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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정몽구 하청' 일만 했는데 마지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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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평생 '정몽구 하청' 일만 했는데 마지막은…"

[자동차로 흘러들어온 사람들]<2> 현대차 아산공장 해고자 배동원 씨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가 송전탑 고공농성에 들어간 지 200일 넘었다.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도 노숙농성이 진행 중이다. 그 또한 한 달 째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화'. 길게는 이 문제로 10여 년을 싸워왔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그들의 요구가 현실적인지 아닌지, 그들이 이기적인 집단인지 아닌지를 떠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해온 개개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들이 왜 싸우는지, 대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인지, 아니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들이기에 이러는지.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제각기 걸어온 길을 따라가는 이 글은, 총 6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필자 주

자동차로 흘러들어온 사람들
<1> "지가 싸움은 못해도 불의는 못 참거든요"

ⓒ프레시안(최형락)

정년퇴직을 9개월 남겨두고 해고됐다. 그러니까 그의 나이가… '그'라고 칭하기도 어려운 나이다. 그의 아들이 올해 서른하나인데, 현대본사 앞 농성장에서 같이 먹고 자는 이들 나이가 그쯤 된다. 앞을 지키고 선 용역들은 그보다도 더 어리다.

"아저씨도 이거 하세요"

58년 그의 인생은 이러했다.

"내가 경남 산천 6남매 집 맏이야. 옛날에는 그런 게 있었잖아. 장손은 집을 지켜야 한다고. 집이 뭐 사는 것도 아니면서 옛날에는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25살까지 기술 하나 배운 게 없었어. 농사만 짓고 소만 몰고. 그러다 도시로 나왔는데, 농사철이면 다시 들어가고 이러면서 정착을 못하고 왔다 갔다 한 거지. 그러다 아내를 중매로 만났어. 소 한 마리 팔아가지고 결혼한 거야."

아내와 부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석공 일을 배웠다. 그런데 돌을 갈던 중 그라인더가 터져버렸다. 손이 나갔다. 치료를 하느라, 소 한 마리 팔아 마련한 신혼살림을 다 까먹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긴 싫었다.

"성할 때 나와 가지고 다쳐가 돌아갈 수는 없더라고."

집에 달랑 3마리 있는 소 중 한 마리를 팔아 부산으로 온 게였다. 돌아갈 면목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간 곳이 울산이다. 노가다를 하다 손이 아물 즈음 회사에 들어갔다. 현대중공업 배에 들어가는 전기케이블을 만드는 회사였다. 하청 일이었다. 당시 시급이 590원. 30년 전, 설렁탕 한 그릇 가격이 950원이었다. 형편없는 돈이었지만, 그래도 일했다.

"추석이 됐는데, 반장이 와서 시급을 많이 올려줬데. 내가 일을 잘 해줬지. 그래서 기대를 좀 했는데… 내 일하는 거 보면 100원 정도 올려줄 것 같다 하고 갔는데 30원 올려준 거야. 많이 올려줬다 말을 말던가. 왜 거짓말 하는데…."

자존심 상하고 억울한 마음에 도저히 회사에 있을 수 없었다. 울산 후문에 있는 00정밀이라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몽구 회장과 동문 동창이라는 사장이 운영하는 회사였다. 그곳 월급이 18만 원이었다. 한 달 내내 9시까지 일해도 다른 데서는 15만 원도 못 받았다. 몸 바쳐 일했다. 조장 직책까지 올랐다. 그런데 일이 생겼다.

"그때는 학생들이 와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사라졌어. 학생들하고 2년을 몰래 노동가요 배우고 그러면서 노동조합 준비를 한 거야. 89년에 사람들이 퇴근 시간에 몰래 가가지고 설립 신고를 한 거야. 우리가 그때 진짜 많이 가입했어. 내가 회계감사를 맡고. 그런데 위원장이 회사에서 돈을 받은 거지. 그 사실을 회사 사람이 나한테 알려준 거야. 현대자동차 정문 앞에 있는 아파트 한 채가 500만 원 했을 때였는데, 300만 원을 받은 거야. 내가 2주 동안 위원장을 닦달했어. 돈 받았냐. 위원장은 아니다 깨끗하다 하고.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그러면 노조가 깨질 것 같은 거야."

그가 망설이는 사이, 회사는 다른 조합원들에게 말을 흘렸다.

"그때는 몰랐는데, 회사에서 일부러 그런 거였어. 노동조합 깨지라고. 우리가 노동조합은 살려야겠으니까 위원장 배척하고 대책위를 만들었어. 대책위를 주도해서 세우려 하는데 회사에서 나를 잘라버린 거야."

그 뒤로 울산 바닥에서 일을 못 했다. 이력서를 내면 고개부터 저었다. 노동조합을 만들다 쫓겨난 몸이라는 것을 알고는 받아주지 않았다. 울산에서 현대그룹 그늘을 피하긴 힘들었다. 노가다를 뛰고, 타일 까는 일을 했다. 두 일 모두 계절을 너무 탔다. 다시 이삿짐을 쌌다. 초등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아산으로 왔다. 사슴농사를 할 생각이었다.

"친척이 권해주더라고. 그때는 사슴 피 한 사발에 5만 원 하고 그럴 때였어. 농장 주인한테서 3마리를 받아다가 키웠는데, 외환위기(IMF)가 터진 거야. 농장주가 힘들어하고 눈치도 보이기에 5마리를 사가지고 독립을 했어. 그런데 이번에는 건강 열풍이 불어서, 사슴피 이런 게 혐오음식이 된 거야. 모 박사라는 사람이 TV에서 '동물 피에 독 있다' 이래버린 거야. 그 뒤로 안 팔려. 나는 그때 TV가, 언론이 무섭다는 걸 처음 알았어."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취직했다. 작은 안료공장에서 일하다 아는 사람 소개로 자동차 공장에 들어가게 됐다. 처음에는 정규직인줄만 알고, 손이 다친 적 있는데 괜찮겠냐고 묻기까지 했다. 순진했다. 가서 보니 "아, 이게 비정규직이구나" 싶었다.

하청업체 조반장에 원청 정규직 노동자, 원청 조반장까지 다 머리 위에 이고 살아야 하는 게 하청노동자였다. 나이가 오십에 가까웠던 그도 정규직 노동자가 내뱉는 욕을 못 들은 척 해야 했다.

2003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은 그랬다.

"조반장부터 정규직까지, 다 괜히 비정규직 겁주고, 그러니까 비정규직은 괜히 주눅이 들어가 있어. 그런데 이제는 아니야. 이제는 비정규직도 정규직한테 대들고 그래. 정규직이 뭐라 하면, '나가서 보자' 그래. 뭐 지금도 비조합원은 그리 대들지는 못 하지."

노동조합이 생긴 이후 점차 변한 게였다. 아들 뻘 되는 젊은 애들이 와서 "아저씨도 이거 하세요" 했다. 그게 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은 필요한 거거든"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그가 있는 업체가 조합 가입률이 제일 높았다. 그 책임을 물어 하청업체 사장이 잘렸다. 그러니까 하청업체 사장 자리는 원청이 마음에 안 들면 잘라버릴 수도 있는 그런 자리였다. 도급이니, 독립성이니 그런 것은 다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그 다음 현대차에서 과장이라는 사람이 와서 사장을 하다가 그만두고 다른 업체에서 사장이었던 사람이 왔어. 사장이 새로 왔는데, 고용승계를 못 해주겠다는 거야."

업체도 설비도 직원도 업무도 아무것도 변한 것이 사장 하나 달라졌을 뿐이데, 업체 전환이라고 했다. 고용승계까지 못한다고 했다. 근속을 인정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일하는 데, 오늘부터 다시 입사 첫 날이란다. 납득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는 못 한다고 했다. 그러자 회사는 나가라 했다.

불법파견 판정 때문이었다. 도급이라 우겨보아도 법에서 속속 불법파견 판정이 났다. 불법파견했으니 2년 이상 일한 자는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했다. 회사는 혹여 법을 지켜야 하는 그때를 대비해 2년 이상 근무자를 만들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고용승계를 못한다 했다.

"우리는 일하러 들어간다고 했어. 시무식 하고 며칠 뒤에 우리가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갔지. 공장에 들어가는 문이 양 팔 길이 정도 됐는데, 문 앞에 용역 200명이 넘게 지키고 있는 거야. 들어갈 수가 없지. 공장을 빙빙 돌다가 뒷문이 조금 열려 있는 걸 본 거야. 거기로 잽싸게 뛰어들어가서 라인을 잡았어. 그것도 6시간."

아산 공장에서 그리 라인을 오래 멈췄던 적이 없다며 그는 신나했다. 하지만 그 6시간 후 아들뻘 되는 용역들에게 사정없이 얻어맞았다. 용역들이 공장에 들어왔는데 얼굴이 불콰하고 눈이 희번득 거렸다. 회사에서 용역들에게 술을 먹여 들여보낸 거였다. 만취 상태의 용역들은 인정사정없었다.

"다 맞았지. 새끼들, 술 막 취해서 들어왔으니 나이가 적고 많고가 문제가 아니야. 현대 놈들은 무조건 패는 거야, 우리를."

그래도 열심히 싸웠다. 차체 틈을 막는데 사용하는 오일실러를 모아 준비해 두었다. 용역들이 들어오자, 오일실러를 던져버렸다. 실리콘처럼 끈적끈적한 그것이 용역들의 몸에 달라붙었다. 소화기까지 터트리며 버티었지만, 그래도 수적 열세를 어쩔 수가 없었다.

쫓겨나 공장 앞에서 농성했다. 결국 회사도 반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한 걸음은 아니었다. 근속은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근속수당이 사라진 만큼 시급을 올려준다고 했다. 회사에서 편법을 쓴 것이다. 회사는 죽어도 2년 이상 근무한 하청노동자를 만들려하지 않았다. 그의 뒤에 들어온 신입들은 6개월, 1년짜리 계약서를 쓰고 들어왔다.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더는 어쩔 수가 없어 계약서를 다시 썼다. 1년 차 노동자가 되었다.

그 후로도 싸움은 계속됐다. 2010년 대법원의 불법파견 인정 판결로 인해 공장 안 열기는 커져갔다. 그에 따라 징계 해고자도 늘어갔다. 그 또한 3개월 감봉 징계를 당했다. 이미 그에 앞서 해고자들이 수두룩했다. 그가 일하는 업체 A조에 해고되지 않은 이는 고작 8명. 그 8명을 사장이 불렀다. 면담을 하자는 게였다. 면담 내용이야 뻔했다. 노동조합 활동 안 하겠다고 약속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모여서 상의를 한 게, 면담 거부하자. 얼마 안 남은 사람 회유하기 위한 거니까 가지 말자. 이미 우리랑 같이 싸운 사람들도 다 해고됐는데, 우리만 살자고 그러지 말자. 면담 거부해버리니까, 그 이튿날 아침에 야간 일하고 라인을 벗어나는 순간 노란 봉투를 주더라. 그게 해고통지서인 거야. 들여다보지도 않고 던지고 나왔지. 그때가 정년 9개월 남았을 때였어."

그래서 말년이 고생이다. 서울까지 올라와 매연 많은 거리에서 쪽잠 자며 농성한다. 나는 의문했다. 노동조합 활동으로 블랙리스트까지 올라본 그가 왜 또 노동조합에 가입했을까.

"원래 막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노동조합은 필요한 거거든. 해봤으니까, 아는 거지. 뭐가 바뀌는지 알거든."

시급이 오르고 복지가 나아졌다. 그보다 중요한 변화는 더는 반장이 하는 욕, 정규직이 하는 반말을 묵묵히 듣고 있지 않게 됐다는 게였다. 같이 욕했다.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대응했다. 가만히만 있었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성과다.

어느 부모와 다를 것 없는 그가 싸우는 오늘

그의 늙은 아내는 이 싸움을 반대하지 않는단다. 평생 애썼다고, 이제는 당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라고 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거 하기 위해 서울 양재동에 올라왔다. 그가 올려다보는 현대 건물 어디쯤에 있을 정몽구 회장과 면담 한 번 하겠다고. 아니 불법파견 사용하여 법을 어긴 정몽구 잡아가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이리 정리했다.

"평생 정몽구 하청 일만 했지."

인생의 마지막은 정몽구 하청이 아니길 바라며, 그는 정직원 정년퇴임 나이를 세어본다.

나는 그의 한평생을 일만 한 삶이라 정리했다. 그러자 그가 되물었다.

"부모들 중에 안 그런 사람 있나?"

어느 부모와 다를 것 없는 그가 싸우는 오늘, 울산 송전탑 고공농성 222일, 현대 본사 앞 농성 36일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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