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2월 28일, 대구. 일요일이었음에도 중·고등학생은 모두 등교해야 했다. 환경 미화 등의 명목을 내걸었지만 속내는 그게 아니었다. 야당의 유세장에 가지 못하게 하고자 학생들을 등교시킨 것이었다. 3.15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대구 유세가 예정돼 있던 날이었다.
학생들은 교사에게 따져 물었다.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런데 이게 뭐냐고. 참담한 심정의 일부 교사를 뒤로하고 학생들은 거리로 나섰다. "학원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진 4월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제자들의 당연한 물음에 제대로 답할 수 없었던 교사들은 4월혁명 후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해방 후 최초로 교원 노조를 결성했다. 이승만 하야 이틀 후인 1960년 4월 28일 발기인회가 소집됐고 5월에 대구를 시발점으로 전국으로 확산됐다. 교원 노조에 가입한 교사는 2만 명이 넘었다(전국 교원의 약 25퍼센트).
교원 노조원이 이토록 빨리 늘어난 밑바탕엔 이승만 정권 때처럼 살지는 않겠다는 교사들의 다짐이 있었다. 정권 유지 도구로 살아가며 자괴감을 느끼지는 않겠다는 각오였다. 그와 더불어, 4월혁명 때 피 흘린 제자들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했다.
교육의 자주성 회복, 학원 민주화 등을 요구하는 교원 노조는 정권에 눈엣가시였다. 장면 정권은 "교직을 노동자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건 그 신성성을 모독하는 일"이라며 으름장을 놨다. 교원 노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노동조합법까지 개정하려 했다.
교원 노조에 결정타를 날린 건 5.16쿠데타 세력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4월혁명 후 터져 나온 정당한 목소리를 힘으로 억눌렀다. 통일 운동 세력을 용공 분자로 몰아갔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에도 빨간 칠을 했다. 숨죽여 지내야 했던 유족들이 이승만 퇴진 이후에야 겨우 만든 피학살자 묘역을 파괴하고 위령비를 땅속에 묻어버리는 '제2의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교원 노조도 박정희의 철퇴를 피해가지 못했다. 쿠데타 직후 교원 노조 간부 1000여 명이 체포됐다. 교원 노조는 용공 단체, 정부 전복 세력으로 몰렸다. 제자들의 정당한 외침을 저버리지 못했던 교사들은 옥살이를 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 자녀들 중 일부는 연좌제의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 1961년 교원 노조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와 함께 학교 현장에서 민주주의는 다시 먼 나라 이야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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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짓밟은 교원 노조, 이번엔 박근혜가 겨냥
그로부터 28년 후, 병영 같던 학교에서 교사들의 노조가 다시 탄생했다. 1989년 참교육을 외치며 출범한 전교조다. 해방 후 첫 교원 노조가 4월혁명의 물결을 타고 태어난 것처럼, 전교조 역시 6월항쟁으로 열린 민주화의 공간에서 탄생했다.
이번에도 가시밭길이었다. 정권의 얼굴은 바뀌었지만 '교원 노조는 교사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논리는 그대로였다. 노태우 정권은 1989년 1500명이 넘는 교사를 파면·해임하는 강수를 뒀다. 교사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꿈꾼 죄로 교단에서 쫓겨나 차가운 거리로 내몰렸다.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외롭지만은 않았다. 많은 학생이 자발적으로 전교조 교사를 응원했다. "선생님을 돌려달라"며 전교조 교사에 대한 징계 철회와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학생만이 아니었다. 일부 학부모들은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를 결성하고 전교조 해직 교사 복직 운동 등을 벌였다.
다시 그로부터 10년 후, 전교조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창립 10년 만에 합법화된 것이다. 참교육을 향한 오랜 노력과 희생의 결과였다. 합법화 후 전교조는 크게 성장했다. 1만 명 안팎이던 조합원은 한때 10만 명 선까지 늘었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는 정부의 교육 정책에도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시련은 사라지지 않았다. 합법화 후에도 전교조에 대한 공세는 계속됐다. 우익 단체들은 전교조를 '악의 축'으로 여겼다. 없애야 할 집단으로 간주하고 끊임없이 공격했다. 이명박 정권과 보수 언론 역시 전교조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박근혜 정부가 '전교조 불법화' 카드를 꺼내든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교사 출신인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교원 노조를 짓밟았던 것과 닮은꼴이다. 사학 재단 이사장 출신인 박근혜 대통령은 그간 전교조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감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관련 기사 : 박근혜 눈에 전교조는 '한 마리 해충'?…과거 발언 논란). 박 대통령의 그런 태도엔 교사들의 노조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배어 있다. 이른바 보수 세력에게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그러한 공포와 혐오에 바탕을 둔 '전교조 죽이기'가 성공해 교원 노조가 사라진다면, 학교 현장의 민주주의는 퇴행할 가능성이 높다. "선생님, 비겁합니다" 시대의 망령이 되살아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전교조에 대한 공격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없는 이유다.
▲ 1989년 7월 14일, 구로고 학생들이 전교조 관련 교사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선생님을 돌려달라"…그로부터 24년, 전교조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
짚어야 할 점이 하나 더 있다. 박근혜 정부에 미운털이 박혔을 여러 조직 중 통합진보당에 이어 전교조가 표적이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시쳇말로, 때려도 여론전에서 불리할 게 없을 법한 상대라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런 곳부터 하나씩 손보면서 공격 대상을 넓혀가는 전략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이렇게 된 데에는 전교조가 자초한 면도 있어 보인다. 합법화 이후 전교조는 적잖은 국민에게 참교육보다는 조합원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단체로 비친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전교조가 힘을 쏟았던 교원 평가 저지 투쟁 등은 진보 세력으로부터도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했다. 전교조 해직 교사 복직 투쟁을 했던 학부모 단체마저 전교조의 그런 행보에는 거리를 뒀다. 이를 '전교조 죽이기' 세력의 공세와 왜곡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교조가 교사들의 이익 단체로 비치는 면이 늘어가는 동안 학교 현장에선 비정규직이 양산됐다. 물론 차별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을 양산한 주요 책임을 전교조에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전교조 조합원들이 이 비정규직들과 함께 얼마나 울어줬는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곳곳에서 나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24년 전 참교육을 꿈꾸던 교사들이 쫓겨날 때 많은 학생과 학부모는 함께 싸우며 눈물 흘렸다. "선생님을 돌려달라"는 절규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러나 24년 전 상황이 지금 다시 일어난다고 해도 그러할까? "선생님, 비겁합니다"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일선에서 막아야 할 전교조는 "선생님을 돌려달라"고 외칠 우군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을까? 전교조 스스로, 무겁게 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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