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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가 판치는 사회, '정의'만으론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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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가 판치는 사회, '정의'만으론 부족하다"

[이정전 칼럼] 진정 정의로운 사회

총선과 대선이 있는 금년에도 작년에 이어서 '정의'가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될 것 같다. 정치가부터 정의사회의 구현을 외치고 있고 이에 부응하여 사회 각계각층에서 정의에 대한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다보니 마치 정의로운 사회가 낙원이나 되는 듯이 많은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분홍빛 환상에 젖어 있다. 물론, 불의가 판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정의로운 사회가 과연 이상적인 사회인가? 마르크스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스위스에 가보자.

스위스에 루체른이라는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가 있다. 이 도시의 중심가에는 유명한 음악가 바그너가 자주 들렸다고 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중국음식점이 있고 거기에서 멀지 않은 공원에는 관광객이라면 으레 들려보는 유명한 사자의 상이 있다. 이것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사자는 용맹의 상징이다. 그런데, 커다란 암벽에 새겨진 이 사자는 한껏 용맹을 뽐내기는커녕 심장에 창을 맞고 죽어 가는 사자다. 그래서 이 사자 상을 '빈사의 사자 상'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 스위스 루체른의 '빈사의 사자 상'

스위스라고 하면 정밀한 시계나 아름다운 경치만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스위스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용병(傭兵)이 그것이다. 세계적으로 용맹을 떨쳤던 스위스의 용병은 프랑스 대혁명 때에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루이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 왕비가 기거하던 궁전으로 시민혁명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궁전을 수비하던 프랑스 군대는 혼비백산해서 자기나라 왕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고 뒤따라 외국 용병들도 모두 도망갔다. 유독 스위스 용병만이 끝까지 남아서 남의 나라의 왕과 왕비를 위해서 싸우다가 220여명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창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상징이 새겨진 방패를 끝까지 끌어안고 죽어 가는 루체른 공원 사자의 상에는 바로 그러한 스위스용병의 굳은 절개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 언젠가 로마 교황청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스위스 용병의 신의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로마 교황청의 최측근 경비는 스위스 용병에게 맡기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스위스 사람들은 이 관례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일화는 스위스 사람들이 얼마나 신의를 잘 지키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시계처럼 틀림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스위스 사회는 원칙이 잘 지켜지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상당히 정의로운 사회인 셈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스위스 사람들은 유럽에서 제일 인기 없고 욕을 많이 얻어먹는다. 스위스 사람들은 눈을 번득이고 서로를 감시하다가 약간이라도 수틀리는 짓을 목격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곧장 경찰에 고발해버린다. 스위스 사람들과는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기가 참 어렵다고 한다. 5만원어치 상품을 선물로 받자마자 그 상품의 가격을 알아보고 나서 곧장 시계처럼 정확하게 5만 원짜리 상품으로 되갚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마도 정나미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스위스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고 한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고 질서가 잘 잡혀있지만, 숨 막히고 정나미 떨어지는 사회, 이것이 스위스 사회라고 그곳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스위스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오죽하면 스위스에 살다가 독일에만 가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느낌으로 한숨 돌리게 되고, 프랑스에 가면 더 사람 살만하다고 느끼게 되며, 이태리에 가면 절로 흥이 난다는 농담이 있을까.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때에 짝과 같이 쓰는 책상의 가운데에 금을 그어 놓고 금을 넘어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칼로 잘라버리던 짓을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것이다. 이런 못된 짓을 하는 짝은 결코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이런 초등학교 어린애들의 짓이 유치해보이지만, 여기에서 정의의 원초적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의의 여신상을 보면 정의의 개념을 딱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저울과 칼이다. 각자의 정당한 몫을 저울로 재고 어긋나는 것은 가차 없이 칼로 베어버린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와 같이 우선 네 것과 내 것을 분명히 가르고 그리고 각자 자신의 몫을 빈틈없이 챙기는 데서 출발한다. 과연 그런 사회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사회인가? 저울과 칼이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니다.

가정에서 어머니가 정의의 여신과 같이 자식들의 모든 행동을 일일이 저울질하고 조금이라도 원칙에 벗어나면 가차 없이 칼로 응징한다고 하자. 과연 이런 가정이 좋은 가정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가정만은 허물을 감싸고 잘못을 용서하며, 사랑으로 충만하여 푸근하고 웃음이 넘쳐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랑과 웃음이 충만한 곳에는 저울과 칼이 필요 없다. 누구나 엄마에 대하여 길게 얘기하다 보면 저절로 눈물을 흘리게 된다. 엄마 얘기하다가 우는 배우를 TV에서 자주 보았을 것이다. 저울과 칼만 들이대는 어머니는 그런 눈물을 자아낼 수 없다. '행복한 가정'이라는 말은 있어도 '정의로운 가정'이라는 말은 없다. 정의가 구현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사회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정의는 행복을 위한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일 당신에게 친구가 있으면 당신은 정의가 필요 없다. 그러나 당신에게 정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친구가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부정이 만연하다 보니 정의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는 것은 당연하며 따라서 정의사회의 구현은 시급한 우리 사회의 과제다. 하지만, 과연 어떤 사회가 정말 정의로운 사회인가? 판·검사가 할 일이 없어서 바둑으로 소일하는 사회, 법과대학이 인기가 없어서 늘 정원미달인 사회, 죄수가 없어서 감옥소에서 닭과 돼지를 기르는 사회, 이것이 진정 정의로운 사회다. 우리는 정의사회의 구현에 너무 집착해서 더 소중한 것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정의에 대한 분홍빛 환상부터 버리라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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