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의 일상을 따라가기로 한 것은 이 문제가 지금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 매듭을 풀지 않으면 언젠가는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이 다르지 않은 고통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경고음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8년째 투병 중인 한혜경 씨와 그의 어머니 김시녀 씨, 작년 5월 세상을 떠난 이윤정 씨의 남편 정희수 씨를 만났다. 이들의 평범한 하루를 기록했다. <편집자>
혜경 씨와 그림자 엄마
엄마는 그림자 같았다. 하루 종일 혜경 씨 옆을 떠나지 않았다. 보행기를 잡고 걷는 딸의 뒤를 엄마는 왼발 오른발 맞춰가며 따라 걸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함께였다. 그렇게 8년. 엄마는 딸의 삶을 따라 살고 있었다.
▲ 강원도 춘천시 강원대학교 병원에서 만난 한혜경 씨와 어머니 김시녀 씨 ⓒ프레시안(최형락) |
혜경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1995년 10월 삼성전자 LCD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수백 개의 칩이 꽂힌 회로기판에 솔더크림을 바르고 챔버(가열기)에 넣었다 뺀 뒤 까맣게 타버린 불량을 체크하는 일을 했다. 솔더크림의 주성분은 납. 안전에 관한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 채 2001년까지 6년을 일했다.
2005년 소뇌에서 종양이 발견됐다. 크기로 봐서 7~8년은 된 종양이었다. 머리를 열고 종양을 제거했다. 예전 같으면 수술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지만 수술은 감행됐다. 종양은 다 제거되지 않았다. 목숨은 살릴 수 있었지만 후유증은 컸다. 지체장애, 시력장애, 언어장애 1급. 제대로 걷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산재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업무 연관성이 없는 개인 질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재심까지 불승인되자 2011년 4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을 걸었다. 2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았다. 오는 4월 12일 예정된 것까지 공판만 여덟번 째다.
지금은 어떤 상태일까? 사물이 여러 개로 보이는 복시 때문에 안경알 한쪽을 뿌옇게 만들어 놓았다. 왼 눈은 쓰지 않는다. 두 다리는 중심 잡기와 힘 조절이 되지 않는다. 1년 전부터는 보행기를 잡고 걷게 됐지만 아직 혼자 걸을 수는 없다. 듣고 생각하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말은 느리고 어눌하다.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는 음절을 조합해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다.
밤에는 두세 차례 꿈을 꾼다. '학교 가야지'라고 잠꼬대를 하면서 신발을 신으려고 내려오다 넘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서울대 분당병원에 입원했을 때 기절이 잦아 먹기 시작한 약 때문에 생긴 증상이다. 아침에 9알, 낮에 2알, 저녁에 9알의 약을 먹고도 자기 전에 꿈 안 꾸게 하는 약 4알을 먹어야 한다.
▲ 강원도 춘천의 강원대 병원에 입원한 혜경 씨. 이 병동에는 뇌질환 환자가 많다. ⓒ프레시안(최형락) |
어머니 김시녀 씨는 딸 간병 생활이 8년째다. 이젠 병원 생활에 이골이 나서 집에는 1~2주에 한 번밖에 들르지 않는다. 병원이 더 편하다고 말한다. 힘든 때는 아플 때다. 딸을 돌봐야 하니 아파도 가지 않던 병원에 조금만 몸이 이상해도 달려가곤 한다. 딸 때문에 아플 수도 없다. 때론 아프지도 못하는 게 서럽기도 하다.
엄마의 하루는 혜경 씨와 정확히 일치한다. 오전 6시 30분에 일어나 혜경 씨를 목욕시키고 7시 반이면 아침을 먹는다. 9시 반에 재활 치료, 11시 반에 작업 치료를 다녀온다. 점심을 먹고 걷는 연습을 하고 3시 15분에는 자전거 운동 기구를 태운다. 30분이던 것이 이용자가 많아 그마저 25분으로 줄었다.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 간이 침대에서 잠이 든다.
행복한 가정 이루는 꿈, 그러나…
엄마는 혼자 식당을 해서 남매를 키웠다. 고생하는 엄마를 본 딸은 착하고 속 깊게 컸다. 하루 500원을 주면 아끼고 모아 한 달에 2000원을 쓰고 1만3000원을 돌려주는 딸이었다. 삼성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삼성은 일의 강도가 셌지만 성과급이 많아 일을 많이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6년을 다녔다. 김시녀 씨는 삼성에는 똘똘하지만 가난한 아이들이 많이 다녔다고 기억한다.
혜경 씨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좋은 남편을 만나 아이들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그녀는 평범하게 살았고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물론, 이 소박한 꿈을 꾸게 된 데는 불우했던 유년의 기억도 한몫했다. 혜경 씨는 홀로 남매를 키운 엄마에 대한 애착만큼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도 강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혜경 씨의 꿈은 병이 생기면서 산산조각 났다. 고생하며 마련하고 지킨 아파트는 병원비로 고스란히 날아갔다. 모아 놓은 돈도 거의 다 써버렸고 지금은 월세집을 얻어 산다.
"뭐 생각해?"
"또 늦어진 거."
"몇 년을 기다렸는데 또 못 기다리겠냐."
"엄마 미안해."
"뭐가?"
"엄마 인생이 없어졌으니까."
"넌 엄마가 이러면 버릴 거니?"
"아니 그건 아니고…."
"혜경이 네가 나야."
혜경 씨는 밤마다 간이 침대에 누우며 편하다고 하는 엄마에게 미안하다. 병실의 밤은 편할 수 없다. 심전도와 혈압 체크, 채혈 등으로 늘 어수선한 병실에서 8년째 잠드는 엄마를 보는 것은 그래서 미안하고 불편하다.
"엄마한테 잘해야 해요. 엄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엄마는 내가 엄마라는데 저한테는 엄마가 저예요.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언제까지 미안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착한 딸이 아니에요. 속만 썩이는…."
ⓒ프레시안(최형락) |
"삼성,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다"
혜경 씨가 그림자 엄마를 멀리하는 순간이 있다. 삼성 얘기를 할 때다. 엄마가 속상해 하는 것이 싫어 다른 데 가 있으라고 한다. 엄마가 가지 않으면 입을 잘 열지 않는다. 그녀가 서투른 말투로 말을 시작한다. 느리지만 얼굴과 목소리에는 독기가 서렸다.
"내 삶이 엉망이 됐어요. 이건 너무하지 않아요? 이게 다 삼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열받아요. 마음앓이 많이 했어요.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어요. 돌릴 수만 있으면 돌리고 싶어요. 하! 내 인생 돌려내."
삼성은 3년 전 합의를 종용했다. 엄마는 너무 힘이 들어 합의에 응할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딸이 반대했다. 딸만큼이나 제정신일 수 없었던 엄마는 딸의 뺨을 네 대나 때렸다. 엄마가 이렇게 힘든데 언제까지 승산 없는 싸움을 하자는 것이냐고 엄마는 울분을 토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삼성의 합의 제안은 산재 신청 기한을 넘기게 하려는 꼼수였다. 제대로 보상할 계획도 없었다. 그걸 알고 항의하자 그쪽에서도 시인한 일이다.
"내 삶이 엉망이 됐어요. 이건 너무하지 않아요? 이게 다 삼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열받아요. 마음앓이 많이 했어요.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어요. 돌릴 수만 있으면 돌리고 싶어요. 하! 내 인생 돌려내."
삼성은 3년 전 합의를 종용했다. 엄마는 너무 힘이 들어 합의에 응할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딸이 반대했다. 딸만큼이나 제정신일 수 없었던 엄마는 딸의 뺨을 네 대나 때렸다. 엄마가 이렇게 힘든데 언제까지 승산 없는 싸움을 하자는 것이냐고 엄마는 울분을 토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삼성의 합의 제안은 산재 신청 기한을 넘기게 하려는 꼼수였다. 제대로 보상할 계획도 없었다. 그걸 알고 항의하자 그쪽에서도 시인한 일이다.
엄마와 딸, 꿈이 남아 있을까?
8년간의 투병은 모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다. 아직도 투병은 끝나지 않았고 더디게 진행 중인 소송에서 무엇을 더 빼앗길지 알 수 없다. 어떤 희망도 꿈도 갖기 어려운 것이 현실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모녀는 삶의 계획을 세우고 작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엄마의 바람은 분명했다. 어떻게든 작은 집이라도 마련해 딸이 혼자서 생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보행기를 잡고 혼자 걷고 밥을 떠먹을 수 있으면 더는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는 2년쯤 뒤엔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의외였지만 혜경 씨도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엄마 발을 주무르고 있으면 엄마가 시원하대요. 안마사 하고 싶어요. 아픈 사람 시원하게 해 주고 싶어요. 풍 걸린 사람도 고쳐주고…. 그런데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혜경 씨도 스스로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하면 되지. 왜 못해"라는 말로 딸의 희망을 홀로 긍정했다.
모녀의 하루가 저물었다. 춘천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 기차 안에서 창 밖은 암흑뿐이었다. 하지만 창밖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기차는 새벽이 오고 해가 떠오르면 서서히 밝아지는 아침을 달릴 것이었다.
의외였지만 혜경 씨도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엄마 발을 주무르고 있으면 엄마가 시원하대요. 안마사 하고 싶어요. 아픈 사람 시원하게 해 주고 싶어요. 풍 걸린 사람도 고쳐주고…. 그런데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혜경 씨도 스스로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하면 되지. 왜 못해"라는 말로 딸의 희망을 홀로 긍정했다.
모녀의 하루가 저물었다. 춘천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 기차 안에서 창 밖은 암흑뿐이었다. 하지만 창밖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기차는 새벽이 오고 해가 떠오르면 서서히 밝아지는 아침을 달릴 것이었다.
▲ 엄마가 혜경 씨의 손을 잡고 있다. 혜경 씨는 수술 이후 시력이 악화되고 몸의 균형을 제대로 못 잡아 넘어지고 부딪혀 상처가 많다. ⓒ프레시안(최형락) |
▲ 엄마는 마치 그림자 같았다. ⓒ프레시안(최형락) |
▲ 작업 치료. 핑크색을 좋아하는 혜경 씨가 오늘은 파스텔톤 파란색을 마음에 들어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 작업 치료 중 색칠하기를 하고 있는 혜경 씨. 힘 조절이 안 돼 큰 필기구를 두 손으로 잡아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 재활 치료 중 혜경 씨가 선생님들과 같이 만들었다는 모형물을 들고 어머니가 자랑을 한다. 재활에 열심인 혜경 씨는 더디지만 조금씩 호전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 딸과 엄마는 8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함께했다. 둘 다 상대방이 자기라고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 산재 불승인 이후 2011년 행정소송을 걸었지만 2년이 되도록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고 있다. 오는 4월 12일 8차 공판이 열린다. ⓒ프레시안(최형락) |
▲ 오후 3시가 넘으면 자전거를 탄다. 혜경 씨는 다리에 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힘 조절이 잘 안된다. ⓒ프레시안(최형락) |
▲ 혼자 움직이는 딸을 엄마가 급히 뒤쫓는다. 혜경 씨는 1년 전부터 보행기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경기도 부천시 송내동의 한 정육점. 정희수 씨가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다. 큼지막한 화면에 가족 사진을 띄웠는데 넘겨도 넘겨도 사진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가족은 너무 멀리 있었다. 아내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고, 아이들은 부산에 내려보냈다. 혼자 사는 가장에게 사진은 큰 재산이었다. 사진을 넘기며 그가 살아온 얘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아내와 첫 만남, 그리고 이별
희수 씨가 아내를 만난 것은 2002년 크리스마스였다. 부산에서 막 서울에 올라온 그는 차를 몰고 천안까지 내려가 윤정 씨를 만났다. 충남 서천이 고향인 윤정 씨는 4촌 누나의 회사 동료였다. 셋째 딸이라서 그런지 착해 보였다. 1년 반의 연애 끝에 2004년 5월 대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변변한 신혼집을 구하지 못해 상가 2층에 작은 방을 마련해 살았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조금씩 집을 늘려가면서 행복도 커졌다. 아들딸 하나씩을 뒀다. 여행도 많이 다니고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 2010년 5월 5일 아내가 갑자기 쓰러졌다. 급히 응급실로 옮겼다. 머리 사진을 찍자마자 중환자실로 옮겨야 했다. 교모세포종, 뇌암이었다. 병원은 시한부 삶을 선고했다.
병세가 깊어졌다. 말수가 적어지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다. 간병을 하면서 가게에는 신경 쓸 수 없었다. 처남이 도와줬지만 고기 장사는 단골 장사라서 주인이 자리 비우면 매출은 줄게 마련이었다.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다. 보험금이 실비보다 적게 나왔다. 결국 벌어 놓은 돈을 까먹기 시작했다.
희수 씨는 좋다는 것은 모두 해 먹였다. 주위에서 가망이 없다며 말렸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병을 알고부터 2012년 5월 7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아내는 딱 2년을 살았다.
▲ 정희수 씨와 이윤정 씨. 부부는 많은 곳을 놀러 다녔다. 즐거운 한때는 사진으로만 남았다. ⓒ프레시안(최형락) |
삼성과 맺은 악연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은 공장에서 일하면서 쓰던 유독물질 때문이었다. 이윤정 씨는 1997년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해 6년을 일했다. 반도체 칩이 꽂힌 기판을 챔버에 넣고 빼며 불량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상상이나 했을까. 2003년 퇴사하고 7년이나 지났는데 뇌암이 발병했다. 2010년 7월 산재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2011년 4월 행정소송을 걸었다. 재판은 지지부진했다. 올해 2월 22일 7차 공판이 열렸지만 공판만 거듭될 뿐 아직 1심 판결도 나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그 사이 윤정 씨는 세상을 등졌다. 벌써 1년이 다 돼 간다.
아내를 잃은 남자의 삶은 온전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부산 큰누님 집으로 보냈다. 가게에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데 아이들을 돌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카들이 커서 그나마 가능했다. 그는 혼자가 됐다. 억울한 마음에 피해자들과 함께 서초동 삼성전자 본사 앞 시위에 나갔다. 갈 때마다 경호원들이 막았다. 울분이 치밀어 싸웠다. 그는 투쟁이니 민주화니 노동운동이니 그런 건 모르고 살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파탄 난 가정의 가장'이어서 그곳에 갔다고 했다.
황유미 씨가 죽은 지 6년 되던 날 희수 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 갔다. 공장을 나오는 꽃다운 얼굴들이 보였다. 나오는 얼굴마다 밝지 않았다. 불쌍하고 마음이 안 좋았다. 살아서 윤정 씨의 표정이 그랬으리라.
ⓒ프레시안(최형락) |
혼자 남겨진 남자
희수 씨는 부천에서 10년을 살았다. 서울에 올라온 뒤 방학동에 잠깐 살다 이곳에 이사와 정착했다. 장사를 시작한 것도, 결혼해 아내와 집을 늘려가며 자리를 잡은 것도 이곳이었다. 아이들도 여기서 키웠다. 그런데 여기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고향에 내려갈까 생각도 많이 했지만 떠나기는 또 쉽지 않았다.
오늘은 옆집 과일가게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마음 넓은 주인 아주머니가 불고기와 미역국을 끓였다. 혼자 지내다보면 끼니를 잘 챙겨먹지 않는다. 아침은 거를 때가 많고 점심은 사먹거나 가게에서 라면으로 대충 때운다. 그래서 이웃이 신경 써줄 때가 더없이 고맙다.
과일 가게에 들어섰다. 강아지 사랑이가 뜨끈한 앉을 자리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그 옆에 앉아 희수 씨는 전화를 건다. 부산에 있는 아이들이다. 뭘 잘못했는지 일곱 살 딸이 고모한테 혼나고 울고 있다.
"아빠~~~."
"고모한테 혼났어? 괜찮아."
"아빠 보고 싶어."
"아빠도 보고 싶어."
"아빠 언제 와?"
"4월에 갈게."
"4월 언제? 6일?"
"글쎄 15일쯤? 그때 상황 봐서 갈게. 비행기 타고 숑 갈게 기다려."
"아빠 빨리 와~~~. 보고 싶어~~~."
아이가 서럽게 운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고개 숙인 희수 씨의 눈시울도 붉어진다.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는데......(한숨) 아이들 울고, 아빠 보고 싶다 하는데 그런 마음 누가 알겠어요. 애들은 무슨 죄라고…."
희수 씨는 사별 후 상당한 우울감을 겪었다. 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지금도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느낀다. 부산에는 두 달에 한 번 갈까 말까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가족 사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죠.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꿈꾸지 않나요?"
귀가.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휑한 집에 잘 들어가지 못했다. 집에 들어섰다. 아이들 사진은 있는데 윤정 씨의 사진이 없다.
"처음엔 그냥 뒀는데 보면 자꾸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지금은 뗐어요"
그는 혼자 있을 때 아내 사진을 보기가 어려웠다고 말한다. 추억을 조금씩 지워가는 중이라고 말하는 희수 씨는 이 집에 살기 어려워 4월에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희수 씨가 방 안에 들어가 아내의 유품 상자를 꺼낸다. 상자 안에 공부했던 노트가 몇 권 보였다.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대신 공장으로 가서 언니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착한 아내는 늘 언젠가는 대학에 가겠다고 말하곤 했다. 아내의 유언도 자식들 공부시켜서 대학에 꼭 보내라는 것이었다. 공부 못해 대학 안 가고 공장 가면 싫다고. 윤정 씨는 결국 대학 가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는 그저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뿐이다. 아픔을 지우기 위해 추억을 지워간다던 남자. 그는 그것을 지울 수 있을까? 돌리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홀로 남겨진 남자는 천천히 유품 상자를 덮었다.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죠.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꿈꾸지 않나요?"
▲ 화상통화. 아이들은 부산에 내려보냈다. 가게 때문에 돌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귀가.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휑한 집에 잘 들어가지 못했다. 집에 들어섰다. 아이들 사진은 있는데 윤정 씨의 사진이 없다.
"처음엔 그냥 뒀는데 보면 자꾸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지금은 뗐어요"
그는 혼자 있을 때 아내 사진을 보기가 어려웠다고 말한다. 추억을 조금씩 지워가는 중이라고 말하는 희수 씨는 이 집에 살기 어려워 4월에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희수 씨가 방 안에 들어가 아내의 유품 상자를 꺼낸다. 상자 안에 공부했던 노트가 몇 권 보였다.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대신 공장으로 가서 언니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착한 아내는 늘 언젠가는 대학에 가겠다고 말하곤 했다. 아내의 유언도 자식들 공부시켜서 대학에 꼭 보내라는 것이었다. 공부 못해 대학 안 가고 공장 가면 싫다고. 윤정 씨는 결국 대학 가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는 그저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뿐이다. 아픔을 지우기 위해 추억을 지워간다던 남자. 그는 그것을 지울 수 있을까? 돌리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홀로 남겨진 남자는 천천히 유품 상자를 덮었다.
▲ 부천시 송내동에 위치한 정희수 씨의 정육점. ⓒ프레시안(최형락) |
▲ 고기는 단골 장사라서 주인이 꼭 자리를 지켜야 한다. 친절하게 손님을 맞는 희수 씨. ⓒ프레시안(최형락) |
▲ 희수 씨는 틈틈이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을 본다. ⓒ프레시안(최형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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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육점 지하 창고에서 앨범을 들춰보는 희수 씨. ⓒ프레시안(최형락) |
▲ 과일가게. 혼자인 희수 씨에게 신경 써 주는 이웃이다. 가끔 밥을 얻어 먹기도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 퇴근 후 옆집에 들렀다. 강아지 사랑이(11)가 주인 아줌마의 품에 안긴다. ⓒ프레시안(최형락) |
▲ 그나마 화상통화 덕에 아이들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 귀가 ⓒ프레시안(최형락) |
▲ 아무도 없는 휑한 집에 혼자 들어서는 희수 씨. 사별 후 처음엔 집에 잘 안 들어오려고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 윤정 씨의 유품을 열어본다. 대학에 가고 싶어 하던 아내의 노트. 주고받은 편지, 선물,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프레시안(최형락) |
▲ 가족으로 북적이던 아파트에 혼자 사는 희수 씨는 4월 작은 곳으로 이사를 계획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 그는 그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프레시안(최형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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