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민주화는 지난해 대선을 관통한 화두였습니다. 이 화두를 잘 풀어가는 것이 새 정부의 주요 과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제 민주화에 관한 논의는 무성하지만 이뤄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갈 길은 멀지만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인 경제 민주화를 위해 다시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할 때입니다.
이에 <프레시안>은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을 위한 국민운동본부' 자문위원회와 공동으로 경제 민주화의 오늘을 짚고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기획 '경제 민주화 워치'를 진행합니다. '경제 민주화 워치' 칼럼은 매주 게재됩니다. <편집자>
늙은 사무라이와 같은 일본 경제가 아베노믹스라는 칼을 빼들었다. 1990년대 초 버블 붕괴 이후 일본 경제는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복에 실패했고 국민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기나긴 불황을 이겨내기 위해 일본의 아베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아베노믹스라고 불리는 팽창적인 거시 경제 정책과 다양한 성장 촉진 정책들을 제시했다. 이러한 일본 경제의 모습은 디플레와 장기 불황이라는 적을 베기 위해 최후의 칼을 드는 무사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물론 그 싸움의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일본 정부에 따르면 아베노믹스의 첫 번째 화살은 양적 완화로 대표되는 확장적인 금융 정책, 두 번째 화살은 적극적이고 기동적인 재정 지출, 그리고 세 번째는 민간 투자를 촉진하는 다양한 성장 전략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4월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2년 내 2%라는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제시하며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을 통해 본원통화를 내년 말까지 두 배로 늘리겠다는 확장적인 양적완화정책을 발표했다. 또한 대규모 인프라 투자 등을 위해 올해 초 10조 엔이 넘는 경기 부양책을 발표하고 향후 10년간 최대 200조 엔 규모의 재정 지출을 실시할 것이라 발표했다. 지난 6월에는 규제 개혁과 민간 투자 활성화를 위해 전력, 의료 및 기반 시설 정비와 경제특구 설립 등을 포함하는 성장 전략들도 발표했다.
아베노믹스에 대해서는 희망 섞인 기대부터 불가능한 작전이라는 비판까지 국내외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정부가 시장에 강도 높게 개입하는 극단적인 케인스주의 정책이기 때문에 크루그먼과 스티글리츠 등의 학자들은 박수를 보냈지만 하버드대의 펠드스타인은 재정 문제로 인해서 지속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경우 일각에서는 '아베노미스(아베의 실수)'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지만, 당장 국민들의 지지는 매우 높다. 사실 양적 완화를 핵심으로 하는 아베노믹스는 2007∼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변화한 경제학계와 미국의 정책 변화를 반영한다. 고이즈미 정부의 재무장관이었던 다케나카는 2000년대 초 이와 같은 정책을 실시하고 싶었지만 보수적이던 일본 중앙은행의 반대로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며, 당시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성공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지적한다.
늦긴 했지만 아베노믹스가 일본 경제를 살릴 수 있을까. 양적 완화 정책과 함께 주식 시장은 작년 연말 이후 40%가량 상승했고, 엔화 가치도 하락하여 작년 말 1달러당 83엔 정도이던 엔화가 올봄 약 100엔 수준으로 상승했다. 이러한 변화는 토요타와 소니 등 수출 대기업의 수익을 크게 증가시켰고 급속한 경기 회복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제성장률은 연율 기준으로 2013년 1분기에 무려 4.1%, 2분기에도 3.8%를 기록했다. 특히 2분기에는 다섯 분기 연속으로 줄어들던 설비 투자가 분기 기준 1.3% 상승했고 소비도 0.7% 늘어났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9월 1일 발표한 기업 단기 경제 관측 조사에서는 제조업 대기업의 경기동향지수가 9개월 연속으로 개선되어 리먼 사태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전망 엇갈리는 아베노믹스…성공 위해선 경제 민주화가 필수
그러나 아베노믹스는 자신을 벨 수도 있는 위험한 수단이며, 실패하면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소위 성장 전략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으며, 고령화에 대응한 복지 개혁이나 경제 구조의 개혁과 개방 등 중장기적인 고려는 많이 부족하다. 가장 큰 걱정은 재정 문제로 인한 국채 가격 급락과 장기 금리 상승 등 금융 시장의 혼란이다. 일본의 GDP 대비 국가 부채는 이미 240%를 넘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고 재정 적자도 수년간 GDP의 10%가량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90%가 넘는 일본 국채를 일본 금융 기관 등이 국내에서 소화하지만, 앞으로 외국인 투자가 늘어나면 패닉의 가능성이 높아질 수도 있다. 아직 경상수지는 흑자이지만 무역수지는 계속 적자여서 이러한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결국 아베 정부는 인플레이션과 경기 회복으로 분모를 늘려서 정부 부채 비율을 떨어뜨리고자 하지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다. 정말로 인플레이션이 나타난다면 이를 반영하여 금융 시장의 명목금리가 높아질 것이므로 정부의 부담이 커질 수도 있으며, 5월 말에는 실제로 일시적으로 국채 금리가 급등하기도 했다. 심각한 재정 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일본 정부는 경기 회복을 배경으로 결국 5%의 소비세를 2014년부터 8%로 인상하기로 결정했지만 세금 인상이 회복을 가로막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더욱 큰 문제는 최근 기업의 수익 증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은 여전히 정체하고 있고 소비 회복도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GDP에서 차지하는 수출의 비중이 15% 정도여서 국내 소비가 경제에 훨씬 더 중요하다. 결국 아베노믹스가 성공하려면 수익이 높아진 일본 기업들이 임금을 인상하고 그것이 다시 국내 수요 회복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나타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은 1997년 이후 계속 하락하여 2012년의 경우 1989년 수준에 불과하며, 2013년에도 임금과 보너스의 인상은 몇몇 대기업을 빼고는 제한적이다. 이를 고려하면, 아베노믹스의 성공을 위해 넓은 의미에서 경제 민주화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베노믹스의 효과는 아직 금융 시장과 기업에만 집중되고 있으며, 엔저 효과로 물가만 오르고 있어서 국민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수익이 크게 늘어난 기업들이 국내가 아니라 동남아에 대한 투자를 급속히 늘리고 있는 것도 문제다. 특히 불황과 함께 일본도 비정규직의 비중이 1990년대 초반 약 20%에서 올해 38%를 기록했고 '격차사회'라 불리듯 소득 불평등과 빈곤도 심각한 수준이다. 소비세 인상과 법인세 인하는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생활의 부담을 높이고 소득 분배에도 악영향을 끼쳐 아베 정부의 정치적 기반마저 약화시킬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일본 정부도 적극적으로 대기업에 임금 인상을 주문하거나 심지어 노동조합의 편을 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임금을 인상하고 투자를 증가시키는 기업에 대해서만 법인세를 인하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현실화되지 못했지만, 정부 내에 노사정 합의를 추진하려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기업은 임금 인상, 정부는 임금 인상 기업에 대한 세제 우대와 구조조정 지원, 실업자의 취업 지원, 그리고 노동자는 노동 시장 규제 개혁과 실업의 수용 등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합의와 같은 합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아베노믹스로 경제가 반짝 회복된다 해도 그 혜택이 모든 국민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임금 상승과 소득 분배의 개선 등 경제 민주화에 기초한 튼튼한 경제 회복만이 일본 경제를 살려낼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들과 시민 대중의 정치적 압력이 필요하다. 일본 국민들은 기업의 임금 인상과 함께, 내수 촉진을 위해 부자와 빈자 그리고 노인층과 청년층 사이의 소득과 자산의 재분배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전국시대 이전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싸울 때에 화살을 먼저 쏘고 칼을 뽑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었다고 전해진다. 일본 정부가 제시한 정책들이 말 그대로 화살이라면 장기 불황을 물리치는 아베노믹스의 진정한 칼은 경제 민주화를 외치는 국민들이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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