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전환이라는 그들의 요구가 현실적인지 아닌지, 그들이 이기적인 집단인지 아닌지를 떠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해온 개개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들이 왜 싸우는지, 대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인지, 아니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들이기에 이러는지.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제각기 걸어온 길을 따라가는 이 글은, 총 6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필자 주
"그니까 남편이 군대 갔을 때, 사귀던 여자 친구한테 다른 사람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급하게 휴가를 받아서 나왔다 그랬지?"
아내의 말에 운전하던 남편은 부정을 한다.
"내가 언제?"
"언제이긴, 자기가 나한테 이야기해줬다."
"기억이 안 난다."
모르쇠로 버틴다. 그래 봤자 서로의 과거(?)가 빤하다. 투닥거린다는 표현조차 어울리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은 익숙한 모습이다. 지선 씨와 아내 재은 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다.
재은 씨의 말에 따르면, 고등학교 시절 남편은 여고생들을 창가에 불러 모으던 체육 잘하고 훤칠한 남학생이었다. 반면 재은 씨는 부모님에게 반항하기 위해 머리를 삭발한 당찬 학생이었다. 머리는 자라 짧은 스포츠머리가 됐다. 선도부였던 남편은 교문에서 그녀의 머리 길이를 쟀다. 그러다 친해졌다.
"아무래도 서로 어릴 적부터 아니까. 그래서 더 이해하는 거 같아요."
그녀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많았다. 아이 돌 사진을 찍기로 한 날, 남편은 잠시 나갔다가 오겠다며 사진관 앞에서 보자 했다. 그리고 스무닷새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CTS 점거파업이 일어난 때였다. 계획되지 않은 파업이라, 남편 지선 씨조차 반나절 집회만 하고 올 줄 알았다.
▲ 송전탑 위에 있는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 천의봉 씨 ⓒ프레시안(최형락) |
돌 사진 찍으려는 날, 공장 점거라니…
찍지 못한 돌 사진이 문제가 아니었다. 공장 점거라니. 이미 한 해 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77일 파업이 있었다. 테이저 총, 가스분사기, 최루액 난사 등 경찰이 파업노동자들을 어떻게 진압하는지 충분히 보았다. 웬만해서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재은 씨였지만, 수화기를 붙들고 남편에게 당부했다. "만약 경찰 들어오면, 그냥 조용히 잡혀가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저항하다 더 크게 다칠 것이 염려됐다. 남편은 무사히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뒤 해고됐다.
2년이 지났다. 복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노동조합은 싸운다. 옷가게를 열 정도로 옷에 관심도 많고 잘 꾸밀 줄도 알던 재은 씨는 요사이 높은 굽 구두는 신어본 적이 없단다. 해고자의 아내로 생활이 빈곤하여 옷차림이 소박해진 것이 아니었다. 물론 집을 좁혀 와야 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은 있다. 하지만 그녀가 멋을 포기한 까닭은 다른 데 관심을 두기 바빠서이다. 송전탑 아래 현대자동차 농성장에 들르라, 노동조합 행사에 참여하라, 분주하다. 재은 씨는 이를 두고 높은 구두를 버리고 자존심을 택했다고 말했다. 옳은 것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진다는 자존심, 아니 자부심이다. 옳은 선택, 평범하던 부부의 삶이 이 선택으로 달라졌다.
지선 씨는 어릴 적 '깡촌'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농사일을 도우며 컸다. 운동을 좋아했고 배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 손에 이끌려 도시로 왔다. 아들 공부시키겠다는 부모님의 의지였다. 낯선 도시에서 할 것이 없어지자, 공부만 하긴 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했단다.
하지만 고등학교 올라가 기숙사 생활을 하니 자유가 생겼다. 부모님 통제를 벗어나 '재미있게' 지냈다. 자습서 비도 기숙사 비도 받아다 다른 데 썼다. 사지 못한 자습서는 옆 반 친구들에게 가서 빌렸다. 그 친구 중 지금의 아내도 있었다.
고3이 되자 대학은 가야겠다 싶었다. 진주에 있는 모 대학 금속학과에 입학했다. 실업계 대학이었고, 원하던 과도 아니었다. 어디라도 가야 할 것 같았다. 생각 없이 들어간 대학이지만, 가서는 열심히 했다. 성적도 잘 나왔다. 교수에게 인정도 받아, 큰 제철소로 추천서도 받을 수 있었다. 교수님이 추천해준 선배들이 수습 몇 개월을 거쳐 정규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제철소로 가지 않았다. 그때는 돈이 뭔지 몰랐다. 정규직 무서운 줄도 몰랐다.
어린 마음에 큰일을 해야겠다 싶었다. 꿈만 가지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인터넷 홈페이지 관리를 하는 사업이었다. 아는 형과 같이 시작했는데 1년간 매출이 거의 없었다. 기술도 노하우도 부족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사업을 접고 지선 씨는 모 전자제품 쇼핑몰에 취직했다. 전국 어디나 체인점이 있는 대기업 쇼핑몰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파견직원으로 일했다. 삼성, 엘지, 대우 등 쇼핑몰에서 판매되는 전자제품이 있었고, 전자제품 회사는 노동자들을 쇼핑몰로 파견 보냈다. 그곳에서 이들은 쇼핑몰 판매직원처럼 물건을 팔았다.
그가 속한 전자회사는 그리 큰 기업이 아니었다. 인기가 없었다. 언변이 좋았던 그는 꽤 물건을 파느라 분주했지만, 돈은 되지 않았다. 그가 판 제품의 판매액이 한 달에 1억 가까이도 돼도, 그의 월급은 오를 줄 몰랐다. 그가 판 많은 물건 중 자사 제품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자사 제품 판매수당만으로 월급을 받는 처지였다. 쇼핑몰 판매직원으로 모든 회사의 제품을 다 팔아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월급을 받을 때는 오직 파견노동자일 뿐이었다.
그 사정을 알기에 형편 좋은 직원들은 옆 동료 회사 제품을 앞장서 팔아주고는 했다. 서로 그리 챙겼다. 그럼에도 시원치 않은 벌이 때문에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힘들었다. 당시 사귀고 있던 아내에게 면이 서지 않았다. 그러던 중 친척이 울산에 일자리가 있다고 했다. 일자리라니, 가야 했다.
"그때만 해도 울산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어요. 현대자동차 공장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현대차 대우차 삼성차 알았는데, 이 차들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생각을 안 해봤거든요."
남편 따라 부인도 울산으로
그런 그가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부품을 라인으로 옮겨다 주는 생산관리 일이었다. 1년은 힘들었다. 타지로 와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이전까지 제품 설명하랴 홍보하랴 종일 말하는 것이 일이던 사람이 대화 나눌 상대조차 없었다. 야간 근무는 더 힘들었다. 잠을 못 잤다. 몸이 적응될 만하면 또다시 밤낮이 바뀌었다. 그 사정을 안 지금의 아내가 울산으로 왔다.
남편이 있는 낯선 도시로 왔다. 혼자 지내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재은 씨도 아는 사람 없기는 마찬가지. 무료하기도 하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동네 호프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다 동향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도 남편과 같은 회사에 다녔다. 공통점이라고는 고작 그뿐이었지만, 외로웠던 처지에 반가웠다. 그 친구를 통해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다른 이들도 알게 됐다. 이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었다. 회사와 크고 작게 싸우기 바쁘던 노동조합 초기, 그들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녀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처음 접하는 노동조합 이야기였지만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제가 원래 반골 기질이 있던 것도 같아요. 새로웠어요. 권력에 대항하는 거잖아요. 현대기업이라는 큰 회사에 맞서서 싸우는. 저에게는 어릴 때 아빠라는 권위가 있었고, 거기에 대한 투쟁을 혼자 했던 건데. 이 사람들은 대 권력에 투쟁을 하는구나, 새로웠던 거 같아요. 그게 맞는 것 같고."
자신을 내리누르는 권위가 싫어 머리를 짧게 자른 여학생이었던 그녀는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친해졌다. 집으로 불러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고 했다. 남편도 함께했다. 남편에게도 노동조합을 권했지만 "우리 공장은 아닌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선 씨도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싶었다. 맞는 것 같았다. 한 날은 같은 공정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말을 했죠. 잠깐 이야기 좀 들어봐라. 회사가 불법 파견이다,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전부 다 에이, 그런 이야기 하지 마요. 우린 그냥 일만 하고 싶어요. 딱 잘라 말을 하더라고요."
한 달가량 설득했으나,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한 동료는 친구가 노동조합을 하다 해고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친구는 울산 바닥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멀리 떠났다고 했다. 울산에 현대기업 손길이 안 닿는 곳이 없었다. 현대에서 노동조합하다가 해고가 되면, 더는 울산에서 일 못 한다. 고향 떠나 부모 떠나 타지에서 살아야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겁을 냈다.
그도 가입하지 못했다. 겁이 났다. 혼자 가입을 한다는 것은 회사가 노동조합을 없애려 할 때 자신만 해고하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미 해고될 뻔한 경험도 있었다. 그 공포를 알았다. 끝까지 버티었고, 친했던 정규직 형들이 업체 사장에게 말 한마디씩 해준 덕에 살아남았다. 그가 일하던 자리가 정규직 바로 옆이었다. 정규직 형들과 제법 친하게 지냈다.
"지금 돌아보면, 얍삽했다 느껴지기도 해요."
그는 정규직의 도움으로 자신의 고용을 지킨 상황을 그리 말했다. 자신을 대신해 다른 동료가 회사를 나갔을 게였다. 하지만 하청업체에서 이것은 처세술일 뿐이었다.
"아무도 그걸 문제라고 생각 안 해요. 아, 저렇게 살아남아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배우는 거죠."
노동조합이 없는 상황에서, 힘없는 하청 노동자가 믿을 구석은 힘 있는 자였다. 그것이 정규직 노동자이기도, 업체 반장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면하며 살아갔다. 업체 반장이나 같이 일하는 선배들에게 '사회가 이렇게 흘러가니, 튀지 마라. 흘러가는 대로 살아라' 충고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충고대로 살지 못했다. 2010년 불법파견 판정이 있었다. 대법원이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에 대해 불법파견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판결이 난 것이다. 그 소식이 사람들을 움직였다. 500명이었던 조합원이 그해 3배 넘게 늘었다. 그도 가입했다.
"'우리는 정규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푸라기를 잡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때는 겁나는 게 없었어요. 그전에는 업체 사장이랑 반장이 곧 법이었어요. 그런데 노동조합을 알게 되고 우리가 정규직이라는 걸 알게 되니까, 업체 사장은 이제 허수아비라는 게 보였죠."
자신했으나, 여전히 겁은 난다.
"솔직히 사람들은 겁은 다 나요. 겁은 나는데… 그래도 시도를 하나, 안 하나지요. 저도 겁 많아요. 애도 키워야 하고, 와이프도 있고, 부모님은 지금은 젊지만 한 번씩 가면 용돈 드려야 하고."
이제는 허수아비 업체 사장이 무서운 게 아니다. 언제까지 이 싸움을 해야 할까 그것이 겁이 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왔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지금은 철탑 위 의봉이랑 병승 형도 있고. 회사 용역에게 많이 맞아가며 피 흘려가며 싸운 사람들 생각하면 떠나는 게 배신 같았죠."
종종 도망칠까 생각도 했다. 해고 생활은 힘들다. 다른 데 가서 돈이라도 벌면 숨통이 트이겠는데 하다가도, 다른 데 가서 일해 봤자 비정규직 신세라는 것을 떠올린다. 계약직 1년 2년짜리 인생으로 살아가는 거다. 평생을 그리 살아야 할까.
"우리나라 모든 사업장에 비정규직 문제가 있잖아요. 또 솔직히 겁나는 게 본 것이 있으니까 다른 데 가서 조합을 만들어야 하는데 하고 싸울까봐, 또는 못 하고 구시렁대며 살아가게 될까 봐. 그러느니 차라리 여기서 정당하게 싸우자."
ⓒ프레시안(김봉규) |
포기할 줄 모르는 부부
상황은 좋다고는 볼 수 없다. 현대자동차는 불법파견이나 사용기간 2년을 초과한 파견노동자를 직접 용된 것으로 보는 2007년 이전 파견법 고용의제를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걸었다. 현대자동차는 무분별한 간접고용을 막기 위한 이 작은 보호조항조차 기업의 자유를 침해하기에 잘못된 법이라 했다.
한편,중앙노동위원회는 울산공장 32개 업체를 불법파견이라 판정내렸다. 나머지 19개 업체는 불법을 인정받지 못했다. 합법도급이라 했다. 대부분 컨베이어 벨트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생산관리나 엔진, 시트 사업부 업체였다.
"생산관리 부서라든지 엔진 시트 부서 등은 차를 직접 만지지는 않지만, 그곳에서 가져다주는 자재로 차가 만들어지잖아요. 우리는 자동차 공장 전체의 컨베이어 벨트 속도에 맞춰 자재를 이동시키는 건데. 만약 우리가 자재를 제때 넣지 않으면 컨베이어벨트가 그러니까 라인이 멈춰요. 그런데 우리가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에 들어있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는 거지요."
지선 씨는 생산관리 부서에서 일했다. 회사와 노동부는 인정과 불인정을 가르며, 일하는 이들에게서 기대를 빼앗아 간다. 회사는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 라고 한다. 지친 노동자들이 스스로 포기하길 기다린다.
하지만 이 부부는 포기할 줄을 모른다. 아내, 재은 씨는 말한다.
"지난 간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지나간 것을 가지고 이야기해봤자, 답을 얻을 수가 없는 거잖아요."
주어진 상황에서 온 힘을 기울인다. 그것이 그녀의 방식이다. 남편, 지선씨도 말한다.
"어떻게 가든, 어떤 과정을 거치던 목적지에 도착할 거니까요."
부부가 덤덤하다. 최근 재은 씨는 공공연맹 노동조합 상근자로 들어갔다. 지선 씨는 노동조합에서 법규부장을 맡고 있다. 싸움이 한창이다. 부부는 최선을 다해 주어진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
이들의 싸움이 오늘(30일)로 고공농성 257일, 현대 본사 앞 농성 70일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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