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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구 회장, 한국일보는 당신 장난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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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구 회장, 한국일보는 당신 장난감이 아니다

[기고] 한국일보의 진짜 기자들을 응원해야 하는 이유

언론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 지난 몇 년은 경악과 허탈의 시기였다. 제대로 된 기사를 써보겠다는 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 기자들은 비상식적인 사람들과 싸워야 했다. 공정 보도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장을 상대로 KBS와 MBC가 각각 오랜 싸움을 벌였고, 더 길었던 YTN 기자들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부산일보, 국민일보, 연합뉴스에서도 다수의 상식은 소수의 비상식과 투쟁을 해야 했다.

이들이 싸우는 동안, 관찰자 역할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연구자/교수인 나는 개탄하거나 비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작년 한 해 동안 언론사들의 파업 사태를 걱정하는 칼럼을 서너 차례 쓴 기억이 난다. 싸움의 현장에 참여할 위치도 아니고 사태를 해결할 무슨 대단한 힘이 있는 사람도 아닌지라, 상식을 향한 응원의 형식은 고작 원고지 10매 정도의 잡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은 다시 (칼럼이라는 형태로) 언론의 일부가 되었다. 우울한 언론 현실을 비판하는 글이 바로 그 언론의 한 귀퉁이를 차지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그나마 작은 희망의 단초이기도 했다.

내가 썼던 글이 실렸던 매체는 한국일보였다. 참 공교롭다. 바로 이 한국일보가 지금 우리나라 언론의 위기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작년의 공영 방송 파업 사태가 한국 언론의 고질적 문제를 반영한 사건이라면, 오늘의 한국일보 사태는 한국 언론의 잠재적이지만 심각한 병폐를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린 사건이다. 정치 권력이나 (광고)자본 권력이 아닌, 한 명의 비상식적인 사주가 '좋은' 저널리즘을 방해하는 견고한 장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관계를 먼저 분명히 하자면, 한국일보 장재구 회장은 채권단과 한 약속을 어겼고, 한국일보 구성원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법적 절차를 어겼으며, 법원의 명령도 무시했다. 200억 원 배임 혐의로 고발을 당했고, 드러난 정황을 볼 때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을 확률도 높아 보인다. 그는 기자의 압도적 다수가 반대해 편집국장 임명 동의가 거부된 인물을 다시 편집국장 직무대행에 앉혔고(다행히 법원은 전임 편집국장의 해고 효력을 정지한다고 결정하면서, 신임 국장은 현재 그 지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용역 직원들을 동원하여 편집국을 폐쇄했으며, 기자들의 기사 작성·송고 시스템 접속을 차단했다(이는 법원에 의해 '위법한 직장 폐쇄'로 해석되었다).

가장 어이없는 일은 기자들에게 '근로 제공 확약서'를 요구한 것이다. 생각하고 말할 권리를 누구보다도 존중해야 할 언론사주가 기자들에게 일종의 충성 서약을 강요한 것이다(이에 대해 법원은 "기자들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정당한 요구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극히 상식적인 결론이었다).

동네 김밥집 주인이라면 주방장이 반대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메뉴도 바꾸고 가격도 올릴 수 있다. 신문사는 아니다. 사주가 보도 내용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헌법상의 기본권인 편집권에 대한 침해이다. 언론사 사주들은 종종 편집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기사의 내용과 배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곤 하지만, 이는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지난 주 한국언론정보학회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충남대의 이승선 교수는 편집권의 역사와 의미에 대한 명쾌한 정리를 발표한 바 있다. 핵심은, 편집권 개념에는 사주에 의한 부당한 통제를 배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이 애당초 추상적이기 때문에 법적 제도화가 어렵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승선 교수는 '편집권'을 '언론의 내적 자유' 개념으로 대체하여 논쟁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출발점은 "언론 기관 종사자는 압력이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명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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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인으로서 능력도, 언론인으로서 사명감도 보여준 적이 없는 장재구 회장에게 언론의 내적 자유에 대한 고민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내 회사'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천박한 봉건 지주의 인식만을 보여주었다. 법원의 판결로 상식이 회복되리라고 기대했던 것도 무리였다. 장재구 회장과 몇 안 되는 사주 추종 간부들은 법원 결정을 무력화하는 갖가지 꼼수들을 동원하고 있다. 편집국이 개방되면서 이제 대충 사태가 끝났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여전히 한국일보의 '진짜' 기자들은 기사의 작성도, 송고도 못 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가장 무기력함을 절감하는 순간은 모든 이가 틀렸다고 지적하는 일이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정파적 의미가 조금이라도 개입된 언론사 파업 사태에 대해서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비난과 응원이 갈릴 수도 있다. 한국일보 사태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민주당이 "한국일보 노동조합의 투쟁을 지원하자는 취지"로 결의안을 발표하는 동안 새누리당의 남경필, 정우택, 이상일 의원도 기자들을 응원하는 발언을 했다. 안철수, 심상정 의원과 노회찬 전 의원도 나섰다.

26개 언론사의 막내 기수 기자들도 장재구 회장의 "비상식적인" 결정들을 원상 복구하라고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발언을 아껴오던 언론 관련 3개 학회도 한국일보 경영진의 행태가 "심각한 언론 자유 침해 행위"라는 내용의 성명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법원의 결정까지 감안한다면, 장재구 회장과 '가짜' 기자들에게 우군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변화는 없다. 왜인가? 장재구 회장은 한국일보라는 신문사를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개인 장난감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사태는 다른 어느 신문사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실제로 작년 국민일보가 겪었던 일이기도 하다. 국민일보 사태는 정의롭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장재구 회장도 조금 더 버티면 결국 국민일보처럼 끝날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 언론은 돌이키기 어려운 암울한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정파적 편향성 논란이나 정치 권력의 통제 유무는 이제 사치스러운 논쟁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 기업들, 그리고 그 종사자들에게 묻고 싶다. 비상식적인 사주 한 명이 언론사 하나를 초토화하는 사례를 만들기를 원하는가? 우리 회사, 우리 사주는 그럴 리 없다고 안심하고 있는가? 나는 타 신문사와 방송사들이 장재구 회장에 대한 감시의 눈을 거두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일보 사태가 서서히 잊히는 것이 두렵다. 한국의 언론이 또 한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짝퉁 한국일보를 만들고 있는 소수의 가짜가 아닌, 한국일보의 진짜 기자들을 내가 응원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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