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탄압을 딛고 진실의 문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적잖은 현대사의 실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 이들 중 두 사람이 2013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난다. 서울대 국사학과 동문인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와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다. 서 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히며, 진보적 역사 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안 교수는 30년 넘게 한국사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한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 전문가다.
<프레시안>은 안 교수와 서 교수를 11일과 13일 차례로 만났다. 올해 들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역사 관련 사안들에 대한 견해와 퇴임 이후 계획을 들었다.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각각 2차례씩, 모두 4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아래는 서 교수 인터뷰 뒷부분이다. <편집자>
강단 떠나는 두 역사학자 [안병욱 ①] "일베-뉴라이트-<조선>은 이어져 있다" [안병욱 ②] "남로당식 사관? <조선>, 흉기 들고 난동" [서중석 ①]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프레시안 : 한국현대사학회 인사가 참여한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도 있었다. 한국현대사학회 측은 자신들이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서중석 : 뉴라이트가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다. 한국현대사학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뉴라이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공자만 교과서를 써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학회의 구성원들 중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가 거의 안 보이는 것도 문제다.
그리고 좀 이상한 게, 한국현대사학회 쪽에서 뭘 한다고 하면 어느 한 신문(<조선일보>)이 참 많이 다뤄주는 거다. 그러면서 지금 통용되는 교과서가 좌파적이라는 식으로 몰고 가더라. <조선일보>는 그걸(한국현대사학회 쪽 주장) 상당히 비중 있게 보도하더니만, '남로당식 사관, 아직도 중학생들 머릿속에 집어넣다니'라는 제목의 사설까지 실어가면서 (채택된) 교과서의 90퍼센트를 좌파가 만들었다는 식으로 몰아세웠다.
이건 (1980년) 5.18 때 북한에서 특공대 600명이 내려와 전남도청을 점령했다는 것에 못지않은 엉터리 주장이다.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가 남로당식 사관으로 돼 있고 집필자 대부분이 좌파라면, 그런 역사 교과서가 어떻게 이 정부에서 통용될 수 있겠나. 더군다나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정한 건) 이명박 정부이고, 지금은 박근혜 정부 아닌가. 너무나도 모순된 이야기가 아닌가. 간단히 얘기해서, <조선일보> 논리대로라면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정부라는 비난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걸 가르치는 교사들은 뭐가 되며 그걸 배운 학생들도 색깔론으로 뒤집어씌울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불성설도 아니고 황당무계도 아니고 지록위마도 아니고 참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백주대낮에 어떻게 그런 발언을 할 수가 있는 건지…. 상상하기 어려운 폭거다. 테러 행위다. 도대체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험악하게 됐는가. 이렇게까지 막말로, 정략적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면 무슨 소리든 쏟아부으면서 몰아쳐도 되는 건가.
정말 이건 분노 정도가 아니더라. 남로당이라는 게 우리 역사에서 한 번 있었지만 1953년 이후엔 조직적으로 활동한 적이 거의 없다. (반공 체제가 느슨해지는) 4.19 이후에도 그 사람들 안 나온다. 1953년 이후 사라진 걸로 봐야 한다. 그런 건데, 상대방을 정략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쓰다니 참…. 그것도 '한국현대사학회 발표에 의하면' 같은 식으로 표현하던데, 책임을 모면하려는 <조선일보>의 얕은 수작이다.
한국현대사학회 쪽에서 만든 교과서가 검정 심의를 통과했다. 최종 통과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고치는 문제만 있을 뿐이다. (<조선일보>에서) 이 교과서를 옹호하기 위해 그런 (사설을 내보낸) 것으로 보인다. 1차 목표는 그것이고, 2차적으로는 극우 반공 시대의 퇴행적 이데올로기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1995년 이후 그걸 살리는 작업을 그 신문에서 계속 해오지 않았나.
▲ 서중석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조선>의 폭거…그들 논리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정부"
프레시안 : 일등 신문을 자처하는 곳에서 그러는 걸 계속 봐야 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서중석 : 그런 표현을 쓰는 게 난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이건 냉전 시대에도 없었던 거다. 그런데 요 근래 곳곳에서 굉장히 험악한 말들을 쓰고 있다. 일베도 그렇고. 수십 년에 걸친 민주화 운동과 6월항쟁을 통해 개방과 민주화 시대로, 기본권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는 시대로 왔는데 그렇게 험악한 식으로 가는 건 그걸 무위로 돌아가게 하는 것인 듯해 걱정이 된다. 정신적인 사막성, 황량함이 만연하면 사회의 좌표,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그야말로 냉소밖에 남지 않게 된다. <황야의 무법자> 같은 영화에 나오는 식의 인간 세계인 거다.
그것(정신적인 황량함을 부추기는 보도)을 언론에서 공공연하게 하고 있다. 종편들에서 광주항쟁을 음해하고 중상모략을 일삼았다. 수십 년간 무슨 문제만 있으면 북한 소행으로 떠넘기려는 알레르기 반응을 노린 것이다. '남로당식 사관' 이것도 그런 걸 노린 면이 한편으로 있다. 어느 사회에나 해서는 안 될 발언이라는 게 있는 건데….
프레시안 : 개인적으로 놀란 적이 있다. 학생 운동을 하고 진보적 언론에서 일하는 한 후배가 '5.18 때 북한군 600명은 말도 안 되지만 그래도 몇 명은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해 놀랐다. 이 정도 친구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걸 보며, 정말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중석 : 우리 사회에서 길들여진 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다. 권력이 노동 운동, 사회 운동 세력 등을 두들겨 팰 때 즐겨 쓴 것이 '여기에 좌경 용공 세력이 들어와 있다', '북한과 관련이 있다' 같은 것들이었다.
(1960년) 4월혁명 때도 그랬다. 3.15의거가 마산에서 나자마자 경찰은 총에 맞아 죽어 병원에 안치된 시신의 호주머니에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이런 일을 일으킨 것처럼 하는 내용의 쪽지를 써넣었다. (김주열의 주검이 떠오른 것을 계기로) 제2차 마산 항쟁이 4월 11일부터 발생하니까 내무부 장관 홍진기는 "마산 소요에 5열(간첩) 개재(介在)의 혐의가 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이다, 공산당 선전에 속아서 '마산 폭동'이 일어났다는 특별 담화를 연속 발표했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염색이 된 사람은 '대통령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면 뭔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다. 바로 그걸 노린 거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이 4월혁명의 배후라는 주장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당시 북한은 남한에서 그런 게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아연하기만 했다. 미 제국주의의 속국으로만 한국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절대 권력을 누린다는 식으로만 가르쳤는데, 아 그렇게 큰 시위를 하니까 깜짝 놀라고 아연하기만 한 것이었다. 처음엔 대응을 못했다.
그런데도 권력자들은 '공산당이 뒤에 있다'고 조작하려 했다. 그 이후에도 권력은 그런 식으로 많이 대응했다. 그게 수십 년간 쌓이다 보니까, '뭔가 있으면 공산당만 대면 된다'는 일종의 자동 반응 같은 게 생긴 거다.
1980년 광주에서 그런 큰 시위가 일어나는데 공산당 간첩이 올 리도 만무하고 있을 수도 없는 거다. 그렇게까지 허술한 대한민국이 절대로 아니었다. 우리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에 반공과 방첩 갖고 산 나라 아닌가. 나도 (등산하러) 산에 올라가다가 2번인가 끌려가고 그랬다. 간첩일지도 모른다며. (웃음) 한국은 그런 사회였다. 그러니까 (5.18 때 북한군 600명 투입 같은 건) 눈곱만큼도 있을 가능성이 없다.
그렇거니와 수만 명, 수십 만 명이 궐기해 사납기 짝이 없는 공수 부대까지 몰아낸 것 아닌가. 그런 일이 간첩 몇 명 있다고 될 일인가. 간첩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왜 광주에서 그런 큰 분노가 일어나서 특수 훈련을 받은 공수여단 두 개하고 특별 사단인 20사단을 도시에서 나가게 했느냐,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이다.
당시 계엄사령부에서 '배후에 불순 세력이 있다. 모종의 사주가 있었음을 밝혀냈다'는 식으로 발표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걸 구체화할 자료를 내놓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이 광주학살 때문에 나중에 얼마나 크게 추궁을 당하나. 그런 상황에서 간첩 하나라도 광주항쟁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만 있으면 (그들에게) 얼마나 좋은 재료가 됐겠나. '우리가 걱정한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군대를 투입한 거다. 진압 우선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그런데도 끝내 못 잡았다. 자신들이 발표한 게 허위임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완전히 물 건너간 거였다.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기 전에 이미 그랬다. 그러면서 광주의 진실이 밝혀진 것 아닌가.
프레시안 : 사실이 그러한데도 이제 와서 북한군 600명을 운운하고 있다.
서중석 : 10주년 때도, 20주년 때도 안 나왔는데 33주년인 올해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나타난 것이다. 특수한 정치적 목적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한다.
민주화에 대한 이중적 태도…한 손으로는 폄훼하고 다른 손으로는 편승하고
프레시안 : 저들은 민주화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같다. 하나는 5.18 왜곡처럼 어떻게든 폄훼하려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박효종 서울대 교수처럼 "6.10항쟁 못지않게 6.29선언도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일부 여당 인사들이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이 민주주의를 만들어온 중심 세력이었다",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한나라당에 있다"고 강변하는 흐름이다. '산업화는 당연히 우리 것, 민주화도 알고 보면 우리 것'이라는 식이다. (관련 기사 : 새누리당과 뉴라이트의 '6월항쟁 탈취' 사건)
서중석 : 양 박자다. 조화를 이루며 같이 음을 내는 건데, 어느 것이나 터무니없는 거다. (6월항쟁을 살펴보면 1987년) 6월 10일 명동성당 농성 투쟁과 넥타이 부대의 시위, 그리고 15일부터 대규모 시위, 18일에 최루탄 추방 대회가 이어지며 점점 (규모가) 커지고 26일에 대규모 평화 행진의 날을 맞이해 그렇게 큰 시위가 안 일어났으면 6월항쟁이 있을 수가 없었다. 6.29가 일어나는 과정도 기록을 통해 검토해보면, 25일에서야 박철언이 초안을 한 번 잡아본 거고 27일 저녁 무렵 노태우와 박철언이 5시간 걸려 6.29선언 발표 내용을 만들어낸 거다. 6.26이 아니었으면 6.29는 안 나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굴복이었다. '이젠 버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단순한 굴복은 아니었다. (5공 세력이) 민주화 쪽으로 선회한 것처럼 위장하는 양면 구사 작전으로 6.29를 했던 거다. 사실 6.29 자체는 1972년 (유신)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들여다보면 직선제 하나 빼놓고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1972년 이전에 있던 정도의 언론 자유를 있게 하겠다는 정도였다. 그런 건데, 워낙 극악한 통치를 유신 체제와 전두환 신군부가 했기 때문에 6.29가 돋보인 거다. 그런데 그것처럼 난센스가 없다. 순전히 투쟁에 의해 그런 것 아니었나.
문제는 6월항쟁을 6월항쟁 세대조차 잘 모른다는 것이다. 6월항쟁을 잘 알수록 힘이 나고 민주주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이 생기고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강한 전망과 믿음이 생길 수가 있는 건데, 그런 공부를 안 하려고 한다.
1995년부터 낡은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계속 이야기하는 건데, 진보 세력이 제대로 공부를 안 한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음해와 중상모략은 쉽게 공박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유신 체제와 전두환 정권의 후신인) 우리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느니 6.29선언은 참 대담한 민주화 구상이었다느니 하는 것들에 대해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고 궁색한 변명인가를 공박하는 지적인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승만을 띄우는 쪽에서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인데 그렇게 폄하해서 쓰냐. 어쨌든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이니 그걸 인정해주자', 이렇게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다. 한 친구는 그러더라. 그런 말도 일리는 있다고 느껴진다고.
▲ 이승만 전 대통령. ⓒ연합뉴스 |
"건국 대통령 이승만? 비약이다"
프레시안 : 지난 10여 년 사이에 주변에서 그런 반응이 늘어난 게 사실이다.
서중석 : 엄청난 문제다. (해방 공간에서) 남북 협상 세력이라고 불린 이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이 단정 운동 세력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 그들을 어떻게 비판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얼마나 가슴 아픈 분단이었나. 단정 운동이라는 게 친일파가 중심이 됐다는 것도 세상이 다 아는 일 아닌가.
(1948년) 5.10선거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사람들, 난 인정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한다. 북한에 가서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분들, 평생을 독립 운동에 바친 김구·김규식 같은 이들의 노력은 또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만 현실은 현실대로 인정해서 5.10선거에 참여해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려는 노력은 해야 하는 거다. 그런 자리에 친일파 등이 등장해 나쁜 짓을 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5.10선거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5.10선거를 통해 훌륭한 제헌 국회가 만들어졌다. 소장파 전성시대가 있었고, 좋은 헌법을 만들었고,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법을 바로 통과시켰고, 농지개혁법도 처음엔 꽤 좋게 만들었다.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아 그렇게 한 것이다. 그게 이승만 세력, 단정 세력을 놀라게 한 것이고 그래서 반동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나고,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일어나고, 김구 암살까지 (1949년) 6월 공세가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승만이 건국한 건가? 1919년에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만들었나? 임시정부에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을 뽑은 걸로만 돼 있지 않나. 5.10선거도 이승만이 실시한 게 결코 아니다. 유엔 소총회 결의에 따라 미군정에서 한 것이다. 이승만은 동대문갑에 입후보한 것 빼놓고는 직접적으로 한 게 없다. 독립 운동을 해서 건국한 것과는 전혀 다른 거다.
또 5.10선거에서 부정 선거 이야기가 제일 많이 들린 게 동대문갑 아닌가. 최능진(경무부 수사국장이었으나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하다가 파면됐다. 이승만에게 맞서다 한국전쟁 때 총살됐다. <편집자>)과 싸웠는데, 얼마나 비겁하게 했나. 5.10선거를 제일 추하게 만든 지역구 중 하나가 동대문갑이었다. 그런 걸 따지더라도 '이승만이 건국 대통령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비약이다.
그리고 4월혁명 51주년(2011년)에 보수 언론에서 '4월혁명 정신과 이승만 건국 정신은 같다'는 이야기를 내보냈다. 그해에 이승만 대통령 양아들과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에서 4.19 묘지를 참배한다고 하면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나.
4월혁명 정신은 이승만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승만의 부정부패와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일어선 것이 4월혁명 정신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단정 운동에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한국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었나? 해방의 정신, 민주주의와 인권의 정신 같은 게 들어 있었나? 권력을 잡겠다는 욕심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모른다. 진보 세력은 또 공부를 안 한다. 이러니 수구 세력이 맘 놓고 공격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남로당식 사관"이라는 사설 제목을 뽑아도 그렇게 큰 공격을 안 당할 거다, 이렇게까지 생각해도 될 만큼 진보 세력이 대응을 제대로 못한다는 걸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프레시안 : 패턴인 것 같다. 한국현대사학회나 뉴라이트 단체 같은 데서 주장하면 <조선일보> 등에서 크게 실어주고, 그 과정을 몇 년 거치면 상식처럼 퍼지는 식이다. 몇 년 전, 뉴라이트 시각을 담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 나왔을 때도 진보 세력은 정면 대응을 하기보다는 대체로 무시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면서 더 확산된 것 같다.
서중석 : 그렇다. 그때 <조선일보>가 <재인식> 나오기 몇 달 전부터 엄청나게 보도하더니만, <재인식>이 나오자 여러 면을 털어 아주 크게 다뤘다. 세상에, <한성순보>(1883년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 이래 신문이 한 책을 그런 식으로 소개하는 건 처음 봤다. 어지간한 신문은 대충이라도 다 훑어봤는데, 그렇게 하는 건 본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학술면 한 페이지 할애해주면 좋은 거고, 정치면 같은 데서 박스 기사 하나 더 내주면 최고 대접 해주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진보 언론 등에서) 제대로 대응을 못 했다.
"근현대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수구 세력에 제대로 대응해야"
프레시안 : 그런 게 쌓이면서 20년 가까이 오다 보니 지형이 이상한 방향으로 바뀐 것 같다.
서중석 : 그렇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에서 희망이 잘 안 보이지 않나. 그러니까 (사람들이) 험악한 분위기와 언사에 익숙해지고 그것에 마비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호흡이 너무 짧다. 장기적인 안목을 갖추고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세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 근현대사를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너무 표피적이고 단견이다.
(예컨대) 1970-1980년대에 나와 한때 가까웠던 김지하나 황석영은 참 재주꾼이고 시나 소설에서 훌륭한 것들이 많은 사람들인데, 나중에 많이 바뀌더라. 그걸 보며 내가 제일 크게 느낀 건 지적 엘리트조차 자기 자신의 역사, 문화, 민중에 뿌리를 깊이 못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시적인 재주만 발휘가 된 것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분위기를 타는 면이 강하지, 깊이 뿌리를 내려서 일을 해나가는 면은 약한 것 같다. NL이 인기다 하면 그쪽으로 몰렸다가 그다음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인기다 하면 다시 저쪽으로 쫙 몰리는 쏠림 현상이 강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이 보인 강한 정의감 같은 것도 (여전히) 많이 있다. '우리 사회는 희망만 보이면 바로 정의, 진보, 민주주의, 인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낙관주의랄까 기대도 많이 갖게 된다.
난 현대사를 하면서 절망과 희망의 희비쌍곡선이 교차하는 식으로 살아왔는데, 6월항쟁 이후 희망이 훨씬 커졌다. 물론 6월항쟁 이후에도 절망적인 게 많았고 요 근래 와서는 너무 표피적인 게 많이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이만큼 대견한 역사를 만들어온 힘에 상당히 큰 믿음과 희망을 갖고 있다. 난 그걸 역사의 힘, 민중의 힘, 우리 전체의 역량으로 표현한다.
▲ 1987년 7월 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구름처럼 모여든 시민들. 질식당한 민주공화국을 되살린 6월항쟁의 주역은 바로 이들이었다. ⓒ연합뉴스 |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속에서도 대견한 역사를 만든 민중, 그 힘을 믿는다"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정년 퇴임을 맞는 소회와 퇴임 후 계획이 궁금하다.
서중석 : 담담하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적극적으로 살고 공부 열심히 해서 수구 냉전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만연하지 않도록 분발해야 한다. 조금 전 이야기한 그런 믿음을 갖고.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무실 하나를 물색해 놨다. 책의 상당 부분은 연변대학에 기증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남은 책은 새 사무실로 옮긴다. 생활엔 거의 변화가 없을 거다. 출근해서 연구하고 점심 후 뒷산을 산보하다가 다시 연구하는 생활일 거다.
학술적으로 기여하는 작업을 제외하면 가급적 사회 문제에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다.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활동은 계속할 계획이다. 일본 교과서와 10여 년간 싸워오지 않았나. 그런데 이젠 한국 내의 극우 성향 교과서와도 싸우게 됐으니 (지형이) 훨씬 더 복잡하게 돼버렸다. 할 일이 더 많아졌다. 부담이 된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위원장도 맡고 있다. 하필 내가 맡았을 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고, 그 정권이 (우리가) 할 일이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남북 간에 너무 심한 역사 인식의 차이를 어떻게든 좁히고 교류의 폭을 넓히고 나아가 통일을 전망하는 데 학술적으로 기여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작년에 유신 40주년을 맞아 유신 관련 발표를 2번 했(고 앞으로도 계속 연구할 생각이)다. 4월혁명은 내가 꼬맹이 때부터 관심이 큰 주제이고, 발표를 많이 해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방대한 4월혁명 사료집을 내는 작업을 편집위원장으로서 주도해왔는데, 그 일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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