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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여자축구, '1966년 기적' 재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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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북한 여자축구, '1966년 기적' 재현할까

[런던올림픽]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 예선 마지막 경기

8강 진출인가, 또 올림픽 조별 예선 탈락인가. 북한이 자랑하는 여자축구가 기로에 섰다.

북한(세계 랭킹 8위) 여자축구 대표팀은 2012 런던올림픽에서 미국(세계 랭킹 1위), 프랑스(세계 랭킹 6위), 콜롬비아(세계 랭킹 28위)와 함께 G조에 속해 있다.

북한은 '태극기 소동'(관련 기사 : 북한팀 소개 전광판에 인공기 대신 태극기 '소동')을 겪은 첫 경기에서 콜롬비아를 2-0으로 이겼다. 북한으로서는 경기를 지배하며 몰아붙인 끝에 얻어낸 기분 좋은 승리였다. 그러나 두 번째 경기에서 프랑스에 0-5로 참패하며 예선 탈락 위기에 놓였다. 프랑스가 북한보다 세계 랭킹에서 앞서긴 하지만, 북한이 5골 차이로 허무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현재 G조 1위는 미국(2승, 승점 6, 골득실 +5), 2위는 프랑스(1승 1패, 승점 3, 골득실 +3)이고 북한은 1승 1패(승점 3, 골득실 –3)로 3위다. 북한은 31일 오후 5시 15분(현지 시각, 한국 시각은 8월 1일 오전 1시 15분)에 미국과 예선 마지막 경기를 치른다.

런던올림픽 여자축구에 출전한 팀은 12개다. 4개 팀씩 3개 조로 나눠 예선을 치러 8강 진출팀을 가린다. 각 조 1-2위 팀은 자동으로 8강에 진출하며, 남은 2장은 각 조 3위 중 골득실과 다득점에서 앞선 2개 팀에 돌아간다.

북한이 절망적인 처지에 놓인 것은 아니다. 8강 진출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럼에도 북한이 위기에 놓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마지막 경기 상대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미국 여자축구 대표팀은 세계 최강으로 꼽힌다. 여자축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96년 이후 치러진 4번의 올림픽에서 3번 우승하고 1번 준우승했다. 1991년부터 6번 개최된 여자월드컵에서도 모두 4강에 올랐고, 그중 2번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미국은 이번 대회에서도 2연승을 거두며 탄탄한 전력을 과시했다.

탈락과 진출의 갈림길에 서 있는 북한으로서는 마지막 경기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같은 시간에 열리는 프랑스-콜롬비아 경기 결과에 따라 변수가 다양해지기는 하지만, 북한이 8강 진출의 가능성을 높이려면 최소한 비겨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상대가 최강 미국이라는 점에서, 북한의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북한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첫 경기를 이긴 후 연이어 2경기를 지면서 예선 탈락한 아픈 기억도 갖고 있다.

金 3개…올림픽 초반 선전에 신난 북한

29일(현지 시각) 하루 동안 유도와 역도에서 각각 1개씩의 금메달을 따내며 세계를 놀라게 했던 북한은 30일에도 기세를 몰아 금메달 하나를 추가했다. 남자 역도 62㎏급에 출전한 김은국이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중국의 라이벌 장지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한 것.

경기 전부터 장지의 가장 유력한 라이벌로 거론됐던 김은국은 접전이 될 것이란 예상을 깨고 인상 3차에서 세계 타이기록인 153㎏을 들어올려 140㎏을 든 장지를 압도했다. 용상에서도 174㎏을 드는데 성공해 결국 합계 327㎏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반면 장지는 김은국의 기록을 추적하려는 시도도 변변히 못한 채 메달권 밖으로 밀려났다. 역도 부문의 절대 강국인 중국 선수가 자국에 경제를 크게 의존하는 북한 선수에 패배한 셈이다.

북한은 이로써 대회 시작 일주일도 안 돼 금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는 예상 밖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북한 선수단의 이러한 초반 돌풍은 북한 주민들에게도 힘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30일 "첫 텔리비죤 방영을 통해 자기 나라 선수의 메달 획득 소식에 접한 평양 시민들과 조국에 체류 중인 재일동포들 속에서 기쁨의 목소리가 올랐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TV>는 29일과 30일 각각 밤 10시 30분과 10시에 올림픽 개막식과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안금애의 경기장면을 내보냈다. 31일에는 오후 9시 30분경부터 방송 일정이 잡혀 있다. 북한 매체들은 세계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북한 선수들의 소식을 전하면서 '자신의 몸무게 3배를 들어올렸다'라고 엄윤철의 경기를 칭찬한 <AP>의 반응을 소개하기도 했다. 북한이 올림픽에서 올린 최고 성적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땄던 금메달 4개, 동메달 5개다. / 김봉규 기자


넘버원 미국, 만만찮은 북한…'AGAIN 1966' 가능할까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미국이 한 수 위이지만, 북한의 저력도 만만치 않다. 북한 여자축구는 강인한 체력과 조직력, 정신력을 바탕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97년 아시아여자선수권대회 준우승을 시작으로 여자아시안컵에서 세 차례(2001년, 2003년, 2008년) 우승했다. 2006년에는 20세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중국을 5-0으로 대파하며 우승했다. 이것은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 대회에서 아시아 국가가 우승한 최초의 사례다.

이에 더해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은 2008년 17세 이하 여자월드컵도 우승했다. 이때 결승전에서 미국을 만나 연장전 끝에 2-1로 눌렀다.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은 같은 해 열린 20세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2연패를 노렸으나, 결승전에서 미국에 1-2로 지면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북한과 미국은 여자월드컵에서도 격돌했다. 2007년 중국에서 열린 여자월드컵에서 북한과 미국은 2-2로 비겼다. 북한은 이 대회에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2011년 독일에서 열린 여자월드컵에서도 두 팀은 맞부딪쳤다. 이 경기는 미국의 2-0 승리로 끝났다.

▲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2012 런던올림픽 조별 예선 첫 경기에 앞서 국가를 부르고 있다. ⓒAP=연합뉴스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은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뛰었던 선수를 이번 대표팀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선수들을 대폭 교체했다. 2011년 독일 여자월드컵에서 선수 5명의 금지 약물 복용 사실이 드러나고, 그로 인해 2015년 여자월드컵 대회 출전권을 잃으면서 실추된 위상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또한 그동안 월드컵과 올림픽에서 유독 약했던 징크스를 깨겠다는 뜻도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여자축구 대표팀이 북한의 자랑거리라는 점과도 관련 있다. 북한에서 여자축구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것으로 전해진다. 2006년 20세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우승하자, 이 여자축구 대표팀이 우승하기까지 거친 과정을 그린 5부작 드라마 <우리여자축구팀>이 텔레비전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당시 여자축구 대표팀이 귀국할 때, 북한 고위층이 공항에 마중 나왔을 뿐만 아니라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노력영웅' 등의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콜롬비아를 상대로 한 예선 첫 경기에서 2골을 터트린 김성희가 바로 이 대회 우승의 주역 중 하나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은 마지막 경기에서 사력을 다할 전망이다. 이에 더해 상대가 미국이라는 점도 경기 분위기를 한층 달굴 가능성이 있다. 북한과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총부리를 마주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미국과 전면전을 치른 북한의 여자축구 대표팀이 조별 예선에서 탈락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에서 미국과 경기를 치른다. 북한과 미국이 1998년 미국-이란 월드컵 경기처럼 치열하지만 불필요하게 거칠지는 않은 경기를 치를 수 있을지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아울러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이 '1966년의 기적'을 재현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신의근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 감독은 올림픽이 개막하기 전인 24일,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 대표팀이 보여준 모습을 재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당시 북한은 그때까지 월드컵에서 두 번이나 우승했던 이탈리아를 누르고 아시아 최초로 8강에 올랐다.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이 1966년 북한 남자축구 대표팀처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지 지켜볼 일이다.

'월드컵 10대 이변' 1998년 미국-이란 경기

정치와 스포츠는 서로 다른 영역이기는 하지만, 국가 대항전에서는 이 둘의 거리가 급격히 좁아지는 경향이 있다. 북한처럼, 미국과 역사적으로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조별 예선전으로 치러진 미국-이란 경기도 그중 하나다.

미국과 이란이 같은 조에 편성되자, 언론에서는 대회 시작 전부터 두 팀의 경기를 '전쟁'으로 묘사했다. 다소 섣부른 이런 전망이 나온 것은 미국과 이란이 얽힌 역사의 무게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흔히 미국-이란 관계 악화와 관련해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쫓겨나고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점거 사건이 발생한 것만 떠올리지만, 뿌리는 그보다 깊다.

1951년 '이란인을 위한 석유'를 주장하며 석유 회사를 국유화했던 모사데크 총리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53년 쿠데타로 쫓겨났다. 이 쿠데타의 배후에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모사데크가 물러난 후 이란에서는 팔레비 왕조의 독재가 계속됐는데, 미국은 팔레비 왕조를 후원했다. 물론 풍부한 석유 자원과 호르무즈 해협의 전략적 가치 때문이었다. 이 시기 이란에서는 사바크(SAVAK)라는 비밀경찰을 앞세운 백색 테러가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이 때문에 국제 인권 단체에서는 이란을 '최악의 인권 국가 중 하나'로 규정했고, 이란은 국제사회에서 "미국 헌병"이라는 조롱을 당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란은 반미 이슬람 혁명 후 8년간(1980-1988) 이라크와 전쟁을 치렀다. 그런데 미국은 이란 혁명 후, 사담 후세인이 이끌던 이라크를 후원했다.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상한 이란으로서는 미국을 곱게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감정이 쌓인 이란과 미국이 월드컵에서 맞붙게 되자 '전쟁'이라는 수식어가 나오게 된 것이다. 경기 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화해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발표할 정도였다. 예상대로 경기는 치열했다. 이란 주장 알리 다에이가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미국에 이기는 것"이며, 그 때문에 16강 진출을 위해 치러야 할 다음 경기(독일전)를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경기는 2-1, 이란의 승리로 끝났다. 이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는 100만 명이 몰려나왔고, 선수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매우 치열하긴 했지만 우려와 달리 지나치게 거칠게 경기가 전개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경기 시작 전 이란 팀은 미국 팀에 꽃을 선물했다. 이 대회에서 22명이 퇴장 당했지만, 이 경기에서 그라운드 밖으로 쫓겨난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미국 선수 1명과 이란 선수 2명이 경고를 받았을 뿐이었다. 이 경기 후 미국과 이란은 그해 FIFA의 페어플레이 상을 받았다(북아일랜드와 공동 수상).

CNN은 2010년 이 경기를 '월드컵 역사상 10대 이변' 중 하나로 선정했다. '10대 이변'에는 1966년 북한-이탈리아 경기도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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