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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이유는…

[김영종의 '잡설'·15] 유언비어의 사회학 ③

유언비어의 사회학 ③

드디어 유언비어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되었다. 유언비어에 관한 글을 쓰려고 생각하자, 20대에 읽으려 했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책 제목은 이 글의 제목과 같은 <유언비어의 사회학>(원서 출간 1946년, 번역 출간 1977년)이며 저자는 시미즈 기타로(淸水幾太郞), 옮긴이는 이효성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몇 가지 내용을 간략히 검토하면서 내 이야기를 계속해나가겠다.

먼저 이 책에서는 '보도'와 '유언비어'를 사실과 일치하느냐의 여부로는 구별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 둘을 지식으로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신앙으로만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내용'은 다 아는 바처럼 사실(팩트)이다.

'형식'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뉘는데, 보도는 정보의 출처가 분명하며 기자가 사실을 취재해 문자로써 객관화한 형식인 반면, 유언비어는 소문의 출처가 분명치 않고 다중에 의해서 사실이 구두로 불안정하게 전달되는 형식이다. 사람들은 보도의 형식을 믿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지, 내용에 대한 지식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보도가 사회라는 환경에서 벌어진 일을 전달할 때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환경-이미지-인간'이라는 관계를 설정하여, 인간이 환경에 직접 관계하지 않고 이미지를 통해 관계하는 것으로 보았다. 보도도 직접적인 사실이 아닌 이미지로 전달하고 이미지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유언비어는 이 이미지가 신뢰를 잃었을 때 당국이 통제하면서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인간과 환경 사이에 성립하는 지식은 스스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반면, 인간과 이미지 사이에 성립하는 신앙은 정지된 이미지를 토대로 질서를 유지한다는 것.

나도 언론이 사실의 세계가 아닌 이미지의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고 주장하지만, <유언비어의 사회학>의 저자 시미즈 기타로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이미지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시미즈 기타로는 이미지가 실제의 모상 같은 것으로 원상인 실제가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모상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틀림없다. 더 많은 설명은 2부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지식에 의해 실제에 다다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미지에 의존하는 언론의 진실은 사실상 실제와는 거의 관련을 맺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이 이미지를 생산하는 만큼 언론에서 지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언론을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하다.

이에 반해 나의 이미지론은 '실제' 자체가 '가상'이고 '이미지'라는 것이다. '실제'가 사회 환경을 가리킨다고 보는 점에서는 시미즈 기타로와 다르지 않지만, 나는 사회 환경은 실제인 자연환경과 달리 인간의 '말'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나는 그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 언론에 대한 내 견해는 외형상 시미즈 기타로와 비슷할지라도 결과는 극단적으로 상반되게 나타난다.

ⓒ김용철

그러면 내 견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겠다.

가상은 본질을 추구하는 지식이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실제 말들의 쓰임이 모여 교환되는 시끌벅적한 장터다. 언론은 가상의 세상 그 자체다. 통제나 조정이 필요 없다. 말과 말이 서로 부딪치며 이 물결 저 물결이 엎치락뒤치락 뒤섞이면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합리적 언론관이 우려하는 것 같은 혼란과 파괴, 퇴보, 멸망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계획 도시'처럼 합리성의 메커니즘에 따라 조종되는 언론에서 일어난다. 가상의 언론은 '계획 도시'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연 마을'에 해당한다. '자연 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아름답고, 일반적인 고정관념과 달리 '계획 도시'보다 몇 만 배나 많은 교차점을 가지고 있어 그만큼 더 소통이 잘 이루어지며, 훨씬 '편리하다'는 점이다.

가상의 언론은 '모든 것을 재단하는 절대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다양성이 넘쳐나며 자유롭다. '팩트'나 '증명'은 개인 언론의 장터 속에서 살기 때문에, 전자('팩트'나 '증명')가 낮이라면 후자는 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촛불처럼 공존하지 않을 수 없다('산조 정신과 애니미즘 미학' 참고). 반면 합리적 언론관은 전깃불처럼 어둠을 완전히 일소하려 달려든다.

그러므로 가상의 언론에서는 '팩트'나 '증명'이 다양성의 바다에 떠 있는 부표처럼 '상대적 기준'을 형성하게 된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가상에는 근거가 있을 수 없으므로 '팩트'나 '증명'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언론의 다양한 쓰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축제 때의 가장행렬처럼 맡은 역할을 놀 뿐이다. 축제가 혼란-죽음-재생을 재연하듯이, '팩트'와 '증명'도 철저히 죽음을 맞아 우주가 재탄생하는 기쁨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가상의 언론'이 출현하기는 요원하지만, 근대의 합리적 언론이 등장하기 전만 해도 '가상의 언론'이 세상을 움직였다. '가상의 언론'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유언비어다. 태평천국의 난, 프랑스혁명 등 세계역사 속에서 수없이 드러나듯 유언비어는 세상을 뒤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와 독재 시절에 가장 무서운 진실의 힘을 발휘한 것 또한 유언비어였다. '유언비어(流言飛語)'는 '말이 흘러 다니고 말이 날아 다닌다'는 뜻인데, 말의 속성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어의(語義)는 말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을 경우를 전제한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면 말은 어디로든 흘러가고 날아가게 되어 있다. 유언비어가 있기 때문에 말을 가두어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말을 막는다는 생각을 아예 지워버리고 말을 통제하는 것이 현대의 합리적 언론 시스템이다. 첫머리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현대인은 자기 검열이라는 통제의 내면화를 통해 말은 고사하고 생각마저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언비어도 나올 수 없고, 유언비어가 나온다 해도 맥을 못 춘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은 현실적으로 보면 유언비어를 없애는 것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유언비어를 소생시켜야 '합리성의 메커니즘'과의 대결구도를 마련할 수 있다. 유언비어는 반드시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서' 자신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 발언한다. 유언비어의 특징은 현재성이다. 미래로 이월시키면 유언비어는 힘을 잃고 만다. '합리성의 메커니즘'이 증명체계를 동원하여 사태에 관한 발언을 자꾸만 미래로 이월시키는 것과는 정반대다.

내가 유언비어를 중시하는 것은 바로 이 현재성 때문이다. 이 글의 주제도 말이 현재성을 상실한 오늘날의 언론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말의 현재성은 숙명적으로 권력과 부딪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살아 있는 소시민(민중)의 언론으로서 유언비어를 열린 자세로 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화, 전설, 옛이야기, 시, 소설 따위를 가상이 아닌 실제라고 주장하면, 그래서 사람들이 믿기 시작하면, 통치권력은 이를 유언비어라고 엄단한다. 이처럼 현재의 세상에 관여해야만 유언비어가 되는 것이다. 관여는 세상의 권력과 충돌하는 것을 말한다. 인류사에서 가장 뚜렷한 예가 있으니,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이유는 유언비어를 유포한 죄였다.

▲ "유언비어는 '세상 바깥의 말'(A) 속에 있는 '세상과 충돌하는 말'(B)이다." ⓒ프레시안
유언비어는 '세상 바깥의 말'(A) 속에 있는 '세상과 충돌하는 말'(B)이다. 그러니까 A의 부분집합인 것이다. A를 헛소리라고 한다면, 유언비어(B)는 헛소리 중에서도 세상을 뒤집는 전복의 축제자다.

"내 복에 무슨 난리야"라는 말이 있다. 난리가 복이라는 것이다. 8·15 해방이나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을 기념하면서 축제를 벌이는 것은 난리가 축제임을, 유언비어가 축제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면 먼저 헛소리(A)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여러 학문 중에서도 헛소리(A)를 가장 배제하는 '역사'와 '과학'에서 헛소리(A)가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간략히 소개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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