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카톡! 소리와 함께 그녀의 갤럭시 노트가 진동한다. A양은 휴대폰을 집어 들고 킬킬대다 삼성 지펠 냉장고를 열고 당근을 꺼낸다. 문득 더위를 느낀 그녀는 당근을 입에 물고 일명 '김연아 에어컨'이라 불리는 삼성의 스마트 에어컨을 켠다.
찌는 듯이 더운 여름 오후, 갖가지 편리한 기기들에 둘러싸인 대부분의 현대인이라면 아마 A양과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대기업에서 생산되는 전자제품들은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TV, 에어컨과 함께 자라난 20대 젊은이들은 더하다. 심심하니까 컴퓨터로 인터넷 서핑을 하고, 친구와 메시지를 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더우니까 에어컨을 켜고, 배고프니까 냉장고를 열어 음식을 찾고….
하지만 이러한 전자제품들을 누가 어떻게 만들고, 그 과정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는가? 물론 내 돈 주고 사 쓰는 물건일 뿐인데,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까지 알아야 하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노동력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그 대가로 지불해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어떨까? 그것도 안전하고 깨끗하다는 '청정산업' 이미지, 노동자들이 아무 불만도 없다는 '무노조 신화'이미지를 강요하는 기업에서 생겨난 일이라면?
이것은 삼성 반도체 백혈병 문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몇 년 전에 방영된 인상적인 다큐멘터리를 놓친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겠다. 일부 방송국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프로그램, 보도자료 제작을 시도했으나 상부 지시로 중단되었다고 한다. 삼성의 언론장악 때문에 이 문제는 그 심각성만큼 크게 다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 반도체 사건에 대한 르포만화 <사람 냄새>, <먼지 없는 방>이 진보 신문에조차 지면광고를 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현실의 일부를 보여준다. 덕분에 르포만화 <사람냄새>와 <먼지 없는 방>은 언론사 광고 없이 SNS만으로 홍보되고 있다.
르포란 흥미나 감동을 위해 허구를 더하는 형태가 아니기에 100% 현실을 기반으로 한 고발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만화'라는 형식으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은 큰 의미가 있다. 만화란 항상 대중들에게 사랑받아온 매력적인 장르이기 때문이다.
두 작품 중 <사람 냄새>는 삼성 반도체에 다니다 백혈병으로 생명을 잃은 고 황유미 씨와 아버지 황상기 씨를 다루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먼지 없는 방>에 비해, 거시적인 관점으로 삼성 백혈병 문제를 다루었다.
꼬박 세 시간을 달려간 구미에서 삼성이 사람냄새 나는 기업이 되길 바란다는 만화가 김수박 씨를 만났다.
"드디어 스마트폰을 쓰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늦었죠."
막 비닐을 벗겨낸 상품처럼 모든 것이 새것인 구미 신시가지에서 그를 보았다. 그는 한적한 카페에 자리를 잡자마자 삼성의 로고가 박힌 휴대폰을 꺼내 보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삼성 반도체 문제, 현재 다뤄야 할 시급한 문제다"
김다은 : <사람 냄새>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 다니다 백혈병에 걸린 사람들과 남은 유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람 냄새>가 같은 소재를 다룬 <먼지 없는 방>과 동시에 출간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의도된 기획이 있었나?
김수박 : 처음부터 정해진 기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있었고, 책 <삼성을 생각한다>가 출판되어 한창 이슈가 되던 시기였다. 그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중 보리출판사의 윤구병 씨로부터 삼성에 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다뤄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김다은 : 많은 작가들 중에, 본인과 김성희 작가가 그런 제안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전에 어떤 활동들과 연관이 있는가?
김수박 : 그 전에 만화가들이 공동으로 작업한 <내가 살던 용산>과 그 후속편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출간된 바 있다. 둘 다 용산 참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작품인데, 김성희 씨와 내가 다룬 부분이 언론에서도 잘 건드리려 하지 않는 부분이었다. 다룬다 해도 직접적으로 말하려 하지 않는, 굉장히 민감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제안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한다.
김다은 : 그 민감한 부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혹시 물어도 되나?
김수박 : 사망의혹 부분이다. 용산에서 죽은 사람들은 부검 결과 불에 타 죽었다는 결론이 났는데 거기에 대해 의혹 제기가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다. (그 두 작품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미심쩍은 부분들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윤구병 씨가 우리 두 사람을 불렀을 때 그 점을 언급하며 '당신들은 뇌관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삼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같이 작업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김다은 : '삼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막연한 제안이 삼성 반도체 이야기로 발전된 이유와 과정이 궁금한데?
김수박 : 제안을 받고 돌아온 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삼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조사했다. 조사해 보니 그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반도체 문제였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노동자 측인데 고용주가 문제를 기피하고,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공하지 않으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었다. 또 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이것이 지금 당장 해결이 되어야 하는데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 현재 '이 시점'의 다급한 문제라는 뜻이기도 하다. 삼성 반도체가 '현재'의 문제, 즉 누군가 나서서 널리 알리면 조금이라도 해결에 힘을 보탤 수 있는 문제라는 것에 김성희 씨와 뜻을 모았다.
김다은 : <먼지없는 방>에 반도체 생산 과정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반면 '사람냄새'에는 삼성에 대한 인식 이야기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김수박 : 삼성 반도체 문제는 앞서 말했다시피 '현재'의 다급한 사안이기 때문에 이것이 제대로 이슈화 되고 많은 사람들이 나서준다면 해결점을 찾을 수도 있는 문제다. 아무리 삼성이 크다 한들 전 국민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작품을 진행하기 전 이 점을 중점으로 두고 거꾸로 질문해 보았다. '왜 이 사안이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는가'라고. 그 답은 결국 이 사안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르고 있고,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을까? 이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이 '삼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였다.
"삼성이 주입시킨 과장된 환상이 왜곡된 인식 만들었다"
김다은 : 삼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란 어떤 것이며,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김수박 : 삼성이 국민들에게 주입시키는 과장된 환상과 위기의식 때문에 왜곡된 인식이 생기는 거다. 삼성은 자신들이 '어려운 시절을 극복시켜준 은인'이며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는 이미지를 강조한다. 또 '삼성이 곧 대한민국이고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도 망한다'는 말도 안 되는 위기의식을 심으려 한다. 삼성이 뭐하는 곳인가? 기업이다. 기업이면 물건 파는 곳이 아닌가? 대한민국이 물건 만들어 파는 곳 하나 망한다고 망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삼성이 곧 우리나라 경제이며,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류이다. 삼성이 어떤 식으로 덩치를 불리는지 아나? 자기들한테 하청 주는 중소기업이 성장할라치면 다른 기업들과 단가 경쟁을 붙인다. 그렇게 하면 그 기업은 성장할 수가 없다. 성장에 필요한 자본과 에너지를 단가를 낮추는데 사용하니까. 그렇게 해서 그 기업이 죽으면 삼성은 그걸 주워 먹고 더 비대해진다. 경제의 성장 가능성을 낮추는 것이다. 또 이런 식의 덩치불리기는 우리나라 내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단가경쟁을 중국이랑 붙인다고 생각해봐라. 그건 원가부터가 아예 상대도 되지 않는다. 이러고도 삼성이 곧 우리나라 경제라고 할 수 있는가?
김다은 : 아무리 삼성에 대한 인식이 그렇다 한들, 이 사건은 100명도 넘는 사람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가 아닌가? 아무리 그 기업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존재한다 해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정도가 심한 것 같은데?
김수박 : 삼성에 대한 인식과 반도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게만 연결돼 있지 않다. 이것은 이중구조다. 삼성이 곧 우리나라고 우리나라 경제이므로 일부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게 첫째, '병 걸리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돼 애써 퍼뜨려놓은 긍정적 인식이 흐려질까 봐 삼성이 반도체 문제를 기피하는 것이 둘째다.
김다은 : 그렇다면 삼성이 100명이 넘는 사람의 생명을 저버리면서까지 긍정적 인식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수박 : 삼성이 너무 커지다 못해 이제는 국민들에게 존경을 요구하는 것 같다. 일면 이해한다. 존경받고 싶다는 욕구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니까. 하지만 우리가 삼성의 물건을 즐겨 구입하고, 또 그 물건의 디자인과 성능이 좋다고 삼성을 존경하는가? 그렇지 않다. 존경이란 그런 게 아니다. 삼성이 정말 존경받고 싶다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들을 위해 일하다 병에 걸리고, 생명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산업재해로 인정해 정당한 보상을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 냄새>는 삼성을 '까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삼성이 정말 존경받는 기업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온 진심어린 제안이다. 삼성이 정말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냄새 나는 기업이 되었으면 한다.
김다은 : 장르가 르포만화다 보니 유가족들과 인터뷰를 많이 했을 것 같다. 인터뷰를 포함해 작품을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무엇인가?
김수박 : 사실 처음에 계획했던 기획의도, 틀 같은 것들이 유가족들과의 인터뷰를 거치면서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인터뷰라는 것이 원래 듣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분들과 이야기를 할 때 계획한 틀에 맞는 이야기들, 다루고자 하는 내용에 맞는 내용들을 끌어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분들과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고 그분들의 슬픔을 눈앞에서 보다 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 계획하고 구상했던 모든 것들을 다 버렸다. 그리고 그 분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들, 그 분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완전히 다시 작품을 구상했다. 제목 <사람 냄새>만 해도 삼성에서 딸을 잃은 황상기 씨가 한 말에서 나온 거다.
▲ 고 황유미 씨와 아버지 황상기 씨. ⓒ프레시안 |
김다은 : 책에서 삼성 얘기만큼 많이 나오는 게 황상기 씨가 대접하는 '송이버섯' 얘기인데, 이것이 '사람냄새'에 대한 비유인가?
김수박 : 그렇다. 일단 송이버섯 자체가 특유의 깊은 향을 지닌 음식이다. 또 황유미 씨가 병에 걸리고 난 후, 집에 방문한 삼성 관계자에게 황상기 씨가 대접하는 음식이 송이버섯이다. 그가 대접할 수 있는 최고의 음식, 남들 보기에는 보잘것없어 보일지 몰라도 그에게는 최고로 귀하고 소중한 음식이 이 송이버섯인 것이다. 이것은 삼성이 스스로의 거대함에 짓눌려 보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가치이다. 이처럼 송이버섯은 책 제목에 대한 비유인 동시에 작품을 이끌어가는 강력한 모티브이다.
김다은 : 이 문제가 생명의 싸움이라고 책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 문제가 언젠가는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가?
김수박 : 물론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삼성이 백혈병 문제를 산재로 인정하지 않고 덮으려 하는 이유는 이미지 문제도 있지만 비용 문제도 있다. 모든 피해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주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슈퍼볼 광고에 쏟아 붇는 몇 천억, 이미지 유지에 쏟아 붓는 엄청난 돈을 생각해 보라. 그 돈이 이 돈(산재를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비용)보다 적다. 그리고 삼성의 이사들이나 그 밖의 다른 고위직들은 이 사건에 대해 다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자식들에게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겠는가? 그들이 정말 자신들의 양심의 소리, '심장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 문제는 해결돼야 한다.
김다은 : 만화가들이 이렇게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수박 : 세상이 원이라면 작가란 원의 테두리에 서 있는 사람이다. 먹고 사는 일을 포함해 원 안에서 일어나는 수만 가지 일들과 작가는 적당히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일반인들이 세상살이에 지쳐 못 보고, 안 보고 넘어가는 것들을 작가는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또 원 안에서 무언가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테두리에서 조망하는 작가가 목소리를 내 위험신호를 알려줘야 한다.
잠수함의 토끼 이야기를 혹시 아나? 잠수함에는 토끼를 한 마리씩 넣어 가는데 수압이 너무 높아지면 토끼가 죽는다. 죽음으로써 위험신호를 알리는 것이다. 작가 역시 그런 존재다. 요즘 세상이 억압적인 공기로 차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삼성 반도체 뿐 아니라 천안함 사건, 용산 참사 사건도 그렇고 상식적으로 분명히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사람들은 쉬쉬하고 넘어가 버린다. 작가들이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바로 그거다. 세상이 뭔가 위험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거다.
김다은 : 앞으로도 이렇게 사회문제를 다룬 르포만화 집필계획이 있는가?
김수박 : 현재로서는 확정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운명론을 믿는 편이라 창작을 위해 소재를 일부러 찾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삶을 살아가다 내게 다가오는 것, 내 눈에 밟히는 것이 있으면 작품으로 만든다. 다음에 어떤 작품을 하게 될지는 나 자신도 궁금하다.
인터뷰를 하기 전,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사람 냄새>? 유명해. 요즘 트위터에서 삼성 까는데 자주 인용되는 만화야.'
'삼성을 까는 만화'라는 이미지, 삼성로고를 이용한 책 표지 디자인부터 SNS에 실제로 올라오는 인용글들, 백혈병 피해자만큼이나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삼성 자체의 구조와 문제 등, <사람냄새>가 이런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이 큰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만화가 김수박이 말했듯, 이 작품은 단순히 '삼성을 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김수박은 삼성 반도체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알리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
다만 그는 이를 위해 거시적인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노동자의 안전보다 완벽한 제품 생산이 중요시되는 작업환경, 사람의 생명보다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대기업, 그가 파고 들어간 것은 이런 점들이다. 그의 말대로 이 작품, <사람 냄새>는 삼성에게 국민들의 진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인간미 있는 기업이 될 것을 '제안'한다. 이 제안이 과연 유효할까? 그것은 지켜볼 일이다.
삼성이 진정한 의미의 '국민기업', '존경받는 기업'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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