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임은 '최후통첩'이라 불리는 게임으로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경제학 개념을 뒤집어 놓았다.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은 "이 게임이 알려진 이후 수만 번이나 진행됐으나 대부분 A가 B에게 4000원을 주고 B는 이를 받아들이는 걸로 마무리된다"며 "이런 결과는 그간 경제학의 가정이 틀렸다는 걸 증명한다"고 말했다.
주류 경제학에서 말하는 대로라면 A는 B에게 1원을 주고 자신은 9999원을 가져야 한다. 반면, B는 1원을 거부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예스'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게임에서 이런 결과가 나온 예는 없다. 주류 경제학에선 이익만 고려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단순히 이익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 원장은 "물론 A가 B에게 2500원 이하를 줄 경우, B는 '노'라고 하기도 한다"며 "아무것도 못 받는다는 걸 알고도 '노'라고 하는 건,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응징을 하겠다는 인간의 심리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간은 불공정하다고 판단하면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응징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 원장은 사람들이 '재벌'에 분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재벌이 한국 경제를 부양하는 건 맞지만, 그 방법에서 공정하지 못한 점이 사람들을 분노케 한다는 이야기다.
지난 28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이 '수렁에 빠진 한국 경제와 재벌'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참여사회연구소와 참여연대, 시민경제위원회, <프레시안>이 공동 주관하고 5.18기념재단이 후원하는 '재벌 공화국을 넘어'라는 강좌의 일환이다. (☞바로 가기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 2012년 선택은?)
이 자리에서 정 원장은 사람들이 재벌의 착취 구조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는지 등을 이야기했다. 강연 내용을 요약했다.
▲ 정태인 원장. ⓒ프레시안(김봉규) |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성
지난 10여 년 동안 경제개혁연대 등은 주주이론(shareholder theory·기업의 주인은 주주이므로 임금과 이자, 지대 등을 뺀 나머지는 주주의 몫이라는 이론)에 입각한 소액주주운동으로 재벌의 횡포를 견제했다.
기업총수 등 지배주주가 소액주주를 약탈하는 것(tunnelling)을 막기 위해 주주대표 소송제, 이중 소송제, 사외이사제 등을 도입한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상호출자제한 기업규모의 완화,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금산분리 완화, 지주회사 설립요건 완화를 통해 재벌은 외환위기 이전보다 더 거대한 규모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을 보는 관점은 주주자본이론 보다 이해당사자 이론(stakeholder theory)으로 더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기업은 이해당사자 전체가 이익과 위험을 공유함으로써 더 효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따라서 기업은 주주뿐 아니라 이해관계자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 기업이 파산했을 때 주주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받는 노동자, 하청기업(공급기업), 지역주민, 그리고 소비자가 모두 이해관계자이다.
경제학자 조지 에컬로프는 '선물로서의 교환'에 주목했고 행동경제학은 그것이 인간의 상호성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했다. 쉽게 이야기해서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보답하고 악의에 대해서는 보복을 하는 게 상호성이다. 이에 자신의 준거임금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우 노력을 더 기울여 생산성이 높아지고 결국 투자자에게도 이익일 수 있다. 이는 선물게임, 공공재 게임 등 여러 실험에서 되풀이 확인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직장인이 이직할 경우, 자신이 받는 임금은 어떻게 결정될까. 대략 자신의 경력 등에 비춰 이직하는 곳의 동료와 비교해서 결정한다. 만약 비슷한 경력의 동료보다 임금을 적게 받으면 분노한다. 반면, 그보다 많이 받으면 더 열심히 일한다. 그게 상식이다. 이런 예는 임노동관계에서만 설명되는 게 아니라 다른 경제 관계, 예컨대 하청관계, 소비자 관계 등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재벌 문제 해결하기 위해선 수탈 구조 깨는 게 필요
물론 이론적으로 그렇다 해서 사회적으로 바로 실현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현재 재벌 구조는 하청 및 비정규직 노동자를 수탈하는 시스템이다. 기업총수가족과 가신, 지배주주는 나머지 이해당사자를 수탈한다. 그러나 수탈당하는 이해당사자인 1차 공급업체, 소액주주 등도 하청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를 수탈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금의 재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이런 수탈 구조를 깨뜨리는 게 필요하다. 무엇이 있을까. 기본적으로 수탈당하는 이해당사자들이 먼저 세력화해 착취하는, 즉 재벌과 대등한 교섭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재벌체제 내 정의를 위해서 다른 이해당사자들이 응징 수단을 구비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응징수단은 노조 조직과 파업, 하청기업은 공동 교삽단체 조직 등을 들 수 있겠다.
공유 이익의 분배 규칙을 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해 당사자이론의 가장 큰 단점은 구체적 제도 제시가 없다는 점이다. 각 이해당사자가 세력화되어 분배 규칙을 정할 수 있겠지만 현재처럼 세력화가 되지 않았을 경우, 규칙을 도입하는 게 필요하다.
최근 미국 경영학자 프리먼 등이 집대성한 공유자본주의론이 그 규칙이라 하겠다. 이것은 이미 미국에서 효과가 입증됐다. 특히 노동자가 자사 주식을 소유하는 노동자 주식소유 제도는 재벌기업뿐만 아니라 하청계열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
어쩌면 스페인의 몬드라곤이 한국 재벌개혁의 이상적인 모델일지도 모른다. 몬드라곤은 수직적 하청계열, 내부 금융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고유의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노사 간, 노노 간 양극화,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가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경제적 효율성을 달성하고 있다. 자본주의 기업에 유리한 제도 환경 속에서도 이런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반면, 협동조합 도시인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의 중소기업 산업지구는 수평적 네트워크 형태지만 자본시장에 의해 통제받는 전문 대기업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 본성이나 현실에 비춰 이상형이라고 할 수 없다.
재벌, 자원 독식하지만, 견제 부재
과거 한국이 발전국가 시대였을 때는 재벌과 경제시스템이 공생관계였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발전이나 브랜드 효과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재벌이 정치, 관료, 사법부를 다 장악함으로써 약탈적 기생관계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장하준 교수 등이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
대마불사라는 점에서 시민 역시 재벌의 현실적, 그리고 상상의 공생관계로서 볼모가 됐다. 생태계라는 관점에서 재벌의 폐해는 무엇보다도 대마불사에 의한 시스템 위기의 근원이 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자원을 독식하고 견제가 부재하다는 문제가 있다.
재벌, 특히 삼성은 사회 전 분야에서 지대추구를 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갖췄다. 의료민영화, 금융시장 자유화(자본시장통합법) 등이 그 예다. 결국, 재벌의 지대추구는 공공성이 강한 분야에 집중될 거다.
재벌은 한국의 모든 요소를 동원한 한국사회의 작품이다. 따라서 국민은 이를 규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특히 공멸의 위협을 제기히면 강력한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 이해당사자 각각의 권력화, 공유자본주의론 도입 등이 그 수단이 될 수 있겠다.
- '재벌 공화국을 넘어' 강연일정 1. 8월 28일 : 수렁에 빠진 한국 경제와 재벌(정태인) 2. 9월 4일 : 재벌 개혁, 왜 실패했나(이병천) 3. 9월 11일 : 재벌 지배 구조, 어떻게 바꿀 것인가(이동걸) 4. 9월 18일 : 재벌 퍼주기에서 공생의 경제로(김남근) 5. 9월 25일 : 토크쇼 '재벌 개혁과 경제 민주화, 2012년의 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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