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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와 쿠르베,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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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와 쿠르베,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청춘의 고전 시즌2]<9> 낭만주의적 시선과 사실주의적 시선의 차이

혁명에 대한 이미지와 정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혁명'이란 이름만으로 쉽게 떠올리고 공감할 수 있는 예술작품의 이미지가 있다.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들고 수많은 군중의 선두에서 혁명의 깃발을 들어 올리는 여신의 이미지. 1830년 7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다.

'1830년 7월 28일'이란 부제가 붙어있는 이 그림은 프랑스 혁명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한 때 프랑스 화폐의 배경 그림으로 쓰였고 최근까지 수많은 패러디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이 그림의 표상을 인식하는 만큼 실제 혁명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이 그림을 "세상 모든 혁명의 면모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것"으로까지 여기는 듯하다. 아마도 이 숨길 수 없는 막연함으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민중을 이끄는 자유, 1830 ⓒEugène Delacroix(외젠 들라크루아)

청춘의 고전 아홉 번째 시간, 이번 강의를 맡은 조은평 교수는 이 강의를 구상한 의도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아주 간단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두 가지 '혁명'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것은 '상징화된 혁명'의 이미지와 표상의 의미로 '상식화된 혁명'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실제 '혁명'에 대한 기억은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은평 교수에 의하면 이 문제의식은 들라크루아가 그린 '7월 혁명'의 진짜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면서 1871년 '파리코뮌'의 혁명성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상징화된 그림 속의 혁명과 실제 혁명 사이의 간극은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이어지는 화풍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 '파리코뮌(Commune de Paris)'은 1871년 3월 18일부터 같은 해 5월 28일 사이에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 72일간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를 말한다.

사실 들라크루아가 그린 7월 혁명의 내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대단하지만은 않다. "단 3일에 걸쳐 샤를 10세의 복고왕정을 몰아내고 '루이 필리프'라는 새로운 국왕을 내세워 입헌군주정이라는 또 다른 왕정을 이뤄낸 부르주아 혁명의 한 단계"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잊혀지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프랑스 왕정을 종식시킨 공화정의 상징이 되었다. 반대로 파리코뮌의 혁명은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코뮌 당시의 조치와 내용들이 사람들에게 더 많이 기억돼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민주주의는 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상대적으로 사라지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봉합'되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의문으로부터 이 강좌는 시작되었다.

낭만주의 시선과 사실주의 시선의 차이

"진정한 예술가란 격정과 열정을 증폭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주제다. 주제는 너 자신이다. 주제는 자연 앞에서 받는 녀의 인상, 너의 감정이다" - 파트리시아 프리드카라사 저, 『회화의 거장들』 중에서 들라크루아의 말 -

조은평 교수에 의하면 실제로 들라크루아는 "예술은 바로 '순수한 환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었고 스스로도 인정하는 낭만주의 회화의 대가였다. 조은평 교수는 "사실 이러한 순간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낭만주의 회화의 전략인 것 같다"고 부연한다.

19세기 초에 발생하여 신고전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낭만주의는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작가 자신의 느낌과 감성을 표현해낸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현실에서 직접 겪은 사건을 그림에 나타내지 않고 자기의 주관적인 감정을 화폭에 담는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도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풍의 그림으로 실제로 들라크루아 자신이 직접 혁명에 참여하여 목도한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전해들은 혁명 얘기에 감동 받아 3~4일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또 다른 들라크루아의 작품으로 고대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의 몰락을 주제로 자신의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완성한 작품인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나 제리코(Géricault, 1791~1824)가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의 난파사건을 모티브 삼아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은 낭만주의 그림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들은 작가의 개성과 감수성, 상상력을 잘 드러내고 인상적인 주제를 대담한 색채와 강렬한 붓 터치로 표현하여 화가의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들은 당시의 실제 현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경우 "들라크루아는 정치적 의미에는 관심 없고 단지 정말 역동적으로 작품 속 대상을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

▲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 ⓒEugène Delacroix(외젠 들라크루아)
▲메두사호의 뗏목, 1819 ⓒGéricault(제리코)


이에 비해 낭만주의적 전통을 거부하면서 나온 사실주의 회화는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주변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다. "기억의 낭만은 기억 속에서는 아름답지만 반대로 사실은 잔인하고 불편할 수 있지 않은가?" 조은평 교수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준다면 천사를 그리겠다"고 한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발언을 두고 보면 이전 낭만주의 화풍과 비교하여 사실주의 화풍의 차별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화풍의 차이뿐만 아니라 사회현실을 보는 시선 또한 매우 달랐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했던 쿠르베는 1848년 혁명에 가담했고 1871년 파리코뮌에도 적극 가담한다.

쿠르베는 살롱에 제출한 <오르낭의 매장>이 퇴출당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개인전을 열게 되었고 최초로 '사실주의(realism)'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실주의는 이상에 대한 부정이다", "사실주의는 민주적인 예술이다" 쿠르베는 사실주의라는 용어로 "일상생활의 주제를 역사화의 반영으로까지 끌어올리는 회화 스타일"을 지칭한다. 조은평 교수는 "과거에는 역사가 이상화된 이미지였지만 쿠르베는 일상생활의 주변 얘기들을 역사화의 주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평한다. <오르낭의 매장>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 도미에(Daumier, 1808~1879)가 그린 <삼등 열차> 역시 같은 맥락의 그림이다.

▲ 오르낭의 매장, 1849~1850 ⓒCourbet(쿠르베)
▲ 삼등 열차, 1862년경 ⓒDaumier(도미에)

<화가의 작업실: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에서 쿠르베는 화가인 자신이 중심에 있고 한쪽에는 괴로운 생활에 찌든 평민의 모습을 그려 넣고 반면에 다른 쪽에는 자신이 그리는 풍경화를 보고 여유롭게 감상하고 있는 귀족들을 그려 넣어 양쪽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구도를 구현했는데 그림에서 자신의 위치와 대상들의 강조를 통해 사실주의의 시선으로 현실에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임과 동시에 모순적인 현실을 고발하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 화가의 작업실: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 1854~1855 ⓒCourbet(쿠르베)

낭만과 사실의 간극 : 1830년 혁명과 1871년 '파리코뮌'

조은평 교수는 "들라크루아와 쿠르베는 비슷한 시기를 살았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너무 컸었고 추구하는 화풍의 차이로 인해 두 그림 사이의 간극은 환상과 현실의 간극과 같다"고 하면서 문제는 "역설적으로 들라크루아의 현실에 대한 유일한 그림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가 대중적인 혁명의 이미지로 기억된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낭만적인 혁명의 이미지가 자꾸 대두되면서 혹시 이런 낭만주의적 혁명의 이미지를 통해 당시 혁명의 진실 뿐 아니라 혁명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저 흘려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마치 민주주의는 다 저런 피를 먹고 이룩되었다는 식의 생각으로 점철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자답했다.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고 민주는 실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기만 속에서 낭만의 추억으로 혁명을 떠올리면서 지금을 잊고 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곧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대의제 민주주의, 세계화된 자본제 등)을 낭만주의적으로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의 이념 속에서 공화국이 완성된 것만 기억하고 이것이 공화정의 완성이라고 기억하게 하는 것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이미지"라고 하면서 "더 극단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하려 했던 것들이 억압되고 참혹하게 진압된 역사적 사실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사이에 프랑스 혁명의 종착점인 '파리코뮌'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감춰지고 만다.

혁명의 모습들은 결국에는 혁명 내부의 여러 갈등 요소와 존재들을 봉합하는 차원에서 '종결됐다'고 사람들에게 강요되었으며 이런 과정의 결과물이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라는 것이다. 삼색기는 결국 균열을 봉합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더 급진적인 민주주의로 발전시키는 길이 있었음에도 봉합을 통해 그 길이 차단된 것이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아벨 로르동의 <1830년 7월 혁명의 3일간의 이야기>와 앙리 펠릭스 엠마뉘엘 필리포토의 <1848년 2월 25일 시청에서 혁명의 붉은 깃발을 물리치는 라마르틴>에서 보이는 단색기와 삼색기의 대립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 1830년 7월 혁명의 3일간의 이야기, 19세기경 ⓒ아벨 로르동
▲ 1848년 2월 25일 시청에서 혁명의 붉은 깃발을 물리치는 라마르틴, 19세기경 ⓒHenri-Felix-Emmanuel Philippoteaux(앙리 펠릭스 엠마뉘엘 필리포토)

모든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혁명에 참여했었지만 자본주의 세력의 안정화, 산업자본가·금융가 등 세력이 성장하면서 결국은 부르주아 혁명의 확립으로 귀결되어 그 이상의 급진적 혁명은 계속해서 봉쇄된 역사였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848년 '2월 혁명' 이후 '6월 봉기'(1848년 6월 23일~26일 파리에서 발생한 사회주의자·노동자의 반란)가 진압된 당시 현실이다. 이를 두고 맑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는『신(新)라인 신문 Neue Rheinische Zeitung』에서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박애는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와 혁명가들의 이해관계가 상통할 때만 지속됐다. 1789년 이후 수많은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들 중 질서에 대항하려는 시도는 한 번도 없었다. 지배와 예속의 정치적 형태가 숱하게 변화했음에도 모든 혁명은 계급지배와 노동자들의 예속, 부르주아 질서를 존속하게 내버려두었다. 6월은 이 질서를 건드렸다."

조은평 교수는 "1830년 7월 혁명은 성공하여 입헌왕정을 확립하고 공화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던 반면, 파리코뮌은 지나치게 혁명을 극단화한 결과, 공화정을 넘어 극단적인 민주주의 길로 나아가려 했기에 진압 당한 과격한 이상주의자들의 결과물로 치부되는지도 모른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파리코뮌'을 담은 그림은 별로 없다. 파리코뮌은 멋진 그림으로 등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 1871년 3월 19일 바리케이드, 1871 ⓒ장 밥티스트 프랑수아 아르노 뒤르벡

파리코뮌의 기억과 현대 민주주의

조은평 교수는 파리코뮌의 의미가 "실질적 민주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맑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파리코뮌의 의미를 평가했는데 내용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 상비군의 폐지와 무장 인민의 대체, • 행정과 입법을 겸하는 행동기구, • 경찰의 폐지와 코뮌의 관료에 대한 상시적 해임 가능(소환권), •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으로 수행, • 교회의 해산과 교회 재산 몰수, • 억압이 아닌 확장적인 정치형태를 구현 등을 들 수 있다. 인민들이 스스로 자신들 운명의 주인이 되었고 노동자 계급이 단순히 기성의 국가 기구를 접수하여 자기 자신들의 목적으로 그것을 행사할 수 없음을 확실히 했다.

이 당시 파리의 상황은 도둑이나 절도와 같은 범죄가 거의 없었고 1848년 2월 이래 파리는 안전을 되찾았는데 경찰과 같은 국가의 질서유지 방법이 동원되지 않은 상태에서였다. 쿠르베도 1871년 4월 15일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파리는 참으로 낙원입니다. 경찰도 없고, 비행도 없으며, 어떠한 방식의 부당한 행위도 없습니다. … 파리가 언제나 이처럼 있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프랑스 내전』中)

맑스는 파리코뮌을 두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했다"고 평가했는데 사실상 "99% 민중의 독재"라는 말은 "인민의 통치"를 의미하고 "민주통치가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상태"라고 조은평 교수는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 본뜻인 '인민(demos)의 통치(지배kratos)'로 이해할 수 있다. 파리코뮌은 역사상 가장 인민의 통치(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일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of·by·for the people)'라는 구호는 시혜적 느낌이 강하다. 이것을 파리코뮌의 기억과 연결한다면 그 간극은 더 크다. 조은평 교수는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의 한 문장을 인용하여 "민주주의라는 말은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기의가 불명확한 텅 빈 기표"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지금의 민주적 제도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금의 것과 다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인민의 역량에 족쇄를 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삶을 관여하는 정치와 경제시스템에 참여하는 시간은 아주 잠깐이다. 이런 무능력한 현실을 인식하며 사실주의적인 시선을 통해 얻는 비관적 전망은 정치에 대한 냉소를 초래한다고 본다. 마치 "세계에 대한 욕망을 견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가 자신을 욕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리비돌로지』中)인 우울증자들과 같다는 것.

혁명에 대한 단상도 이와 같아서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환상"과 "사회주의 국가 몰락에 의한 사회주의에 대한 냉소"가 맞물려 우리 현실에서 구체적인 혁명의 전망은 상실한 듯하다.

"정권교체라는 낭만적 정치혁명"이 있을 뿐이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가 그랬던 것처럼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 같은 혁명의 이미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전락한다. 조은평 교수는 오늘날의 이런 망각 상황에 대해 '파리코뮌'은 바로 "우리 시대의 실재가 유령처럼 튀어 오르게 해주는 망각된 혁명의 기억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와 해방의 길

조은평 교수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들어 이데올로기 동굴 속에 있는 현대인을 가정한다. 그리고 파리코뮌의 노동자들은 "플라톤의 '동굴'에 묶여 있는 '죄수'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힘으로 동굴을 빠져나가 햇빛은 본 해방된 노동자들"이라고 비유한다. 한편 지젝(Slavoj zizek, 1949~)의 지적처럼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서 결국 기존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의 형태, 삶의 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 속에서도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예를 들면 한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서 어떤 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 세상이 확 바뀌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파리코뮌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전문적 식견을 가진 사람이 관리가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아닌 누구나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파리코뮌의 의의이다.

"인민은 자기 의무를 다한 수임자(受任人)들에게 감사해선 안 된다. … 왜냐하면 인민의 대표자들은 의무를 다한 것이지 도움을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리코뮌 당시 클럽 기관지였던 『프롤레타리아』에 실린 말이다. 조은평 교수에 의하면 이것은 '평등의식'을 말하는 것이고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가 『무지한 스승』에서 규명한 모든 사람은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파리코뮌에서 보여준 철저한 평등의 시각과 실천이 파리코뮌이라는 역사적 현장을 있게 만든 힘이었고 랑시에르가 규명한 지적평등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이를 현실에서 입증해 나간다면 현실은 다시 파리코뮌과 같은 급진적인 사고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은평 교수는 "랑시에르의 말처럼 해방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우리 스스로가 먼저 해방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중요하다"고 말한다. "해방하는 인간"과 "해방되는 인간"을 만들어 내면 이들이 모여 "해방된 사회"를 만들어 낸다.

체 게바라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말했다. 조은평 교수는 "낭만주의적 시선에 문제를 제기하고 사실주의로 가자"고 하면서 낭만주의로 혁명을 보지 않고 우리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이 파리코뮌과 혁명의 의미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거꾸로 그런 리얼리스트의 시선 속에서 불가능한 꿈은 다시 낭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망각하기 위한 낭만이 아니라 열정이나 열망으로 불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그람시가 얘기한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를 겸비해야 한다. 그래야 사실주의적 시선으로 지성을 들이댈 때 사람들이 우울증이나 비관주의의 함정으로 빠지는 실수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청춘의 고전 시즌2> 다음 강의는 8월 25일 서영화 한신대 외래교수의「반 고흐의 <구두>와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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