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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물 침출수ㆍ탄저균…'인간 재앙'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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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핏물 침출수ㆍ탄저균…'인간 재앙' 시작됐다

'쓰레기 매립장' 수준 오염…전국 가축 매몰지 35% 유출

가축 320만 마리를 죽음으로 내몬 구제역 바이러스가 가축에 이어 사람까지 겨냥할 모양새다. 살처분 가축 수가 늘어나면서 전국 곳곳은 거대한 '가축 공동묘지'로 변했지만, 급하게 매몰 작업이 이뤄지면서 침출수 유출 등 제 2의 '환경 재앙'이 예고되고 있는 것.

'침출수의 공포'는 이미 시작됐다. 살처분 규모가 커진 지난해 12월부터 경기 파주와 경북 영천, 경남 일대의 가축 매몰지에선 '핏물 침출수'가 흘러나와 주민들이 불안에 떨어야 했다. 가축이 부패하며 흘러나온 침출수가 지하수로 흘러들어가 인근 농가의 수도꼭지에서 핏빛 물이 새어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대량 매몰로 인한 침출수 유출은 사실 '예고된 재앙'이었다.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발생한 구제역·조류인플루엔자(AI) 가축 매몰지 중 약 35%에서 침출수가 유출돼 지하수와 토양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정부의 용역 보고서가 10일 뒤늦게 공개됐다. 보고서대로라면, 정부가 허술한 매몰로 인한 침출수 유출 위험을 알면서도 늑장 대응한 셈이다.

▲ 사상 초유의 구제역 사태와 AI까지 겹치면서, 전국은 '가축 공동묘지'가 됐다. 지난달 27일 충북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의 한 매몰지에서 방역요원들이 살처분을 완료하고 가스 배출관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뉴시스

전국 매몰지 35%, 이미 침출수 유출됐다…7년 전 묻은 곳도 유출

한국환경공단의 'AI 발생 주변지역 환경영향 조사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부터 지난해 5월 사이 조성된 구제역·AI 매몰지 1200여 곳 가운데 23곳을 대상으로 오염 현황을 표본조사한 결과 매몰지 8곳(34.8%)에서 침출수가 새나와 인근 지하수와 토양을 오염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환경부 의뢰로 진행된 이 조사는 지난 2008년부터 시작돼 구제역이 맹위를 떨치던 지난해 12월 마무리됐다.

▲ 경북 영천 고경면의 한 매몰지에서 핏빛 침출수가 흘러나와 분뇨 차량으로 처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보고서 내용을 보면, 지난해 1월 발생한 구제역으로 돼지 781마리가 파묻힌 인천 강화군 매몰지의 경우 지하 17m 깊이 지하수의 수질이 생물학적산소요구량(BOD) 기준 772PPM을 기록했다. 통상 '가장 더러운 물'로 꼽히는 쓰레기매립장 침출수(BOD 400~800PPM) 수준으로 오염된 것이다.

2004년 AI로 닭 2만여 마리를 묻은 충남 천안시의 매몰지 2곳에선 가축이 파묻힌 지 7년이 지났는데도 현재까지 침출수가 새나와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매몰지의 침출수 유출이 더 심화된다는 것이다. 조사 결과 2010년 매몰지는 8곳 중 1곳(13%), 2008년 매몰지는 10곳 중 3곳(30%), 2007년 매몰지는 3곳 중 2곳(67%), 2004년 매몰지는 2곳 중 2곳(100%)에서 침출수가 유출됐다.

이번 구제역·AI 사태로 지난 7년간 조성된 매몰지 수의 세 배를 넘어서는 매몰지(4414곳)가 급하게 생겨나면서, 침출수 유출 위험은 더욱 커지고 있다. 35%라는 확률대로라면, 4400여 곳의 매몰지 가운데 1500곳이 넘는 곳에서 지하수·토양 오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엉터리' 방역도 모자라 '엉터리' 수습까지…식수 오염 공포 현실로

이 같은 우려는 이미 현실화됐다. 환경부가 지난달 경북지역의 구제역 매몰지 89곳을 조사한 결과, 61곳(68%)에서 침출수 유출로 인한 식수원 오염 우려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축을 급하게 매몰 처리하면서 관련 규정을 지키지 않았거나, 우천 시 붕괴 위험이 있는 산비탈이나 수질오염 우려가 있는 하천변에도 마구잡이로 파묻은 것. (☞관련 기사 : 구제역 '가축 무덤', 봄이 오면 무너진다)

▲ 경기도 파주의 돼지 살처분 현장. 대부분 살아있는 돼지가 생매장된다. ⓒ윤후덕 민주당 파주지역위원장
물론 정부의 가축 매몰 지침도 존재한다. 정부의 '구제역 긴급행동지침'을 보면, 일단 지하수층이나 하천변을 피해 매몰지를 선정하고 5m 깊이로 구덩이를 파 그 위에 가축 사체에서 침출수가 새지 않도록 톱밥과 비닐 차단막을 덮어야 한다. 그 위에 1m 두께로 흙을 덮은 뒤 동물의 사체를 쌓고, 추가적인 흙 덮기와 비닐 감싸기를 마쳐야 매몰 작업을 완료될 수 있다. 매몰지 속에는 파이프를 심고 사체에서 나오는 유독가스를 밖으로 배출하며, 매몰 구덩이보다 낮은 곳에 저류조를 설치해 침출수가 빠져나가게 해야 한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숫자의 매몰로 매몰 터조차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 같은 지침은 휴지조각이 됐다. 여기에 매몰 가축의 90%를 차지하는 돼지의 경우 대부분 생매장되면서 돼지가 몸부림을 치면서 차단막이 찢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더 큰 문제는 지하수 오염이다. 부패한 동물 사체에서 나온 침출수엔 대장균, 장 바이러스 등 미생물과 질산성 질소, 암모니아성 질소 등 유독화학물질이 함유될 가능성이 높다. 또 심한 패혈증을 유발하는 탄저균(炭疽菌)과 같은 치명적인 병원균이 섞여 나올 수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실제 2002년 구제역이 발생한 경기 용인시 백암면 농가 11곳 중 6곳의 지하수에서 일반 세균이 기준치보다 4배 이상 검출됐다. 2009년엔 전국의 AI 매몰지 15곳 중 8곳에서 인근 지하수의 80%가 침출수에 오염돼 먹는 물 수질 기준을 초과했다.

환경부, '침출수 재앙' 알면서도 늑장 대응…상수원 오염 땐 '대재앙'

2001년 구제역으로 가축 620만 마리를 살처분했던 영국은 동물 사체에서 나오는 침출수 문제가 대두되자 가축을 선별적으로 소각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가축 매몰지에서 석회와 살균제 성분을 함유한 침출수가 새어나와 물고기 수천 마리가 떼죽음을 당하는 등 200여 건의 수질오염 사고가 발생했던 것.

영국 웨일스에핀트 지역에선 침출수 때문에 묻었던 가축 사체를 다시 파내 소각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영국 보건부가 2001년 발표한 '가축 매몰이 공공건강에 미치는 위험 연구' 보고서를 보면, 침출수 유출은 20년 이상 이어져 지하수 오염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9일 매몰지 전수 조사 방침을 발표하는 등 뒤늦게 수습에 나섰지만, '늑장 대응'이란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특히 침출수 유출로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매몰지 인근의 주민들 사이에선 "방역을 제대로 못해 구제역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으면 뒷수습이라도 똑바로 해야하는 것 아니냐"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다.

당장 낙동강 상류 지역의 매몰지 중 절반이 넘는 45곳이 붕괴나 유실 위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날씨가 풀리면서 매몰지에서 흘러나온 침출수가 하천으로 스며들 경우, 결국 종착점은 1000만 영남 주민의 식수원인 낙동강 상수원이 될 수밖에 없다. '가축 재앙'은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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