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 그건…."
나이가 들어도 못된 습성은 변하질 않는다. 벌써 3년째. 파업과 해고, 징계, 폭행, 고소·고발, 가압류에 시달리면서도 "모든 사내 하청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며 싸우고 있는 현대차 비정규직 평조합원 몇몇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어쩌면 쓰린 가슴에 염장을 지르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숱한 고통을 감내하며 고생해온 이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는데, 투쟁에 동참하지 않은 비조합원들은 대부분 입사원서를 쓰고 그중 일부는 정규직으로 채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입사원서를 앞에 두고
"비정규직지회에서 신규 채용 반대하잖아요. 그러면 써선 안 되죠. 그리고 우리가 입사원서 쓴다한들 지금까지 투쟁해온 걸 회사도 뻔히 아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 뽑아주기나 하겠어요?"
예상하지 못했던 답은 아니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비슷한 심정이리라. 하지만 한번 발동을 시작한 못된 습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가지만 묻는다 해놓고 하나 더.
"그러면 말이야. 비정규직지회에서 입사원서 쓰지 말라는 얘기를 하지 않으면? 그리고 너희 같은 조합원들도 채용될 가능성이 보이면 어떻게 할래? 그래도 원서 안 쓰고 버틸 거니?"
"그건…."
이런 '돌직구'를 던지다니 나도 참 못됐다. 뭐라고 답을 하려다가 속으로 삼키고선 입을 다문다. 이런…. 내가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어렵게 버티고 있는 친구들에게 악마의 속삭임을 불어넣고 있는 것 아닌가.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안 쓸 것 같아요. 저 혼자 정규직 되려고 시작한 싸움 아닙니다."
"맞아요. 그렇게 정규직 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아요."
뭐라? 신규 채용에 합격할 가능성이 눈에 보여도 입사원서를 쓰지 않을 것 같다고?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다. 노조 간부들이라면 모범 답안처럼 "신규 채용에 응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란 건조한 얘기를 했을 텐데, 평조합원들 입에서 이런 얘기를 듣게 될 줄이야….
▲ 최병승 씨와 천의봉 씨가 불법 파견 시정을 요구하며 현대차 울산공장 앞 철탑에서 고공 농성을 하고 있다. 철탑에 오른 지 200일이 넘었지만,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라는 이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나 혼자 정규직 되려고 시작한 것 아니다!"
이 대화는 올해 초에 나눴던 얘기이다. 현대차는 끝내 불법 파견을 인정하지 않고 신규 채용 절차를 강행했다. 작년 말에 신규 채용 공고를 냈다가 정규직·비정규직 노조의 강한 항의가 이어지자 잠시 보류하긴 했지만, 올해 초에 이마저 무시한 채 강행해 버린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 차례 신규 채용 절차가 끝난 것처럼 보였는데 3월에 규모를 늘려서 두 번째 신규 채용을 실시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사내 하청 노동자들만을 대상으로 입사원서를 받아서 총 798명을 채용했다.
그런데 또! 지난 5월 2일부터 300명을 추가로 뽑는다는 공고를 냈다. 올해 말까지 1750명을 채울 것이라 하니, 이번에 3차로 뽑는 300명을 제외하고도 하반기에 650여 명을 더 채용한다는 얘기이다. 이 인원 역시 아마도 2~3차례에 나눠서 찔끔찔끔 채용 절차를 진행할 것임에 틀림없다.
올해 말까지 1750명을 채용한다는 계획이 서 있다면 한꺼번에 다 뽑으면 되지 왜 5~6차례에 나누어 200~300명씩 뽑는 것일까? 그것은 현대차 자본이 신규 채용을 통해 비정규직지회를 무너뜨리려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교섭에서 안을 제시했는데 노조가 수용하지 않으면 200명 신규 채용 공고를 통해 조직을 흔든다.
현대차 자본이 노리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조합원들로 하여금 입사원서를 쓰도록 만드는 것이다. "노조 믿고 대들어 봐야 너만 손해다. 회사 믿고 입사원서 쓰면 선처해 줄게"라는 메시지이다. 그래도 버티면 다시 교섭을 하는 척하다가 또다시 300명 신규 채용 공고를 낸다. 또 버티면 이런 절차를 또 밟는다. 그야말로 '말려 죽이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까지 3차례나 진행된 신규 채용에서 회사는 아직 재미를 보지 못했다. 울산·아산·전주의 2000명 가까운 비정규직 조합원들 중 입사원서를 낸 것은 10% 남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조합원들은 왜 신규 채용을 거부하는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실마리가 앞선 대화에 등장한다. "나 혼자 정규직 되려고 시작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정규직 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내 한 몸 건사하려면 구차해지지만
현대차 자본이 정규직노조도 반대하는 신규 채용을 강행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눈엣가시 같은 비정규직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비조합원이 얼마나 신규 채용에 응하느냐 하는 데에 큰 관심이 없다. 조합원들을 무너뜨려서 신규 채용 원서를 쓰도록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심지어 몇몇 조합원들에게는 직접 전화를 해서 "직접 원서 쓰지 않아도 채용에 응하겠다는 의사만 확인되면 접수를 해드리겠다"는 친절한(?) 작업까지 해댄다.
이런 작업은 정리해고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자본 측은 정리해고 이전에 '희망퇴직'을 대대적으로 받으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엄밀히 얘기하면 이럴 때 사용되는 희망퇴직은 '정리해고를 회피하려는 수단'과는 거리가 멀다. 최대한 희망퇴직 규모를 늘림으로써,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려는 노동자들의 심리를 무너뜨리고 위축시키려는 것이다. "자, 네 동료들 다수가 희망퇴직으로 나갔다. 아무리 싸워봐야 전망은 없다. 그러니 포기해라."
난다 긴다 하는 현장 활동가들, 내로라하는 전투적 간부들이라 할지라도 '희망퇴직 원서'를 앞에 놓고 고민 한번 안 해본 이들이 있을까? 모두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현대차 비정규직 평조합원들 역시 신규 채용 원서를 앞에 놓고 한두 번쯤은 "에이, 그냥 써버릴까?"를 고민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이 싸움에 나 혼자만이 아니라 더 많은 노동자들의 이해가 함께 걸려 있다는 점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내 한 몸 건사하려면 구차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이 사안에 동료들을 비롯해 같은 처지의 수만 명 노동자의 생존권이 달려 있다는 점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그만큼 강한 책임감이 생긴다. 해고와 구속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날 때부터 '투사의 DNA'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 혼자 잘되려고 시작한 싸움이 아니기에 긴 세월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이나 쌍용차 투쟁에 연대하는 이들 모두 바로 이 지점 때문에 함께하려 한다. 만일 이들이 자신들 정규직 되는 문제에만, 혹은 자신들에 대한 정리해고가 철회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면, 과연 어느 누가 이들의 투쟁에 연대하려 하겠는가?
현대차 자본은 바로 이 지점을 오판했다. 신규 채용을 몇 차례에 나누어 하며 말려 죽이기를 시도하면, 조직력이 와해되며 평조합원들이 입사원서를 쓸 것으로 봤던 것이다. 돈과 권력이면 뭐든지 가능하다고 믿는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전적으로 옳은 판단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평조합원들이기에, 수많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90% 가까이 원서 작성을 거부하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처음부터 제기했던 슬로건인 "모든 사내 하청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요구가 바로 그런 세계관을 대표한다. 근속 2년을 넘었건 그렇지 않건, 불법 파견으로 판정이 되건 그렇지 않건, 1차 사내 하청이냐 2·3차 사내 하청이냐를 묻지 않고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나 혼자 정규직 되려고 시작한 싸움이 아니"라는 말을 가장 쉽게 표현한 요구이다. 이 정신이 무너지지 않는 한 신규 채용으로 민주노조를 무너뜨리려는 자본의 꼼수는 당분간 통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차 비정규직 4.2년차 기본급 138만 원, 연봉 5400만 원?
이런 현실을 현대차 자본이 인식한 것인지, 최근에는 공격 방향을 좀 바꾸기 시작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액 연봉을 받고 있다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시작한 것이다. "사회적 약자라는 현대차 사내 하청 근로자…평균 연봉 5400만 원"(<한국경제> 5월 15일 자)
일부 언론사들이 보도하는 이 내용은 작년 10월 30일, 현대자동차 사측이 언론사에 배포한 "사내 하청 참고자료"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베껴 쓰는 수준이다. 그 자료에서 현대차 자본은 근속 4.2년차 비정규직의 임금을 아래와 같이 공개한 바 있다.
이런 종류의 저열한 공세에 일일이 대응해야 할까 의문이 들긴 하지만, 최근 통상임금과 최저임금 문제를 비롯해 임금 체계 전반이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른 바 있으니 몇 가지 내용을 다뤄보도록 하겠다. 일단 현대차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따져보자.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턱없이 낮은 기본급'이다. 월 평균 임금(453만 원) 대비 기본급(138만 원) 비중은 30.46%에 불과하다. 그럼 나머지 임금은 어떻게 보충되는 것일까? '비고'란에 적혀 있다. 한 달에 휴일 특근을 2회씩 하고, 하루 8시간이 아니라 10시간 노동으로 주야 맞교대를 돈다는 것. 즉 70% 가까운 임금이 잔업과 특근 등 초장시간 노동과 상여금으로 채워진다.
하루 8시간, 주 40시간 노동만 해서 벌어들이는 임금은 138만 원에 불과하다. 세금과 4대 보험료를 떼면 120만 원 밑으로 떨어질 것이다. 최근 불거진 통상임금 논란에 비추어 봤을 때, 한국의 제조업 노동자들 기본급이 밑바닥 수준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럼 근속 4.2년차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 즉 시급은 얼마나 될까? 계산식은 간단하다. 기본급을 월 소정근로시간 240으로 나누면 된다. 보통 주 40시간제 하에서 월 소정근로시간은 226으로 계산하지만, 현대차의 경우 토요일을 유급으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240으로 나눠야 기본 시급이 나온다.
기본급 1380339 ÷ 월 240시간 ≒ 5751, 즉 근속 4.2년차 비정규직의 시급은 5751원으로 법정 최저임금 4860원보다 고작 891원 높은 수준이다. 지난해 임금 인상 이전의 시급은 5343원으로, 작년 최저임금 4580원에 비해 763원 높은 수준이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임금 총액이다. 작년 임금 인상이 이뤄진 뒤에 근속 4.2년차, 그러니까 2008년에 사내 하청으로 입사한 노동자들의 총 연봉이 5438만 원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증거'를 들이밀어야 한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실제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명세서를 보여주는 것이다.
본래 이런 자료를 공개할 때에는 신원을 지우는 것이 관례이지만, 증거의 진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당사자의 양해를 얻어 실명으로 날것의 급여명세서를 공개한다. 위 명세서에 나온 노동자는 2004년 8월 25일에 현대차 아산공장 엔진부의 사내 하청 업체에 입사했으니, 위 명세서를 받던 시점에는 근속 8년을 넘어 9년차로 들어가던 노동자이다.
현대차 사측이 제시한 표와 정확한 비교를 위해 지난해 8월과 9월 급여명세서를 찍어서 공개한다. 8월은 임금 인상 이전의 임금을 보여주고, 9월은 임금 인상 이후의 임금을 보여준다. 우선 임금 총액에서 현대차 사측이 주장하는 액수와는 큰 차이가 난다. 8월에는 상여금을 받았음에도 각종 세금 공제 후 180여만 원을, 9월에는 상여금이 없어서 150만 원을 수령했다.
이 액수대로 계산기를 두드려 본다면 연봉은 2000만 원 남짓이 된다. 휴가비와 성과급을 고려하더라도 3000만 원을 넘지 않는다. 물론 이 액수는 잔업과 특근을 얼마나 했느냐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난다. 위 명세서의 주인공은 특근을 전혀 하지 않은 사례를 보여준다.
더 분명한 차이는 기본 시급에 있다. 근속 8년이 넘는 노동자의 지난해 8월 시급은 5177원이고 임금 인상 후의 9월 시급은 5585원이다. 아니, 현대차 사측의 주장대로라면 근속 4.2년차 비정규직의 기본 시급이 8월에는 5343원이고 9월에는 5751원 아니었던가! 근속이 4년이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교해 봐도, 현대차 자본이 주장하는 자료가 얼마나 과장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쉽게 말해 '뻥'이라는 것이다.
(*<인사이드 경제> 다음 편에서는 현대차가 사내 하청 제도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짚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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