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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도 경험으로부터는 배운다

[기자의 눈] '靑-言 2차대전'의 개전을 지켜보며

청와대와 일부 보수 언론 간에 다시 전면전이 벌어질 조짐이다. 현 정권 들어, 아니 지난 정권부터 보아 왔던 모습인지라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 양상은 날로 저질스러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총칼이 아니라 아무리 말과 글을 무기로 삼는 전쟁이지만 '약탈 정부' '노무현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모임' '사회적 마약' 같은 날선 단어들이 횡행하고 있어 애초 싸움의 단초를 제공했던 '계륵 대통령'이라는 어구는 애교스럽게 들릴 정도다.

아이들 싸움에도 시비는 가려야 하지만…

물론 언론의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가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고 권력 역시 부당한 비판에 대한 항변권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언론과 권력은 싸울 일이 있으면 싸우는 것이 맞고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일상적으로 벌이지는 일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최근 조선, 동아일보와 청와대가 벌이는 싸움을 두고 권력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반박으로 평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미 이들이 연출했던 여러 차례의 멱살잡이와 마찬가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들 싸움에서도 누가 먼저 때렸는지 따져보지 않고 "왜 시끄럽게 구냐?" "이유 불문하고 둘 다 조용히 해"라며 꿀밤을 먹이면 먼저 맞은 쪽이 억울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 나라 최고의 권부와 '판매부수'로만 따지면 전체 신문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두 신문사 사이의 다툼에다 대고 "제발 시끄럽게 굴지 말라"는 말로 일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선 잘잘못을 따져 보는 게 옳은 순서다.

"코드 정책으로 아파트 값 떨어뜨려 문제"라는 황당 비판

논란의 대상이 된 세 편의 글 가운데 청와대 관계자가 "다른 기사도 문제지만 이 기사는 해도 해도 너무 한다"며 분개했던 <동아일보> 28일자 '세금 내기 아까운 약탈 정부'라는 기명칼럼을 읽어보면 그 항변에 일견 수긍이 간다.

이 칼럼에서 해당 논설위원이 주장하는 바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제목 그대로 '이 정권에 세금 내기 아깝다'는 것. 이 정권에게든 다른 정권에게든 세금 아깝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 이 칼럼이 제시한 근거들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서적인 쪽에 치우쳐 있다.

"먹을 것 못 먹으며 장만한 강북 소형 아파트 값이 코드 정책 탓에 뚝뚝 떨어지면 눈이 뒤집힌다. 집값은 제자리인데 재산세 부과 기준을 바꿨다며 세금만 더 내라니, 앉은 자리에서 도둑맞는 기분"이란다.

다시 말해 이 정부의 '코드 정책'이 아파트 값을 잡고 있고 부동산 관련 세금이 올라가서 문제란 주장이다. '코드 정책'이 정말 아파트 값을 잡는 데 성공했다면 대통령 지지율은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높았을 것 같다.

"사유재산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투자도, 고용도, 성장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세계은행 보고서가 3년 전에 나와 있다. 언제 내 재산 약탈당할지 모르는데 이 나라에 투자하고 싶을 리 없다"는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사회안전망의 부재와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충이 내수부진을 가져와 한국 경제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냈던 세계은행이 이 칼럼을 읽어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궁금해진다.

급기야 이 칼럼은 현 정권을 '도둑정치(kleptocracy) 세력'으로 규정한다.

"지배세력이 자기 이익을 위해 공권력을 이용해 국민 재산을 축내는 것이 도둑 정치다. 끊임없이 편을 갈라 으르고 달래는 통치술(divide-and-rule)은 도둑 정치의 전형적 수법으로 꼽힌다"는 것이 이 칼럼의 설명이다.

도당(盜黨)정치로 번역되기도 하는 'kleptocracy'는 절도광 또는 도둑을 뜻하는 'klepto'와 지배, 정치를 뜻하는 어미 '-cracy'가 합쳐진 신조어다.

이 단어는 지금은 콩고로 이름이 바뀐 자이르를 32년 동안 철권 통치한 모부투 정권을 규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다. 모부투는 냉전기간 그를 공산주의에 대한 방패로 써먹은 서방을 등에 업고 국고와 천연자원을 빼돌려 수십억 달러를 모았었다.

결국 이 칼럼은 아파트 값 떨어뜨리고 부동산 세금 걷어서 '코드 세력' 호주머니에 넣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급기야 "더 망하지 않으면 천운(天運)이라고 봐야"한단다.

"좌파재집권 위해 FTA 추진한다"?

이 정도면 개인적으로 무슨 원수를 진 게 아닌가 하는 궁금증이 들 정도다. "능력과 상관 없이 공직을 차고 앉은 코드맨들이 시대착오적 코드 정책만 쏟아내지 않았어도 내 살림살이와 우리 경제는 훨씬 뻗어 갔을 것이 분명하다"는 문장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까?

2주에 한번 씩 기명칼럼을 쓰는 이 논설위원은 지난 4월에는 '좌파 FTA는 정치쇼인가'라는 글을 통해 "노 대통령이 진짜 신자유주의 개혁은 않고 FTA만 체결한다면, 다음 정권을 어느 쪽이 잡든 일자리만 뺏기다 멕시코처럼 다시 좌파정권이 집권할 공산이 크다"며 "FTA 협상 과정에서 반미감정이 폭발해 좌파 재집권의 길을 열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FTA 체결이 되든 안 되든 좌파엔 꽃놀이패인 셈"이란다.

이런 식이니 "청와대는 나라 안팎의 각종 고급 정보가 집결하는 곳이지만 시중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조크나 유언비어를 전혀 모르는 경우가 있어 '노무현 조크' 두 토막을 소개한다"며 "월드컵 결승전에서 지단이 박치기로 퇴장당한 이유는 노사모라는 말을 들어서"라고 하는가 하면 "'노무현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모임'의 대표는 희망자가 너무 많아 경선 중"이라는 잡담을 늘어놓는 '편집부국장' 칼럼은 차라리 솔직하고 담백하게 다가올 정도다.

삿대질과 비판을 혼동하는 '비판신문'들

"시장원리에 어긋나니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는 적절히 않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외부적 충격으로 개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약간의 무리수가 있더라도 한미FTA를 추진한다"고 공언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사회주의 정책' 때문에 나라 망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가 찰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영합리화'라는 명목 아래 공공기관이 비정규직을 늘리지 않을 경우 경영평가 점수를 삭감하고 상여금도 차등지급하고 있는 정부로선 '좌파'라는 규정도 억울한 마당에 '좌파 재집권'을 위해 한미 FTA를 추진한다는 비판 역시 '아닌 밤중에 홍두깨'일 듯 싶다.

'80년의 역사'를 자랑하면서 '비판언론'을 자임하는 두 신문이 이런 식으로 함께 펼치는 황당한 협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혹시 이들은 시정의 싸움판에서 난무하는 삿대질을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힘들다.

하긴 지지율도 바닥인 정부를 때리는데 무슨 이유면 어떻고 무슨 방법인들 어떠랴 하는 계산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속이 시원하다" "역시 정권에 맞서는 신문"이라고 맞장구치는 독자들도 적잖을 테니 말이다.

신문한테만 '신속하고 체계적이며 과단성'있게 대처하는 청와대

하지만 '비판신문'들의 이런 '황당 협공'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응하는 청와대의 행태에도 선뜻 손이 올라가지 않는다. '계륵' 기사가 또다른 '비판신문'에 게재된 28일, 청와대는 모처럼 발 빠르게 움직였다. 오전 10시가 채 되기 전에 핵심관계자가 브리핑 룸을 찾아와 "적극 대응"을 예고했고, 오후 1시 30분에는 홍보수석이 "두 신문은 사회적 마약"이라고 반격을 가했다.

게다가 '향정신성 물질' '사회적 마약' '일부 언론의 사회적 일탈' '천박한 메타포' 등의 단어가 사용된 홍보수석의 댓거리 역시 그 비판 대상인 '계륵, 약탈정부' 타령만큼이나 자극적이었다.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논문 표절 및 부풀리기와 관련한 점증하는 의혹, 하염없이 늦어지는 법무부 장관 인선,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재보선 패배와 당청 갈등, 출구가 보이지 않는 대북 관계 등등 손가락으로 꼽기도 힘들 만큼 산적한 현안들에 대한 청와대의 '신중하고도 차분한 대응'을 감안하면 두 신문에 대한 신속하고 체계적이면서도 과단성 있는 대처는 단연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

산적한 현안들에 대해서도 두 신문 다루듯이 대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판국이니 혹시 청와대도 '비판 언론'들처럼 "상대에 대한 맹공이 지지자들을 결집시킨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비판신문'들의 횡포에 맞서는 과정에서 실리를 챙긴 경험도 없었던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간의 학습효과로는 부족한가?

'비판언론'들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청와대가 이들과 맞서 싸우기를 바란다든가, 그 싸움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청와대가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게다가 혹여 이를 지지율 반등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더더욱 큰 패착이다.

지난 기간 권력과 언론의 이전투구가 남긴 학습효과는 그것보다 더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일은 없다는 깨달음이다. 바보조차 경험으로부터는 배운다.

이미 청와대는 두 신문에 취재제한 조치를 내렸다가 '언론과 오해를 푼다'는 명목으로 슬그머니 그 조치를 해제한 경험도 있다.

28일 이백만 홍보수석은 '비판 언론'들을 향해 "쓰는 순간 짜릿하고 통쾌하다고 해서 마구 남용하면 공급하는 자, 공급받는 자가 모두 황폐해집니다"라고 충고했다. 이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 할 대상은 두 신문사만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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