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외도'?
7월에는 '복지 포퓰리즘 추방 국민운동본부'라는 조직이 서울시의 초등학생 전면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주민투표를 서울시에 청구했고 주민투표의 실질적 제안자인 오세훈 서울시장은 "주민투표가 복지 포퓰리즘에 종지부를 찍을 역사적인 기로가 될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전국에 촛불 바람을 일으킨 대학생 '반값 등록금'은 포퓰리즘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마디로 거부했다. 보수 우익신문들이 한나라당과 오 시장의 장단에 맞춰 반(反)포퓰리즘 캠페인 바람을 더욱 부채질했다. 포퓰리즘을 일시적으로 대중의 인기를 끌기 위한 선동 데마고지(demagogy)와 동일시하고 포퓰리즘이라는 말로 대학생과 야당 시민단체의 주장을 공격하면 국민들이 이 공격에 동조하고 소위 '포퓰리스트(포퓰리즘 이용자)'의 풀이 꺾이리라는 계산에서 그랬다고 본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자가당착에 빠져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다. '반값 등록금'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공약이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반값 등록금을 이야기하는 야당이나 시민단체를 포퓰리즘을 이용한다고 비난하기 전에 자신들의 포퓰리즘부터 먼저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한나라당의 입장을 옹호하는 보수 우익 언론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쟁점이 나타나면 쌍방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다음에 선악의 판단을 내려야 한다. '좌파'이거나 '포퓰리즘'이라며 나쁘다고 단죄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설명 이전에 단죄가 앞선 것이다.
화제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마이클 샌들 교수가 한국에 와서 강조했던 말이 있다. 선악 문제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속에서 '원래의 입장', 다시 말하면 자기의 입장을 고려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사안을 따져본 다음에 판단을 내리라는 것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그 판단이 주관적이 아닌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이나 보수 언론은 여전히 자기는 옳다는 전제 아래서 상대방의 선악을 미리 단죄한다. 이런 자세로는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정의'를 찾아 낼 수 없다. 그러니까 정쟁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포퓰리즘이란 말은 함의가 분명치 않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지금까지는 선거용 선동이나 기회주의와 거의 동의어로 이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한나라당이나 보수 언론도 그랬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포퓰리즘은 선거를 치르는 거의 모든 정당이 이용하는 전략이다. 그러기 때문에 선거를 앞두고 상대방 주장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외도'라고 말하는 사람과 다를 게 없다. 비난 받은 포퓰리즘이 성공을 거두는 일도 없지 않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의 빈곤퇴치 정책이나 경제회복 정책도 포퓰리즘이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룰라는 포퓰리즘 약속을 실현해서 퇴임 때 인기가 80%가 넘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포퓰리즘=선동'이라고 단죄하는 것은 과학적인 태도가 아니다.
▲ ⓒ뉴시스 |
'이론'을 자처하는 지배세력의 포퓰리즘
서민층의 포퓰리즘보다 더 위험한 것은 지배세력이 펼치는 포퓰리즘이다. 다만 지배세력은 자기들의 주장을 포푤리즘이라고 말하지 않고 권위를 인정받은 이론임을 자처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포퓰리즘인 줄 모르고 속아넘어 간다. 시장 포퓰리즘이 대표적이다. 2003년 시장 포퓰리즘을 비판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미국의 토마스 프랭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시장 포퓰리즘'은 미국이 새로운 컨센서스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시장 포퓰리즘은 큰 소리로 그 민주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시장 지배 하에서처럼 정식 민주주의 제도의 가치가 소외되고 왜곡된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시장 포퓰리즘은 사회정의를 열심히 거론한다. 그러나 시장 포퓰리즘이 풍미하던 1990년대에 미국경제는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고 대신 1920년대 이후 일찍이 본 일이 없는 가혹한 수준으로 가난한 사람들 배려는 등한히 했다. 시장 포퓰리즘은 말로는 엘리트를 비판하면서 기업 경영계급을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돈 많은 부자 엘리트의 하나로 바꿔 놓았다. 시장 포퓰리즘은 위계 사회를 비판하지만 기업을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제도로 만들었다. 이 포퓰리즘은 개인의 자치 확대를 찬양한다 그러나 개인이 확대된 자유를 시장에 도전하는데 이용할 때 그 개인을 바보로 만들어 버린다. 이 포퓰리즘은 선택의 자유를 외친다. 그러면서도 시장의 승리는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진정한 대항권력, 경제적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익의 명령을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을 키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왕년에 진정한 포퓰리스트들이 주장했던 그 세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
포퓰리즘의 두 개의 얼굴이다.
지배세력의 포퓰리즘은 치지도외(置之度外, '생각 밖에 둔다'는 뜻)하더라도 점점 포퓰리즘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포퓰리즘은 정권이 정치를 잘 할 때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정권이 하는 일이 민중의 불만을 살 때 나타난다. 대의 민주주의의 정부나 국회가 그들에게 주권을 위임한 국민의 뜻과 다르게 행동해서 국민의 신뢰를 잃고 분노를 자극할 때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포퓰리즘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정권이 무언가 대단히 잘못 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경종이다. 부자 정권이나 한나라당이 분명히 알아둬야 할 일이다.
포퓰리즘의 재평가,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
민주주의가 점점 형태만 남은 민주주의로 변질하고 소수 엘리트들이 국민의 주권을 농락하는 실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이 목소리를 알리는 포퓰리즘이 필요하다. 포퓰리즘을 폄하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하고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만드는데 선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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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민주주의 역사의 권위자인 피에르 로자발롱(Pierre Rosavalon)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을 재발굴해야 한다며 "시민사회와 정치사회 간 그리고 사회비판과 개혁 프로젝트 간의 상호작용을 활성화한 민주주의를 '발명'해 낼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는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포퓰리즘을 활용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을 제안하면서 7월18일 르몽드와 국영 라디오 <프랑스 퀼튀르>(문화 채널) 공동포럼에서 발표한 "포퓰리즘을 다시 생각하자"는 기조연설에서 21세기는 "포퓰리즘의 세기"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예견했다. 포퓰리즘이 본연의 위치를 찾을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 같다.
민주주의가 여론의 정치라는 것은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주권자인 국민이 국정에 의견을 표시하는 것은 선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국민은 그들의 의견을 정부나 국회의원들에게 알릴 권리가 있다. 민주주의는 주권자의 의견을 반영하는 여론정치라고 하지 않는가? 파리의 지성인 주간지 누벨 옵세르봐퇴르의 논설위원 자크 줄리아르는 4년 전 "우리는 왕년의 대의 민주주의에서 여론민주주의로 옮아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독소크라시(doxocratie)" 즉 여론정치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 냈다. 그는 오늘날은 법이 시행되기 위해서는 의회의 표결이 필요할 뿐 아니라 또한 '거리'의 의견, 여론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고전적 민주주의 원칙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치제도는 선거가 끝난 후에도 여론에 의해 계속 감시받고 규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언론의 보도, 지배적인 지식인들의 생각이 포퓰리즘의 형태로 나타나 여론 민주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줄리아르는 여론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유익한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위험도 안고 있다고 경고한다.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지배적인 생각(의견)을 전달하는 역할을 거대 미디어가 담당하고 있는데 미디어의 독립과 대표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 영국에서 불거진 머독 언론의 횡포는 이러한 위험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한 예다. 오늘 한국의 보수 우익의 보도 태도를 보면 우리도 여론정치가 안고 있는 위험성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보수 우익 언론의 종편 진출을 경고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언론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거대 언론에 대한 민주시민의 부단한 감시가 요구되는 시기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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