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그랬습니다. 공부가 안 돼서 우울할 땐 공부를 하면 된다고."
<격정 소나타>. 2006년, 당신이 스물 여덟의 학생 감독으로 남긴 단편 영화의 기획 의도입니다. 저는 당신의 이 말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남겼다는 예의바르고도 처절한 마지막 쪽지 내용은, 작가 최고은으로서 남기고 싶은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젊은 예술가를 연민의 대상으로, 혹은 사회 구조적 문제의 표상으로서만 기억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게 무슨 말인가 했어요. 하지만 단편 영화를 보며 천천히 스며드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주인공은 피아노 콩쿨에 참여한 여고생이에요. 그녀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요. 그 때문에 악의적인 비아냥과 폭력적인 험담에 시달립니다. 게다가 콩쿨은 치열한 경쟁이잖아요. 저마다 칼 끝처럼 예민한 가운데에 누구의 호의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온전히 자신의 약점과 마주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디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가 쉽던가요. 마음 먹는다고 바로 극복된다면 그것은 약점 축에도 끼지 못하겠지요. 이겨내려고, 혹은 미봉책이라도 내세워 위기를 돌파하려던 이 소녀는 결국 세상이 자신을 보는 폭력적인 시선까지 변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의 고통을 놓아줍니다. 자신의 약점까지 온전히 스스로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저 연주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미소짓습니다.
▲ 최고은 작가의 유작 <격정소나타>의 한 장면. |
최작가님은 인터뷰 때 그랬다지요. 영화 만들기가 너무 힘들어서 고민하다가, 그럴 때 그냥 영화를 만들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영화를 보는 내내 당신이 한 컷 한 컷을 만들어 가며 반영했을 신중함과, 그 컷을 붙여나가며 새겨넣었을 고민과, 그리하여 한 세계가 탄생해 나갈 때의 희열의 마디마디가 느껴지는 것 같아 가슴이 옥죄어 왔습니다. 영화 산업의 프롤레타리아로 무보수 노동에 떠밀렸던 젊은 예술가는,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힘들어도 괜찮다. 약해도 괜찮다. 너 자신을 사랑해라. 그리고, 그저 살고 싶은 삶을 살아라.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염원하던 자기 긍정이었던가요. 사회로 방출된 예술가 지망생들은 초등교육에서 친 사기를 원망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세상에는 직업이 많고 많답니다. 가수, 배우, 작가, 화가, 의사, 변호사, 학자… 우리는 작가나 예술가가 의사나 변호사 같은 직업이라고 잠시 착각했던 겁니다. 그리하여 소위 '예술'을 하고자 하는 젊은이는 몇 가지 고민에 직면하게 됩니다.
먼저, 이 세계는 결국 20대들의 의욕과 열정, 아이디어에 빨대를 꽂아 착취하여 유지되는 곳이라는 것. 보장되지 않은 명예로운 예술가의 위치나 언젠가 만날 지도 모를 자본주의적 '대박'의 당근을 경망스럽게 흔들어 대며 그냥 인내하며 나아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일을 해가려면, 끝날 기약이 없는 시기 동안 가족이나 친지의 경제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는 와중에도 예술가로서의 자긍심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심,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나 세상은 밥이 되지 못한 예술과 돈이 되지 못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경멸과 비아냥, 비웃음을 날릴 것이라는 것.
경제력을 기댈 사람, 마음을 기댈 친지의 존재, 그러고도 스스로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자존감. 이 모든 것이 갖춰져야 그 길에 들어설 수 있겠다는 판단을 하던 20대 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리하여 저는 썩은 동앗줄을 붙들고 도망쳤지요. 방송은 밥이 되는 곳이니까요. 밥이 된다는 것 만으로 저는 으쓱해질 수 있었으니까요.
거친 욕망들과 몰염치한 권리 주장의 틈바구니에서, '대중에 욕망'에 부합하는 '대박 상품', '킬러 콘텐츠', '한류 돌풍'을 일으킬 이야기에 골머리를 썩다가 마음이 무너집니다. 살아남아 미안합니다. 살아남아 미안합니다. 다섯 편이나 계약이 됐다죠? 당신은 글 한 줄 못써내는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훈수를 들어야 했을까요. 이건 너무 마이너해. 이런 이야기 사람들이 안 본다고. 이걸 어떻게 찍으란 거지? 돈은 좀 기다려봐. 당신이 본 마지막 풍경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신의 마지막 의식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당신의 참혹한 죽음은 또 하나의 브랜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영화가 제작될 수도 있겠죠. 당신의 죽음은, 그리고 당신의 사진은, 그리고 당신이 부끄러워 알리기 싫었을 쪽지 내용까지 널리널리 회자될 겁니다. 이 글도 그 중 하나가 되겠지요. 값싼 동정, 비인간적인 비아냥도 그 반응 중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위선이나 폭력으로만 생각하진 말기로 합니다. 저는 당신이 이웃의 문에 붙인 쪽지에서 느낀 연민보다 훨씬 강한 감동을 당신의 영화로부터 받았으니까요. 값싼 호기심과 감상적인 슬픔은 거두고, 당신의 영화를 기억하기로 합니다.
공부가 안 될 땐 그냥 공부를 하면 되 듯, 삶과 세상의 의미가 알 수 없고 공포스러워도, 일단은 살아나가면 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너무 미안해하거나 자학하는 일도 머쓱한 것이겠지요? 당신의 영화에서 말해주듯, 그냥 그것이 나라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런 것이겠지요 최고은 작가님.
우리는 고민하겠습니다. 착취의 구조에 대하여. 꿈에 선택된 예술가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권리에 대하여, 그리고 당신이 세상에 남긴 <격정 소나타>의 주인공의 밝은 미소에 대하여.
허나 오늘만큼은 가슴 속에 떠오르는 시 한 편을 새기며 고인을 추모하고 싶습니다.
평화로우시기를.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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