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촬영감독이 돼서 영화를 찍는 거예요. 그걸 위해 이리저리 여러 방법을 모색 중인 셈이죠."
10일 만난 그는 현재의 휴식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일을 그만 둔 후 1년 동안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때는 하루하루 산다는 게 벅찼다. 당장 생활할 생활비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씨는 "얼마 전 돌아가신 최고은 씨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고 했다.
이 씨는 "최고은 씨의 죽음을 두고 일부에서는 '굶어 죽을 때까지 뭐했냐'라고도 한다"며 "하지만 영화판 일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일을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영화에 대한 꿈을 버렸다면 다른 일이 아니라 허드렛일도 할 수 있다"며 "하지만 꿈이 있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이 씨는 이래저래 지인들의 촬영을 돕기도 하며, CF 촬영장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올 4월에는 이 씨가 촬영에 참가한 저예산 영화 <회초리>가 개봉된다. 이 씨는 "힘들지만 꿈이 있기에 감내하고 있다"며 "언젠가는 꿈을 이를 수 있지 않겠냐"고 웃었다.
▲ 영화 촬영 현장의 스텝들. (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상관이 없습니다) ⓒ연합뉴스 |
흥행 대박 영화으로 보너스? 언감생심
이 씨가 처음 영화 쪽에 발을 들인 건 군대를 제대한 1998년이었다.
"학창시절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영화 관련 쪽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요. 그러다 군대 제대 이후 무작정 충무로 문을 두드렸죠."
그렇게 촬영부 막내로 처음 찍은 영화가 1999년에 상영됐다. 하지만 3개월 동안 일하면서 받은 돈은 10만 원이 고작이었다. 이 씨는 "그래도 좋았다"며 "아카데미 등에서 촬영 기술 등을 배우려면 되레 돈이 들지만 이곳에서는 돈까지 주면서 기술을 가르쳐준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웃었다.
박봉인 막내 스태프 생활을 몇 년간 계속했다. 이 씨는 당시를 두고 "영화판 일이 고되다는 건 이미 정평이 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씨가 무엇보다 힘든 건 계약 기간이 지났음에도 제작사가 보수 없이 추가 촬영을 강행할 때였다. 이 씨는 "다음 작품도 해야 하는데 추가 촬영으로 인해 스케줄 자체가 아예 엉켜버리는 경우가 몇 차례 있었다"며 "하지만 이를 거부할 순 없었다"고 말했다.
"제작사의 열악한 상황 때문에 보수 없이 추가 촬영을 할수밖에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로 인해 다른 작품을 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쉬어야만 하는 상황에 몰리면 정말 난감하죠. 물론 거부를 할까도 생각해보지만 손바닥 보다 작은 충무로 바닥에서 '싸가지 없다'는 평이라도 나면 이후엔 일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거절하기 어려워요."
영화가 대박으로 흥행해도 보너스는 '주면 감사한 것'에 불과한 것도 문제였다.
"<색즉시공>을 5개월 동안 찍었는데, 이 영화가 대박으로 흥행하자 영화 스텝으로 일한 이후 처음으로 보너스가 나왔어요.
이 씨는 "하지만 그나마 일이라도 하는 것에, 적지만 보너스를 주는 것에 감사해야만 했다"며 "일조차도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이 없을 때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버텼다"고 했다.
이 씨는 그러다 2006년 개봉한 <맨발의 기봉이>부터 촬영부 '퍼스트(First)'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퍼스트'로 일을 하면 형편이 나아질 줄 알았지만 생활고는 여전했다. '퍼스트'는 촬영부에서 첫 번째 서열로, 연출부에 비유하자면 조감독과 비슷하다. 이 씨는 "6개월 동안 영화 한 편을 촬영한다고 해도 자신이 받는 돈은 1000만 원 안팎이었다"고 설명했다.
"힘들다고 여기서 멈출 순 없잖아요"
'퍼스트'가 되자 일은 더 많아졌다. 영화 종사 관계자도 만나야 했고 '오야지' 즉, 촬영감독 수발도 들어야 했다.
"도제식을 고수하는 영화판에서 '오야지'에게 깍듯해야 하는 건 기본이죠. 자칫 눈 밖에라도 나면 다른 촬영팀과도 영화 작업을 할 수 없게 때문이죠."
그런 생활을 2009년 개봉한 영화 <차우>를 끝으로 청산했다. 이 씨는 당시 선택을 두고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이 꿈꾸는 촬영감독을 할 수 없겠다는 판단에서였다"고 했다.
"'퍼스트' 역할만 하면 평생 이것만 하게 될 거 같았어요. 그래서 촬영팀을 떠났죠. 그 이후 지금까지 촬영감독이 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모색 중입니다."
물론 쉽지가 않다. '배고픈 인생'에서 보다도 더 팍팍한 인생으로 내려가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하기도 어렵다. 촬영감독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고지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만 넘으면 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어요. 힘들다고 여기서 멈출 순 없잖아요."
영화 스태프들은 대표적인 '워킹푸어'에 속한다. 조사에 따르면 2000년 이들의 평균소득이 337만 원이었고, 2009년도에도 623만 원에 그쳤다. 월급으로 치면 52만 원이 채 안 돼 최저임금수준에도 미치지 못 한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저임금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보장 제도를 정비해 왔지만, 이들은 여전히 사각지대로 밀려나 있다. 2007년부터 제작사별로 4대 보험을 지급하고 있지만 제각각인데다, 실업급여도 180일(6개월) 동안 고용보험을 납부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인해 보통 3~5개월 작업하는 스태프들은 혜택을 거의 못 받고 있다. 이에 영화산업노동조합은 단기고용계약인 경우 직군을 분리해 12개월 이내 피보험기간이 90일이상 180일 미만인 경우 실업급여를 45일분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507시간 이상 일하면 실업급여를 243일 동안 제공하는 예술인을 위한 실업급여 제도(엥떼르미땅)를 운영하고 있다. 영화산업노조는 성명을 통해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반복되는 실업기간 동안 실업부조금을 지급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자는 요구를 수없이 해왔다"며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의 대안으로 영화발전기금 신설을 제시하던 정부가 지금까지 집행된 영화발전기금의 몇 %나 이런 목적에 썼는지 답답하다"고 비판했다. 노조는 "만약 실업부조제도가 현실화 되어 고인이 수혜를 받았더라면 작금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최고은 씨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 아니라 명백한 '타살'"이라고 주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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