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는 절망과 동시에 희망을 지폈다. 이러한 자화상에 충격 받은 이들이 곳곳에서 교수 모임, 의사회, 법률가 모임 등 '반핵'을 내세운 모임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탈핵, 탈성장, 탈토건'을 내세운 녹색당이 2월 창당을 준비 중이다. 녹색당 창당준비위원회는 준비위에 참여한 당원들의 이야기를 묶어 조만간 가제 '녹색당선언'이라는 책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그중 20대 청년들의 이야기 5편을 연재한다. <편집자>
워킹푸어의 하루
오늘도 야근이다. 모니터 시계가 여덟 시 사십 분을 가리킨다. 짐을 챙겨 퇴근하면서 남자친구에게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날린다. "장 봐 갈 건데 뭐 먹고 싶어?" 얼마 안 있어 "김치찌개"라는 답이 돌아온다. 파주의 밤 버스정류장은 초저녁부터 인적이 드물다. 12월 말인데도 혹독한 추위다. 코가 찡할 정도로 차가운 공기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고 목도리에는 금세 축축하게 입김이 맺힌다.
동네 마트 정육 코너에는 돼지 앞다리가 김치찌개를 한 번 끓일 분량만큼씩 랩핑되어 있다. 각각 중량대로 가격표가 붙어 있다. 한줌 정도 되는 앞다리살이 3800원이다. 참치 한 캔은 1980원. 나는 정육 코너와 통조림 코너 사이에서 한참 망설이다 결국 참치찌개를 선택한다. 내일 점심 도시락 반찬용으로 동글동글한 어묵 한 봉지를 사고 귤 한 봉지, 930밀리리터 우유 한 팩을 바구니에 담아 계산대로 간다. 총 1만 360원이다. 마트에 이삼일에 한 번꼴로 들르니까 한 달에 마트에서만 이십여만 원 가까이 쓰는 셈이다. 월급에서 월세 삽십만 원을 제하고 관리비, 전기세, 도시가스세, 인터넷 티브이 결합 상품료, 십만 원에 육박하는 스마트폰 요금, 보험료 등등을 내고나면 남는 돈은 얼마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워킹푸어·렌트푸어의 일원인 셈이다.
서울에서 월세 세입자로 산다는 것
나는 재작년 여름 대학을 졸업하고 파주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다. 스물네 살의 나이에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살던 대학 앞의 셋집에서 회사까지는 왕복 네 시간 가까이 걸렸다. 여덟 시 반까지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씻으면 잠을 잘 시간이었다. 그렇게 파김치가 되어 출퇴근하면서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으로 이사가기가 싫어 버텼다. 결국 반 년 만에 파주로 이사온 것이 작년 겨울이었다.
처음에 나는 서울이 아닌 곳에서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람과 자본이 밀집된 수도에서 벗어나 변방에서 한가롭고 여유롭게 사는 연습을 한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평일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회사에 있고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거나 다른 일을 보러 서울에 가다보니 집은 그저 잠을 자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술에 취해 막차를 타고 돌아오다 내릴 곳을 놓쳐 불빛 하나 없는 종점에서 콜택시를 기다리며 울기를 여러 차례, 나는 월세 계약 일 년만 지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서울로 이사하리라 이를 갈았다.
마침내 일 년이 지나고, 살던 집의 보증금과 그동안 모은 돈을 합쳐 천만 원의 보증금을 들고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부동산을 돌아다녔다. 파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마포·망원 부근에서 집을 구해야 했다. 골목마다 원룸 건물이 다닥다닥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이 많고 많은 집 가운데 내가 살 방 한 칸이 없으랴 싶었다. 그러나 그중 보안이 잘 되어 있고 숨을 쉴 만한 평수의 방은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을 훌쩍 넘었다. 마음에 드는 방을 보고도 입맛만 다시며 돌아나오기 여러 차례, 마침내 이 많고 많은 집 가운데 내가 살 방 한 칸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축건물에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40만 원이라는 방을 찾아갔을 때였다. 역에서 한참 떨어진 구불구불한 골목 끝에 있는 그 건물을 찾아가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골목 끝에서 자가용 한 대가 들어오더니 삼십 대 후반인 듯한 남자가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아들과 함께 내렸다. 집을 보여주러 온 주인이었다. 아저씨는 딱 하나 남은 방이라고 소개하면서 문을 열었다. 화장실까지 합쳐 채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였다. 깨끗한 것이 유일한 장점일 뿐 고시원과 다를 바 없는 방이었다.
그때 아이가 방 안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순진무구하게 "아빠! 이 방은 왜 이렇게 작아? 이렇게 작은 방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라고 외쳤다. 아저씨가 어색한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아이는 연신 팔짝팔짝 뛰면서 "내 방보다도 너무너무 작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건물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서울에서 방 찾기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얼마 전 나는 파주 안의 다른 동네로 이사했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이다. 계약을 할 때 나는 건물 주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부동산에 물어보니 주인은 서울 목동에 살고 있고 집을 지을 때 외에는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다고 했다. 관리비 수거과 고장 수리 등은 업체에서 관리인을 고용해 일임하고 있었다. 이 건물에 집을 보러 왔을 때 일 층과 이 층에 각각 한 칸씩 매물이 있었다. 옆 건물이 일 미터도 간격을 두지 않고 붙어 있어 일 층은 볕이 잘 들지 않는다. 이 층은 그보다 볕이 잘 들지만 월세가 5만 원 더 비싸다. 나는 일 층을 선택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부동산 부자(라고 추측할 뿐이지만)에게 한 푼이라도 더 내고 싶지 않았다.
▲ 대학가 원룸 밀집 지역에 붙은 전단지. ⓒ뉴시스 |
우리는 왜 고향을 떠났을까
이 작은 방에 얼마 전 고향에 갔던 남자친구 K가 올라왔다. K의 고향은 부산이다.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인 그는 졸업 후 고향으로 가 몇 군데 언론사에서 시험을 보았다. K는 대학생활 내내 서울의 교통체증과 사람으로 꽉 찬 지하철역을 지긋지긋해했다. 탁 트인 바다가 있고 인심이 좋은 고향에서 정의를 찾아 발로 뛰는 기자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하지만 부산에 있는 언론사는 몇 되지 않았고 그 몇 안 되는 공채에서 고배를 마시자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동거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문제였다.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나도 서울에서 일 년마다 집을 구하고 이삿짐을 싸는 동안 언제부터인가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내 고향은 남도의 항구도시 목포이다. 몇 해 전 도청이 들어오면서 인근에는 높은 빌딩들이 늘어서고 개발 열풍이 불고 있지만 쇠락한 항구 쪽에는 여전히 오래된 어시장이 있다. 해질녘에 영산강 하구둑을 끼고 도로를 달리면 좌우로 늘어선 가로등마다 갈매기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바다가 보이는 높은 언덕에는 지역 문인들의 유품과 친필을 모아 전시하는 작은 문학관이 있다.
무엇보다 고향에는 내가 어릴 적부터 살던 집이 있고 널찍한 내 방이 있으며 부모님이 계신다. 나는 취직한 뒤 일 년에 단 세 번, 어버이날이 있는 주말과 추석, 설 연휴에 고향에 갈 수 있었다. 강남터미널에서 목포터미널까지는 고속버스로 네 시간이 걸린다. 파주로 이사온 뒤에는 강남터미널까지 가는 데만도 한 시간 반이 걸린다. 웬만한 사람들은 고향에 도착할 시간이다. 일 년에 서너 번 엄마아빠의 얼굴을 보면서도 며칠 안 있어 돌아와야 한다. 부모님은 아직도 내가 짐을 챙겨 돌아갈 때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공무원 시험을 봐서 목포에서 살자고 농담인 것처럼 슬쩍 뼈 있는 말을 날린다. 지방에서 여자에게 번듯한 일자리란 공무원과 교사 정도로 되어 있다. 고향에 내가 종사하고 있는 직종의 회사는 단 한 곳도 없다.
목포에서 한 시간 가량 차를 달리면 도착하는 땅끝 해남에는 외할머니가 혼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신다. 할머니는 요즘 듣기 힘든 아름다운 토박이말을 하고 옛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면 무척 마음이 아프다. 이 모든 것들을 배워두고 싶지만 부모님은 내가 교사나 공무원으로 고향에서 일하기를 바라는 것이지 농사를 지을 바에는 차라리 얼굴 한번 못 보더라도 외국에서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가끔 K와 나는 고향을 떠났을 때를 회상한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숙고할 여지가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K는 처음부터 졸업한 뒤에 부산에서 일하고 싶었다고 한다. 유학 개념인 셈이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서울에서 취직하고 쭉 서울에서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육친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본성이다. 나는 내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본성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은 지금 사회에서 지배적이고 건강한 '상식'으로 되어 있다.
장소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는 일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나는 이것이 주거·교육·직업·지역불균형뿐 아니라 다른 많은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올해 봄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보면서 핵발전소에 대한 사람들의 기이한 무관심 역시 장소에 대한 감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자식과 손자, 그 손자가 대를 이어 산다면 그곳에 핵발전소 따위를 세우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장소에 대한 무관심은 그 장소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사는 장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삶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그것을 견딜 수 있는가이리라.
하지만 석유 생산이 정점을 찍고 값싼 석유 시대가 종말을 고하는 지금, 우리는 조만간 좋든 싫든 그런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할 것처럼 보인다. 내가 상상하는 석유 없는 세상은 언제나 종말론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녹색당 청년을 위한 강연에서 김종철 선생님은 자신들 세대는 석유 시대 이전의 세상에서 살아본 적이 있으며, 얼마든지 재미나게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무척 편안해졌다. 석유 시대 이전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일은 종말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성을 회복하며 자연과 조화를 되찾아가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예전에는 왠지 모르지만 내가 나중에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나중에 비정규직이 안 될 거라 생각하는 학생들처럼, 아무 근거 없이 언젠가 부자가 되고 좋은 집을 소유하고 비행기를 타고 세상을 누빌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다른 꿈을 꾼다. 고향에 내려가 두 손으로 먹을거리를 직접 생산하면서 가족들과 걸어서 곧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사는 꿈이다. 내가 태어난 땅에 깃든 이야기들과 언어를 소중히 여기고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의 일처럼 참여하면서 사는 꿈이다.
나는 녹색당 사람들과 함께 이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고 싶다. 고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가족을 설득하고 미래를 구체화하고 싶다. 이 새로운 꿈으로 향하는 길을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재미있게 실천해나가고 싶다. 우리 청년들에게는 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상식', 이른바 '주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비전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나와 K는 오늘도 즐겁게 살 것이다. 돼지고기 김치찌개 대신 참치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점점 덜 먹고 덜 쓰면서, 부산과 목포 중에 어느 곳이 더 살기 좋은지 옥신각신하고, 나중에 어떤 집에서 살고 아이를 어떻게 교육시킬지 생각하면서, 아주아주 즐겁게 조금씩 변화해갈 것이다.
김강희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녹색당이 생애 첫 정당이다. 생각만 많고 몸은 움직이지 않는 체질을 개선할 기회로 삼고 녹색당 창당을 위해 (나름대로는)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지인들의 무지로 "그럼 넌 전기도 쓰지 마" "고기는 왜 먹냐" 등등의 질문에 시달리는 중이지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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