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님의 침묵'…언론은 무엇을 하고 있나?
점입가경(漸入佳境). 들어갈수록 점점 재미가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하는 짓이나 몰골이 더욱 꼴불견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사자성어에 꼭 알맞은 일이 지난해 대통령 선거 때 있었던 국가정보원 선거 개입 사건이다.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발각된 국정원 여직원의 인터넷 댓글 공작은, 예상했던 대로 여직원 개인의 정치활동이나 과잉충성이 아니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휘 아래 심리전 부서가 통째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국정원의 불법 선거 개입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을 막기 위한 국정원 개혁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조짐은 사건의 초기부터 나타났다. 12월 16일 밤, 박빙의 승부를 앞두고 열린 대통령 후보들의 마지막 TV 토론 직후 경찰은 "국정원 여직원 대선 관련 댓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중간수사결과를 서둘러 공표했다.
한국일보 기자들을 응원한다 [박홍규] 회장 고발하자 직장 폐쇄…한국일보 사측의 불법 행위 [함성호] 한국일보 투쟁은 우리의 그릇을 지키는 싸움! |
당시 박근혜 후보가 "(여직원의) 컴퓨터 노트북을 뒤져 봐도 댓글 하나 단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2박 3일 동안 감금당하고 고생한 젊은 여직원, 그 여직원만 불쌍하게 됐다"라고 했던 '실드'도 무색하게, 그 여직원의 아이디를 분석한 결과는 국정원의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대선 개입 혐의를 뒷받침했다. 더욱이 국정원은 지난 대선뿐 아니라 2009년 2월부터 광범위한 여론 조작과 야당 인사에 대한 음해 공작을 벌였다는 게 속속 드러났다. 그런 가운데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은 수사라인에 증거 인멸을 지시한 잘못으로 사퇴와 함께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되었으며, 기세 좋게 쏟아냈던 '실드질'과 달리 이때부터 '님의 침묵'이 됐다.
국정원이 대선과 정치에 불법 개입했다는 증거가 명백해지자, 국정조사와 국정원 개혁 여론이 비등해졌다. 그러자 남재준 국정원장이 지난달 24일, 난데없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무단 공개했다. 국정조사를 피하기 위한 새누리당과 개혁의 칼날을 피해보려는 국정원의 야합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언제나 권력과 한 편인 보수 언론은 곧바로 고 노무현 대통령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하고 서해를 북한에 안겨 주려고 했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온 힘으로 맞장구를 쳤다(기자 세계의 은어로는 이런 경우를 '빨아준다'고 한다는데, 차마 바로 쓰지 못해, 괄호 속에 넣는다).
새누리당과 국정원이 교감 끝에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대화록 전문을 까고 나서, 뜻하지 않은 누수가 생겼다. 지난해 대선 당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총괄본부장이었던 김무성 의원은 대통령 선거 닷새 전인 12월 14일 오후 부산 서면 유세장에서 "전 국민이 현재 최고의 관심을 갖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가서 한 굴욕적 발언에 대해서 제가 오늘 대한민국 대표로 이 자리에서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고서 그가 쪽지를 보고 울먹이듯 읽어 내려간 내용은 24일 국정원이 공개한 전문과 토씨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는 그 당시 국회의원도 아닌 일개 시민이었는데, 어떻게 비밀기록문인 대통령 기록물을 보게 되었을까?
하필 '님의 침묵'은 국정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대화록 전문을 공개되던 날 "대선 때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국정원의 댓글 공작이야 이명박 정권의 자기 보호 차원이거나 원세훈의 과잉충성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쟁점은 김무성의 단독 행동이 아니라, 박근혜 후보의 대선 전략이라는 큰 맥락 속에서 보아야 하므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 힘들다. 박근혜 대통령이 불법을 인지하고, 허락했을 가능성이 크다.
▲ <한국일보> 노조는 지난 5월 2일 신문 1면에 '장재구 회장의 불법 인사를 거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실었다. 이후 <한국일보> 사태는 언론사 초유의 '용역 깡패 등장' 상황으로까지 흘러왔다. ⓒ<한국일보> 노조 |
우리나라 1등 신문이 사주 비리를 캔 적 있는가?
막상막하(莫上莫下). 더 낫고 더 못함의 차이가 거의 없음을 일컫는 말로, 현재 <한국일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이 자아내고 있는 점입가경과 맞먹는다. <한국일보> 노동조합은 4월 29일, 장재구 회장을 200억 원의 업무상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10년 넘게 쌓여온 회장의 비리나 경영 파탄을 방치하면 <한국일보> 전체가 침몰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과 <한국일보>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그러자 장 회장은 편집국장을 기습 경질하는 등 보복 인사, 방패막이 인사를 단행하고 이에 반발해 기존 편집국 체제로 신문을 제작하던 기자들을 편집국 밖으로 내몰고 일을 하려면 사측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충성 계약서(근로제공 확약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이미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입사한 기자에게 충성 계약서가 웬 말인가? 장 회장이 떳떳하다면 충성 계약서를 강요할 게 아니라, 검찰의 수사를 독촉했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결백을 밝히고, 회사를 해치려는 불순분자를 가려내 처벌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선택은 달랐다. 용역을 동원해 편집국을 봉쇄하고 180여명이나 되는 기자들을 회사 밖으로 내몰았다. 쫓겨 난 기자들은 현재, 충성을 확약한 소수와 급하게 외부에서 수혈한 인력으로 찍어내는 '짝퉁 한국일보'를 치를 떨며 바라보고 있다. 취재가 이루어지지 못해 자매 신문이나 통신사의 기사와 사설을 무단으로 베끼고 짜깁기한 신문은 '누더기'지 신문이 아니다.
공정성과 정확성이 생명인 언론은 항상 '편한 사람을 불편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감시견주의(watchdogism)라는 오명과 오해도 따르지만, 기자들이 불편하게 해야 하는 것은 권력, 광고주, 권위자, 시민만이 아니다. 그 가운데는 사주와 경영진도 포함된다. <한국일보> 기자들이 사주의 비리를 오랜 기간 방치했다는 사실은 사주 감시에 실패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사의 사주를 감시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 또한 반증한다. 우리나라에서 1, 2등을 다투는 신문의 기자들이 언제 자기 사주의 비리와 허물을 캐고 든 적이 있던가?
<한국일보>가 아니더라도 신문은 많다. 하지만 미국에 있는 그 많은 신문 가운데 워터게이트 사건을 단독보도해서 닉슨의 사임을 이끌어낸 신문은 <워싱턴포스트>밖에 없었다. <워싱턴포스트>의 사주였던 캐서린 그레이엄과 벤자민 브레들리 편집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기자가 집요하게 사건을 파헤치자 <뉴욕타임스>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와 같은 경쟁매체가 가로 늦게 취재 경쟁에 합세했다. 이런 사례는 신문이 아무리 많아도, 결코 넘친다고 타박할 수 없는 근거가 된다.
1954년 창간되어 59년 동안 쉬지 않고 움직였던 '한국일보 시계'는 장 회장이 용역을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하고, 정상적인 신문을 발행하기에는 턱도 없는 10여 명의 인원으로 '짝퉁 한국일보'를 낸 6월 17일자로 멈춰 섰다. 편집국에서 내쫓긴 180여 명의 기자들이 원하는 최선의 해결을 통해 신문이 정상화되더라도, <한국일보>의 치욕은 남는다. 사주의 옹졸하고 짧은 판단으로, 워터게이트 범죄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심각한 위법이 드러난 국정원 비리 정국 한 가운데서, <한국일보>는 만회할 수 없는 공백으로 남았다.
점입가경을 연출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나, 막상막하의 수를 두고 있는 장재구 회장에게 감히 "인생을 살면서 도리를 거스르지 않고 마음 편하도록 힘쓰시라(人生在世, 只求心安理得就好了)"는 충고를 드리고 싶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