다. 지리십경 중의 하나인 직전단풍(稷田丹楓)입니다. 성삼재에서 걷기 시작하여 노고단, 돼지령을 지나 피아골로 내려오며 절정의 아름다움 속으로 젖어드는 산행길입니다. 산길을 걷다보면 절로 그 아름다움에 동화되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산행이 될 것입니다.
<지리산행복학교>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는 이원규 시인은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온 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몸이 열린 자들만이 자연이 주는 절정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
입니다. 절정의 아름다움이 주는 자연의 지혜를 품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산길로 접어들어 절정의 아름다움을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구간소개

- 산행코스 : 성삼재-노고단 대소-노고단-돼지령-피아골 갈림길-피아골 대피소-남매폭 포-삼흥소-통일소-연주담-직전마을
- 산행거리 : 약 14.6km(도상거리)
- 소요시간 : 약 8시간
- 난 이 도 : 중하(★★)

[산행계획]
여유 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 두 분이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산악가이드 이철승 선생님은 백두대간 종주 등 산행경력 30년의 공인 등산안내인이고, 엄재용 선생님은 백두대간을 3회 종주한 공인 등산안내인입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 기사님 전화번호는 010-4152-1055 입니다.

01: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01:30 사당역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01:40 양재역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02:00 경부고속도로(하행) 죽전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05:00 청솔회관(전북 남원시 인월면 상우리 386-2/063-636-2489) 도착
아침식사 및 도시락 싸기
06:00 산행 안내 및 등반 교육(이동하며)
06:30 성삼재 도착, 스트레칭 후 산행 시작
07:30 노고단 대피소
07:50 노고단 고개
08:40 돼지령
09:10 피아골 갈림길
10:50 피아골 대피소, 점심식사
12:20 남매폭포
12:40 삼흥소
13:30 연주담
14:30 직전마을, 산행 마감
14:50 피아골 노고단산장 식당(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1194)
산채정식이나 토종닭백숙에 막걸리를 곁들여 식사 겸 뒤풀이
15:30 <백두대간12걸작선> 시즌2 졸업식
-조촐한 졸업식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간의 소회와 함께 나누는 조촐한 자리에 함 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16:30 서울로 출발
19:3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일정은 현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프레시안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의, 우의, 스틱, 물통,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그리고 반드시 빈 도시락과 수저세트를 가져오세요.

<백두대간12걸작선(傑作選)2>⑫ <피아골 구간>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3회 식사와 뒤풀이, 강의비,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백두대간학교 홈피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십시오(산행에 관한 문의는 이철승 선생님에게 해주세요. 010-8727-0202). 아울러 백두대간학교 카페에도 많이 놀러오시고 회원 가입도 해주세요 (http://cafe.naver.com/baekdudaeganschool)^^.

☞참가신청 바로가기

▲ 노고단 운해 Ⓒ구례군

[산행자료]
[지리산(智異山)]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지명>
'지리산'이란 지명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역사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887년) 최치원 선생의 쌍계사의 진감선사 비문에 등장하는 '智異山'이다. 다만,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가 최초인데 <삼국사기>의 기타 기사에도 地理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오늘날과 같이 智異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려시대 이후 지리산은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으로 개인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한다. 또한 조선시대 영남학파들에 의해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이 있는데 신선사상의 발로이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덕산(德山), 민중적 변혁의식의 장소성이 반영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 등도 지리산의 또 다른 별칭이다.

<역사>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경에 지리산 자락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 골골이 숨어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동기를 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 입지하고 있다.
지리산의 험난한 역사는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지대로 싸움터의 무대였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다. 근대엔 동학민중운동과 여순반란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다.
구례의 석주관과 고려 말 이성계가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지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순반란에서 시작해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스러진 곳이다.

<지리>
지리산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난과 보신지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규경(1788~?)은 '청학동 변증설'에서 "우리나라의 형승은 험조한데, 산이 서리고 물이 감돌아 양의 창자 같은 곳이 아님이 없고, 그리하여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다"고 했으니 바로 골짝마다 삶터를 일굴 수 있는 지리산의 지형지세를 염두에 두고 일컬은 평인 것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지리산의 주거환경 조건을 말하기를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피난지와 은거지로 적합한 지리산의 자연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충분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과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이곳이 한라산 혹은 변산, 금강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여겨진 배경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 전설을 비롯한 이상향 관념이 생겨난 조건이 됐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 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 권역이었던 것이다.
국토의 남쪽에 크게 둥지를 틀고 있는 지리산의 입지적 무게는 중심지에 대한 변방지역의 독립성과 근거지를 확보하는 장소성을 띤다. 따라서 지리산은 지배층의 견지에서는 반역지의 속성이 있었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변혁의 근거지요 산실이기도 했다. 구산선문의 2개 산문이 지리산에서 일어난 통일신라 말 불교의 변혁과정도 그랬고, 동학을 위시한 근대의 민중운동도 그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지리산의 호칭이 불복산, 반역산이라는 것도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으로 지리산의 변혁적 장소성에 대한 지배계층의 의식을 잘 드러내어 주는 단면이다.

▲ 지리산 다랭이논 Ⓒ지리산국립공원

<문화와 인물>
지리산 권역에서 태동된 판소리의 동편제는 서편제와는 대조적으로 지리산 산세의 웅혼함을 닮아서 메아리쳐 이루어진 음률이다. 그리고 남명 조식(1501~1572)의 장중한 사상적 무게와 그가 일상에서 견지한 공경과 의로움은 61세 이후로 덕산 자락에 터를 정해 산천제에 거처하고 스스로를 방장산인으로 여기면서 지리산과 한 몸이 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명의 문하에서 의병대장인 곽재우를 비롯, 조종도, 정인홍, 김효원, 최영경 등의 수많은 인물이 지리산의 봉우리처럼 배출됐고, 남명의 사상은 1862년의 진주민란, 동학란 등의 위정척사운동과 3월 독립운동, 그리고 형평사운동 등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지리산의 생태적 조건은 고대적인 신화와 의례에서 모성적 장소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해 딸 여덟 명을 낳아서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전설뿐만 아니라,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에 의하면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언급도 나온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남악사에 봉안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성모사에 봉사한 사실도 어머니 산으로서의 지리산의 역사적 상징 과정을 잘 표현해 준다.

-지리산 이름의 뜻
1. 신라 5악(岳)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하여 智異山이라 하였다.
2.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 흐를 '류(流)'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지리산의 산세가 두루뭉실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4.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壯)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

- 지리산과 역사적 인물
지리산은 경남의 산청, 함양, 하동군과 전북의 남원시, 전남의 구례군에 걸쳐 있으면서 오만 가지 삶을 아우르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 20여 개가 펼치는 산자락 둘레만도 800여 리에 이르는 산답게 많은 시인 묵객들의 작품을 낳기도 했다.
고운 최치원을 시작으로 고려 때는 이인로, 조선시대에는 서경덕,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남명, 서산대사 등이 지리산에 올랐다가 느낀 바를 작품으로 남겼다.
고운은 지리산 곳곳에 글과 글씨를 남기고 가야산에서 영원히 입산하며 "스님이여 산 좋다 말씀마오/이렇게 좋은 산을 낸들 어이 떠나겠소/뒷날 내 자취 찾아 보시구려/한번 들면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니"를 읊고는 약속대로 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또 이인로는 고려 무신정권 아래서 참담한 생활을 하다 이상세계를 찾아 지리산에 들어 "지나는 곳마다 선경이 아닌 곳이 없구나/천암(千巖)이 다투어 솟아 있고/온갖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소리 내어 흐르는데/대나무 울타리와 떼를 입힌 집들이/복숭화꽃 살구꽃에 어리어/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듯 하구나"라고 노래했다.
화담은 반야봉에 올랐다가 "지리산이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올라가 보매 마음의 눈이 끝없이 넓어지네/바위는 장난하는 듯 솟아 봉우리를 이루니/아득한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랴/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을 일으키고/하늘에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산은 나를 위해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니/천리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인가"라는 시를 읊고는 즐거워 했다고 <화담집>에 기록하고 있다.
점필재와 그의 제자 김일손은 각각 17년의 간격으로 지리산을 오르면서, 점필재는 <유두류록(流頭流錄)>을, 김일손은 <속두류록(續頭流錄)>을 남겼다.
김일손은 정여창과 지금의 중산리를 거쳐 천왕봉으로 올랐는데 천왕봉 일출을 보면서 "햇살에 비친 계곡과 하늘이 온통 구리쇠를 갈아 뿌린 것 같구나/ 세상의 모든 것이 차츰 눈에 들어오는데 대지의 모든 산이 개미집이요/지렁이가 흙을 물어 쌓은 듯하다"고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천왕일출 감상을 적고 있다. "흰 구름이 산골짜기에 자욱하니 푸른 바다 물결은 포구를 이루었고, 흰 파도가 눈을 몰아내니 산뜻한 섬이 되어 점점이 깔린 듯하다. 돌담에 몸을 기대고 위아래를 바라보니 정신도 마음도 한가지로 막막하여 몸이 태초의 공간에 안긴 채 하늘과 땅과 더불어 흘러가는 듯 했다."

-지리십경(智異十景)
제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어느 산인들 해가 뜨지 않으랴만 천왕봉에서의 일출구경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기가 어렵다,
제2경: 직전단풍(稷田丹楓)
피아골의 단풍. 피아골은 지리산의 울음주머니로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에 이 계곡에 흘린 피가 많았다고도 한다. 피밭골(직전)에서 유래,
제3경: 노고운해(老姑雲海)
지리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산허리를 휘두른 구름인데 특히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으뜸으로 칭한다.
제4경: 반야낙조(般若落照)
해가 떨어지면서 구름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불덩어리는 자연이 만든 화려한 잔치다.
제5경: 벽소명월(碧宵明月)
벽소령은 옛 부터 화개에서 마천으로 넘나드는데 쓰이던 고개다. 이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밝은 달은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제6경: 세석(細石)철쭉
해마다 5월 말이면 지리산에서는 고운 분홍색 철쭉이 피어나 지상낙원을 이룬다.
제7경: 불일현폭(佛日懸瀑)
지리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보라로 인해 지리십경에 들게 되었다. 냉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다.
제8경: 연하선경(烟霞仙境)
연하봉의 이끼 낀 기암 사이에 가득 들어찬 고사목 숲은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제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려 급류를 이루는 이 계곡은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로 골이 깊고 수량도 풍부하다.
제 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
지리산을 남서로 감돌아 비단 폭을 펼쳐 놓은 듯한 섬진강. 비록 열 번째 경치로 꼽히기는 했지만 지리산 자락에서 내려 보는 섬진강 풍광은 조물주가 아니고는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성삼재] 지리산 주능선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개다. 지리산 종주의 기점으로 이용된다. 861번 지방도로가 올라간다. 정상에는 단정한 휴게소와 식당이 있다. 이곳에 있는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 서북능선인 만복대까지 관리한다. 일반 등산객들은 종석대를 거치지 않고 코재로 직접 올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돌을 다듬어 바닥에 끼워맞춘 돌포장 도로가 길이 크게 꺾이는 지점까지 올라간다. '3개의 재(고개)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또한 성삼재는 삼한시절의 전적지로, 마한군에게 쫓기던 진한왕이 달궁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살 때였다.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재요,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남쪽은 성(姓)이 각각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어 지켰다 해서 성삼재라 하였다 한다.

[종석대] 성삼재의 남쪽이자 코재의 서쪽에 올라앉은 봉우리다. 동은 지리산 주능선, 서는 시암재와 양미봉으로 연결되는 서릉, 남은 원사봉으로 이어지는 차일봉 능선, 북은 만복대로 올라가는 서북릉이 종석대를 기점으로 갈라져 나간다. 코재에서 출입문을 만들어놓고 통제하는데 관리인은 없다. 정상부가 암릉인데 '엎어놓은 종처럼 오뚝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코재] 종석대 동쪽이자 화엄사계곡에서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깔딱고개의 끝이다. 언젠가부터 이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여행자들이 섬진강을 멀리서 구경하고 지나간다. 성삼재로 차량이 올라가기 전에는 화엄사를 산행기점으로 삼아 이곳 코재를 경유했다. 화엄사에서 올라가자면 줄잡아 3시간 30분 소요된다. 화엄사에서 오르자면 코재를 앞두고 경사가 하도 급하여 '코가 당에 닿는다'고 해서 '코재'라 불렀다 한다.

[노고단] 1507m.

<지명>
노고단이란 도교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며, '할미'는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 仙桃聖母)를 일컫는다. 서술성모를 마고할미로 존칭하며 부르게 된데서 노고단이란 지명이 유래됐다. 옛날 신라시대부터 지리산의 산신 서술성모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던 민속신앙의 영지였다.
산정부에 가까운 1,100∼1,200m 높이에는 원추리꽃으로 덮인 광활한 고원이 펼쳐져서 부근이 좋은 피서지를 이루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서양사람들의 별장지가 되었다. 노고단의 경관은 울창한 임상(林相)과 웅대한 산용(山容)의 경치가 훌륭하고, 정상부에서의 조망이 뛰어나다. 서쪽 계곡에는 화엄사(華嚴寺)가 있는데, 경내에 각황전(覺皇殿)을 비롯해 국보·보물로 지정된 전각(殿閣)·석등(石燈)·석탑 등이 많다.

<마고할미 전설(반야봉)>
지리산 산신 중 여신(女神)인 천왕봉의 마고할미는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노고(老姑)라 불리는데 바로 천신(天神)의 딸이다.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았다. 그들은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던 중 반야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다. 그리고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든다. 그리고 마고할미는 딸들을 한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린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남편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지고 만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이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니 바로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반야봉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 것은 하늘이 저승에서나마 반야와 마고할미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한다.

[돼지령] 예로부터 멧돼지들이 좋아하는 둥굴레가 많이 나는 곳이어서 이름이 생겼다(일부에서는 원추리 뿌리를 캐먹는 멧돼지들의 모습이 많이 목격돼 돼지평전이 됐다는 설도 있음).

[피아골] 지리산 피아골 관문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19번 국도를 타고 북서쪽의 구례로 달리다가 화개장터 앞을 지나 2km쯤 더 간 외곡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이 마을에서 섬진강 큰 물줄기와 헤어져 북쪽에서 흘러내려오는 연곡천의 작은 물줄기를 따라 오르면 피아골의 긴 골짜기가 주위의 풍경을 펼쳐 보이며 산길을 안내한다. 목아재와 촛대봉이 반원형으로 터 준 골짜기를 오르면, 양쪽 산기슭에 기촌, 가락골, 중터, 조동 등의 마을들이 차례로 나타나면서 외진 산길의 적적함을 덜어준다. 촛대봉 능선이 경남과 전남을 갈라놓았다. 옛부터 두 도(道)의 사람들이 오가던 길 줄기들이 등성이를 나란히 얽어 느랏목, 뒷골재, 새끼미재 등의 고개들을 만들어 놓았다. 목아재를 감돌아 산길 왼쪽으로 비스듬히 발길을 꺾으면 조선시대에 원집이 있었다던 원터에 닿는다. 더 오르면 피아골이다. 마을의 한자명은 직전(稷田), 여기에서 직(稷)이란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작물로 '피'라고도 불린다. 즉 피밭이다. 피아골 골짜기를 직전계곡이라고도 한다. 6.25 등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이곳에서 피를 많이 흘려 '피의 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피아골을 피와 관련지어 지명의 원뜻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왜냐면 6.25 전에도 '피아골'이라 불렸기 때문이다.

[임걸령] 전설에 초적 도적 임걸년은 팔도행상의 물건을 일부만 털었고, 또 그것을 모아 빈민을 구제한 의적이라고 하는데 실제 임란 당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선조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지은 <난중잡록>(의병의 기록과 사회상 기록)에는 1594년 6월 "이때에 영남사람 임걸년이 또한 도당을 모아 지리산 반야봉에 둔쳐서 출몰하며 도적질을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임걸년이 와전되어 임걸령이라 한다.
임걸령에서 노고단까지는 대체로 순탄한 길이라, 노고단에서 임걸령을 향해 화살을 쏘고 말을 타고 달렸더니 말이 먼저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주변에 키 큰 나무가 호걸처럼 많이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노루목]
1.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
2. 넓은 들에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좁은 지역.
노루목이란 명칭은 이곳의 암두(巖頭) 모양새가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든 모습이란 얘기와, 노루가 지나다니던 길목이라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또한 문순태의 장편소설 <철쭉제>에는 '산에서의 세 갈림길'을 흔히 노루목이라 한다고 적혀 있는데, 많은 사람이 쉬어가는 길목인 노루목에서는 흔히 세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보아 이 역시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또는, 땅의 모양이 넓거나 늘어졌다는 뜻으로 '널'자에 지점이라는 뜻의 '목'자가 합쳐져 널목→놀목→날목→너르목→노루목 등으로 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반야봉] 1733m. 주능선의 삼도봉에서 서북쪽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독립봉으로는 천왕봉에 이은 두번째 고봉이다. 생김새는 달마대사의 머리를 닮았다. 심원과 쟁기소, 반선으로 오르내리는 등산로가 모두 북봉에서 갈라진다. 반야봉에는 남신의 상징인 반야와 천신의 딸이자 여신인 마야고 사이에 얽힌 러브 스토리가 전설로 내려온다.

<전설>
마야고(마고)는 어느 날 사모하는 반야의 옷 한 벌을 지어놓고 반야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고원에 핀 쇠별꽃이 바람에 일렁이며 물결칠 때마다 마야고는 행여 반야가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마야고는 마침내 신명나게 머리채를 나부끼며 그 꽃잎 물결 속으로 반야의 옷을 든 채 달려갔다. 그리고 무엇을 잡을 듯이 허우적거렸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리운 반야는 보이지 않았다. 쇠별꽃의 움직임을 착각한 마야고는 수치와 분노를 못 이겨 얼굴을 손바닥에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신을 속인 쇠별꽃을 다시는 피지 못하게 하고 반야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려버렸다. 또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추어보던 산상의 연못은 신통력을 부려서 메워 없앴다.
이 전설의 흔적은 지금도 지리산에 남아 있다. 그녀가 메워버린 못을 누군가 천왕봉 밑 장터목에서 찾아내 '산희샘'이라 부르고, 찢겨져 흩어진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으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지리산 풍란은 '환란'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연곡사]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있는 연곡사는 543년(백제 성왕 21년)에 화엄사 종주 연기조사가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경내에는 동부도, 북부도를 비롯하여 국보 2점과 보물 4점이 보존되어 있다. 1981년 3월 1일부터 당시 주지인 장숭부 스님이 정부 지원과 시주로 옛날 법당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화강석과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아 정면 5칸, 측면 3칸의 새 법당을 신축한 이후 복원 불사가 계속되고 있다. 사찰 이름을 연곡사라고 한 것은,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지리를 보고 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 중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치더니 제비 한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했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한편 연곡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이다.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났는데 호남 지방에서도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담양출신 의병장 고광순. 그는 1907년 8월 26일 지리산 연곡사에 근거를 설치하고 적극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기습을 받아 패전하고 순절하였다. 이때 절도 불탔다. 이를 기리는 비석이 경내에 세워진 것이다.

[다랭이논] 비탈진 산골자기에 여러 층으로 만든 좁고 작은 논.

[참고자료]

피아골 다랭이논
이성부

이 마을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이 깊은 곳에 어떤 사람들이 흘러 들어와
마을을 만들었는지
나는 굳이 알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빈 골짜기로 올라와서
비탈에 하나씩 둘씩 돌을 쌓고 땅을 고르고
마침내 씨앗 뿌려 질긴 목숨 끌어갔음을 본다

참으로 사람이야말로 꽃 피는 짐승
가슴 가득히 불덩이를 안고
피와 땀을 뒤섞이게 하는
그것이 눈물겨워 나도 고개 숙인다
구례군 토지면 직전마을 피아골 들머리
아침 햇발에 층층 쌓인 다랑이논들
거친 숨결 내뿜는 것을 본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 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 노을을 품으려거든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최창남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 전문가이며 작가,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2008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인문학적 산행기를 <프레시안>에 연재했습니다.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 등 다수의 책을 출간하였으며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등 민중가요들을 작곡하였습니다.

최창남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12걸작선2>를 시작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으로 산행을 시작한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가슴 저리도록 아름다웠던 눈 덮인 지리산, 모진 눈보라에 몸 떨며 황홀했던 소백산, 장엄한 산줄기에 절로 마음 내려놓았던 덕유산, 깊은 산에 자리한 거대한 풍력 발전기 곁을 지나던 선자령, 제비꽃 무성하던 봄의 대덕산, 철쭉 붉게 타오르던 봉화산, 빗줄기와 운무 따라 오르던 함백산, 구름 위로 걸었던 오대산, 무릉도원 풀어냈던 청옥·두타산,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함께 바람과 구름까지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 황홀지경을 보여주었던 조령산, 고요히 산길 걸으며 자신을 만날 수 있었던 고루포기산과 능경봉에 이르기까지 12번 산길을 걸었습니다.

걸으면 걸을수록 백두대간은 더욱 살가워졌습니다. 몸은 대간 길에 머물기 원하고 마음은 대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듣기 원하게 되었습니다. 친밀함은 더욱 가까워지고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런 마음의 길을 이어 나가기 위해 <백두대간12걸작선2>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2>를 시작하며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왜 백두대간인가?'
'왜 우리는 백두대간을 걷는가?'


백두대간은 이 땅의 시작입니다. 백두대간이 열리며 이 땅의 모든 산줄기가 이어 일어나고 열 개의 큰 강을 비롯한 수많은 물줄기가 흘렀습니다. 생명의 터전입니다. 삶의 출발이고 정신의 뿌리입니다. 또한 백두대간은 하늘의 뜻이 발현된 하늘의 땅입니다. 하늘의 지혜가 머무는 신성한 땅, 거룩한 공간입니다.

백두대간은 '지혜의 머리가 된 산'인 백두산(白頭山)의 '하늘의 연못' 천지(天池)에서부터 '머물면 사람 사는 세상과는 다른 지혜를 얻게 되는 산'인 지리산(智異山)의 '하늘의 봉우리' 천왕봉(天王峰)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입니다. 하나의 산줄기요 굽이굽이 흐르고 있는 하나의 산입니다. 수많은 생명들이 오고가는 생명의 통로일 뿐 아니라 기후와 언어, 삶과 문화를 구분 짓는 큰 산줄기입니다.

따라서 백두대간을 걷는다는 것은 이 땅의 처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잃어버렸던 첫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지혜를 얻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의 바람에 기대어 그 산길을 다시 엽니다.

새로운 산행 코스를 선정하는데 몇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 구간별로 이야기가 있는 산행을 만들어갑니다.
둘째, 근교 산행을 즐기는 분들이면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산행 코스를 잡았습니다.
셋째, 숲의 소리를 듣고 나무와 꽃을 느끼며 천천히 산행을 합니다.
넷째, 계절별로 아름다운 구간을 선정하였습니다.
다섯째, 산행 구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구간별 난이도 표시하였습니다.
여섯째, 종주 산행을 하기 원하는 분들을 위해 지리산과 설악산 종주를 넣었습니다(1박2일로 진행되는 산행으로 난이도 '중상(中上)'의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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