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일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왔던 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몸은 물에 젖은 솜뭉치 같았다. 몸살 기운도 있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체력 보강 차원에서 숙소 근처 식당에서 삼겹살 3인분을 먹었다. 맛을 음미하기보단, 그냥 살기 위해 입에 구겨 넣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했다.
다음날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새벽 알람 소리를 듣고 급히 일어났지만,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쓰러졌다는 게 더 정확했다. 허리, 어깨, 팔, 다리, 어느 하나 편한 곳이 없었다. 내 몸에 붙어 있는 팔, 다리였지만 내 것이 아닌 느낌이었다.
24시간 배달 가능한 성인용품에 흥정 붙이는 '삐끼' 아주머니들
ⓒ매일노동뉴스(정기훈) |
여관에 비치된 컵에는 이전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 모를 체모가 들어있기도 했다. 벽지는 누렇다 못해 노랗기까지 했다. 바닥에는 담뱃불로 지진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12인치 텔레비전 화면에도 그 흔적이 있었다. 처음엔 누군가 벌레를 잡은 줄 알고, 휴지로 열심히 닦기도 했다.
여관 주변도 '익사이팅' 했다. '역마차, 신데렐라, 장미' 등 이상한 이름의 술집들이 즐비했다. 일명 '방석집'이었다. 여관방에서 창문을 열면 맞은편에 있는 '성인용품점 24시간 항시 배달'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을 닫아도 네온사인 간판 불빛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성인용품도 배달할 수 있다는 걸 이곳에 와서 처음 알았다.
퇴근하는 노동자를 상대로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하는 여성들도 여관 주변 골목에 포진하고 있었다. 호객행위를 하는 아주머니들이 퇴근길에 '어린 여자 있다'며 손을 이끌기도 했다. 그걸 뿌리치면 되레 화를 내며 '얼마면 되겠느냐'고 흥정을 붙이기도 했다. 나중엔 그런 아주머니들이 부담스러워 휴대전화에 귀를 대고 통화하는 척하며 그곳을 지나가기도 했다. 다른 길로 가자니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어느 날 유령처럼 사라지는 그들
조선소를 다녀 온 뒤에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왜 조선소 하청을 취재를 하러 갔느냐"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총선 정국인데 시기를 좀 조율하는 게 좋지 않았냐"는 조언이었다.
사실 총선 정국에는 모든 이슈가 정치 이슈로 묻힌다. 조선소에서 일하던 때도 텔레비전을 틀면 하나같이 누가 공천을 받았고, 누가 떨어졌다는 식의 뉴스가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조선소 체험기는 그다지 이슈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총선이 아니더라도 언제 하청 노동자 이야기가 이슈됐던 적이 있던가.
조선소 하청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진 건 2011년, 김진숙 지도위원과 희망버스로 화제가 됐던 한진중공업 사태를 여러 차례 취재하면서였다.
노동계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한진중공업에서도 그 안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의 거취는 아무런 언급이 되지 않았다. 정규직이야 노조도 있고, 파업할 수 있는 권리라도 있지만 비정규직은 그마저도 없어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일노동뉴스(정기훈) |
한국조선협회 자료집을 보면, 2008년 말 기준으로 한진중공업 내 정규직 노동자는 1385명이었고 사내하청 노동자는 3652명이었다. 대략 3배나 된 셈. 반면, 2010년 말 기준으로 정규직 노동자는 1093명인 반면, 비정규직은 2036명이었다. 1600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마디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유령처럼 사라졌다. 통계는 아직 없지만 2011년 자료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
하지만 그들이 조선소 안에서 한 일들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들이었다. 대부분 조선소가 그렇지만 선박에 페인트칠하는 도장이나, 선박 철을 깎아내는 일명 파워 등 힘들고 건강을 좀먹는 일들은 비정규직인 사내하청 노동자 몫이다.
임금이 높거나 대우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정규직보다 적은 월급을 받고, 위험이 노출된 노동 현장에서 일했다. 다쳐도 산재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산재를 신청하려면 조선소에서 일하지 못할 걸 각오해야 한다. 상여금은 회사에서 챙겨주면 그저 감사한, 일종의 시혜였다.
유령이 된 그들
문제는 지금도 하청 노동자는 '찍' 소리 내지 못하고 해고되고 있다는 점이다. 열악한 처우는 여전하다. 일하다 죽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나 시스템은 미비하다. 일부에서는 그걸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노동계에서도 그런 시각이 팽배하다. '안타깝지만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청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란 쉽지 않다. 설사 용기를 내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 목소리를 들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유령 같은 존재가 된 셈이다. 기자가 조선소 하청 노동자로 변신했던 이유다.
○ 위험의 양극화, 산재는 왜 비정규직에 몰리나 ☞ 연재를 시작하며:<프레시안> 기자는 왜 조선소 하청으로 취업했나 - 기자가 체험한 조선소 하청 노동 <1> 취업 면접 때 묻는 건 딱 하나, "버틸 수 있겠나?" <2> "목숨 갉아먹는 유리 먼지, 여기가 지옥이다" <3> 점심시간 1분만 어겨도 욕설에 삿대질, 경고까지 <4> "6미터 추락 반신불수, 책임자는 알 수 없어" - 조선소, 한국사회의 축소판 <1> 발 헛디뎌 죽은 다음날, 회사가 한 말은? <2> 노동자도 아닌, 사장도 아닌, 넌 누구냐? <3> 저녁 먹자던 아버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니… <4> "5년동안 몰랐는데 내가 바로 불법파견이더라" - 위험의 양극화, 대책은? <1> 폐암 진단, 길고 긴 소송, 얻어낸 건 장례비 <2> "냉동고에서 질식사한 노동자, 그러나 회사는 무죄"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