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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년의 강, 명포를 추억하며

[이 많은 작가들은 왜 강으로 갔을까?]<23·끝> 박정애 소설가

우리 어머니 택호는 명포댁.
당연히 명포엔 어머니의 친정이자 우리 사남매의 외가가 있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아버지의 동네 숲실과 달리, 지형이 양지바른 포구 같아서 명포明浦라 불렸던 외가 동네에는, 배들이 들락거리는 포구는 없어도, 금모래가 빛나고 예쁜 조약돌이 널린 강변과 숱한 생명을 품고 밤이나 낮이나 흐르는 얕은 강이 있었다.
명포에서 어머니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열세 살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우리 외할머니가 녹내장으로 실명하는 바람에 맏딸이었던 어머니가 부모를 봉양하고 어린 동생들을 수발해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솜씨 좋고 부지런하고 착했다. 가모家母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동네 이장인 외할아버지의 손님들을 접대하고 상급 학교에 진학한 아우들을 바라지했다. 외할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언제나 자랑스러워했다.
"큰아(맏이) 쟈는 갱빈(강변)에 내삐리놔도 잘살 그릇인 기라."

숲실이 강변보다 척박한 곳이었을까.
첫아들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는 결핵 뇌막염이라는 중병에 걸렸다. 어린 아들은 엄마, 엄마, 엄마를 찾아 울어댔고 병원에서는 돈, 돈, 돈을 불러댔다. 돈도 없고 의지도 박약했던 아버지는 자신의 불운을 술로 달랬다. 고생만 시킨 맏딸이 시집가서도 고생바가지를 차고 사는 꼴이 늘 안타까웠던 친정 부모가 나서서 병원비를 주선하고 정성스레 약시시를 해댄 끝에 어머니는 꼬박 3년 동안의 투병 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고관절이 굳어 절룩거리기는 했어도 어쨌든 살아서 숲실로 돌아온 어머니는, 딸 둘을 잇달아 낳았다. 아버지는 술독을 끼고 살았고 어머니의 삶은 여전히 힘겨웠다. 바로 옆에 큰집이 있고 앞집, 뒷집이 다 일갓집이었지만 우리 어머니가 도움을 청할 곳은 명포 친정밖에 없었다.
막내를 임신한 어머니는 딸들 중 하나를 친정에 맡기기로 했다. 어머니의 가방은 무거웠다. 두 딸의 옷가지, 둘째 딸의 기저귀, 늙으신 부모님께 드릴 알사탕 두 봉지, 양말 두 켤레, 참기름 한 병, 인절미 한 고리……. 버스 기사와 안내양은, 요금 안 내는 어린애들을 달고 무거운 짐까지 인 어머니 같은 승객을 제일 싫어했다. 어머니도 당신 요금만 달랑 낸 것이 죄스러웠던지라 연방 고개를 조아리며 딸들과 짐을 챙겼다.
나는 멀미를 심하게 했다. 동생은 어머니한테 착 달라붙어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날은 더웠고 승객들은 담배 냄새, 땀 냄새, 방귀 냄새, 똥거름 냄새, 곰팡이 냄새 따위 갖은 불쾌한 냄새를 풍겼다. 나는 참다 참다 못 참고 덕산 마을회관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먹은 인절미를 남의 보따리 위에 고스란히 게워내고 말았다. 보따리 주인과 안내양이 들입다 소리를 질렀고, 다른 승객들도 혀를 차거나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는 또다시 죄인처럼 굽실거리며 동생의 광목 기저귀를 꺼내 토사물을 닦았다. 어머니에게서 떨려난 동생이 불에 덴 것처럼 울어댔다. 버스 기사가 짜증을 냈다.
"거, 언나 쫌 달개소(달래요). 정신 시끄러버가 운전을 할 수가 있나, 에이."
나는 콧구멍을 차창으로 밀어냈고 어머니는 당신의 젖으로 동생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구러 동곡 정류장에 다다랐다. 어머니는 나에게 보따리를 맡기고 동생을 업은 채 화장실에 갔다. 나는 혹여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도망갈까봐, 짐 보따리를 꼭 끌어안고 기다렸다. 석유 기름내와 지린내가 뒤섞인 정류장 특유의 냄새에 나는 또 욕지기를 느꼈고 울고 싶었다. 나는 화장실로 쫓아가 어머니를 부르고 싶은 마음과 짐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수백 번도 더 갈등했다.
어머니는 결국 나타났다.
그리고 정류장을 나와 교회와 국숫집과 점방과 학교를 지나 마침내 명포, 금모래가 빛나는 강변에 이르렀다.
"보따리 지키고 있어라. 저짝에 동생 니라놓고 오꾸마."
어머니는 짐을 내려놓고 포대기를 추스른 다음, 동생의 엉덩이를 뚜덕이며 행여 미끄러운 돌멩이를 밟고 넘어질까 조심, 조심, 강을 건넜다.
어머니가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강물 흐르는 소리가 괴물의 울음소리로 바뀌어 커졌다. 강물이 어머니를 삼킬 것 같았고 어머니가 동생만 데리고 도망갈 것 같았다. 나는 짐 보따리를 붙들고 하염없이 흐느꼈다. 어머니가 점처럼 작아져 눈 앞에서 사라지자, 나는 그예 짐 보따리를 버려두고 강물에 한쪽 발을 담그기도 했다. 하지만 다섯 살배기 산촌 아이였던 나한테 물은 낯설고 무서웠다. 나는 한 발은 강물에 담그고 한 발은 모래밭에 얹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어머니는 결국 나타났다.
어머니 등에 업혀 건너는 강물은 졸린 듯 금비늘, 은비늘을 뒤챘고 고즈넉이 흘렀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을 나는 그때도 지금도 알지 못한다.
동생은 강 건너 능금밭 자갈길의 포플러나무에 포대기 끈으로 묶여 악머구리처럼 울고 있었다.
"동생 지키라. 보따리 갖고 오꾸마."
어머니가 절룩절룩 멀어져갔다. 나는 상큼한 사과 향내를 들이마시고 담장 높은 내시가內侍家의 속내도 궁금해 하고 과수원집 마당의 꽃밭도 둘러보았다. 어머니가 설마 나와 동생, 둘 다를 버리랴 싶었다. 까짓 동생이야 울건 말건 나하고는 상관없었다.
돌아온 어머니가 짐을 내려놓고 동생을 업고 다시 짐을 이었다. 나는 어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걸었다.
"옴마, 아부지요!"
어머니가 대문간에서 목청을 높였다. 지게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고, 이기 누꼬? 박실이 아이가?"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어머니의 방문은 언제고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거친 손바닥으로 어머니의 이마와 뺨과 콧방울과 턱을 어루만지며 우셨다.
"쪼매만 기다리라. 내가 얼릉 밥상 채리오께."
"마 놔뚜소. 내가 한 숟가락 챙그리 묵으마 되제, 말라꼬 옴마가 하실라 카는교?"
"아이고 야야. 내가 니를 중핵교도 안 보내고 십 년을 살림시키묵다가 남으 집에 보냈는 것도 인자사 돌아보마 마음 아파 죽겠는데, 이래 친정이라꼬 댕기러온 니를 우째 또 시키묵겠노. 인자는 눈 어둡은 것도 익숙해져가 괘안타. 고만 뜨듯한 데서 등더리나 찌지거라."
할머니는 기어이 어머니를 안방에 눕혀놓고 더듬더듬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뜸이 질 때쯤 밥 위에 우엉 이파리와 강된장 종지와 달걀찜 종지를 얹었다. 거기다 김치 한 보시기를 보태어 외할머니가 상을 봐오면, 우리 세 모녀는 자다 일어나 밥을 먹었다.
외가에 머문 사흘 동안, 어머니는 우리 자매 중 누구를 외가에 맡길까 이리저리 저울질했다. 어머니는 끝내 나를 점찍었다. 어머니가 잠깐만 제 눈 앞에서 사라져도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도록 울어 젖히는 동생을 놔두고 갔다간 무슨 사달이 나도 날 것 같았나 보았다.
사흘 후, 어머니가 버스에 올라탔다. 동생을 업고 외할머니가 싸주신 보따리를 이고…….
나는 그때서야 동생처럼, 악을 쓰고 울며불며 엄마한테로 달려갔다.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당신 두 팔로 내 사지를 결박해버렸다.
"일 년 뒤에 오꾸마. 갓난쟁이 동생 한나 더 데불고 올 끼다. 위할배, 위할매 말씸 잘 듣고 심부름도 잘하고……. 알었제? 일 년 뒤에 보재이."
어머니가 버스 차창을 붙잡고 외쳤다. 나는 우느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 년 후의 어느 여름날 느지막한 오후, 나는 늘 하던 대로 바가지 하나를 들고 명포 물가로 나갔다. 저녁 국거리로 쓸 고디, 표준어로는 다슬기를 주워야 했다. 고디는 흔전만전 널려 있었다. 뽀얗게 국물이 우러날 때 텃밭에서 뜯은 부추를 뿌려 끓인 고디국은 만날 먹어도 맛있었다.

ⓒ이상엽

나는 금세 한 바가지를 주워놓고 얕은 물속에 당그랗게 떠올라 있는 당글바위 위에 엎드렸다. 뜨겁게 달궈졌다 알맞추 식은 바위는 어머니 등판 같았다. 눈을 감으면, 이 세상에는 오로지 내 나른한 몸뚱이와 강물 흐르는 소리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었지만, 내가 바위를 타고 떠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옛이야기에 나오는 연오랑과 세오녀처럼 바위를 타고 떠내려갔다. 한없이, 한없이, 떠내려가다 보면, 지느러미를 가진 사람 물고기들이 나타나 퍼덕거렸다. 그들은 사람 사는 땅이 너무 슬퍼서 물속으로 들어가 물고기가 된 종족이었다.
엄마가 올까.
그럼, 오지. 오고말고.
엄마가 올까.
그럼, 오지. 오고말고.
꿈속에서인 듯 찰방찰방, 찰박찰박, 물을 건너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올까.
그럼, 오지. 오고말고.
"거, 누고?"
목소리가 생생했다. 꿈이 아니었다. 나는 눈을 떴다. 저 멀리, 아이를 업은 여자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옴마."
"마침맞기 잘 만났다. 우리 큰딸이 일 년 새, 마이 컸데이."
어머니가 모래밭에서 포대기를 끌렀다. 나는 아기를 받아 안았다. 눈이 큰 아기가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얼라가 순해갖꼬 벨로 안 힘들 끼다."
어머니가 둘째 딸을 데리러 저쪽 강변으로 갔다.
어머니는 결국 나타났고 나타날 것이었다. 나는 아기를 둥개둥개 흔들어주었다.

장마철에는 작은 배를 불러 건너기도 했던 강. 피라미며 송사리며 모래무지며 고디를 한정 없이 품고 있던 강. 헤엄 못 치는 어린이도 바가지 하나 꿰어차고 고디를 주울 수 있었던 친구 같던 강. 당글바위 위에 엎드려 눈 감으면, 흘러, 흘러, 인간 물고기(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를 보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미야자키와 내가 물속 인간에 대해 그토록 유사한 상상을 했다는 사실에 놀랐었다)를 만날 수 있었던 강.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흐르는 유년의 강.
그 강은, 이제, 없다. 충충한 물을 가둔 운문댐이 있을 뿐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운문댐은, 나 같은 사람한테는 접근 불가의 대형 수족관 같은 곳이다. 댐으로 바뀐 뒤, 나는 한 번도 명포에 가지 않았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느님, 부처님, 단군 할아버지, 웅녀 할머니, 칠성님, 산신령님, 바리공주님께 비나이다. 두루두루 굽어살피시어 우리의 강들이 제 생김새대로 굽이굽이 흘러가게 하소서.

129명의 작가, 10명의 사진가가 참여한 '불면의 4대강' 이야기는 오늘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더 많은 글과 사진은 시집 <꿈속에서도 물소리 아프지마라>(고은 외 99명 지음, 이하 아카이브 펴냄), 산문집 <강은 오늘 불면이다>(강은교 외 28명 지음) 사진집 <사진, 강을 기억하다>(성남훈 외 9명 지음)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한 달 동안 관심있게 지켜봐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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