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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우린 어떻게 된 사람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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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체 우린 어떻게 된 사람들일까"

[세상이 'J'에게·⑦] "이제라도 그들에게 존경심을 가져야"

재능교육 학습지노동자들이 스스로의 노동권을 찾고자 거리로 나선 지 2012년 1월 28일로 꼬박 1500일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서울 한 복판, 시청광장에서 보이되 보이지 않는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 오랜 한뎃잠에 몸도 마음도 축이 나고, 바닥의 한기도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언제까지 이들이 풍천노숙을 해야할까. 재능교육 노동자들을 위해 많은 이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프레시안은> B급 좌파가, 작가가, 노동운동가가, 청년이, 혹은 당 대표가 그들에게 전하는 목소리를 릴레이로 싣는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와 재능out 국민운동본부에서 공동으로 기획했다. 그들이, 혹은 세상이 재능노동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편집자>


2008년 미국발 세계공황은 30여 년 넘게 지구를 장악해온 신자유주의의 종막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인류에게 더는 희망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주인공들이 그 사태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건 그들에게 위기를 극복할 방안이나 능력도 없음을 웅변한 셈이다. 오로지 한껏 쌓아올려 놓은 제 왕국을 지키려는 패악질로 일관하는 1%에 대한 99%의 전지구적 저항의 물결이 끓어오르고 있다. 21년 전 무너진 현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동시에 넘어서는 대안 사회에 대한 궁리와 상상이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게 일어나고 있다.

한국은 그런 전지구적 상황과는 무관한 행성인 듯하다.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중요한 건 1:99의 체제를 넘어서는 일이 아니라 1:99의 체제를 수정 보완하는 일이다. 그들은 다른 세상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같은 세상의 다른 정권'을 만드는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다. 그들은 실은 '좋았던 10년'을 회복하고 싶어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정치는 물론 사회 문화 예술 학술 언론 영역에서 상당한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신흥 기득권 세력이 된 그들에게 수구 기득권 세력과의 집권경쟁은 절체절명의 일일 수밖에 없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은 그들의 집권 10년의 기억에 눈을 감은 채 '씨바 쫄지마'니 '묻지마 통합'이니 하는 그들의 구호와 추임새에 이끌린다. 그런 애석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과 가치 기준도 뒤틀린다. 이를테면 김진숙을 무사히 귀환하게 한 주인공은 살인적인 업무량을 감당하며 묵묵히 일 해온 희망버스 활동가들이 아니라, '같은 세상의 다른 정권'에 열중하면서 희망버스에 동승한 정치인과 유명 인사들이다. 1%의 기부와 자선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해 온 사람의 서울 시장 당선은 진보 집권의 첫 승전보가 된다.

ⓒ노동과세계(이명익)

진보시장이 일하는 시청 맞은편에서 1500일 농성하는 노동자들

그 진보시장이 일하는 서울시청 맞은편에 1500일 넘게 길거리 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들이 있다. 한때 3000명의 조합원을 가졌지만 이젠 고작 열 명 남짓인 그들은 그나마도 힘센 장정 하나 없는 처지라 걸핏하면 경찰과 용역깡패들에게서 농성장을 침탈당하고 폭행을 당한다. 진보시장은 온 나라의 진보적 시민들에게서 응원을 받지만 그 노동자들은 보수시장일 때나 별다를 게 없이 길거리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진보 시민들은 매우 적다. 그 희한한 풍경에 오늘 한국사회의 기만적 진실이 온전히 담겨있다.

사실 그 노동자들이 진보진영의 응원과 진보시민들의 관심을 확보하는 건, 어지간한 승리로 싸움을 끝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조금만 타협적이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조금만 '현실적'이면 오늘 당장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열두 명 전원 원직 복직'이라는 요구 조건을 고수한다. 그들의 비타협과 비현실적 태도는 진보진영으로 하여금 그들을 열심히 응원하지 않을 빌미가 되며, 진보 시민들로 하여금 그들을 적당히 외면하는 빌미가 되며, 사측으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지만 우리도 방법이 없다"고 너스레를 떨 빌미가 된다.

그럼에도 그들이 굽히지 않는 건 그들의 요구가 실은 '최소한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학습지 노동자가 노동자라는 것, 노동자는 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을 가진다는 것을 고집할 뿐이다. 그건 정말이지 최소한의 것이며, 그 최소한을 타협하는 건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눈곱만큼도 비타협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단지 세상이, 진보진영과 진보시민들이 뒤틀려있을 뿐이다. 그들이 사수하는 최소한은 단지 그들의 최소한이 아니라 200만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최소한이며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최소한이며 1500만 전체 노동자들의 최소한이다. 그들이 후퇴하면 우리의 삶이 후퇴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걱정하고 우리를 격려한다

김진숙 씨가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오던 날 유명자 지회장의 대화다.

김규항 : 진보정당도 아닌 정동영 씨가 그만큼 애를 쓴 것, 김여진 씨의 인간적 진정성은 그 자체로 상찬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승리의 축제 분위기에서 희망버스 활동가들은 오히려 생각이 많아 보이더라.

유명자 : 무대 뒤에서 묵묵히 일 해온 사람들, 김진숙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김진숙을 만들어낸 구조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 김진숙의 생환을 기뻐하면서 승리감에 취하지 않고 본격적인 싸움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김규항 : 선생 역시 생각이 많아 보인다. 재능 투쟁과 결부지어 좀 더 듣고 싶다.

유명자 : 사실 많이 걱정된다. 근래 몇 년 동안 투쟁 사업장 하나하나 합의되고 마무리될 때마다 자본은 거의 업종과 산업을 넘어 똑같은 합의안을 제시하고 있다. 소수 몇 명을 일시에 복직시킨다고 해서 큰 비용이 나가는 것도 아닌데 1년, 2년, 3년씩 유예 기간을 두고 순차적으로 조금씩 들여보내선 현장에서 고립시켜서 빼내고 고립시켜서 빼내고 해서 결국 고사시킨다. 우리는 지금 '열두 명 전원의 유예 없는 일시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저 꼴통들, 힘도 제일 없는 것들이 쪽수도 제일 안 되는 것들이 저러고 있으니 답답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도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내걸고 그것에 맞춰서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툴툴 거릴 게 아니라, 자본이 연대하는 것의 반의반이라도 연대하면 분명히 그렇게 풀린다. 불가능한 싸움은 없다.

그들은 우리를 걱정하고 우리를 격려한다. 그들을 지나치게 비타협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툴툴거리면서 '같은 세상의 다른 정권'의 구호에나 이끌리는 우리를 말이다. 대체 우린 어떻게 된 사람들일까. 만일 우리에게 아직 염치와 분별력이 남아있다면 이제라도 그들에게 존경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1500일 넘게 대신 져온 우리의 짐을 어떻게 나누어질지 궁리해야 할 것이다. "툴툴 거릴 게 아니라, 자본이 연대하는 것의 반의반이라도 연대"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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