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을 통해 경제 민주화에 관한 적잖은 논점이 제기됐지만, 아쉬운 대목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좌파, 그리고 현장의 목소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에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의 글을 세 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프레시안>에 '인사이드 경제'를 연재하고 있는 오 정책위원은 그간 진행된 경제 민주화 논의에서 놓친 것이 무엇인지를 좌파 현장 활동가의 눈으로 짚었다. 독자들이 다른 시각으로 경제 민주화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 주>
<왼쪽에서 본 경제 민주화> ① '용'빼는 재주 없던 박정희 정권이 '용' 된 비결 ② 노무현에게 '좌파 신자유주의' 딱지도 과분한 이유 |
헌법 제 119조 2항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요즘 대선 쟁점의 하나로 거론되는 '경제 민주화' 얘기에서 빠지지 않는 조항이 헌법 제 119조 2항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이 조항은 1987년 10월 29일, 국민투표로 가결된 헌법개정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의 여당이었던 민정당 국회의원 김종인(현재 박근혜 캠프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이 조항을 제안했다고 한다.
물론 이 조항을 넣은 진짜 주인이 누구냐를 놓고 여야 간 설전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좀 더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이 조항이 통과된 날짜, 즉 1987년 10월 29일이다. 즉, 87년 6월 민주화 항쟁만이 아니라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진 이후라는 것이다. 경제 민주화 논쟁을 벌이는 위정자들은 4반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119조 2항 얘기를 하면서, 한사코 이 사실만큼은 절대로 거론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6월 항쟁의 결과물로 나온 노태우의 '6.29 선언' 8대 항목에는 노사관계나 노동 정책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언급도 없다는 점 역시 말이다. 만약 6월 항쟁이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라는 노동계급의 도도한 진출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119조 2항이 포함된 헌법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7·8·9월 대투쟁으로 노동자들의 뜨거운 저항이 올라오자 집권 민정당은 노동법 개정으로 투쟁을 무마하려 시도하는데, 이 노동법 개정은 헌법 개정 논의와 그 궤를 같이했다. 재벌들은 곧바로 엄청난 로비를 조직했고, 그들의 관심은 단순히 헌법 119조 2항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법 개정에도 맞춰졌다.
그러나 지배세력에게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7·8·9월 대투쟁은 군사독재만이 아니라 자본의 철옹성이라 여겨지던 공장을 박차고 거리로까지 뛰쳐나와 도심을 들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독재는 포기하더라도 자본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달랠 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 김종인 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
25년 전을 술회하며 김종인 씨가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연구모임 초청강연에서 했던 말이다. 재계의 후원을 포기하더라도 헌법 119조 2항을 신설해서 '지켜야 할 무엇'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경제 민주화를 얘기하는 모든 이가 그토록 하기를 꺼리는 얘기, 즉 노동계급이 무너뜨릴지도 모를 자본의 지배체제가 바로 그것이다. 헌법 119조 2항의 생성 역사를 보아도 역시,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한국의 신자유주의 ① : 역사의 일치와 불일치
한국에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논자에 따라 약간 다르다. 가장 빠르면 '신경영전략'이 도입된 1990년대 초반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논자들은 1994년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 선언 또는 1997년 IMF 경제공황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앞에서 살핀 것을 떠올려보면, 세계적으로 이미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지배적 원리로 자리 잡게 되는데, 왜 한국에서는 그보다 10년이나 뒤늦은 1990년대 중·후반에 도입된단 말인지? 바로 이 질문 속에 세계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경제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들어 있다. 아니, 최소한 내가 이해하는 경제 시스템의 원리가 그러하다.
지금까지 다뤄왔던 '케인즈주의적 코포라티즘' 또는 '신자유주의' 개념은 주로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선진 자본주의에서 벌어진 일들을 설명할 때에만 딱 들어맞는다. 한국이나 남미·아프리카 국가들처럼 20세기에 제3세계로 분류되던 국가들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칠레에서 가장 먼저 시도되었지만, 그 실험이 신통치 않은 것으로 드러났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한국이나 남미·아프리카 국가들의 자본주의가 '선진'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들 나라에서 계급투쟁이 자본가의 지배체제를 뒤흔들 만큼 위협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1968 혁명'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노동계급의 저항은, 1968년만이 아니라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다.
그런데 미국과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이 '비공인파업'의 물결로 터져 나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삐삐도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에, 정말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거의 동일한 시점에 파업이 벌어진 것이다. 1950~1960년대에도 파업은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노동조합 관료에 의해 잘 통제되었다.
그러나 1968년부터 발생한 파업은 미국과 서유럽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관료적 지도부가 아무리 통제하려 해도 노동자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다. 서로 언어와 문화도 다르고 노동자투쟁의 역사도 달랐지만, 미국과 서유럽 노동자들은 마치 똑같은 DNA라도 갖고 태어난 것처럼 파업에서 동일한 행동 패턴을 보여주었다.
설상가상으로 1970년대에 2차례에 걸쳐 터진 석유 파동은 결정적으로 자본가의 이윤율을 더 깊은 수렁으로 떨어뜨렸다. 그런 상황에서 노동계급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분쇄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지배 원리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신자유주의가 그 역할을 했다. 그래서 미국과 서유럽에서 신자유주의는 공통적으로, 노동계급의 저항을 야만적으로 짓밟으면서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남미·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노동계급은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미국과 서유럽에서 1968년에 벌어진 수준의 저항은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는 신자유주의 지배원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대부분이 미국·서유럽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속성 때문에도 그러했다.
그러다가 '늦깎이'로 세계노동운동에 데뷔한 3개 국가가 있다. 차례대로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이 그 주인공이다. 브라질은 '룰라'를 상징적 지도자로 올려놓은 1978~1980년 해외자본이 들어선 공단에서 엄청난 파업의 물결이 일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대부분이 흑인으로 구성된 노동자들이 1985~1987년에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다들 알다시피 한국은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다.
신자유주의 공세로 대부분의 노동계급 저항이 1980년대 초반에 분쇄되었던 미국과 서유럽 노동자들은, 이들 3개국에서 벌어졌던 노동자투쟁을 매우 호기심 있게 지켜보았다. 1990년대에 이르면 세계 노동운동에서 남아공 노동조합연대회의(COSATU), 브라질 노동조합총연맹(CUT), 한국 민주노총(KCTU), 이 3개 조직이 가장 각광받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 3개국 모두 1990년대 중·후반에 신자유주의가 도입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1980년대에 엄청난 노동자 파업의 물결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파업 물결을 짓밟고 잠재워야 한다는 점에서, 10년 앞서 미국과 서유럽에 지배적 원리로 자리 잡은 신자유주의가 도입되는 것이다.
사실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신자유주의가 지배 원리로 도입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노동계급의 폭발적 에너지가 분출된 곳에서만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아직도 1970~1980년대의 한국처럼 독재 체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국가, 즉 노동계급의 저항이 폭발하지 않은 곳에서는 자본가들이 굳이 신자유주의를 도입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도입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노동계급의 저항이 자본의 이윤율에 강한 타격을 주었던 곳, 그런 나라에서 신자유주의를 통한 노동계급 공격으로 이윤율 회복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역량이 강하지 않은 곳에서는, 기존의 억압적 정책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가미한다고 해서 자본의 이윤율이 급격히 늘어나지는 않는다. 강조하고 또 강조하지만 세계 각국의 자본주의 체제 작동의 지배 원리에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힘 관계가 주요한 결정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프레시안(손문상) |
한국의 신자유주의 ② :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역할
따라서 '케인즈주의적 코포라티즘'과 '신자유주의'는 계급과 계급의 역관계를 반영한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2차대전 직후와 1968년에 노동계급의 혁명적 진출이 있었기에, 주로 이들 나라의 시스템을 설명할 때에는 그대로 들어맞는다. 뒤늦게 도입된 나라들의 경우, 미국과 서유럽의 10여년 경험을 바탕으로 약간의 변형이 벌어지기도 한다. 또한 각국의 특성에 따라서도 일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예를 들면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은 각국의 시장 개방을 핵심 정책으로 밀어붙였다. 금융을 비롯한 자본시장 개방은 물론이고, 실물자본이 자유롭게 공장을 건설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자본에게 전 세계적 규모의 시장을 수탈할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였다.
IMF 경제공황 이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실제로 해외자본이 훨씬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한국의 완성차 5개사 중 대우차는 GM에, 삼성차는 르노에, 쌍용차는 상하이차 또는 마힌드라에 넘어갈 것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난 15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것이며, 실제 한국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자본은 실물자본이 아니라 금융자본이다.
IMF 경제공황 직후 정권을 인수한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 교과서대로 금융시장을 활짝 개방하고 해외자본에 M&A(인수·합병)의 길을 열어주는 등 해외 투자 유치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실제 해외매각에 성공한 것은 정권 말기에 부도 위기에 빠진 대우차를 GM에 매각한 정도에 그쳤다. 해외의 실물자본은 웬만해서는 한국에 직접투자 하기를 꺼렸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에까지 견결히 이어지는 정책 중 하나가 공공부문 민영화(사유화)인데, 일부 실제로 사기업이 된 부문도 있긴 하지만 이 역시 15년에 걸쳐 국가부문의 일부가 거대 공기업들로 변화되는 수준이었다. 민영화된 기업이 해외로 매각되는 사례 역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발견할 수 없다. 해외자본의 국내 유입은 압도적으로 금융자본·투기자본이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는데, 먼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해외자본 유입의 대부분은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차관의 형태였던 점, 즉 실물자본이 한반도에 투자된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을 얘기해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과 서유럽 역시 시장 개방이 활발해지기 전까지는 실물자본이 옮겨 다니는 것은 자유롭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면 실질적인 이유로 꼽기 어렵다.
오히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변화 양상을 떠올려야 한다. 즉, IMF 공황 이후 한국의 시장이 활짝 열리면서 투자가 자유로워지긴 했지만, 해외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 시기에 훨씬 매력적인 투자처가 열리고 있었다. 바로 10억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광활한 저임금 국가 중국이다. 1994년에 거의 전쟁 직전으로까지 가는 등 남북관계의 불안정성을 안고 있는 한반도에 공장을 짓느니,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는 것이 훨씬 유리했던 것이다.
아울러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독특하게도 해외의 실물자본에 맞서 싸워본 경험이 풍부한 편이다. 많은 해외 자본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 투쟁이 그리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끈질긴 저항을 보여준 사례가 여럿 있다. 당장 완성차에서 대우차와 쌍용차의 경우 해외매각 과정에서 정리해고 공격에 맞서 완강한 파업을 벌인 바 있다.
1987년 대투쟁 직후 마산과 이리(지금의 익산)의 수출자유지역에서도 활발한 민주노조운동이 벌어졌다. 결국 이윤율이 떨어진 해외 자본은 전노협 사업장을 중심으로 광적인 폐업 탄압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폐업하고 공장을 철수하는 자본을 향해 끝까지 해외 원정투쟁을 불사하며 저항해온 전통을 갖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투쟁은 패배했고, 결국 해외매각이 강행되거나 공장 철수가 이뤄졌다. 하지만 해외 자본이 한국에서 벌이는 노동탄압은 거의 대부분 만만치 않은 노동계급의 저항에 부딪혀왔다. 이 점에서 해외의 실물자본이 직접 한반도에 공장을 짓고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계급과 계급의 힘 관계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해외 직접투자 유치가 신통치 않게 되자, 노무현 정권은 방향을 한쪽으로 집중시킨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 시동을 걸어놓은 금융시장 개방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 총론으로 제시된 것이 이른바 '동북아 금융허브'인데, 그 완성판이 바로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7년에 만들어진 '자본시장통합법'과 한미 FTA 체결이었다. (정태인 교수는 2007년에 한미 FTA 저지운동을 벌이긴 했지만, 그 스스로 청와대에서 대통령 직속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기조실장을 역임한 바 있다.)
그 결과 한국 주식시장은 "세계적 투기자본의 ATM(현금인출기)"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해외 투자자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경제가 괜찮을 때에는 돈놀이를 즐기다가, 미국이나 유럽의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곧바로 돈을 빼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돈을 빼가기 위해서는 달러로 환전을 해야 하므로 그때마다 원-달러 환율은 수직으로 상승했다. 심지어 미국 금융위기로 달러화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질 때에조차,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시장에 쏟아부은 투자금을 회수하느라 원화 가치는 달러화보다 더 떨어지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의 이른바 우량기업들은 대부분 외국인이 주식의 40%대를 보유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합세하여 더 많은 주식을 획득한 후 적대적 M&A가 벌어질 법도 한데, 해외 투기자본은 주식시장을 놀이터 삼아 돈놀이를 벌일 뿐 경영권 장악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그룹이 경고해온 '주주 자본주의'의 모든 조건을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만들어줬는데 말이다. 분명히 한국에 상륙한 신자유주의는 미국과 서유럽의 그것과 공통점도 있지만 한반도 특성에 따라 상당 부분 각색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케인즈주의, 신자유주의는 본래 미국과 서유럽 등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부에서 벌어진 지배체제 운영원리의 변화를 뜻한다. 이 변화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중심부 노동계급의 혁명적 진출이었다. 중심부의 주변에 위치한 나라들에서는 일정한 시차를 갖고 중심부의 운영원리가 도입되며, 이 역시 주변부의 노동계급 역량이라는 변수를 고려하며 관철된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케인즈주의, 신자유주의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 자본주의를 끌고 가는 것은 중심부이며, 부단히 주변부와 관계를 맺으며 발전한다. 따라서 케인즈주의·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케인즈주의·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중심부가 주변부와 관계를 맺으며 전 세계를 지배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한국의 신자유주의 ③ : 서구와 일치, 그리고 불일치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세계경제위기 시기에, 특이하게도 한국의 현대기아차와 삼성전자는 눈부신 성장을 기록했다. 그래서 마치 한국 경제는 공황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미국의 <타임>지는 "현대차는 1999년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자동차업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현대차그룹과 삼성그룹에 행운이 따랐던 것일까? 그런 측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차를 사례로 놓고 보자면, 글로벌 경제위기로 주요 경쟁사(미국의 빅3, 도요타)들이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공황 이전부터 현대기아차는 소형차 개발과 생산에 주력해왔는데, 공황 이후 세계적으로 소형차 부문이 각광받았다는 점도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행운만으로 기업의 성공을 설명할 수는 없다. 게다가 <타임>지는 단순히 경제위기 때 성공한 것만이 아니라 '1999년 이후' 빠르게 성장했다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이 역시 아이러니이다. IMF 경제공황이 휩쓸고 간 직후 아닌가! 도대체 1999년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대기아차를 사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❶ 1997년 말 IMF 경제공황 직후 1998년 현대차에서 대량 정리해고 사태가 벌어졌다. ❷ 현대차가 적극적으로 해외공장 설립에 나선 시점이다. 1997년 터키에 최초로 해외 완성차공장을 설립한 이후 1998년 인도, 2000년대 이후 중국·미국·체코·슬로바키아·러시아·브라질로 확대했다. ❸ 2000년 현대차 노사 간에 이른바 '완전고용 합의서'가 체결되었는데, 그 내용은 생산라인에 사내하청 비정규직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대신 정규직의 고용보장을 합의한 것이었다. |
위에서 언급한 3가지 사건들 중 ❶과 ❷에 나타난 대량 정리해고와 생산의 해외이전은, 1968 혁명과 오일쇼크로 불어닥친 경제불황 시기(1970~1980년대), 미국과 서유럽 자본가들이 위기 탈출을 위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적극적으로 구사해온 전략을 그대로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❸ 항목이다. 한국의 재벌들은 그저 서구의 신자유주의를 모방만 한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나아간 것이다. 즉 "전면적인 비정규직 도입과 확대"를 밀어붙였다. 사실 한국의 비정규직 제도는 전 세계적으로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 제조업 사내하청 제도는 세계에서 한국이 거의 유일하게,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한국의 비정규직은 급속도로 늘어나 정규직 숫자를 넘어섰고, 착취율도 엄청나게 높아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2008년 세계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한국 재벌들의 '맷집'을 키워주었다. 이제 다른 나라 자본가들이 한국의 비정규직 제도를 모방하기 시작했을 정도이다. 대표적으로 전미자동차노조(UAW)가 2007년에 받아들인 이중임금제도(Two-tier wage system)이 있다. 신규 입사자들은 기존 노동자 임금의 절반만 받게 되며, 복지 혜택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직접 고용한다는 점만 빼면 한국의 사내하청 제도를 빼다 박았다.
ⓒ프레시안(손문상) |
"100만 원 주던 노동자 잘라내면 70만 원만 줘도 하청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게 얼마나 신통했겠습니까? 철의 노동자를 외치며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고작해야 석 달만 버티면 한결 순해져서 다시 그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게 또 얼마나 같잖았겠습니까?"
노무현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03년, 부산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 홀로 외로이 목을 맨 고(故) 김주익 열사, 그에게 바친 김진숙 지도위원의 추도사 한 대목이다. 두 번째 문장은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모든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첫 번째 문장은 한국의 정권과 자본가들이 더 선진(?)적으로 수행한 것이었다. 한국의 비정규직 규모는 1000만을 육박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삼성과 현대그룹의 눈부신(?) 성장은 바로 비정규직에 대한 광적인 착취의 결과였다.
마치며 : 새로운 운영원리는 오직 노동계급의 역량에 달려 있다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그룹은 주주 자본주의의 공격 앞에 한국의 건실한 기업들이 사냥감이 될 것이라 우려한다. 박정희 정권과 재벌이 가진 '순기능'을 재활용해서라도 한국 경제의 토대를 튼튼하게 다지며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태인·이병천 그룹은 한국의 재벌들은 이미 신자유주의 지배체제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재벌 체제를 개혁하고 손보지 않는 이상 경제 민주화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제 내 견해를 얘기하면서 기나긴 시리즈를 끝마칠 시간이다. 한국의 재벌들이 주주 자본주의의 사냥감이 될 것이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해외 자본이 한국에서 운동하는 양상은, 직접 투자나 경영권 장악보다는 금융 투자를 통한 수익 챙기기 방식이었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이미 적대적 M&A의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전혀 불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아직까지는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노무현 정권에 참여했던 정태인 교수가 장하준 교수의 경고를 반박하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이다.)
재벌들은 신자유주의 지배체제의 주인공 역할뿐 아니라, 비정규직 확대·양산의 방식으로 서구 신자유주의보다 멀리 나아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라기보다 주변부에 가깝다. 아무리 재벌이라 할지라도, 주변부의 자본이 제아무리 날고뛰어도 중심부 자본의 주도권을 넘볼 수는 없는 법이다. 한국의 재벌들은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를 받아들인 중심부와 부단히 관계를 맺으며 흥망성쇠를 거듭할 것이다.
문제는 그 중심부의 신자유주의이다. 2차대전 직후 케인즈주의를 도입했던 중심부 국가들은, 1968년에 도저히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노동계급의 성난 저항에 부딪혔다. 20여 년 동안 타협하며 온순하게 길들여온 노조 관료들은 무용지물이었다. 오일쇼크까지 겹치면서 이윤율은 곤두박질쳤다. 이제 타협은 없다! 이러다간 자본주의가 멸망할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체제 위기 앞에 그들은 신자유주의로 개종했다.
그런데 그놈의 신자유주의가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론 사태로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노동계급의 저항을 성공적으로 분쇄하며 20여 년을 별 문제없이 작동하던 신자유주의였다. 1945년이나 1968년처럼 성난 노동계급의 혁명적 진출이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시스템 자체가 붕괴 위기에 빠진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면서 근근이 생명연장 장치를 작동시켜왔을 뿐, 미국의 위기를 걷어내면 유럽에서 터져 나오고, 유럽 위기가 잠잠해지면 중동·아프리카에서 뭔가 폭발하고, 좀 진화했다 싶으니 이번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모두 재정위기가 발생했다. 신자유주의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 위기관리 시스템'이었는데, 이게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럼 신자유주의 말고 뭐가 대안이란 말인가?
그 답은 케인즈주의나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를 세워온 지배자들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진출에 대응하는 방어자 역할을 해왔을 뿐이다. 붕괴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무언가는, 결국 노동자들이 다시 한 번 들불처럼 거대한 파업의 물결을 만들어낸 후에야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 지배자들은 이윤율 회복을 위해 더 무자비하게 노동계급을 공격하고 착취하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노동자투쟁의 위협이 있지 않는 한, 절대로 그들은 능동적으로 시스템을 바꿔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광적인 비정규직 확대·양산 정책을 그대로 유지한 토대 위에서 정규직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미 늘어날 대로 늘어나버린 비정규직을 더 확대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정규직 고용을 공격해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방법뿐이기 때문이다. 공격적 직장폐쇄와 용역 폭력을 통해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조를 깨부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과 서유럽 역시 비정규직 확대·양산을 통해서 꺼져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생명을 연장시키려 할 것이다. 그것이 한계에 봉착하면 또다시 정규직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통해 비정규직을 늘리는 길 뿐이다. 참다 참다 못한 노동자들의 울부짖음이 목젖을 때리는 그 순간까지!
안타깝게도 아직 노동자들은 효과적인 저항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계급과 계급의 힘 관계가 체제의 운영원리를 결정해 왔듯이, 신자유주의의 종말과 대체 역시 똑같은 원칙이 적용될 것이다. "새로운 혁명은 새로운 공황 속에서만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공황이 확실한 것처럼 혁명도 확실하다." 언젠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읊었던 이 말처럼, 새로운 사회체제 운영원리는 새로운 노동계급의 혁명적 진출을 통해서만 벌어질 것이다. 그 혁명적 진출 속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계급과 계급의 힘 관계가 새로운 운영원리의 수준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