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시기를 '총회의 계절'이라고 부릅니다. 매년 1월 말과 2월 전체를 통틀어 참석해야 하는 총회가 10여 군데가 넘습니다. 그러다보니 총회 날짜가 겹쳐서 못가기도 하고, 제 개인 일정상 못가기도 합니다.
교육단체건 생명평화단체건 생협이건 농민단체건, 총회의 한결같은 내용은 사업 보고와 결산, 사업 계획과 예산입니다. 간혹 임기 만료로 임원 선출을 하는 곳도 있습니다. 사실 제가 총회에 가는 것은 이런 의제에 대한 관심과 역할 때문만은 아닙니다. 1~2년 동안 못 보던 얼굴도 만나고 오랜 벗들과 안부를 주고받는 재미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좀 다릅니다. 제가 유심히 살피게 되는 총회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바로 뒤풀이입니다. 뒤풀이 때 무엇을 먹는지, 구제역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유심히 살피고 있습니다.
"담배는 기호식품입니다"
엊그제 어느 단체의 총회에 갔습니다. 그 분야에서는 '진보'라 불리는 단체입니다. 80년대 중반부터 저는 이 단체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직과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당시 서울 마포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그때 저는 작지않은 출판사의 잡지 편집에도 참여 했습니다.
그 잡지는 당시에 유행하던 부정기간행물 '무크(mook)지'였습니다. 군사정권의 검열과 강제폐간이 횡행하다보니, 무크지라는 게릴라식 책을 내게 된 것이지요. 덕분에 이 단체의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과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총회의 뒤풀이는 옛날 옛적 풍경들이 여전했습니다. 자욱한 담배 연기, 만취할 때까지 2차, 3차 순회하기, 젊은 여성회원을 이른바 '꼰대 급' 선배들이 성희롱에 가까운 음담으로 키득거리기. 후배는 선배를 "형님, 형님" 부르고 그 '형님'들은 값싼 농지거리로 호방함을 과시하는 그런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습니다.
2차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여기서도 그릇마다 음식들은 남겨지고 맥주병 밑바닥은 다 비워지지 않은 채 새 술이 주문되었습니다. 어떤 담배꽁초는 무엄하게도 반찬그릇에 꽂혀있기도 했습니다.
나이 지긋한 어느 회원이 그랬습니다. "흡연이란 개인 기호의 문제니 이걸 가지고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담배의 순기능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하면서 담배를 바꿔 물었습니다. 제 옆자리에서 연신 줄담배를 피우는 여성 회원에게 "우리 모임엔 공공장소에서 금연하거나 밖에 나가서 담배 피우는 교양인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는데, 멀리 앉아있던 이 분이 내 말을 들었나 봅니다.
이미 십수 년 전에 논쟁이 끝난 줄 알았던 담배의 효용성에 대한 주장을 듣고 보니 문득 육식에 대한 논쟁 역시 오래오래 그 질긴 목숨을 이어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제역과 육식.
저는 구제역 사태의 핵심은 바로 육식이라고 봅니다. 구제역을 걱정하면서 육식을 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입니다.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대량 살육당한 동물들이 최근 두 달 동안 700만 마리가 넘어섰습니다.
아직도 '구제역'은 멀었나요?
며칠 전 <조선일보>에 어느 지자체장의 편지가 소개되었습니다. 구제역으로 그 지역 소·돼지의 85%를 잃은 경기도 파주시장은 가장 먼저 축산업의 시설현대화를 주장합니다. 축산허가제를 도입해 축산전문화를 이루고, 농장입구에 CCTV를 설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살처분에 대해서도 획기적인 주장을 합니다. 살처분 농가들이 가축을 파묻을 땅이 없어 애를 태우니, 앞으로는 군부대나 야산 등 공유지에 가축들을 파묻게 해 달라고도 했습니다.
'조합원의 협동조합 기능 강화'보다 금융업에 매달린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농협에서 발행하는 <농민신문>의 기사도 대동소이합니다. 이 신문은 축산 관련 단체장의 말을 인용하며 일부 언론이 가축전염병과 살처분에 대해 너무 감성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고 개탄합니다. 예로 드는 것이 구제역 청정국 지위에 매달려 육류 수출액 20억 원을 아끼려다 보상비 1조 2000억 원을 날렸다는 식의 보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동물보호단체나 시민단체의 이벤트성 행사도 비난하면서, 기사의 제목은 '언론들의 축산업 흔들기 지나치다'라고 썼습니다. 동물복지 이야기도 무척 귀에 거슬리나 봅니다. 언론이 자꾸 이런 감상적인 보도를 일삼으면 축산 포기론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기사입니다. 구제역 사태를 바라보는 주류 언론과 정부 당국, 축산업자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보도들입니다.
최근 구제역 보도를 보노면 일정한 흐름이 있습니다.
구제역 발생 초기인 지난해 12월에는 어디에서 구제역이 발생했다는 것과 소·돼지 몇 마리를 살처분했다는 소식이 주를 이뤘고, 얼마 지나서부터는 살처분 현장의 비참과 종사자들의 애로를 다루었습니다.
살처분의 야만성과 동물생명권에 대한 관심, 사람들의 식탐과 돈벌이 축산을 문제 삼는 글은 제가 지난해 12월 27일 <프레시안>에 쓴 칼럼이 처음인 듯합니다. 이 칼럼에서 저는 공장 식 밀집 사육과 사람들의 과도한 육식 문제를 제기했습니다.(☞바로가기: 과다육식과 밀식축산의 업)
1월 10일자 <한겨레>에 쓴 칼럼에서는 축산농가들에 대해서도 문제를 기했습니다. 호주보다 37배나 더 많은 항생제를 쓰고 있는 한국의 축산농가는 '동물학대 수준'이라고 폭로(?) 했습니다. 우리나라 축산은 사회 공공재를 훼손해가면서 개인 돈벌이에만 매달라기 있는 실정입니다. 온실가스 발생이나 토양 오염, 지하수 고갈, 하천 오염 등등이 그 결과입니다.(☞바로가기: 늙은 소 한 마리의 호소 "파묻어야 할 건 소·돼지가 아니라…")
그 칼럼을 쓸 당시 제 생각은 구제역은 물론 인수공통전염병인 조류독감과 돼지독감(신종플루)까지 창궐하는 현실을 '질주하는 기차'로 비유하면서, 우리가 내려야 할 '구제역'은 아직도 멀었다고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날은 저물고 마음은 다급한데, 기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언제 '구제역'에 다다를까 까마득하게 느껴졌습니다.
'질주하는 기차' 구제역, 내리실 분 계십니까?
지난 1월에 녹색소비자연대전국연합회에서 토론회가 열려 참석했는데 저는 그곳에서 동물복지 이야기를 하다가 '식물복지'라는 개념을 제기했습니다. 취재 나온 어느 신문사의 기자가 '식물복지'라는 말이 이채로웠는지 몇 번에 걸쳐 그 개념을 물어왔습니다.
우리의 밥상에 오르는 고기들은 100% 공장과도 같은 사육환경에서 가혹 행위와 약물 중독으로 만들어진 고기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습니다. 책들도 무수히 나와 제목만 적어도 종이 한 장이 모자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그 누구도 우리의 밥상에 오르는 채소들 역시 거의 다 '식물학대'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알지 못합니다. 말 못하는 식물이라고 비닐집 속에 가두어 키우면서, 생산 주기를 단축시키는 종을 만들어내고, 물 비료 등 급속성장제를 투여해 키웁니다. 오직 온도와 영양과 물로만 키우고 있는 실정이니 이 채소들은 사시사철 하늘도 구름도 비도 눈도 구경 못하고 강제 재배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결코 가볍게 볼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 신문기자는 제 주장이 재미있었는지 부지런히 받아 적었습니다. 공장식 축산이 사람들의 건강을 망가뜨리고 환경오염과 동물생명권에 대한 침해로 비판 받듯이, 오래지 않아 우리의 돈벌이 농사에 대해서도 '식물학대' 논란이 불거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식물학대 농법은 과도한 육식문화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때를 가리지 않고 고기를 먹어대니 채소가 많이 소비 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에는 빌딩농장이니 식물공장이니 하면서 무슨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는 실정입니다. "옷고름 풀어 산 문전옥답 신작로로 다 들어가고 봇짐 싸서 정처없는 떠돌이 신세"라는 구전 속요처럼, 우리의 농지들은 공장과 도로, 골프장으로 다 들어 가버리고 공장식 농사를 무슨 대안인 것처럼 농촌진흥청에서 기를 쓰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폐해가 축산업 못지않게 현실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도 봅니다. 그때가 되면 당연히 '식물복지' 이야기가 등장하리라는 게 제 예측입니다.
대선을 앞두고 복지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데 여기에다 '식물복지' 논란까지 가세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면 '동물복지'라는 말이 5~6년 전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이라고 했던 냉소적 반응처럼 어이없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존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아챈다면, 식물복지 뿐 아니라 '무생물 복지'라는 말도 나오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은 대형마트에서 식품을 하나 사더라도 앞뒤로 한참을 살피면서 트랜스지방이 있는지, 원산지가 어딘지, 무과당 식품인지 확인하는 게 교양있는 구매자의 덕목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탄산음료를 끊는다든가 생협 식품을 사 먹는다든가, 친환경축산 고기만 골라 먹는다든가 하는 사람들은 '구제역'에 기차는 도착했는데 다수의 사람들이 내릴 생각도 않고 잠을 자거나 어두운 창밖을 보면서 내릴 때가 되었느니 안 되었느니 논쟁만 하고 있을 때 짐 보따리를 챙기며 내릴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라 보여 집니다. 기특한 일이죠.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고기를 딱! 끊는 것입니다.
생태축산이니 공정무역이니 하는 것 역시 돈벌이와 식탐을 자극하는 경계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재주꾼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아주 짙다고 생각합니다. 답은 채식입니다. 채식은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대구의료원의 황성수 박사는 오래 전부터 완전 채식, 특히 현미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모든 생활 습관성 질환 환자들을 채식으로 치료합니다. '생활습관성 질환'이라는 말도 그 분이 만들어 냈습니다. 성인병이라는 말이 결국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이고 고기, 생선, 우유, 계란으로 대표되는 왜곡된 식습관을 현미식과 통곡식, 채식으로 완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직 약사인 김수현 선생도 밥상을 다시 차리자고 강조합니다. 고기 등의 고단백, 고지방 식품들은 뼈 속의 칼슘을 다 빼내 갑니다. 우유와 생선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주장입니다.
여전히 담배를 기호식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유와 (등 푸른)생선마저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세상에 와 있습니다. 매년 되풀이되는 구제역과 조류독감, 각종 괴질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딜까요? '구제역'에서 과감하게 하차하는 용기와 지혜는 어디에 있을까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기대합니다. 담배갑에 쓰인 경고 문구처럼 "육식은 각종 생활습관병과 환경오염의 주범이며 사람들의 성질을 포악하게 만듭니다"라는 문구가 모든 정육점과 고기 포장지에 붙어 있기를 말입니다.
토양 황폐화와 삼림 파괴, 물 부족과 수질 오염, 지구온난화와 생물다양성 파괴는 육식산업의 죄업입니다. '구제역'에서 당장 내려야 할 때입니다.
[필자 주] 이 글은 대안교육 전문잡지 <민들레> 3월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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