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영화 <밀양>의 도시, 영남루에서는 행진단과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주민들이 함께 한 촛불문화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강정마을 주민들, 용산참사 유가족, 쌍용자동차 노동자를 비롯한 행진단원들과 그곳 주민들이 백년지기처럼 한 목소리를 냈다. 이미 강동균 강정마을 회장은 지난 4년 동안 송전탑 반대 투쟁을 해온 노인들과 산속 농성장에서 만나고 온 뒤였다. 그는 말했다. "80이 되신 노인들이 산중에서 송전탑 반대한다고 움막 짓고, 겨울을 보내고, 여름을 보내고… 저희 부모님 생각이 나서 와락 눈물이 났습니다."
76만5000킬로볼트의 고압 송전탑은 핵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도시로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그를 위해서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절단 내고 마을 한 복판을 고압 전깃줄이 지나가 동네가 폐허처럼 변하게 되므로 이걸 밀양 주민들은 반대하는 것이다. 그들은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고 한다. "오직 이대로 살다가 죽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는 요구다. 그런데 이대로 살던 대로 사는 일은 얼마나 힘들까? 한전은 공사를 강행하려 하고, 이를 저지하다가 이치우 노인이 분신 자결했다. 그런 뒤 산중 농성장을 9개나 유지하고 있는 게 밀양 주민들이다. 그동안 용역들의 폭행, 고소, 고발, 손배가압류를 다 당했다. 그들은 절규한다. "이 나라가 이렇게 고통을 줍니까."라고.
행진단은 이처럼 고통의 현장을 방문한다. 노동자들이 정리 해고되어 농성하는 공장 앞과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도, 지역의 현안이 있는 투쟁 현장마다 행진단은 가고, 우리 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곳의 그들과 가슴 풀어놓고 얘기한다.
ⓒ이계삼 |
생명평화행진단이 간다
13일 오전에는 합천·창녕보를 가보았다. 보에 물이 새고, 둑이 무너져 내리고, 강바닥은 물살에 패어나가는 세굴현상이 심해서 콘크리트 타설작업을 비롯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더 한심한 일은 9월 14일 홍수 때 잠겼던 보 옆의 고수부지에 만든 미실자연공원이다. 자연공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나무는 말라죽어가고 있었고, 잔디나 풀들이 모두 흙을 이고 있었다. 낙동강이 홍수 때면 범람하는 걸 무시하고 인공 공원을 조성한 탓이다. 어도(魚道)는 더 웃긴다. 물길을 따라 올라온 물고기들이 우회하여서 강으로 가야 하는데, 물고기가 알아볼 안내도나 있을까? 물고기가 꽤나 지능이 좋아져야겠다는 농담을 나누며 그 거짓, 기만의 현장을 보았다.
오후에는 우포늪을 갔는데, 우포늪은 그런대로 잘 보전된 듯했다. 그런데 우리를 안내하던 그곳 환경운동연합 대표는 충격 먹었단다. 철새들이 바글바글할 때인데, 평년보다 개체수가 너무 적어졌다는 것, 아마도 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을 따라 내려오던 철새들이 길을 잃었나보다며 한탄했다.
생명평화행진단은 이렇게 생명과 자연이 파괴되는 곳을 간다. 곳곳이 아픔이고, 절규다. 이미 그들의 삶은 벼랑 끝에 몰려 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절규는 있는데, 목소리를 듣지 않는 세상을 향해 행진단은 함께 외치고 다니는 중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데?
이제 곧 대선이다. 60여일도 남지 않았다. 온통 여론은 유력 후보 3인의 행보와 말에 쏠려 있다. 현장에서 죽어라고 싸우고 있는 절박한 민중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려주지 않는다. 왜 그들 후보들은 강정마을 해군기지가 문제투성이라는 점이 밝혀졌는데도 침묵하는가? 왜 쌍용자동차에서 2646명의 노동자가 해고될 때 회계조작이 있었던 점이 밝혀졌고, 그로 인해 23번째 죽음이 있었다는데도 침묵하는가? 왜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이 다큐 영화로는 기록적인 관객을 동원했는데 침묵하는가?
왜 밀양의 송전탑 투쟁에 대해서는,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는 현대차에 대해서는, 삼성반도체 노동자 57번째 죽음에 대해서는, 고리 핵발전소가 위험천만한 고장을 자주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강원도 골프장 건설로 인해 도청 앞에서 1년 가까이 농성 중인 농민들에 대해서는, 광화문에서 장애인등급제와 부양의무제의 폐지를 외치는 장애인들의 농성에 대해서는, 그리고 곳곳에 농성장을 차리고 장기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문제에는, 지금도 이어지는 초중등학교 학생들의 자살에는, OECD 1위인 자살률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재벌들의 문어발 식 사업 확장으로 골목상권을 위협받는 중소상인들과 납품단가 후려치기로 고통 받는 중소기업인들에 대해서는, 살 길 막막한 농민들의 한숨에 대해서는…왜 침묵하거나 말하더라도 애매모호한 언사만 거듭하고 있는가?
침묵하는 정치? 우리는?
목까지 차오른 분노와 원망을 안고 지금도 싸울 수밖에 없는 민중들을 우리는 곳곳에서 만난다. 제발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고 하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만 이어진다. 사안은 구체적인데 대답은 흐리멍덩하기만 하다. 똑 부러진 답을 내놓아도 믿을까말까 한데 왜 분명하게 잘못된 건 잘못되었으니 반드시 고치겠다는 그런 속 시원한 답을 못하는가 말이다. 급기야는 대한문 분향소를 지키던 김정우 쌍용자동차 지부장은 끝장 단식 농성을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행진단은 '자구적인 연대'를 시작했다. 아래로부터의 연대이고, 아래로부터의 정치다. 정치권이 귀 기울이지 않을 때 스스로의 존엄을 찾아 나섰다. 거리의 정치이고, 길 위의 정치인데, 가는 곳마다 서로의 얘기를 나누고, 가슴을 끌어안고, 같이 울고 분노하다보니 사연도 비슷했고, 문제의식도 비슷했다. 그래, 거기도 엉터리 회의를 통해서 사업에 찬성한다고 했구먼, 야 거기도 삼성물산이고 대림산업이야, 처 죽일 놈들 여기 사람도 벌금하고 손배가압류로 피 말려 죽이려고 그러네, 경찰이고 검찰이고 법원도 다 한통속이야, 어쩔 거야, 여기서 물러날 수 없으니 우리 같이 손잡자고.
이렇게 얘기들이 오가다가 11월 3일 간절한 전국에서 '바람버스' 타고 서울광장으로 모이자고 다짐한다. 만 명도 좋고, 10만 명도 좋고, 전국에서 고립되어 투쟁하다 메아리 없는 세상에 지쳐버릴 게 아니라 모두 모여서 세상을 들썩거리게 만들자고 다짐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그런데 행진단은 다시 더 하나를 당부한다. 한 두 사람이라도 좋으니 10월 20일 지리산 실상사에서 열리는 민회(民會)에 꼭 와달라고 말이다. 민회가 무어냐고 물으면, 아따 우리가 주인인데, 매양 당하고만 살 수는 없잖아, 그래서 우리가 모여서 토론하고 우리 정치를 만드는 거야, 지들이 안 들어주면 우리가 정치하면 되고… 이런 얘기들이 자연스레 오간다. 그들의 모습에서 조선 말기의 동학농민들이 봉건 지배세력과 외세에 맞서 전쟁을 결의하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억압과 착취에 신음하던 방방골골의 농투산이들이 사발통문 돌리고, 날밤 새워 토론하고, 행동을 결의했을 동학농민들이 이러지 않았을까? 그들이 우리가 하늘이라고 했듯이 짓밟히고, 두들겨 맞고, 쫓겨나는 우리가 하늘이라고 행진단은 진즉 선포했다. 그래서 행진단의 구호도 "함께 살자! 모두가 하늘이다. 함께 걷자! 강정에서 서울까지"다.
민회라는 다소 낯선 용어를 굳이 쓰는 이유는 딱히 행진단이 만들어내려는 토론장을 표현하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행진단은 10월 19일 오후부터 자체적으로 민회 준비에 들어간다. 행진단 자체의 평가와 성찰의 시간을 갖고, 지리산 실상사까지 달려오는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한다. '이심전심 통! 통! 통!'이라 이름 붙인 예비회의를 하는 것이다. 이 회의에도 참가하고자 하는 분들 모두에게 모둠 토론에 참여할 기회를 준다.
10월 20일 당일에는 지리산 실상사 마당에서 오후 1시부터 역사적인 민회 본회의 '우리가 만드는 세상'을 시작한다. 참가자들 모두에게는 3번의 발언권만 주어진다. 그리고 모든 참가자는 '내가 원하는 세상' 혹은 '내가 믿는 상식'에 대해 140자 글 제출(당일 접수대에서 140자 원고지 1매씩 배부)을 제출해야 한다. 현장에서 달려온 분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간단한 유인물 혹은 요약 문서자료 200부 이상 지참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1부(우리들의 삶, 우리들의 가치)에는 행진단과 실상사까지 달려온 이들이 서로의 생각과 얘기를 공유하는 시간이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과 가치에 대해서도 토론한다. 이걸 토대로 선언문 초안을 즉석에서 정리한다. 2부(우리의 해법)에서는 정리된 문제의식을 갖고 그럼 이런 산적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 것인지에 대해 토론한다. 행동계획을 논의하는 것이다. 특히 11월 3일 서울광장에 들어간 다음에 행동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 집중할 것이다. 대선에 대한 얘기도 나올 것이고, 장기적으로 행진단의 이런 실천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게 된다.
민회에서 나온 선언문과 행동계획 초안은 10월 28일 오후에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 열리는 2차 민회를 통해 다듬는다. 지리산 실상사에서 만들어진 선언문과 행동계획 초안을 토론에 붙여서 이를 확정한 뒤에 행진단은 수도권 일대를 1주일 동안 도보행진하여 서울광장에 도착한 다음, 이 선언과 행동계획을 선포하고, 이에 따른 행동전에 돌입하게 된다. 선언문의 내용이 어떻게 나올지, 행동계획은 어떤 내용들로 채워질지 아무도 모른다. 초안조차도 지리산 민회를 통해서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민중의회(시민의회)가 아니고 무엇일까?
ⓒ프레시안(손문상) |
지리산 민회에 오시라
20일 지리산 실상사로 오시라. 정치권이나 운동권에서 지위가 있다고 대우 받을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오시라. 현장 농성장에서 달려온 이들과 똑같이 발언권 쓰고, 제안하고, 토론에 참여하시라.
둘러앉은 실상사의 마당에서 절밥도 나누면서 깊어가는 지리산 아랫자락에 물드는 가을의 정취에 취하면서도 격정을 토로하고, 그러다가 분에 겨워 울고, 그러다가도 살아 있는 언어로 우리가 같이 그려야 할 세상을 제시하는 광경을 그려보고 오시라. 신경림 시인이 말했듯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라고 그런 달뜬 마음 갖고 오시라. 다시 청하건대 지리산 실상사 민회에 오시라, 공감하고 연대하는 마음과 열린 귀만 갖고 그냥 오시라. 지리산처럼 오만하지 말고, 겸허하게 오시기만 하시라.
* 2012 생명평화대행진의 일정과 민회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여기를 클릭해주시기 바랍니다. (☞ : 생명평화대행진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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