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을 통해 경제 민주화에 관한 적잖은 논점이 제기됐지만, 아쉬운 대목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좌파, 그리고 현장의 목소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에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의 글을 세 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프레시안>에 '인사이드 경제'를 연재하고 있는 오 정책위원은 그간 진행된 경제 민주화 논의에서 놓친 것이 무엇인지를 좌파 현장 활동가의 눈으로 짚었다. 독자들이 다른 시각으로 경제 민주화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 주>
<왼쪽에서 본 경제 민주화> ① '용'빼는 재주 없던 박정희 정권이 '용' 된 비결 |
좌파 신자유주의?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그룹은 정태인·이병천 그룹을 '좌파 신자유주의'라 칭하곤 한다. 아마 이것도 감정 대립의 일종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사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인데, 사실은 농담처럼 붙여본 이름에 불과하다.
어느 인터넷 매체와 인터뷰하던 도중에, 양극화 얘기를 하면 '좌파'라 부르고 파병과 FTA를 이야기하면 '신자유주의'라며 정부를 비판하는 상황을 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럼 우리가 '좌파 신자유주의' 정부란 말입니까"라고 반문하면서 나온 말로 알려져 있다. 아마 정태인 소장이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으로 재직했던 경력도, 이런 딱지를 붙이게 된 배경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된다.
말이 나온 김에 이번에는 '신자유주의'라는 놈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자. 사실 이놈처럼 논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경우도 드무니까 말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설명하는 신자유주의는, 내가 이해하는 방식의 신자유주의이다. 내 해석이 옳다고 강변할 생각은 전혀 없다.
어차피 경제 문제를 논하기 시작하면, 누구나 자신만의 '개똥 경제학'을 갖기 마련이다. 문제는 서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뜻은 다른 것을 지칭하고 있다면, 논쟁은 끝없이 상대방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만다. 그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내 식대로 이해하는 신자유주의를 한번 읊어보겠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생체실험장 칠레
경제 이론의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2차 대전 직후 수십 년간 '케인즈주의'가 세계자본주의 체제 작동의 지배적 원리였음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언제부터 세계를 주름잡기 시작했을까? 이것 역시 주로 들은 풍월에 의하면, 영국의 대처 정권과 미국의 레이건 정권 시절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경제 이론으로서 신자유주의는 현실의 지배체제로 등장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신자유주의 이론의 거두로 꼽히는 인물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미국의 밀턴 프리드먼이다. 두 사람은 각각 1974년과 1976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으니, 이론으로서 신자유주의는 대처와 레이건 정권 등장 이전부터 각광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내용들인데, 지금부터는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사실 대처와 레이건 정권 이전에 몇몇 국가 차원에서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구사해본 사례가 존재한다. 금시초문이라고? 그래서 미리 말해두지 않았던가. 나만의 방식대로 이해하는 신자유주의를 얘기할 것이라고.
▲ 살바도르 아옌데 전 칠레 대통령. ⓒ위키미디어커먼스 |
그런데 이곳 칠레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지구상에서 맨 처음으로 '실험'된다. 피노체트 군부독재 체제에서 경제 정책을 주물렀던 이들은, 미국 시카고대학의 밀턴 프리드먼 교수 밑에서 수학했던 유학파들이었다. 남미 출신의 수많은 부르주아 자제들이 신자유주의 거두 프리드먼의 '시카고학파'에서 공부를 하고 자국으로 돌아가 신자유주의를 퍼뜨렸다. 이들에게는 '시카고 보이(Chicago Boys)'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아직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신자유주의는 칠레에서 자유롭게 실험을 즐기며 세상을 지배할 준비를 하게 된다. 아옌데 정권에서 국유화되었던 구리 광산들은 다시 민영화되어 해외 자본에 분할 매각되는 절차를 밟게 되고, 자본시장·금융시장·환율시장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그 실험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꽝'이었다. 내가 신자유주의를 혐오해서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대처·레이건 정권의 경우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율을 엄청나게 높인 탓에 외형상 자본의 이윤율 회복과 경제 규모의 성장을 가져왔다. 하지만 칠레에서 처음 실험된 신자유주의는, 자본가들에게조차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었다.
케인즈주의와 코포라티즘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기 이전, 그러니까 2차 대전 이후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케인즈주의'가 채택되는 배경으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사례보다 서유럽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피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전장이 되었던 유럽 대륙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에는 크게 2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1930년대 대공황의 원인이 된 과잉생산·과잉투자 문제는 역설적으로 전쟁의 포화 속에 해소되었기에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폐허로 변해버린 경제를 재건하는 데에는 당연히 '실탄', 즉 재건 비용이 절실히 필요했다. 결론적으로 그 비용은 '마셜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이 원조해 주었다.
그러나 남은 한 가지 문제는 쉽지 않았다. 나치 독일과 파시즘의 지배를 분쇄하고 해방에 이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노동계급이, 이제 파시즘만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한 혁명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차 대전 시기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하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주요 국가에서 혁명운동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자본가들은 떠올리기조차 싫은 기억이었다.
하지만 종전 이후 자본가들의 힘은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그 중요한 이유는 나치 독일의 점령 기간 동안 자본가들이 점령군과 그들이 세운 괴뢰정부에 부역했기 때문이었다. 자본가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거세게 타올랐다. 대표적으로 나치 점령군에 부역했던 프랑스의 르노자동차는 자산 일체가 무상으로 몰수되어 국유화되기도 했다.
반대로 노동계급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나치 독일의 강점에 맞서 결성된 '레지스탕스' 구성원의 대부분은 노동계급 투사들이었다. 히틀러와 함께 파시즘의 대명사였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끝까지 추적하여 체포하고 사형을 집행한 것은 연합국 군대가 아니라 노동계급 중심의 저항군이었다. 유럽 민중들은 목숨을 걸고 파시즘에 맞섰던 노동계급 투사들의 헌신을 잘 알고 있었다.
종전 직후 치러진 선거 결과가 잘 말해준다. 영국에서는 전시 내각을 이끌었던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이 충격적인 패배를 겪게 된다. 총선 승리는 노동당에 돌아갔고, 노동당 당수였던 애틀리가 수상에 취임해 주요 산업 국유화를 단행한다. 프랑스에서도 역시 민중들은 전쟁 영웅 샤를 드골의 당이 아니라 공산당을 제1당으로 선택했다. 처칠과 드골의 명성은 결코 낮지 않았지만, 유럽 민중들은 이름 없는 노동계급 투사들의 헌신과 목숨 건 희생을 훨씬 높이 산 것이다.
레지스탕스의 노동계급 투사들 일부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무기를 정부에 반납하지 않고 땅속에 묻어두었다. 언제라도 자본가들의 지배를 종식시킬 노동계급의 혁명이 시작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민중들의 압도적 지지까지 등에 업고 있던 상황 아닌가. 2차 대전 직후 유럽의 이런 상황 앞에서 자본가들은 선택을 해야 했다. 노동계급의 혁명을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타협할 것인가.
타협책으로 선택된 것이 이른바 '케인즈주의'와 '코포라티즘(Corporatism)'이었다. 코포라티즘이라는 단어 자체가 '타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자본가들이 핵심적으로 양보한 것은 노동조합의 역할을 인정하고 대신 국가 기구 내부로 포섭하겠다는 것이었다. 노동계급의 실질임금을 지속적으로 올려주는 것을 용인해 주면서, 여기에 '유효수요 창출'이라는 케인즈주의 어법을 빌려오게 된다.
정부와 노동조합, 자본가들이 협력한다는 뜻의 코포라티즘은, 지금까지 자본주의 역사상 자본가들이 가장 많은 양보를 선택한 체제이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노동계급의 혁명 위협 앞에 섰기 때문이다.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 핵심 산업들이 줄줄이 국유화의 길을 걷게 된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정부의 각종 정책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대신 노동계급의 불만을 매년 벌어지는 협상 테이블 안으로 묶어두는 정도의 암묵적 협력이 이뤄졌다.
다시 신자유주의란?
굳이 케인즈주의와 코포라티즘의 성립 역사를 들먹거린 이유는, 이러한 시스템이 단순한 경제 운용 원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앞서 살핀 것처럼 2차 대전 직후 수십 년을 작동해온 코포라티즘은, 자본가와 노동계급 사이의 치열한 계급투쟁 속에서 형성된 힘 관계를 반영해 성립된 것이다. 혁명의 위협 앞에 자본가들이 타협한 시스템이라는 것.
따라서 이러한 혁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곳에서는 코포라티즘이 들어설 이유가 없었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그런 시스템이 작동해본 적이 있던가? IMF 공황 직후 김대중 정부가 '노사정 위원회'란 것을 만들어 코포라티즘 비슷한 흉내를 내보긴 했지만, 그것은 정권과 자본의 논리를 관철시키는 통로 역할이었을 뿐 노동조합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노동조합은 서유럽의 노동조합 수준으로 국가 정책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김대중 정권은 흉내만 냈을 뿐 한국에서는 코포라티즘 비슷한 체제가 단 한 번도 작동해본 적이 없다. 이러한 사정은 남미와 중동·아프리카 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코포라티즘은 서유럽을 비롯한 선진자본주의(혹은 중심부) 국가들에서 작동했을 뿐이다.
내 방식대로 얘기를 풀어보자면, 신자유주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2차 대전 후 1960년대 중반까지 케인즈주의와 코포라티즘이 작동하는 동안, 미국과 서유럽에서 자본의 이윤율과 노동계급의 실질임금이 함께 상승하게 된다.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두 차례 전쟁의 아픔을 딛고 다시 황금기를 맞은 것처럼 보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얘기이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이윤율은 정체한다. 어느 한 나라만의 일이 아니라 선진자본주의 국가 전체에서 벌어진 일이다. 20년 이상 잘 작동하던 시스템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73년 오일 쇼크와 유가 폭등을 전후로 이윤율은 정체가 아니라 하락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코포라티즘의 작동에도 구멍이 생겼다. 현장의 노동계급 대중들이 노동조합 지도부의 통제를 벗어나 자발적인 파업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코포라티즘은 노동조합이 계급투쟁을 적절하게 관리한다는 전제 하에 자본가들이 장기간 타협을 해온 시스템인데, 노동자 대중들이 노동조합의 통제에 따르지 않게 되면서 결정적인 문제가 생긴 것이다.
노동계급의 저항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1968년에 전 세계적 수준에서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노동자들의 파업 물결이 이어졌다. 프랑스에서, 영국에서, 이탈리아에서, 미국에서, 심지어 일본에서도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파업이 끊이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서둘러 자본가들과 협상을 통해 획기적인 임금 인상안을 들고 왔다. 이제 주머니를 두둑이 채웠으니 내일부터는 일터로 돌아가자며!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수십만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이다가 노조 지도부의 임금인상안 설명을 듣고 해산한 노동자들이,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이내 다시 파업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임금이 문제가 아니라 현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자본가들의 통제와 지배 전체가 노동자 대중의 불만이었던 것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100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이 숫자는 당시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 수를 상회한다. 다시 말해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비조합원들도 파업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한 달 이상 파업을 벌인 노동자들도 부지기수였다. '68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거대한 노동계급의 파업운동은, 1968년만이 아니라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노조 지도부의 지휘와 통제에 따르지 않고 자발적으로 벌어지는 파업이라는 뜻의 '비공인 파업(wildcat strike)'이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물결쳤다. 이렇게 가다가는 또다시 혁명의 물결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비공인 파업의 빈도수로만 보면 혁명기의 수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이윤율의 정체 및 하락 속도에 가속이 붙기 시작하고, 코포라티즘에도 구멍이 뚫리자 자본가들은 다른 수를 내야 했다.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
경제 이론으로서 신자유주의는 통화주의에 가까워 보이지만, 앞서 케인즈주의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 운용원리가 아니다. 장기간 타협에 의존해 유지하던 체제가 작동하지 않으면서 이윤율의 심각한 위기가 도래하자,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기획된 새로운 시스템이다.
공기업 민영화, 기업의 해외 매각, 금융시장 개방…. 이런 경제 정책들이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핵심이 아니다. 자본에 대한 노골적인 옹호, 노동계급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가 핵심이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미국의 레이건 정권은 1981년 항공관제사들의 파업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버린다. 파업에 참여한 항공관제사 전원을 해고했을 뿐만 아니라, 해고자들이 동종 업종에 다시는 취업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80년대 미국에서 항공기 사고가 급증했던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1984년 대처의 광부 파업 강경 진압을 배경으로 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 ⓒmovie.naver.com |
이듬해인 1984년, 영국 노동조합운동의 가장 전투적 부위였던 광부들이 대처에게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대처는 몇 개월 전부터 파업에 대비해 석탄을 비축했고, 파업이 벌어지자 군 병력까지 투입한다. 몇 개월 동안 파업이 이어졌지만 대처는 일체의 타협을 거부했다. 보수 진영까지 나서서 타협할 것을 촉구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대처의 승리로 대회전이 끝나자마자, 노동법에 대한 전면적인 개악이 이뤄진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를 안착시킨 시기라면 대처 정권의 첫 집권기(1979~1983)가 아니라 두 번째 집권기(1983~1987)부터라고 봐야 옳다. 영국 석유와 영국 항공 등 공기업 민영화 정책은 1981년에 시작되지만,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84년 광부 파업 분쇄 이후이다. 1987년에는 영국의 자존심이라 할 국영기업 롤스로이스까지 민간 부문으로 돌리기에 이른다. 롤스로이스는 10년 뒤에 폭스바겐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BMW에, 즉 해외 자본에 매각되는 신세로 전락한다.
즉, 최초의 '실험'은 칠레에서 이뤄졌지만 실제 세상을 지배하는 이념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등장한 미국과 영국 정권의 노동계급 짓밟기로부터이다. '68 혁명'을 전후로 발생한 세계 자본주의 위기는 분명히 자본주의체제 중심부(미국과 서유럽)의 위기였기에, 칠레를 비롯한 남미 몇몇 국가에서 신자유주의를 실현한다고 극복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칠레는 철저히 신자유주의의 '생체실험장'이었을 뿐이다. 이런 정책을 쓰면 경제 지표가 어떻게 바뀌고 노동계급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체크하는 과정이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미국과 서유럽 등 자본주의체제 중심부에서 '비공인 파업'의 물결로 노동조합 관료적 지도부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성난 노동계급의 저항을 어떻게 분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대처와 레이건이 그 일을 해낸 것이다.
사회자유주의
미국과 영국에 똬리를 튼 신자유주의는 대처와 레이건을 종잣돈 삼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노동조합의 권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벌어지고, 관료적 지도부는 투항했으며 현장에서 비공인 파업을 주도하던 평조합원들도 전망을 찾지 못하고 운동의 물결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에는 대처나 레이건 같은 정권의 등장이 필수적인 것이었을까? 초기에는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노동계급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적 본성은 반작용을 낳기도 했다. 1990년대 초중반이 되면 초기의 정권들이 인기를 잃고 정권을 이양하게 된다. 영국에서는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가,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고, 독일에서는 슈뢰더 사민당 정부가, 프랑스에서는 조스팽 사회당 정부가 들어선다.
▲ 노무현 전 대통령. ⓒ프레시안 |
정태인·이병천 그룹에게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딱지 붙이기가 이뤄진 배경에는, 아마도 이런 유사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최초로 '세계화'라는 말을 도입하고 경제기획원을 없앴던 김영삼 정권 이후, 정권 교체를 통해 등장한 김대중·노무현 범 민주당 정권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노동계급정당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따라서 이들에게 '좌파 신자유주의'나 '사회자유주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너무 과분한 평가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는 말 자체가 자유주의 앞에 새로울 '신(新)'(neo-)자를 붙여서 만들어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뜻풀이만으로 보자면 자본주의 초창기를 풍미했던 자유주의의 새로운 버전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며 노동계급 혁명의 위협 앞에 타협했던 케인즈주의적 코포라티즘을 가운데 두고, 과거와 현재에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노동계급 혁명의 위협 앞에 타협하느라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던 자유주의가, 노동계급 저항의 싹을 짓밟으며 "새롭게, 그리고 더 강하게" 등장한 것이 신자유주의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내 방식대로 이해하는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이다. 둘 모두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두 개의 중요한 계급, 즉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의 대립과 역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그룹이 전 세계적인 주주 자본주의의 위협을 중심으로, 그리고 정태인·이병천 그룹은 한국에서 특수하게 형성된 재벌 대자본의 폐해를 중심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면, 나는 계급과 계급 간의 대립과 역관계를 중심으로 경제 시스템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글에서 중요한 논거로 제시한 '쇼 윈도우' 역시 마찬가지 관점에서 제시한 것이다. 물론 국경을 맞대며 경쟁하던 당시 소련·중국·북한 체제는 노동계급이 염원하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입장에서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코앞에서 한국·대만·홍콩이 자본주의 체제의 척후병 역할을 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사실 앞선 역사에서 비슷한 대목을 보지 않았던가? 2차 대전 직후 폐허가 된 서유럽 자본주의 경제 재건을 위해 미국이 막대한 원조를 했던 '마셜 플랜'이 그것이다. 2차 대전에서 파시즘 추축국과 대립각에 섰던 연합국에는 소련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후 경제 재건 계획에는 마땅히 서유럽만이 아니라 동유럽을 포함한 유럽 전체가 대상이 되어야 했다.
'마셜 플랜'에 참가할 수 있는 대상은 기본적으로 유럽 전체로 설정되었지만, 참가국들이 수용해야 할 일정한 조건을 단서로 붙여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배제했다. 미국은 이런 방식으로 1948년부터 1951년까지 자본주의 체제 재건에 나선 서유럽 16개국에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금액인 12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 원조를 행하게 된다. 참으로 계급적인 원조 아닌가?
그렇다. 참으로 장황하게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해 설명했지만,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그룹이나 정태인·이병천 그룹의 주장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비어 있는 지점, 그리고 내가 경제를 바라보며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지점이 바로 이 대목이다. '공산당 선언'의 그 유명한 경구 -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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