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걸 전 한국금융연구원장은 11일 '재벌 지배구조,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주제로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한 강연에서 현재 상황을 이렇게 진단했다. 참여사회연구소, 참여연대 시민경제위원회, <프레시안>이 공동 주관하고 5.18기념재단이 후원하는 강좌 '재벌 공화국을 넘어'의 세 번째 강연이었다. (☞바로 가기 : 재벌 개혁과 경제 민주화, 2012년 선택은?)
이 전 원장은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탓에, 임기를 절반밖에 못 채우고 2009년 한국금융연구원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관련 기사 : "이건희를 건드리니, 주변이 온통 적이 됐다"). 지금은 한림대 재무금융학과 객원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전 원장은 이날 "재벌 지배구조의 핵심 문제는 외적 무한팽창과 내적 1인 수렴 성향"이라고 말했다. 10대 재벌 총수가 순환출자 등을 통해 "1.1원으로 53.5원의 내부지분율을 지배하는 구조"를 만들었고, 그 결과 총수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국민에게는 손해를 끼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 원장은 시장 지배적 지위 남용, 불공정거래 행위, 담합, 일감 몰아주기 등 재벌의 문제점을 비판한 후, "재벌 총수는 지배구조에 대한 도전이 들어오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며 삼성 상속 소송을 예로 들었다.
"이맹희 씨가 이기면 삼성의 지배구조가 무너진다. 이건희 회장이 공개석상에서 형에게 몰이성적인 이야기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배구조에 대한 도전을 받으면 그렇게 된다."
총수 1인 지배체제에서 벌어지는 형제 간 다툼은 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이 전 원장의 판단이다. 또한 이 전 원장은 재직 시절 삼성그룹 등과 접했던 때의 경험을 소개하며 "삼성그룹은 대한민국의 중요한 자산인데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능력을 발휘해 성과를 낸 사람이 아니라 총수 일가의 세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작업을 한 사람이 그룹의 2인자로 인정받고 (…) 10명이면 10명 다 총수에게 아부하며 충성 경쟁을 하는 체제다. 위기가 닥쳤을 때 컨트롤할 능력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접하면서) '위기를 맞으면 이 기업은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전 원장은 기업에 대한 조세 지원이 재벌에 편중돼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2010년 조세 지원액을 살펴보면, 중소기업 지원액을 다 합쳐도 삼성그룹 지원액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이 전 원장은 "재벌에 의한 '이익 사유화, 비용 사회화' 구조가 고착되면서 경제가 실질적으로 재벌 사회주의화하고 있고, 재벌이 각종 특혜 지원을 독식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재벌 복지병이 심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계열 확장은 이명박 정부 들어 더 심해졌다. 금산분리 완화 정책도 그 원인 중 하나다. 이 전 원장은 "피감시자(산업자본)가 감시자(금융자본)를 소유·지배해 시장경제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 이동걸 전 한국금융연구원장(자료 사진). ⓒ프레시안(김윤나영) |
"보수 운동의 아교는 돈…재벌 개혁, 기득권 구조 전반의 개혁과 함께 가야"
이 대목에서 이 전 원장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도 비판했다.
"박근혜 후보는 자신이 5년 전 말한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가 경제 민주화(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한다. '줄푸세'는 강자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인데, 워낙 창의적인 분이셔서…. 박 후보는 5년 전 금산분리 완화, 산업자본 즉 재벌의 은행 지배를 허용하자는 쪽이었다. 박 후보에게 꼭 묻고 싶다. 재벌이 은행 지배하는 게 경제 민주화인가?"
박근혜 후보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금산분리 완화 등 재벌 친화적 경제 정책을 주장한 점에서는 이명박 후보와 별 차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줄푸세'는 재벌 개혁을 중요한 축으로 삼는 최근의 경제 민주화 논의와는 결이 다른 주장이었다.
이 전 원장은 재벌 체제를 비호하는 관료, 언론, 보수 지식층 등으로 비판 대상을 넓혔다. 이 전 원장은 "보수주의 운동의 아교는 돈이다"라는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말을 인용해 이 세력을 비판했다. 재벌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기득권 카르텔을 공고하게 구축하고, 돈맛에 취한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지적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 원장은 "재벌을 비판하면 빨갱이라고 한다"며 "내가 아는 건 미국 경제학인데, 그럼 미국 경제학이 빨갱이(들의 주장이)라는 건가"라고 되물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재벌 지배구조 개혁은 한국 사회 기득권 구조 개혁 작업과 함께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 이 전 원장의 생각이다.
이 전 원장은 헌법 119조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119조 2항은 경제 민주화의 근거 조항으로 거론된다. 이와 달리 재벌 체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자유와 창의'를 규정한 119조 1항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이 전 원장은 "재벌 체제는 119조 1항을 침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전 원장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금융 시장에서 자금을 모아 성공하는 미국의 구글이나 애플 같은 사례가 최근 한국에 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재벌 체제 때문에 그런 기업이 생겨날 수 없는 게 오늘의 한국이라는 것이 이 전 원장의 생각이다. 헌법 119조 2항 이전에 1항부터 재벌 체제가 막아서고 있다는 판단도 이와 관련 있다.
이 전 원장은 "중소기업->중견기업->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좋은 일자리가 많이 창출되는데, 한국에서는 중소기업이 성장하기가 매우 어렵다"며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려면 건강한 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이 전 원장은 지난 몇 년 사이에 베스트셀러 저자로 떠오른 김난도 서울대 교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김 교수를 욕할 생각은 없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고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사회가 문제인데, 개인에게 '네 탓이니 너만 잘해라'라고 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지금은 사회를 바꿔야 할 때다. 고쳐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재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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