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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상상력으로 신체를 해방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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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상상력으로 신체를 해방시켜라"

[메이데이 총파업, 도시를 멈추고 거리로] 예술가의 총파업

총파업은 공장을 정지시키는 일반적인 파업과 다르다. 총파업은 더 나은 조건을 요구하기 위한 것도, 교섭을 위해 위협하는 전략도 아니다. 오히려 총파업은 현 체제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현 사회 체제 자체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 체제에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판단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2012년 5월 1일 도시를 멈추고 거리로 나가자!" 서울광장을 점령한 '서울점령자들'이 제안하고 30여개의 워킹그룹이 달라붙어 메이데이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날 비정규직, 백수, 실업자, 감정노동자, 예술가, 디자이너, 시인, 작가 등 다양한 목소리와 요구를 가진 이들이 거리로 나올 것이다. 'No Work, No School, No Housework, No Shopping'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5월 1일 하루를 도시를 멈추는 날로 만들기 위함이다. 4일 간 '메이데이 총파업' 연재를 통해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한다. (☞ 메이데이 총파업 블로그)

1. 시인의 소심한 사보타지

나는 어느 날 시를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나는 당시 한 연구소에 고용된 계약직 연구원이었다. 그날은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 와중에 시상이 떠올랐다. 노트를 꺼내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연구소에 도착했다. 회의실에 들어갔다. 회의가 시작됐다. 그러나 시상이 계속 떠올랐다. 나는 시를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회의 도중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옆방의 컴퓨터 앞에 가서 노트의 메모를 옮겨 적고 첨삭하며 시를 완성했다. 다시 회의실에 돌아왔다. 그런데 맘에 걸리는 부분도 떠오르고 또 다른 시구도 떠올랐다. 갑자기 전화가 온 척 하며 "여보세요… 아, 네…제가 지금 회의 중인데요… 아, 급하시다고요…" 이러면서 옆방으로 달려가서 다시 시를 고쳤다. 이러기를 몇 번을 반복 하면서 회의를 거의 훼방 놓다시피 하면서 시 한편을 최종적으로 완성했다.
이 에피소드는 단순히 관료제적 규율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정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신체적 활동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회의 시간에 테이블 앞에 고정돼 있었어야 할 나의 신체,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자세로, 그들의 말을 받아쓰고,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또 손을 들어 의견을 개진해야 했을 나의 신체는 시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산만하게, 안절부절, 일어났다 앉았다, 공간적 안정을 흩뜨리고, 시간의 흐름을 중지시키면서 다른 사람들의 신체, 회의라는 신체, 구획된 공간과 시간이라는 신체 전체에 대하여 의도하지 않은 사보타지를 수행했던 것이다(물론 회의가 끝나고 윗분으로부터 왜 이리 정신산란하게 하냐는 지적을 받은 나는 고개 숙여 사죄해야 했다).

2. 동물들에게 파업은 가능한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통합적으로 조직화되지도 않고 위계화되어 있지도 않다. 이제 개인 또는 집단의 몫과 정체성은 관료제적 질서 안에서 교섭되고 정의되지 않는다. 사회는 무수한 조직과 영역들로 파편화되어 있다. 각각의 조직과 영역에서는 1%의 중심 권력과 99%의 주변부가 갈라지는, 승자독식의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같은 사회의 조각들은 기능적 네트워크로 연결된다. 이윤과 성장은 더 이상 노동력에 의존하지 않으며 네트워크를 타고 흐르는 금융자본과 상징조작 테크닉에서 나온다. 기업은 생산력 향상보다는 구조조정과 혁신이라는 외양 꾸미기로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 데 주력한다. 산 노동은 죽은 노동으로 대체되고 있다. 인적 자원이란 장인적 능력을 가진 인재가 아니라 스펙이 훌륭하고 적응 능력이 뛰어나고 매력적이고 개성 있는 존재를 뜻한다. 이들은 생산하는 자가 아니라 자본의 홍보 모델이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두 종류의 인간종이 양산된다. 시스템 안에서는 '살게 만들어지는(to make live)' '노동하는 동물'이 양산되고 시스템 바깥에서는 '죽게 내버려지는(to let die)' '잉여'가 양산된다.
이 두 인간종(種)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근본적으로 박탈당한다. 앙드레 고르는 노동자의 지식과 기술이 아니라 주주단과 채권단의 의사결정, 컨설턴트의 자문이 기업의 운명을 결정하는 상황에서 노동자의 '자주관리' 자체가 불가능해졌다고 이야기한다. "무엇을 자주관리해야 하나?…'현장의 노동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일로만 구성되었고', '기계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에 고립감과 고독감이 동반하는' 유리 제작공장이나 플라스틱 제작공장에서 주주관리가 무엇을 의미할까?"(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이현웅 옮김, 생각의 나무, 2011, 207~208쪽)

또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정일준 옮김, 새물결, 2008)에서 산업예비군과 잉여의 차이를 지적한다. 관료제적 자본주의 체제의 산업예비군에게 실업은 비정상적이고 일시적인 상태이다. 이들은 자본의 필요에 의해 다시금 고용상태로 복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경제 체제의 잉여에게 실업은 정상적이고 항구적인 상태이다. 그들이 간혹 시스템 안으로 채용될 수는 있겠지만 얼마 안가 축출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주관리는커녕 임금교섭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제기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현대의 인간종은 자본주의 기계의 작동과 사회의 지배 질서에 도전하는 행동으로서 파업을 실행할 수 있는가? 오로지 구매력과 교섭력의 향상에 골몰하는 노동하는 동물들이 어떻게 시스템을 정지시킬 수 있단 말인가? 아예 시스템으로부터 배제된 잉여적 존재들은 어떻게 시스템을 정지시킬 수 있단 말인가?

3. 통치당하는 유희적 신체

타다시 우치노는 현대에 이르러 '규율권력'은 더 이상 사회 전체를 관통하며 작동하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동경의 지하철의 젊은이들의 신체적 상태를 살펴보자. 그들의 신체는 많은 경우 "느슨하게(loose)" 훈육돼 있지 않은(undisciplined)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체가 "느슨한" 것이 그들의 개인적 선택이나 의지 때문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그들의 느슨함은 일본의 권력과 사회적 제도라는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느슨한" 신체들은 "느슨하지 않은"-훈육된-신체들을 요구하는 제도와 사회에 대한 저항의 제스처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권력, 제도, 사회가 그들의 신체를 "느슨하게" 내버려뒀기 때문에 단순히 "느슨한" 것이다(Tadashi Uhino, "From Humanism to Post-himanism and Back?", Asia ICH Performing Arts Forum, 2011. 11. 25. Hong Kong).
일본 지하철 젊은이들의 "느슨한" 신체는 바로 훈육되지 않은, 어떤 기능도 부여받지 못한 채, 시스템 바깥으로 내버려진 잉여의 신체이다. 말 그대로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비활성 신체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잉여의 비활성 신체가 권력과 제도와 사회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필경사 바틀비'처럼 시스템 안에서 끈질기게 '위무위爲無爲'하면 모를까 이미 시스템 바깥으로 배제된 잉여의 '무위'는 시스템의 작동을 중단시킬 수 없다.
그런데 타다시 우치노는 "느슨한" 잉여의 신체를 재활성화시키기 위해 젊은이들에게 예술 제도를 체험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일본 젊은이들의 "느슨한" 신체를 보건대] 규율 제도로서의 일본 교육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느슨한" 신체들로 하여금 다른, 그러나 명백히 더 유희적인 형태의 제도, 즉 연극과 무용을 체험하게 하자." 요컨대 "느슨한" 신체를 활성화시키되, 유희적으로, 대안적 제도인 예술을 통해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위도 아니고 기능 수행도 아닌 유희로서의 예술 제도는 내버려진 잉여의 신체를 저항적 신체로 재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타다시 우치노는 이런 질문은 던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예술 제도 그 자체가 시스템의 중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시스템의 작동에 기여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많은 예술가들과 예술단체들이 국가와 시장의 후원을 받아서 "유희적 신체"를 발명하고 있음을. 이 같은 발명 행위들이 국가와 시장의 관리에 의해 효과적으로 통치되고 있음을.

이때 국가와 시장의 규율권력은 예술적 표현을 억압하고 검열하지 않는다. 규율권력은 "유희적 신체"를 "훈육된 신체"로 억지로 전환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규율권력의 무능력이나 오작동을 뜻하지 않는다. 타다시 우치노는 훈육과 경영을 구별하고 있는데, 사실 경영이야말로 훈육의 자기진화, 규율권력이 드디어 꺼내든 최첨단 무기라 할 수 있다. 이제 규율권력은 예술이 활성화하는 신체가 어떤 신체이건, 그 신체가 극장에서 공연되건, 박물관이나 혹은 거리에서 전시되건, 그것이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황금을 축적하고 그 광택을 내는데 일조하도록 관리하고 운영하고 판매하는데 노력을 기울인다. 이 노력은 너무나 치밀하고 심지어 경탄스럽기까지 하다.

미국에서 1989년에 일어난 '메이플소프 사건'이 전개된 양상을 살펴보자. 애초에 메이플소프의 게이 포르노적인 '유희적 신체'가 촉발했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이슈는 몇 년 간의 논란 끝에 경영적 문제(managerial problem)로 정리가 됐다. 그렇다. 문제는 경영이었다! 1990년대 이후 방만한 미국 예술계의 질서를 잡은 이들은 우파 정치인이나 보수적인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컨설턴트였다. 특히 2000년대 이후 현대 규율권력의 숨겨진 무기인 경영은 과거의 "유희적 신체"가 홀로 해낼 수 없었던 기적을 선보였다. 그것은 설치 불가능한 것을 설치하고(크리스토의 <게이트>, 2005년에 뉴욕 센트럴파크에 설치) 판매 불가능한 것을 판매했다(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의 <"무제"(마르셀 브리언트의 초상)>, 2010년에 4백60만 달러에 판매).

4. 예술가의 파업

예술가의 파업은 "느슨한 신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잉여 예술가들의 수동적 무위와는 상관이 없다. 이때 무위는 이미 배제된 신체의 비활성화 상태이기에 시스템의 작동을 훼방 놓을 수 없다. 또한 예술은 "유희적 신체" 그 자체로서 시스템을 중단시킬 수도 없다. 오히려 현대의 국가와 시장은 경영이란 비장의 무기로 "유희적 신체"를 가치 증식의 도구로 삼는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파업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잠시 과거의 예술가들 이야기를 해보자.

노동자재해보험국에 근무했던 카프카나 영어교사였던 말라르메는 일하느라 작업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잠을 자야할 밤에, 즉 휴식을 통해 노동력을 재생산해야 할 시간에 시와 소설을 썼다. 그들은 야간의 글쓰기를 통해 '피곤하면서 활동적인' 신체, '종속됐으면서 자율적인' 신체를 발명할 수 있었다. 자크 랑시에르는 이러한 글쓰기의 연원이 엘리트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의 야간 글쓰기 활동에 있었다고 말한다. 19세기 전반에 등장했던 노동자의 야간 글쓰기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야간의 부가행위는 노동자 실존의 틀 자체를 해체시키고 낮과 밤, 생산과 재생산의 순환을 와해시킨다는 것이다. 노동 종류 후 다른 생각 없이 피로로부터 회복되는 수면의 시간을 갖는 신격화된 질서를 깬다는 것은 동시에 노동자 실존의 조건들과 사회적 질서의 토대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재생산적 인간들에게 있어서 고유한 시간, 행동방식, 존재방식, 말하는 방식 밖으로 노동 신체들이 이탈함을 의미했었다… "엉망진창이 된" 하루 일과와 시작(詩作)을 위해 수면시간을 줄여야 하는 구속감을 진술하는 청년 말라르메의 편지는, 노동의 낮과 사유의 밤을 계속해서 유지시켜야 한다는 급박한 사태에 빠져 있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썼던 편지들을 모사하는 것처럼 보였다(자크 랑시에르,<문학의 정치>,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09, 161~162쪽).

자율적 활동으로서의 글쓰기는, 생산과 재생산의 고정된 주기, 신체가 묶인 시간과 공간, 지배 질서가 신체들에게 부과한 말과 몸짓의 한계로부터 신체를 해방시킨다. 이렇게 해방된 신체의 감각, 사유, 말이 지배적 공간, 시간, 기능, 관계를 점유하고 중지시킬 때 글쓰기는 파업과 동일한 정치를 수행한다. 그래서 자크 랑시에르는 시인에 대해 묘사하면서 "사회를 마주보고 파업 중"이라는 표현을 썼는지도 모른다. 말라르메와 카프카, 프롤레타리아에게 야간이라는 시간은 시스템으로 재진입하기 위한 휴게소, 대기소로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야간 휴게소, 대기소를 자신만의 공방으로, 작업실로 전유했다. 그들은 그곳을 점거한 채 시스템을 마주보고 시와 소설을 쓰면서, 사회적 파업을 수행하면서, 행복하게 소진돼 갔다.

그렇다면 현대의 예술가는 어떤가? 그저 불행하게 소진(burn out) 되는 일만 남은 건 아닐까? 일이 없어 시간이 많을 때는 광막한 불안으로 소진되고 일에 쫓겨 시간이 없을 때는 숨 막히는 공포로 소진되는 것 아닌가? 이런 지경이라면 결국 현대의 예술가가 사회를 마주보고 수행하는 파업이란 시스템으로부터 정규적/정상적으로 배제된 상태, 혹은 시스템에 의해 비정규적/비정상적으로 과잉착취 당하는 상태에 대한 거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시스템의 배제와 착취 기제가 예술가에게 부과한 실존으로부터 해방된 신체를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유롭고 활동적인 신체의 발명, 과잉착취에 대한 보이콧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예술가 파업의 스펙트럼은 다양할 수 있다. 예술가들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행동들도 파업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능동적 무위(하루 종일 캔버스 바라보며 작업 구상하기, 하루 종일 시 한 줄 쓰기, 아마추어처럼 작업하기, 지나치게 진지한 동료 예술가를 보면 "왜 그래, 프로처럼?" 하고 놀리기), 예술에 대한 자신의 열정이 혹시 성공하려는 욕망은 아니었던지 산책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 억지로 해야 했기 때문에 미뤄왔던 일을 가뿐히 한 번 더, 아니면 영원히 미루기 등등. 또한 예술가들은 조금 더 관계적인 활동으로 옮아갈 수 있다. 실제로 자신의 예술 창작 활동이 정작 '소외된 노동'이 되어버렸을 때, 어떤 예술가들은 '예술 동호회'에 가입하기도 한다. 그 동호회에서 예술가는 자신처럼 불행한 동료 예술가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행복해 한다.

요컨대 예술가의 파업은 자본과 권력의 기능 바깥에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하려는 일체의 노력으로,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활동들로 구성되어 나갈 것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며 경제적 목적이 없는 행위들, 곧 다른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생활의 창조와 재창조, 애정, 육체적·감각적·지적 능력의 충분한 실현, 상업적 성격이 없는 이용가치(타인들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나 서비스)의 창조(그런데 이런 창조는 원래부터 이윤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상품으로 생산되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다.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130쪽)


해방된 신체의 활동은 개인과 동료의 범위를 넘어서기도 한다. 최근에 예술가들은 직접행동, 즉 권력이 빼앗아간 장소와 시간을 점거하여 피지배자의 것으로 재전유하려는 실천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예술 동호회에 가입한 예술가들이 불행한 동료 예술가들과 행복한 유대를 경험했다면, 두리반 농성과 희망버스 운동에 참여한 예술가 콜렉티브와 조직, 개인 예술가들은 해고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철거민, 장애인, 주부, 학생들과 함께 하며 "불행한 피지배자들의 행복한 연대"를 경험하고 구현했다. 이러한 예술가들 중 어떤 이들은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한 열패감은 물론이거니와 끝내 버리지 못하고 있던 나르시시즘까지 극복할 수 있었다. 나는 희망버스에 참여한 한 영화감독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항상 붙들고 있던 카메라를 내려놓자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영화감독은 결국 희망버스에 대한 영화를 완성시켰다. 영화를 만든 그의 신체는 과연 어떤 종류의 신체였을까? 카메라를 항상 붙잡고 있는 "피곤한 신체"도, 카메라를 바닥에 내려놓는 "느슨한 신체"도 아니었다. 카메라를 내려놓은 척 하면서 붙들고 있는, 혹은 붙들고 있는 척 하면서 내려놓는 이 특이한 신체의 활동이야말로 강요된 노동을 작파하는 파업 행동이자 자신과 타인을 모두 행복으로 이끄는 창작 활동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예술가들이 또다시 거리로 나선다고 한다. 그들은 5월 11일 세계 곳곳의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프레카리아트의 총파업에 동참한다고 한다. 이 날의 총파업은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던 총파업들의 본질을 확인하는 동시에 확장할 것이다. 이 날의 총파업은 그동안 지배 시스템의 바깥에서 그것에 저항하고 그것의 입구를 봉쇄해왔던 감각, 말, 사유의 총집결이라는 형태의 사건이 될 것이다. 우리는 불행한 이들의 행복한 상상력이 연대하는 장면을, 해방된 신체의 향연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이 총파업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은 자신을 전위avant-garde도 아니요, 소심한 개인도 아니요, 어떤 고유하고 평등한 신체의 일부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신체의 이름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동일한 예속 상태에 처한 99%, 그 예속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소망하는 99%, 바로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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